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멘헤라' 시대의 전쟁과 속죄주의 -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리뷰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의 최신작인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가 한국 극장에 개봉했다. 늘 반전과 평화를 이야기해 온 건담 시리즈의 신작은 바야흐로 다가오는 전쟁의 시대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나?
※ 본 기사에는 영화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9년 시작되어 올해로 47년차를 맞는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이하 건담 시리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초거대 IP다. 2025년 기준 모든 건담 시리즈를 합친 IP 통합 수익은 1,535억 엔을 달성하여 일본 최대 서브컬처 저작권사 반다이남코의 모든 IP 수익 중 《드래곤볼》에 이은 2위를 차지했고, 이는 현재 일본 만화의 최상위권 작품으로 평가받는 《원피스》보다도 높은 수치다.1 수익 중 다수는 애니메이션과 연계하여 전개되는 프라모델 제품군인 '건프라'의 판매 수익이지만, 애니메이션 전개로 나오는 수익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한 세대가 출생하여 중년에 접어드는 기간인 약 50년, 무려 반 세기 동안 건담 시리즈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일본 거대로봇물 애니메이션의 뿌리깊은 모순이자 존재의의가 있다. 완구 제작사인 반다이의 스폰서십으로 전쟁병기인 '모빌슈트(MS,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 병기의 통칭)'의 멋짐을 어필하며 프라모델 판매로 수익을 창출하지만, 동시에 작중에서 그려지는 전쟁의 모습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것의 하이퍼리얼리즘적 재현에 다름없다. 외계 세력이나 절대악을 적으로 삼는 '정의의 용사'로서의 로봇물에서 탈피, 선도 악도 없는 전쟁의 참화를 배경 삼는 건담 시리즈의 방식은 비록 전쟁병기의 프라모델로 수익을 낸다는 모순이 있음에도 '리얼로봇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을 정도의 독보적인 영향력을 창출했고, 동시에 일본 서브컬처계 내적으로는 최소한의 '반전평화' 정서 확립에 기여해 왔다.
그 대부분이 전쟁 세대거나 이른바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 전후 1947~1949년 일본의 베이비붐 기간 출생한 세대)로서 유년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거나 가까이 듣고 전후 학생운동에 투신하거나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많은 애니메이터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1979년 시작된 건담 시리즈의 초대작 《기동전사 건담》을 만든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와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 역시 이 세대에 해당하며, 이들의 세계관으로부터 직접 이어져내려오는 '우주세기'는 건담 시리즈의 이른바 '정사(正史)' 격에 해당한다. 지난 4월 20일 한국에 개봉한 무라세 슈코(村瀬修功) 감독의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이하 '키르케의 마녀')는 바로 이 우주세기 건담 세계관의 최신작이다.
속죄주의적 운동의 명백한 한계

키르케의 마녀는 건담 시리즈의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집필한 동명 소설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를 애니화한 3부작 극장판 애니메이션 중 2부에 해당하며, 본작의 서사 이해를 위해서는 1988년 작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와 2021년 개봉한 섬광의 하사웨이 1부를 사실상 필수적으로 시청해야만 한다. 이는 영화로서 본작의 대중적 흥행성에 대한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하지만, 세계관의 연결과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올드팬들에게는 외려 고평가받는 요소이기도 하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여 인공건조물 '스페이스 콜로니'에서 살아가는 우주세기(U.C.), 지구연방정부는 지구의 빈민·소수자·노동계급을 우주로 올려보내고 이들에 대한 착취와 차별을 가한다. 우주 식민지인 사이드3는 이에 반발해 '지온 공국'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U.C. 0079년 지구연방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이것이 우주세기 서사의 시작점이다. 여기까지는 보편적인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서사로 보이지만, 본래 공화국이었던 지온의 권력을 장악하고 전제군주제를 도입한 자비 가문은 파시즘·전체주의 독재를 구축하고 연방에 맞서는 성전(聖戰)을 명목으로 지구에 콜로니를 떨어뜨리며 동조하지 않는 콜로니에 독가스를 주입하여 수십억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전쟁에는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있을 수 없다'는 시리즈의 테마는 이렇듯 시리즈의 시작점에서부터 이미 명료해진다.
