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끝나지 않는 밤' 상영회 후기: 폐허 속에서 '공범'의 얼굴을 보다
지난 1월 9일 전환 사무실에서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끝나지 않는 밤》의 상영회가 열렸다. 이미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우리가, 그럼에도 다시 한번 가자의 참상을 두 눈으로 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 웹진 《도모》의 발행주체인 사회운동·진보정치단체 전환은 지난 1월 9일, 회원들을 대상으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을 다룬 알 자지라의 다큐멘터리 영화 《끝나지 않는 밤》의 상영회를 개최했습니다. 해당 영화를 함께 시청한 전환 회원의 후기를 싣습니다. (편집부)


보이지 않는 밤을 목격하다
가자지구의 학살은 이미 수많은 언어로 설명되어 왔다. 매일 갱신되는 사망자 수와 국제기구의 건조한 보고서, 반복되는 규탄 성명과 뉴스 속의 파편화된 이미지들. 진보적 의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온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비극'에 가깝다. 그러나 '많이 안다'는 감각은 때로 위험하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그 비극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게 만드는 핑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9일, 유독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던 금요일 저녁이었다. 서울의 한 켠,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전환 사무실에서 열린 알 자지라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는 밤》(원제: The Night Won't End) 상영회는 내가 익숙하다고 믿어 왔던 그 안온한 감각을 정면으로 흔들어 놓았다.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영화를 기다리면서는 아직 몰랐지만, 화면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정리된 정보나 편집된 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생생한 '밤'이었다. 이 글은 그 날의 상영 이후, 우리가 이 학살을 얼마나 안전하고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 쓰여졌다.
가자지구의 학살에 대해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수만 명의 사망자 수, 국제법 위반을 지적하는 성명들, SNS 타임라인을 부유하는 참혹한 사진들. 하지만 반복되는 학살과 국제사회의 무력한 대응은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 숫자와 텍스트로 치환 가능한 정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 끔찍한 일임에도, 나의 일상을 침범하여 흔들어 놓을 만큼 가깝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끝나지 않는 밤'은 바로 그 거리감을 문제삼으며 시작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친절하지 않다. 가자지구의 복잡한 정세를 요약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팔레스타인 현지인의 떨리는 목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조 요청의 통화 기록, 그리고 실제 현장의 흙먼지 속으로 관객을 거칠게 밀어넣는다. 해설이 소거된 자리를 채우는 것은 날것 그대로의 공포다. 화면은 자주 암전되고, 통화는 끊기며, 구조는 하염없이 지연된다. 이 '미완의 상태'가 반복될수록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 폭력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언제든 재현 가능한 치밀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6살 힌드의 3시간, 그리고 끝나지 않는 신호음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수많은 죽음 중에서도, 6세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잡(Hind Rajab)의 에피소드는 침묵할 수 없는 공포의 정점이다. 화면이 암전된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시각적 정보보다 더 깊숙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힌드 라잡의 사촌 언니인 15세 라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고 있어요. 탱크가 바로 옆에 있어요."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수십 발의 총성이 수화기 너머를 긁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끔찍한 정적. 다시 수화기를 든 것은 6살 힌드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가 말한다. "언니가 죽었어요. 나도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데리러 와주세요."
다큐멘터리는 이 통화가 무려 3시간 넘게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 긴 시간 동안 6살 아이가 가족들의 시신 틈에 웅크려 홀로 견뎌야 했던 공포의 무게를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수화기 너머 구조대원 유수프와 아흐메드의 목소리다. 그들은 울부짖는 아이에게 "지금 가겠다"고 말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의 진입 허가, 이른바 '조정(coordination)'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면은 지도 위에서 깜빡이는 구급차의 위치와,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을 교차 편집한다. 아이를 구하러 간다는 명백한 인도주의적 행위조차 점령군의 군사적 승인 대상이 되고, 결국 그 승인을 받고 진입한 구급차마저 폭격당해 뼈대만 남은 고철로 변해버린 장면. 12일 뒤에야 발견된 힌드와 가족들의 부패한 시신, 그리고 그 옆에 불타버린 구급차의 잔해는 이 학살이 '전쟁 중의 실수'가 아니라 철저한 '확인 사살'의 과정이었음을 증명한다. 힌드의 마지막 목소리는 "무서워요, 해가 지고 있어요"였다. 아이에게 찾아온 밤은 결국 끝나지 않았다.

