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당신은 BDSM을 모른다 - 영화 '뒷자리에 태워줘' 리뷰
일견 '가학적 관계'로만 표상되곤 하는 BDSM,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해리 라이튼 감독의 영화 《뒷자리에 태워줘》는 BDSM에서 '복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합의, 안전, 그리고 자유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 본 기사에는 BDSM, 권력관계, 합의된 폭력 및 성적 실천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본 기사에는 영화 《뒷자리에 태워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합의된 복종의 규칙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시인의 〈복종〉 전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헌신, 진리에 대한 귀의,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독립 의지로도 해석되는 이 시는, 어쩐지 나에게는 BDSM에 대한 순결한 찬가로 들린다.
우리는 흔히 '자유'와 '복종'을 대립항으로 생각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며 행동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시에서 한용운은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자유를 모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를 알면서도 복종한다고. 정확히는, 자유롭기 때문에 복종할 수 있다고.
이 시에서 한용운이 말하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극단적 형태의 자유에 가깝다. 복종은 자유의 부재가 아니라 온전한 자유의 행사이며, 통제의 상실이 아니라 통제권의 위임이다. 선택할 수 있는데 선택하지 않는 것. 떠날 수 있는데 머무는 것. 거부할 수 있는데 받아들이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의 복종(submission)은 굴종(subjugation)이 아니다.
허나, 소위 말하는 '에세머(SMer)'(BDSM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통칭)가 아니라면 이러한 관계맺음은 낯설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BDSM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BDSM은 Bondage & Discipline, Dominance & Submission, Sadism & Masochism의 약자로, 다양한 성적·관계적 실천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흔히 BDSM이라고 하면 주인과 노예, 혹은 마조히스트와 새디스트의 가학적 관계를 떠올리지만, 모든 BDSM이 주종관계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구속(Bondage)에 매력을 느끼고, 누군가는 역할극(Role-play)을 즐기며, 또 다른 누군가는 체벌이나 훈육 같은 특정한 감각이나 심리적 긴장감에 끌리기도 한다. 복종에서 오는 수치심, 특정 행동을 강요당할 때의 굴욕감과 해방감, 상대방을 물리적으로 소유하는 데에서 오는 성적 쾌감 등 일반적인 연애 관계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모든 BDSM 관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관계의 전제가 '강제'가 아닌 '합의'라는 점이다. BDSM은 흔히 권력관계의 연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참여자 모두의 자율성과 동의 위에서 성립한다(강제성이 동반되는 강간플레이조차 상호 간의 확실한 사전 합의와 세이프워드 설정 이후에 이루어진다). 실제 BDSM은 단순히 맞고 때리며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깊은 욕구를 이해하고, 완벽한 소유를 통해 무한한 책임을 지는 일이다. 상대방의 취약성을 맡아야 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 권력남용, 가스라이팅, 경계 침해, 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신체의 일시적, 영구적 손상을 가져오기도 하므로 높은 수준의 책임이 요구되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세머가 된다는 것은, 독립적인 둘 이상의 사람이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합의된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 안으로 스스로 신중하게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바이크 뒷자리'의 뜻
해리 라이턴 감독의 영화 《뒷자리에 태워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BDSM을 단순히 자극적인 성적 판타지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의된 규칙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두 남자의 관계를, 그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응시한다. 이 영화의 원제인 《Pillion》은 오토바이의 뒷좌석, 혹은 그 자리에 타는 사람을 의미한다. 게이 레더·바이커 문화에서 이는 관계에서 뒤를 맡는 사람, 즉 바텀(bottom)이나 섭(submissive)을 은유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 '뒷자리에 태워줘'라는 한국어 제목은 단순한 직역을 넘어 영화의 핵심 관계를 적확하게 옮겨낸 번역이라 할 만하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이 바이커 커뮤니티의 역사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는 일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전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감과 규율을 중심으로 한 남성 바이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다. 이는 동성애가 '범죄'이자 '정신질환'으로 간주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반문화(subculture)적인 바이커 커뮤니티 내에서도 게이들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오토바이 클럽(Motorcycle Club, MC)은 단순한 취미 모임이 아니라 퀴어 남성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드문 공간이었다. 이들은 '게이는 여성스럽다'는 편견에 대해 오히려 거칠고 강한 남성성 과시로 응수했다. 검은 가죽 재킷과 부츠, 크고 시끄러운 바이크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남성성과 연대, 그리고 기존 사회가 허용하지 않았던 욕망을 드러내는 언어였다. 이 과정에서 위계와 역할, 규칙과 책임을 중시하는 레더(Leather) 문화가 결합되어,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정반대의 마초적 게이 커뮤니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알고 보면 주인공 레이(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분)가 바이커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단순한 오토바이 애호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와 규율을 몸에 익힌 사람이다.