본작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역습의 샤아의 배경은 U.C. 0093년. 주인공 아무로 레이는 시리즈 초대작부터의 주인공이자 지구연방의 에이스 파일럿이다. 한편 역시 초대작부터의 메인 빌런이자 극의 핵심인물인 샤아 아즈나블은 초대작 기동전사 건담에서 지온의 패전 이후 스페이스노이드(우주 인류)의 해방과 인류의 개혁을 위해 활동했으나 결국 바뀌지 않는 인류에 실망하고 전 인류를 우주로 올려보내야만 이른바 '뉴타입'화, 즉 우주 신인류로의 각성과 상호간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상 아래 소행성 액시즈를 지구에 충돌시키는 '지구한랭화작전'을 구상한다. 작전은 실제 뉴타입인 아무로의 능력에 감응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미지의 힘으로 무로 돌아가지만, 간신히 살아남은 지구연방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그대로 계속된다.
역습의 샤아의 조연이자 본작의 주연인 하사웨이 노아는 지구연방군의 전설적 함장이자 전쟁영웅인 브라이트의 아들이다. 하사웨이는 전쟁에서 적군의 파일럿이 된 첫사랑 소녀 퀘스 파라야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죽인 조력자를 스스로 쏘아 죽였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U.C. 010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사웨이를 주인공으로 한 본작의 서사는 시작된다.

본작에서 하사웨이는 대외적으로 식물학 실습생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반지구연방조직 '마프티'의 중심인물로서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라는 가명을 쓰며 지구를 사유화하는 연방정부 고관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는 테러리스트이자 모빌슈트 파일럿이다. 소행성 낙하를 막아낸 전쟁영웅의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는 일종의 '운동권'이 된 셈이다. 제국에 맞서 혁명을 성공시킨 전설 한 솔로의 아들이 공화국을 배신하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서사가 떠오르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서사 구조다.
본작의 1부와 2부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서사는 부패한 연방정부를 숙청하고 지구를 정화하겠다는 '대의'와 본인의 성욕·연애욕이라는 이른바 '세속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하사웨이의 모습이다. 이 중 전자, 즉 하사웨이가 말하는 마프티의 대의는 아버지의 적이자 본인이 동경했던 아무로의 적이었던 샤아의 대의, 즉 "누구나 지구에 살 순 없어"라는 하사웨이의 대사로 표상되는 '지구 정화'와 지구 인류의 (강제적) 우주 진출론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역습의 샤아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묘사되는 우주 세력의 한계점은 곧 그것이 '속죄주의'에 기반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명료해진다. 즉 '어머니 지구에 대한 속죄'로서 지구를 오염시키는 지구 거주자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징벌하며 강제로 우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일종의 에코 파시즘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속죄주의적 속성의 운동이 부패한 체제의 '안티테제'로서 일정한 가치를 가질지언정 종국에 대안체제로서의 '테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작중에서도 묘사된다. 초대 기동전사 건담에서 샤아의 아버지이자 '우주의 레닌(얼마 되지 않는 작중 묘사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등의 이미지를 섞어 놓은 것에 가깝다)' 격으로 묘사되는 지온 줌 다이쿤의 사상은 전 인류의 우주진출을 가속화하여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신인류로의 각성을 통한 지구-우주의 평등한 관계 재정립을 꾀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본래 그러했듯) 신세계에 대한 선도적 상상력이자 이념 체계에 가까웠다. 물론 우주 식민지에서 태동한 그 사상은 당연하게도 우주와 지구 간의 불평등에 집중한 반식민·반제국주의의 성격을 동시에 띠었다.


