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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씨네도모

가자지구 난민 활동가의 눈으로 본 영화 '힌드의 목소리'

by Domoleft 2026. 5. 4.

[씨네도모] 가자지구 난민 활동가의 눈으로 본 영화 '힌드의 목소리'

얼마 전 국내 개봉한 영화 《힌드의 목소리》는 2024년 1월 가자지구에서 살해당한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잡의 이야기를 카메라를 통해 재구성했다. 가자지구 출신 난민으로서 한국에서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알리고자 활동하고 있는 살레 알란티시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의 후기를 게재한다.



힌드와 탈린, 그리고 나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늘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학살과 전쟁범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스스로의 가장 깊은 상처를 다시 들춰내는 느낌을 받는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매번 새로운 상처를 입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상실의 고통, 혹은 집단학살이나 인종청소의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런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때로는 상처를 넘어서고 고통을 견디면서도 굳이 저항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건 항복과 패배가 선택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히고 또 잊혀지도록 내버려두는 고통이란,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재한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나는 오랫동안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즉 (이스라엘군이 자행하는) 만행의 규모, 희생된 아이들의 숫자, 파괴된 집들, 폐허가 된 마을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껴 왔다. 그렇기에 힌드 라잡의 이야기가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안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가자지구에서 자행되었고,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자행되고 있는 끔찍한 범죄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 비록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 드러낼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좌측부터: 지난 4월 15일 열린 《힌드의 목소리》 특별 시사회 / 시사회에 함께한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들. 출처: 더콘텐츠온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지난 4월 중순, 영화 《힌드의 목소리》를 한국 극장에서 볼 기회가 왔을 때 내 마음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찼던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극장에 드리운 침묵 속에서, 내 온 몸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칼로 심장을 쑤시는 듯한 아픔이었다.

 

이 영화는 눈 앞에서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결국에는 자신도 이스라엘군의 총알에 몸이 찢겨나간 여섯 살 소녀 힌드 라잡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살려 달라고 끝없이 애원했음에도 결국 무참히 살해당한 힌드의 이야기를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가장 끔찍한 것은 힌드가 나의 어린 조카 탈린과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힌드의 몸을 산산조각낸 총알이 탈린에게도 똑같이 쏘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뉴스에서 힌드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본 조카가 친구를 알아봤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이 여자애는 제 반 친구예요. 저랑 같이 공부하는 친구인데, 괜찮대요? 아니면 죽은 거예요?" 그런 질문에 도대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반 친구가 영원히 떠났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영화 《힌드의 목소리》 중


끝나지 않은 힌드의 이야기

힌드는 2만 명이 넘는 가자지구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살해당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어떠한가? 삶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지워지고, 각각의 이야기가 그들 자신의 시신과 함께 묻혀 버린 모든 아이들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여성들이 그저 숫자로,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통계 수치의 일부분으로 전락했다.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당했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조차 없다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한편으로 내게는 여전한 의문이 남는다. 살인자들은 정말로 자신이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신의 존재를 믿는 한 인간으로서, 나는 신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억압받는 자에게는 정의를, 억압하는 자에게는 처벌을 약속하셨다는 믿음에서 평화를 찾는다. 누군가가 아무리 학살에 공모하고, 침묵하며, 범죄자들을 보호한다 할지라도 결국 신의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믿는다. 모든 아이들은 마땅한 권리를 되찾을 것이고, 모든 범죄자는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故 힌드 라잡의 생전 모습. 출처: 알 자지라

 

이러한 믿음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내세의 축복을 깨닫게 된다. 정의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기에, 그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갈증이 물의 존재를 증명하고 굶주림이 음식의 존재를 증명하듯,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불의에 대한 분노는 곧 절대적인 정의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믿는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것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심판의 날에는 보게 된다는 것. 즉 신이 억압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날이 온다는 믿음이 나에겐 있다.


그렇기에 힌드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은 힌드의 이야기 중 첫 번째 부분, 즉 그녀가 부당하게 살해당한 부분일 뿐이다. 두 번째 부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죽인 자들과 마주서고, 신이 그녀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내세가 찾아오기 전에 할 일이 우리에겐 남아 있다. 힌드를 비롯한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슬픔과 비통함에 먹먹해진다. 때로는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느 누가 그런 잔혹함을 목격하고도 마음이 산산조각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거기에서 멈춰선다면 무엇도 이뤄낼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슬픔과 분노를 동기로 삼고, 행동과 실천으로 바꿔내야만 한다. '힌드의 목소리'와 같은 이야기들이 갖는 진짜 의의는 여기에 있다. 우리 스스로를 일깨워 되돌아보고, 책임을 묻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작은 불의라도 모든 형태의 불의를 거부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크든 작든 결국 모든 불의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5월 22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제66차 팔레스타인 연대 긴급행동 집회. 출처: 스튜디오알


그럼에도, 영화가 갖는 힘은

한편으로 '힌드의 목소리'와 같은 영화들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깊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등장인물들이 느꼈던 진짜 감정을 과연 얼마나 전달할 수 있을까? 고통과 상실의 순간에 희생자와 그들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이나 감정, 그 깊이와 강렬함을 진정 얼마나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훌륭한 영화가 관객을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한 인간이 겪은 상황과 고통을 엿보는 창을 열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 할지라도, 영화는 그러한 감정과 생각의 극히 일부분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을 목격하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딸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비극을 직접 겪어 본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영화적 연출도 이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다. 이미지, 대사, 혹은 영화적 순간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세부사항들, 그리고 내면적 상흔과 트라우마로 가득한 생생한 경험이 스크린 뒤편의 어딘가에는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중


집단학살에는 시각적 표현의 한계가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끔찍한 디테일과 복합적 서사가 존재한다. 아무리 진심을 담아 만든 영화라 할지라도 어떻게 학살의 잔혹함을, 공포와 충격,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순간의 무게를 온전히 재현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오늘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적 고통의 현현과 절망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그 어떤 예술작품으로도 온전히 묘사하거나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진실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전부를 전달하지는 못할지언정 명확한 일부를 전해 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이해와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열어 주는 강력하고 필수적인 도구다. 때때로 그 정도의 변화는 관객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성찰을 유도하며 깊은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진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진실로 향하는 다리가 된다. 비록 우리를 진실의 끝까지 데려다 주지는 못하더라도, 고통의 무게를 느끼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성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게끔 한다. 가자지구의 진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더 많은 사람들이 '힌드의 목소리'를 반드시 보았으면 하는 이유다.


 

힌드의 목소리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

아메르 레헬, 클라라 코우리 / 89분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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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 알란티시 (Saleh Elrantisi)

 

재한 팔레스타인인 활동가.

2022년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시작된 이후 한국에서 난민 신청자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