이 장면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폭력의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너무나 체계적이고 관료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외치고, 누군가는 그 요청을 접수하지만, 허가를 기다려야만 한다. 힌드 라잡의 통화는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가자지구 전체를 옥죄고 있는 통치 기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자지구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어쩌면 폭탄이 아니라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구조를 기다리는 시간, 허가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그 사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간. 다큐는 이 지연된 시간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그 시간이 흐를 때마다 생존 가능성이 어떻게 말살되는지를 고발한다. 적신월사와 같은 국제기구의 이름은 현장에서 무력하다. 보호받아야 할 민간인과 보호를 수행해야 할 구조대원 모두가 군사 점령의 통제판 위에 놓인 '타겟'일 뿐이다. 인도주의 원칙이 군사적 편의에 종속될 때, 국제법은 그저 공허한 종이조각에 불과함을 이 다큐는 웅변한다.
'메이드 인 USA', 폐허 속에 새겨진 공범의 증거
이 학살의 책임은 어디까지 닿아 있는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감정적인 호소에만 머물지 않고 냉철하게 '물증'을 쫓는다. 카메라는 무너진 건물 잔해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남겨진 금속 파편들을 집요하게 비춘다. 폭격으로 생긴 거대한 크레이터(웅덩이)의 지름을 측정하고, 찌그러진 쇳조각에 새겨진 일련번호를 추적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건조한 팩트를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안전지대'라고 지정했던 라파(Rafah)의 민간인 거주지를 날려버린 것은, 다름 아닌 미국산 MK-84 2,000파운드 폭탄이었다.

2,000파운드 폭탄은 살상 반경이 수백 미터에 달해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사용이 금기시되는 대량 살상 무기다. 하지만 다큐는 이 무기들이 바이든 행정부의 승인 하에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음을 폭로한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워싱턴의 관료들은 "이스라엘에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라고 요구했다"고 말하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바로 다음 컷에서 가자의 흙바닥에 뒹구는 'Made in USA' 파편은 그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소리 없이 증명한다.
우리는 흔히 이 사태를 추상적인 '국가 간의 분쟁'으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거래'다. 미국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폭탄이, 미 국무부의 승인을 거쳐, 이스라엘 전투기에 실려,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이 명백한 공급 사슬(Supply Chain)을 목격하고 나면, '미국은 중재자'라는 기존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 학살의 공범은 명확하다.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에서 다시 들리는 목소리
상영이 끝난 후 이어진 김원 전환 국제연대팀장의 해설은 우리가 방금 목격한 참상의 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했다. 그는 "서구 언론과 주류 미디어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라는 단어로 납작하게 가두려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결코 하마스의 공격 행위 자체에 대한 무비판적 긍정이 아니다. 다만 75년 넘게 이어진 점령과 봉쇄, 식민 지배라는 거대한 맥락을 소거한 채, 저항 세력의 폭력성만을 부각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기만이라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벽을 부수고 나오는 것을 두고, 감옥을 만든 자의 폭력은 잊은 채 벽을 부순 행위만 비난해서는 안 된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가자 주민들의 분노는 단순한 증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대로 이어져 온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나크바), 일상을 통제당하며, 죽음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구조적 억압에 대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해설을 듣고 나니,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상영 도중에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한 가자지구 주민의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국이 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다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국의 무기 지원과 외교적 비호 장면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해설을 통해 이 비극의 깊은 뿌리를 확인한 뒤, 이 말은 단순한 비난을 넘어선 통찰로 읽혔다.
오슬로 협정 이후의 기만적인 평화 프로세스, 인티파다 이후 이어진 개입,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의 예루살렘 선언과 아브라함 협정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현대사에서 미국은 단 한 번도 공정한 심판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주민의 발언이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축적된 경험의 언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미국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폭력의 조건을 설계하고 유지해 온 핵심 '행위자'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다큐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주민들의 육성을 통해 끊임없이 힌트를 던지고 있었다. 다만 내가 그 맥락을 온전히 읽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해설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화면 속 폐허 위에 겹쳐진 거대한 공모의 구조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침묵을 넘어, 응답하는 자리로
1시간 30분의 상영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을 채운 것은 무거울 정도의 적막이었다. 평소라면 웅성거림이나 박수가 나왔을 타이밍이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 침묵은 단순한 슬픔이나 충격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스크린 속에서 목격한 압도적인 죽음들 앞에서, 안전한 곳에서 그것을 지켜본 관객으로서 느끼는 부채감, 그리고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함이 뒤섞인 공기였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훌쩍임 소리만이 그 적막을 간간이 깨뜨렸다. 불이 켜지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많은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각자 질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상을 보고 난 뒤의 나는, 그 전의 나와 같을 수 있는가?' 진보정당의 당원이자 이 사회의, 그리고 이 세계의 시민으로서 이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것은 결코 중립적인 경험일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를 다시 '본다'는 행위는, 그동안 충분히 분노하지 않았던 나의 태도와 안전한 자리에서 머물러 왔던 나 자신의 위치를 뼈아프게 돌아보게끔 만든다.
'끝나지 않는 밤'은 결코 가자지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국제질서, 그리고 그 질서를 묵인해 온 세계로 확장된다. 이 밤을 또 하나의 슬픈 이야기로 소비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이 밤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묻고 그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 움직일 것인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온 우리가 지금 마주해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끝나지 않는 밤
카비타 체쿠루 감독
알 자지라 제작 / 다큐멘터리 / 78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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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정의당 청소년위원회, 인공지능 전공 공학도.
AI가 바꾸는 세상과 얼어붙은 현실 사이에서 정의로운 길을 찾고 있다.
영종도라는 섬에서 가자지구라는 고립된 섬으로, 차가운 침묵 대신 뜨거운 연대의 신호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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