그러나 우주 세력 내부의 전체주의 질서 구축과 독재권력 강화 속에 이들의 사상은 '우주 분리주의'로 고착되고, 이들의 정치구호이자 방법론은 '인류의 우주진출을 가속화하여 혁신을 이끈다'는 미래지향적 사상에서 '부패한 지구를 정화하여 인류의 죄를 속죄한다'는 속죄주의로 퇴보한다. 작중 묘사되는 이러한 속죄주의 운동의 한계는 테러를 통해 연방의 일부 고관들을 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지구에 살아가며 부패한 연방정부로부터 우주 이민자들과는 또 다른 방식의 피해를 입는 - 즉 '뉴타입'이 될 최소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 - 평범한 이들에게 전쟁의 피해를 전가시키며 더욱 가혹한 정부로부터의 탄압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본작에서 마프티의 혁명적 테러리즘이 보여주는 결과는 이 한계점의 연장선상에 있다. 1편의 배경이 되는 필리핀의 다바오에서 하사웨이는 연방정부의 비호를 받는 '맨 헌터' 조직이 테러리스트 마프티(즉 본인이다)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지구에 '불법으로 거주하는' 이민자들에 대해 모빌슈트를 동원하여 기총을 난사하는, 마치 도널드 트럼프의 ICE를 동원한 야만적 이민자 살해를 연상케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후 모빌슈트 부대를 동원한 마프티의 다바오 습격 씬에서도 카메라의 위치는 역시 화려한 전투 씬이 아니라 시가전으로 피해를 입는 일반인들의 시선에 머문다.
주목할 점은 속죄주의를 명목으로 행해지는 마프티의 테러리즘과 전쟁이 낳는 피해가 연방 관료들이 아니라, 콜로니의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지구로 넘어와 '불법적 인간'으로서 삶을 이어나가는 - 즉 샤아와 마프티가 '해방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에게 오히려 전가된다는 점이다. 작중 하사웨이 역시 '마프티의 힘으로 지구연방정부의 정권교체를 이뤄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본질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묘사는 전작 역습의 샤아의 도입부, 소행성 '피프스 루나'가 지구연방정부의 수도 티베트 라싸에 낙하했을 때 정작 목표했던 연방정부 각료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도피했고 피해를 본 것은 연방정부의 부패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그럼에도 작품 바깥의 우리가 마프티(그리고 샤아)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이들의 행위가 단순히 저항 세력의 전체주의·속죄주의화만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무기력한 개량·개혁주의 역시도 명백히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작의 18년 전 U.C. 0087년을 다룬 《기동전사 Z 건담》에서 '크와트로 바지나'라는 가명으로 지구연방 내의 극우 군부에 맞서 스페이스노이드와 어스노이드가 공존하는 민주적 연방 개혁을 꿈꿨던 샤아는, 그 많은 동지들의 희생과 극우 군부 세력의 몰락에도 여전히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연방정부에 실망하여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콜로니 낙하로 지구를 한랭화시키겠다는 급진주의·극단주의적 방식으로 자신의 혁명론을 선회한다. 역습의 샤아 극 후반부 길게 펼쳐지는 샤아와 아무로의 대화는 무기력한 개량주의와 대중과 유리된 혁명주의의 오래된 논쟁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아무로: 사회 개혁이라는 걸 모르는군. 혁명은 언제나 인텔리가 시작하지만, 꿈 같은 목표를 세우고 하니까 항상 과격한 일만 저질러! 하지만 혁명이 끝난 뒤에는, 고결했던 혁명의 마음마저 관료주의와 대중들에게 집어삼켜져 가니까, 인텔리는 그걸 싫어해서 사회에서도 정치에서도 물러나 결국 세상을 등지게 돼. 그렇다면...
샤아: 나는 사회 개혁 따윈 생각하고 있지 않아! 우민들에게 그 재능을 이용당하고 있는 자가 할 말이냐!
아무로의 대사는 샤아의 혁명론이 갖는 명백한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자신은 불평등하며 극도로 억압적인 지구연방 체제에서 '뉴타입'으로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부끄러움을 은폐한다. 그러나 연방의 관료주의적 민주주의에 순응하며 모순에 눈감은 채 단순한 파일럿에 머무는 아무로의 방식도, 속죄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지구의 '정화'를 부르짖는 - 그러나 그 정화의 대상에는 체제의 피해자들까지도 당연한 듯 포함되는 - 샤아와 하사웨이의 방식도, 정작 억압받는 스페이스노이드들과 '맨 헌터'들에게 살해당하는 이민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함은 명료하다. 영화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민간인들의 피해와 이에 고뇌하면서도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속죄주의를 오히려 심화시킬 뿐인 하사웨이의 모습을 통해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이 모순을 상기시킨다.

