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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씨네도모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 '모노노케 히메', 제로섬의 세계에서 삶을 말하다

by Domoleft 2026. 2. 2.

[씨네도모]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 '모노노케 히메', 제로섬의 세계에서 삶을 말하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95년 작  《모노노케 히메》가 얼마 전 재개봉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해석으로는 이 영화를 오늘날 다시 바라보기에 충분치 않다. 30년의 세월과 변화한 시대를 뛰어넘어, 《모노노케 히메》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 본 기사에는 영화 《모노노케 히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이란 존재할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어떠한 작품, 이야기도 시대를 넘어설 수는 없다. 여러 시대를 걸쳐 계속해서 소비되고 회자되는 이야기는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닌, 여러 시대와 생동하고 호흡하며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는 있다. 이야기가 주는 시사점이 시대적 맥락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력하게 작용하여 시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런 예외에 가까운 작품이 있다. 바로 최근 국내 극장가에 재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宮﨑 駿)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모노노케 히메》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작품성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대중성의 측면에서도 190억 엔을 벌어들이며 일본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꽤 오랫동안 유지했을 정도로 성공한 작품이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25년 무려 22년 만에 재개봉한 데 이어 오는 2월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과 함께 또 한 번의 극장 재개봉이 예정되어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인지도와 인기는 높다. 그러나 높은 대중성에 더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낸 반작용인지는 몰라도, 보통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숲을 파괴하는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자연을 지키려는 소년의 이야기'처럼 왕도적인 이야기로 풀이된다거나 '인간의 욕망이 야기하는 환경 파괴를 비판하는 이야기'처럼 단선적이고 단순명료한 해석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설명이 틀린 해석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모노노케 히메'가 갖는 서사적 깊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단편적 해석이기도 하다.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 또한 이렇게 선과 악을 양분하여 나누는 교과서적·도식적 서사에 대한 거부감을 인터뷰 등을 통해 여러 차례 토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정말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 타타라 마을과 숲

영화 《모노노케 히메》 중. 에보시 고젠의 타타라 마을에서는 여성과 나병 환자들이 생산의 주체가 된다

 

작품의 주요 무대인 타타라 마을은 사철을 제련하여 경제적 부를 쌓은 공동체로, 핵심 등장인물 중 하나인 여성 영주 에보시 고젠의 통치 아래 안정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곳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장려하고 나병 환자들을 노동의 주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진보적이고 이상적인 공동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이룬 평화는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 타타라 마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얻은 번영, 즉 주변 숲과의 끊임없는 대립이라는 위태로운 구조 위에 서 있다. 또한 사철을 노리는 외부 세력과의 충돌 속에서 지속적인 방어와 생존의 압박에 놓여 있다.

 

이 지점에서 에보시는 철저히 공리주의적인 시각으로 움직인다. 마을의 지속적인 성장과 안전을 위해, 그녀는 숲의 완전한 절멸을 추구하며 자연과의 공존이 아닌 정복을 선택한다. 그녀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논리에 따라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을 내의 구성원 일부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포기하거나 의도적으로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그녀의 진보성은 외부에 대한 폭력과 배제라는 역설을 품게 되고, 마치 '이상향'처럼 보였던 타타라 마을은 결국 누군가에 대한 파괴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이상향으로 드러난다.

 

반면 타타라 마을과 대립하는 숲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계속된 패배로 인해 숲은 이미 멸망 직전의 상태에 처해 있으며, 숲을 지탱해 온 동물 신들 또한 서로간의 균열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숲의 주인 사슴신의 침묵을 원망하며 숲의 부흥을 꿈꾸고, 다른 누군가는 이미 끝난 싸움임에도 복수라는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 인간에게 버려져 들개신 모로에게 입양된 산은 인간의 몸을 가졌음에도 숲을 위해 싸우고자 하지만, 숲의 정령들과 동물 신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수용되지 못하는 존재로 남는다.

 

산은 두 세계 모두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안고 있으며, 그 분열은 곧 숲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상징한다. 이처럼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대립하는 인간과 자연, 타타라 마을과 숲, 에보시와 산의 관계는 작품이 전개될수록 점점 그 목적과 수단이 도치되고, 각 진영은 자신들이 본래 가졌던 정당성을 잃어가며 서로를 파국으로 이끄는 비극적 구조에 빠진다.


이방인 아시타카

영화 《모노노케 히메》 중. 주인공 아시타카는 재앙신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 아시타카는, 작중 대부분의 인물이 야마토 일족(혼슈 남부와 규슈, 시코쿠에 터를 잡은 현 일본의 주류 민족) 출신인 것과 달리 에미시 일족(혼슈 북부와 홋카이도에 터를 잡은 과거 일본의 민족) 출신이다. 그는 숲과 타타라 마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며, 동시에 에보시의 부대에 쫓기던 재앙신 나고에게 저주받은 채 죽음을 앞둔 비극적 인물이다.

 

아시타카는 자신과 무관한 분쟁 속에서 타인의 복수와 이해관계가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을 온 몸으로 겪는 인물이다(기획 단계에서 본작의 원 제목은 '모노노케 히메'가 아닌 '아시타카 전기'였다: 편집부). 그러나 그는 그 위협으로부터 도피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오랜 대립과 복수의 연쇄 속 타인의 목숨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조차 수단화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양측을 오가며 화해를 도모한다. 두 진영을 모두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관조적 위치성은 아시타카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것일 테다.