순수한 주인공 콜린(해리 멜링 분)은 어느 날 바에서 우연히 바이커 레이를 만나 BDSM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러나 레이는 안타깝게도 친절한 안내자가 아니며, 영화는 BDSM의 이상적인 시작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관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긴 협상을 보여주기보다, 자신의 규칙 속으로 콜린을 갑작스럽게, 또 강압적으로 끌어들인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BDSM 가운데서도 D/s(Dominance and Submission, 이하 '디엣') 관계다. 콜린은 레이의 집에서 생활하며 그의 일상을 돌본다는 점에서 하우스 슬레이브(House Slave)의 성격도 띤다. 영화는 처음 D/s 관계에 들어온 섭(submissive)이 겪는 감정의 층위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지배와 복종이 기본 전제인 디엣 관계에서, 콜린은 레이에게 일반적인 연인이라면 자연스럽게 기대할 법한 다정함이나 애정 표현을 쉽게 요구할 수 없다. 마음대로 손을 잡거나 몸을 만질 수도, 키스를 할 수도, 심지어 같은 침대에서 잘 수도 없다. 감정 표현에도 허락이 필요하고, 레이의 말에 순응하지 않으면 체벌이 따라온다. 콜린은 레이의 명령 없이 행동했다가 그의 집에서 내쫓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레이에 대한 콜린의 사랑은 점점 커져 가는데,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규칙을 깨는 일인지, 아니면 관계를 더 깊게 만드는 일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렇게 낯선 규칙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고 머뭇거리던 콜린은 그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복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워 나간다. 이해할 수 없었던 레이의 규칙에도 점차 익숙해지고, 복종 후 주인이 주는 칭찬 한 마디와 다정한 손길 한 번에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어간다. 자신의 생일에조차 레이를 위해 요리해야 하는 상황에 우울해하던 콜린은 레이가 준비한 깜짝 생일 선물을 받고는 감동하여 더 강한 복종을 결심하게 된다. 이런 관계가 처음이었던 콜린에게 이 모든 것은 엄청난 고양감으로, '주인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처음의 혼란과 긴장, 낯섦과 불안은,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안도와 애정을 거쳐,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상대방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내려놓게 되는 순간에 다다른다. 영화는 복종을 하나의 성적 취향이 아니라 진정한 소통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섭인 콜린만큼이나 돔(dominant)인 레이의 균열 역시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과 순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는 감정보다 역할을 앞세우고, 애정보다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D/s 관계에서 돔은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관계의 안전을 책임지고, 섭이 규칙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제시하고, 반항(bratting)을 컨트롤하며 중심을 잡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는 권력이라기보다 책임에 가깝다. 그래서 레이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정함마저 규칙의 일부처럼 절제하고, 애정조차 보상의 형태로만 허락한다. 콜린을 사랑하지 않아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역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가 깊어질수록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규칙들이다. 원칙이라던 규칙에는 하나둘 예외가 생기고, 금지했던 행동은 어느 순간 묵인(spoil)된다. 콜린이 단순히 '충실한 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레이는 더 이상 완벽한 돔으로만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웠던 경계가, 오히려 관계가 깊어질수록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돔 역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 사람이며, 사랑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규칙은 설계할 수 있지만 감정은 설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에서 복종은 즉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학습되는 관계다. 규칙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조금씩 완성되고, 감정은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복종은 수동성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선택을 반복하는 능동적인 실천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디엣 관계에서 돔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섭이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의 성립과 유지 자체를 결정하는 힘 역시 섭에게 있다. 섭은 단순히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참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디엣이란 관계의 주도권을 뺏고 뺏으며 내가 너의 우위에 있음을, 내가 자발적으로 당신의 아래에 있음을 서로에게 내보이는 선언이자 맹세다.

이들의 이별이 인상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둘이 처음 키스를 나누는 순간이다. 많은 D/s 관계에서 키스는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의도적으로 '금지'되는 행위이며, 가끔씩만 주어지는 '보상'이 되기도 하고, 역할과 감정을 구분하는 마지막 '경계'이기도 하다. 많은 에세머들에게 키스는 오히려 섹스보다 더 '사랑'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BDSM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그래서 매우 논쟁적이다. 이는 BDSM이 사랑을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역할이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역할은 규칙을 필요로 하지만, 사랑은 때때로 규칙을 넘어서려 한다. 역할은 경계를 세우지만 사랑은 그 경계를 지운다. 그런 점에서 레이와 콜린의 키스는 두 사람이 서로를 '돔과 섭'이 아니라 '연인'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함께 지켜 왔던 관계의 규칙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레이와 콜린이 돔과 섭의 주도권 줄다리기 싸움을 끝내고 마침내 키스 - 즉 평등성의 회복 - 를 하고 말았을 때, 둘은 이 관계의 끝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 키스가 너무 황홀해 웃어보이는 콜린의 표정은 어딘가 아릿하기까지 하다. 레이는 결국 키스 이후 종적을 감추고, 콜린은 레이를 찾아다니지만 끝내 재회에 실패한 채 이별을 받아들인다.
더 안전하게, 더 자유롭게 사랑하고 복종하기

영화는 시간이 지난 후 콜린이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레이는 자기소개란(bio)에 본인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요구하고 타협할 수 없는 선을 제시하며 이에 동의할 수 있는 상대방을 찾아간다. 이 마지막을 단순히 새로운 상대를 만난다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레이의 규칙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애쓰던 콜린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어디까지가 자신의 경계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BDSM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합의'를 콜린이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처음의 콜린은 누군가가 정해 놓은 규칙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의 콜린은 자신 역시 관계를 만드는 동등한 주체라는 사실을 안다. 그는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존중해 줄 사람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콜린이 레이와의 관계를 통해 배운 것은 '복종하는 법'이 아니라 '안전하게 사랑하는 법'인 셈이다.
백여 년 전 한용운 시인은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라고 했더랬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복종은 한쪽이 다른 쪽에게 자신을 내어주만 하는 일방적인 굴복이 아님을. 누구에게 자신을 맡길 것인지, 어떤 규칙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그리고 그 세계가 나를 나답게 세우지 못할 때 언제 그 문을 닫고 나올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임을.
이 더럽고 작은 판(scene)에 들어온 레이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이 울게 될 것이고, 너무도 아프고, 매번 혼란스럽겠지만 그보다 더 많이 행복할 것이다. 그의 BDSM 라이프가 조금은 더 안전하고, 자유롭기를 바란다. 가장 자유로운 사람만이 가장 잘 복종할 수 있으므로.

뒷자리에 태워줘
해리 라이튼 감독
해리 멜링,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 106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도비아
세상은 원래 하지 말라는 걸 할 때가 제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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