전쟁 시대의 '멘헤라', 그리고 멘헤라 시대의 전쟁
한편 하사웨이의 속죄주의적 혁명론·운동론이 점점 극단화되는 데에는 이보다 미시적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하사웨이가 앓고 있는 뿌리 깊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다. '멘헤라(멘탈 헬스, 즉 정신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유래 신조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묘사되는 하사웨이의 마음 속 모든 문제의 근원은 12년 전 역습의 샤아의 배경이 되는 전쟁에서 첫사랑이던 퀘스 파라야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을 지키고자 퀘스를 쐈던 조력자 첸 아기를 스스로 살해한 경험에 있다.
작중 하사웨이의 PTSD가 묘사되는 방식은 극히 현실적이며 혐오와 동정을 동시에 유발한다. 하사웨이는 본작의 히로인인 기기 안달루시아에 대한 욕망을 느끼면서도 퀘스의 트라우마 때문에 기기와 퀘스를 겹쳐 보고, 동시에 마프티의 동지이자 하사웨이의 모든 것을 챙겨 주는 연인인 케리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본인 앞에서 죽은 퀘스와 본인이 죽인 첸 아기의 트라우마는 스스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연기할 수는 있어도 진심으로 관계를 맺지는 못하는 사람으로 남게 한다. 퀘스의 망령이 마치 형체를 가진 것처럼 하사웨이의 시야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가히 섬뜩함을 불러올 정도의 PTSD 연출이다.
본작의 하사웨이가 "세속이 아닌 대의" 따위 이분법적 대사를 지속적으로 되뇌이는 이유는 또 다시 확장된 속죄주의에 다름없다. 지구의 인간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와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를 등치시키고, 그 속죄를 위한 혁명과 운동에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헌신해야만 자신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샤아 아즈나블이 지구를 향한 인류의 속죄를 주장했지만 사실 그 자신의 본질은 자신이 사랑했던 뉴타입 라라아에 대한 죄의식과 무엇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로 가득차 있던 것과도 다름없다. 자기모순이 왜곡시킨 혁명론이 틀렸음을 샤아가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는 악독한 짓을 하고 있다, 날 막아 봐라, 아무로" 라는 역습의 샤아 작중 대사와 아무로의 능력을 증폭시켜 주는 사이코 프레임을 유출시킨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무화(無化)될 줄 알았던 하사웨이의 트라우마는 본작의 극후반부, 과거 아무로의 모빌슈트였던 뉴 건담과 흡사한 실루엣을 지닌 적의 모빌슈트(아류제우스 유닛 안의 양산형 뉴 건담)를 마주치자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하사웨이가 본인의 속죄주의가 지닌 모순을 이미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적 파일럿인 레인 에임이 몰고 등장한 양산형 뉴 건담을 마주칠 때의 내면 묘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하사웨이의 정신세계 속 아무로는 0093년 샤아의 대사("우민들에게 그 지혜를 보여라")를 그대로 읊는 하사웨이에게 소리친다. "왜 너는 샤아와 같은 말을 하는 거지?""그건 자기혐오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인적 속죄주의를 '대의'로 치환하는 것이 그저 자기혐오를 덮기 위한 또 다른 자기모순에 다름없다는 사실을 하사웨이는 아무로의 입을 빌려 다시 한 번 스스로 깨닫게 된다.
자기모순을 인지한 하사웨이는 정신적 폭주를 견디지 못하고 상대 파일럿인 레인 에임이 타고 있는 양산형 뉴 건담(하사웨이의 정신착란 속 이는 아무로의 뉴 건담으로 보여진다)의 콕핏에 빔 사벨을 찔러넣고 적을 완전히 죽이고자 한다. 1부의, 그리고 본작 초반의 하사웨이가 사로잡은 적조차 처형하고 싶지 않아했으며 최대한 불살(不殺)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는 정신붕괴가 가져온 충격적 변화에 다름없다. 이 시점에, 헬멧의 바이저 뒤로 보이던 하사웨이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전쟁이 만든 트라우마의 극대화가 결국 인간성의 상실을 불러온다는 상징적 연출이다.