 

자신 앞의 분쟁과 위협을 직시하고 양측과 소통하며 운명에 맞서는 아시타카의 태도는 작품 속의 복수 서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더욱 선명해진다. 예컨대, 에보시는 들개신에게 남편을 잃은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들리느냐? 나는 이곳에 있다. 네가 일족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여기에도 들개에게 남편을 잃고 원한을 품은 자들도 있다." 또한 산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인간을 몰아내려 한다. "죽는 게 두려울까 봐? 인간만 쫓아낼 수 있다면 목숨 따위 필요 없어!"

영화 《모노노케 히메》 중. 인간을 대변하는 에보시와 숲을 대변하는 산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복수의 연쇄를 상징한다

 

이처럼 복수와 증오의 감정에 매몰된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 아시타카는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통해 전혀 다른 가치를 제시한다. 이러한 아시타카의 모습은 자신만의 '대의' 혹은 누군가를 파멸시켜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계관에 매몰되어 '세상은 제로섬 게임과 같다'고 외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인물들에게 던지는 대답이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작품을 통해 내놓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인간과 자연의 싸움, 그리고 공멸

작품의 결말부에 다가갈수록 타타라 마을과 숲은 점점 공멸에 가까워진다. 에보시는 불로불사를 가져다 준다는 사슴신의 목을 잘라서 바치라는 천황의 밀서를 들고 온 지코보와 협력하며 사슴신의 피로 한센병 환자들을 치유하려 한다. 숲의 맷돼지 신인 옷코토누시는 패배가 예정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일족을 모두 동원해 마을과 전쟁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에보시는 자신이 출정한 틈을 타 다른 인간 세력에게 타타라 마을이 공격받는 상황에도 마을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는 것"이라며 사슴신의 목만을 원한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폭주한 옷코토누시는 '인간의 절멸'을 외치며 재앙신이 된다.

 

서로의 목적을 망각한 채 벌어진 싸움은 무의미한 희생만을 낳으며 종국에는 사슴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사슴신의 죽음은 곧 모든 삶의 종언을 의미했고, 사슴신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닿은 숲과 타타라 마을의 모든 것은 파괴된다. 그러나 산과 아시타카의 노력으로 사슴신의 목은 사슴신에게 다시 돌아가고, 이 모든 파괴는 다시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새싹이 돋아남으로써 복원된다. 이 때 사슴신은 모든 저주를 풀고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데. 숲의 복원과 한센병의 치유를 포함한 모두의 염원은 이미 이루어진 뒤였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 중.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사슴신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슴신은 마지막 순간에도 파괴만을 남기지 않고 생명을 흩뿌리며 떠난다. 이는 파괴와 창조, 죽음과 삶이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다는 세계관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 무엇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심지어 신조차 인간의 욕망 앞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세계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파국 속에서도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숲은 다시 새싹을 틔우고, 타타라 마을의 사람들 역시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한 팔을 잃은 에보시는 신의 목을 탐했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이제는 모두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들자"며 변화의 여지를 드러낸다. 폭력적이고 이기적이었던 개인이 고통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결말은 두 주인공인 아시타카와 산의 선택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시타카는 인간 세계에 남기로 하고 산은 여전히 숲에 머물기로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게 되지만 완전한 화해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결말은 관객에게 마치 불완전한 결말처럼 보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하고 싶었던 진짜 결말은 바로 이 불완전함 속에서 완성된다. 완전한 화해와 완전한 결합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음 이야기는 시작된다는 것이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 중. 아시타카와 산은 서로의 영역에 남기로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가능성을 남긴다


결국 '너'를 넘어 다시 '우리'로

현대의 삶은 너무도 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국가, 체제, 자본, 시스템, 성장률, 기술 등 거대한 구조와 담론 속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종종 개인과 타인의 존엄은 사라지고 만다. 삶의 방향은 숫자와 논리로 환산되고, 인간은 더 이상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기보다 수단화되며 효율성의 이름으로 평가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모노노케 히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답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단순히 '자연 보호'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계,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제시한다. 인간과 자연, 기술과 전통,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존재하며, 우리는 종종 그 균열을 메우기보다 대립과 배제로 반응한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그 틈을 꿰매려는 작고 느리며 미완성된 태도, 바로 아시타카의 태도에서 가능성을 본다.

 

아시타카는 작품 내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며,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라는 대사처럼 삶 자체의 존엄과 그 삶을 지키려는 마음이다. 그는 거대한 이상이나 목적에 매몰되어 생명을 수단화하지 않으며,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사고를 경계한다. 이처럼 아시타카의 윤리는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부와 틈 사이에서 조용히 빛난다. 바로 그 윤리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기존의 세계는 때로 너무 확고하고 폐쇄적이며, 변화보다는 반복과 재생산을 추구한다. 반면, 새로운 세대는 그것을 무너뜨리려 하기보다 그 균열 속에서 질문하고, 다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세대다. '모노노케 히메'는 그런 새로운 세대에게 조용한 축복을 건넨다. 세상은 제로섬이 아니다. 완전한 화해도, 절대적인 선도 없다. 그렇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존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언제나 작고 약한 선택, 바로 삶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짧고 묵직한 단 한 마디, "살아라(生きろ)"가 주인공의 대사임과 동시에 본작의 포스터에 적혀 있는 메인 슬로건이기도 한 이유다.


 

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마츠다 요지, 이시다 유리코, 미와 아키히로 / 133분 / 199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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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운

전환 회원. 숭실대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세상과 세상 사이의 시차에 21년째 적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