여기에서 영화는 전쟁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년에게 PTSD를 심고, 그 PTSD로 인해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하고 12년 전에 갇힌 소년은 그에게 가해졌던 전쟁의 참혹함을 또 다른 소년에게 반복하는 순환의 구도를 재현한다. 지구연방 측의 상대 파일럿으로 등장하는 레인 에임은 테러리스트를 막아 민간인 피해를 줄인다는 단순하고 납작하지만 명료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모빌슈트 파일럿으로서 능력을 입증하고자 하며, 메인 빌런인 케네스 슬렉 대령으로 대표되는 '썩은 어른'들을 혐오하는, 일반적 소년만화였다면 주인공이 되었을 법도 한 소년 파일럿이다. 한편으로는 과거 역습의 샤아 시절의 순수하던 하사웨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전쟁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상실한 하사웨이는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소년 파일럿을 결국 다시 폭력의 희생양으로 삼게 된다. 비록 상대를 아무로로 착각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 점을 주지하더라도 폭력의 재생산은 여전하다. 이 점에서 영화는 '전쟁 시대의 멘헤라'가 결국 다시 '멘헤라 시대의 전쟁'을 낳는 악순환을 묘사한다. 작중에서는 전쟁의 한복판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표상되지만, 결국 이는 현대 사회의 모순들이 낳는 개개인의 정신적인 불안정성이 결국 다시 인간성의 붕괴를 잉태하는 비극의 메타포로도 해석할 수 있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과거 역습의 샤아에서 이미 이러한 '현대적 마음의 병'의 모습을 다름아닌 퀘스 파라야라는 캐릭터를 통해 묘사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퀘스에 대해. 최근 몇 년간 신경쓰였던 부분인데, '마음이 병든 사람'이 많아진 게 아닐까 합니다. 그 대표 주자로서 퀘스를 묘사했습니다. 살아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할 일(퀘스의 경우에는 아무로와 샤아 사이에 끼어든다던가)에는 스치지도 못하고, 자신의 착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중년을 포함해서요. 퀘스를 만듦으로써 제 나름의 현대성을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2
극 초반, 하사웨이는 '파일럿으로서/뉴타입으로서 둔감해진다'는 이유를 들어 연인인 케리아가 가져다 준 정신과 약의 복용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는 하사웨이가 결국 정신붕괴에 다다르고 만다는 영화적 복선으로 작용한다.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마음의 병을 없앨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 존재를 부정하거나 모종의 '대의' 따위로 치환하면서 또 다른 자기모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며 실제의 나를 마주하는 태도. 그것은 어쩌면 지금과 같은 '멘헤라 시대' - 그리고 또한 전쟁의 시대에 그 무엇보다 필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시대, 건담이 결코 놓을 수 없는 것
한편으로 본작을 감상하며 또 한 가지 집중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명확한 '리얼로봇물'로서의 전쟁 묘사와 전투 연출이다. 1부에서 묘사되었던 모빌슈트 시가전에 의한 민간인 피해와 '불법 이주자' 학살에 이어, 본작의 첫 장면을 장식하는 것은 반연방 게릴라들을 문자 그대로 '밟아 죽이는' 연방군의 모빌슈트 구스타프 칼의 모습이다. 밟혀 죽은 피해자의 카메라에 담긴 것으로 연출된 푸티지는 전고 20m에 달하는 전쟁병기가 한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가감 없이 묘사하고, 이는 마치 가자지구의, 또는 테헤란과 레바논의 수많은 사람들이 폭격 또는 드론 공습으로 살해당하기 직전 찍은 마지막 영상과도 오버랩된다.
전투 연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주역기인 크시 건담과 빌런 기체로 등장하는 아류제우스의 공중전 역시 흥미롭다. 전투 장면에서 등장하는 모빌슈트들의 움직임은 전투기와 같은 기계적 움직임에 가깝고, 인간형 기동병기임에도 실제 인간과 유사한 움직임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이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코멘트를 남긴 것은 그만큼 본작의 연출가들이 인간성이 배제된 '전투병기'로서의 모빌슈트를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음을 입증하는 지점이다.

영화 외적으로, 최근 건담 시리즈는 일본 언론의 소소한 화젯거리에 오른 바 있다. 새로운 영화의 개봉 때문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였다. 지난 3월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파병 반대와 이른바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 수호를 외치는 반전평화 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집회로 대표되는 일본의 새로운 반전평화운동이 과거와 다소 다른 점은 마치 한국의 윤석열 퇴진 집회를 연상시키는 '펜라이트(응원봉)'를 든 '오타쿠'들이 대거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전평화를 외쳐 온 대표적인 서브컬처 매체인 건담 시리즈 역시 이 과정에서 다양한 팬들에 의해 소환되며 광장에서 호명된 바 있다. 이 와중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의 외전인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의 감독을 맡은 마츠오 코우(松尾衡)는 "건담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멋대로 사용하지 마라"는 식으로 시위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남겼고, X 등 SNS에는 이에 동조하며 "건담과 반전은 관계없다, 건담은 본격 전쟁 애니(?)다"라는 등의 적지 않은 코멘트가 올라왔다. 이 와중 건담 시리즈의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감독은 애니메이션 전문지 《아니메쥬》 인터뷰를 통해 최근 논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남겼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80년 이상 살고 있습니다. 다만 4살 때 종전을 맞이했기에 태평양 전쟁이 끝나는 직전의 기억은 있어도, 전쟁 체험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학 동기 중에 피폭자가 있었고, "그때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살고 있었다"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대단한 체험이 없더라도, "그 속에서 살아남은 녀석이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실감이 있는 만큼 조금은 전쟁이라는 것을 리얼하게 생각해 왔다고 봅니다. 건담 등의 작품에는 그런 저 나름의 생각을 담아 왔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건담 팬" 중에서도 반전(反戰)과는 거리가 먼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밀리터리 오타쿠의 기분에 함몰되어 있으니, 결국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3

아흔을 바라보는 거장 토미노의 일갈은 건담이라는 매체가 오늘날의 일본 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다시금 명확히 하고 있지만, 동시에 작품이 반드시 창작자의 의도대로 해석될 수만은 없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모든 예술작품의 해석은 늘 그 시대와 정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건담 시리즈가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반전평화의 미디어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오늘날의 시대가 더욱 전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과거 전쟁의 참혹했던 기억이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의 역설적 반증이기도 하다.
모든 것에 명과 암이 공존하듯,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가 갖는 미디어로서의 한계는 명확하다. 전쟁의 참화를 그려내면서 전쟁무기를 완구화해 수익을 챙긴다는 점뿐 아니라, 반전과 평화를 늘 말하지만 결국 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는 일본 리버럴식 반전평화주의의 무기력함 역시 이미 수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그럼에도 토미노와 같은 애니메이터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엇이 어떠하든 전쟁은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 그리고 원작자의 확고한 의지를 이어받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지금과 같은 전쟁의 시대에 그리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는 단지 또 하나의 애니메이션 영화나 프라모델 판촉을 위한 홍보물만이 아니라, 반전과 평화를 줄기차게 말해 온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쟁의 시대 속 일궈낸 소소한 성취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중 등장하는 메카의 멋짐이라거나, 프라모델을 사서 조립하고 싶다는 욕구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필자와 같은 '오타쿠'에게 전쟁무기의 프라모델을 팔아 올린 수익으로 또 다시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거대로봇물의 매력적인 존재론적 자기모순이 아니겠는가.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무라세 슈코 감독
오노 켄쇼, 우에다 레이나, 스와베 준이치 / 108분 / 2026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일본 애니메이션, 거대로봇과 프라모델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각주
- 반다이남코, 2025년 재무제표 https://www.bandainamco.co.jp/en/ir/library/financialstatements.html [본문으로]
- 티스토리 '놋그릇', 뉴타입 1988년 4월호 역습의 샤아 공개 직전 특집(토미노 인터뷰) https://brassware.tistory.com/112 [본문으로]
- X @Char_Tweet https://x.com/Char_Tweet/status/20424374233264620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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