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죽음을 숭배하는 정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 '28년 후: 뼈의 사원'과 '위악'이라는 시대정신
다시 시작된 좀비영화의 모던 클래식 《28년 후》가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인 《28년 후: 뼈의 사원》으로 돌아왔다. 위악과 조롱, 냉소로 가득 찬 오늘의 시대 속, 이 영화에는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영화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 본 기사에는 영화 《28년 후: 뼈의 사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어가며: 누가 '죽음'을 살아 있게 하는가
니아 다코스타의 《28년 후: 뼈의 사원》은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가 확장 중인 《28년 후》 트릴로지의 두 번째 영화다. 전편이 홀리 아일랜드라는 생존 공동체를 중심에 두고 '죽은 자를 묻고 산 자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다뤘다면, 이번 영화는 그 반대편에 선 세계를 보여준다. 폐허가 된 영국 내륙에서 주인공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 분)는 죽은 자를 수습하고 정리하는 켈슨(랄프 파인즈 분)의 사원과, 죽음과 폭력을 제의와 공연으로 바꾸어 소비하는 지미(잭 오코넬 분)의 공동체를 차례로 통과한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묻는 것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숭배하는가.
영화 속에서 사타니즘은 단순히 종교나 오컬트적 장치를 넘어 2020년대의 정치 전반을 은유한다. 이 땅에서 사탄은 더 이상 지옥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는 공공성이 무너진 자리, 애도가 의식과 공연으로 대체된 자리, 타인의 고통을 조롱과 오락으로 소비하는 자리에서 공동체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삶에 대한 사랑이 무너진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숭배다.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뼈의 사원 위에서 '생기를 되찾아 버린 죽음'을 제 위치에 돌려놓고자 시도한다. 즉, 영화는 마치 죽음이 다시 죽은 채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듯하다.
기억할 것인가 숭배할 것인가
사실 좀비·바이러스 장르물은 '생존' 서사라기보다는 '죽음' 서사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일반적인 아포칼립스가 생존의 가능성을 담보로 잡아 공포를 자아낸다면 좀비/바이러스 아포칼립스는 죽음의 불가능성을 담보로 잡은 공포를 드러내고자 시도한다. 생존자들의 근원적 공포는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의미에서) 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서 온다. 어쩌면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온전하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생존 이상으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평안한 안식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28일 후》의 후속 시리즈로 기획된 '28년 후' 시리즈는 이 '살아 있는 죽음'의 역설을 잘 이해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돋보이는 시리즈다. 첫 번째 이야기인 '28년 후'가 '죽음을 어떻게 죽은 채로 남겨둘 것인가'에 대해 논한다면, 두 번째 이야기인 '28년 후: 뼈의 사원'은 '왜 인간들은 그토록 죽음을 살려두지 못해 안달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기억할 것인가 숭배할 것인가'의 선택지 앞에서 전작이 전자를 보여줬다면 이번 작품은 후자의 사례를 지극히 엔터테인먼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8년 후: 뼈의 사원'의 핵심 이미지는 감염자의 육체라기보다 뼈 그 자체에 있다. 뼈는 이미 한 차례 삶을 통과했고, 이미 죽음을 통과했으며, 더 이상 어떤 욕망의 대상도 되어서는 안 되는 잔여물이다. 말하자면 뼈는 기억의 물질이지 숭배의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 뼈를 다시금 공간의 중심에 세운다. 그것으로 지어진 기억의 사원을 발가벗기고, 그것을 둘러싼 새로운 제의와 폭력의 동학을 구축한다. 기억이 멈춘 자리에서 숭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뼈 더미라는 물질적 형상으로 보여준다.

전작 서사의 시발점이 되는 홀리 아일랜드가 (회피적이었을지언정) 적어도 죽은 자를 묻고 살아남은 자의 일상을 유지하려는 공동체였다면, 이번 작품은 그보다 훨씬 더 음울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죽음을 애도하는 데서 멈추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죽음을 다시 불러내고, 그것을 오늘의 정동으로 되살리며, 급기야 공동체를 조직하는 중심 상징으로까지 만들어 버리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28년 후: 뼈의 사원'은 좀비 장르물 특유의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죽음을 동원하는 정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한 편의 정치·윤리학적 실험실이 되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영화는 거의 '제의적'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간의 비뚤어진 믿음체계를 건드린다. 죽음이 실체를 갖춘 숭배의 대상이 되는 세계, 죽음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어야 하는 세계, 죽음이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어찌 보면 메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르물의 문법에 충실하게 그려진다. 그 은유가 드러내는 바는 잔혹하리만치 단순명료하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은 더 이상 공공선이나 애도와 같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냉소와 위악, 타인의 고통을 공연으로 소비하는 죽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뼈 더미와 사타니즘의 역설
영화 속 악역에 가깝게 등장하는 지미의 공동체는 단순한 생존자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생존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잔혹한 학살을 가하고, 획일적인 복장과 이름, 구호와 몸짓을 통해 서로를 확인한다. 그들의 폭력은 은밀한 생존 행위가 아니라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과장되고 연출된 퍼포먼스로 제시된다. 그 순간 죽음은 치워야 할 재난이 아니라 집단을 결속시키는 무대 장치가 된다. 비로소 죽음이 살아나는 순간, 사탄이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사타니즘을 실재하는 초월적 악의 징표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영화 속 사탄(올드 닉)이라는 상징은 어떤 종교적 존재라기보다는 공동체가 자기 파괴를 정당화할 때 호출하는 하나의 정치적 얼굴이다. 그것은 금기를 깨뜨리는 데서 오는 병적인 쾌감, 남들이 진지하게 여기는 것을 비웃는 냉소, 타인의 상처를 보며 오히려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위악의 미학에 가깝다.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사타니즘은 악을 '믿는' 태도라기보다, 악을 (단순히 생존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달갑게 여기는' 태도다.

때문에 영화 속 제의는 종교의 형식을 띠면서도 동시에 공연의 형식을 띤다. 생존자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옷 벗기기' 고문, 그리고 지미 크리스탈이 켈슨에게 사탄 연기를 시키며 그것을 퍼포먼스로 소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폭력은 은밀하게 수행되지 않고 과장되게 전시된다. 신념은 내면의 확신이라기보다 복장과 구호와 몸짓을 통해 외부로 과시된다. 잔혹함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집단적 쾌락의 원천이 된다. 이 때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니다. 끝나야 할 것이 끝나지 않고, 지나가야 할 것이 현재에 눌러앉는다. 묻혀야 할 것이 무대 위로 끌려 올라온다. 죽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산 자들이 죽음을 살려두려 애쓰는 것이다.
니아 다코스타는 이 영화에서 켈슨과 지미를 각각 "온화한 질서와 아나키적 혼란", 혹은 "연민과 잔혹함"의 대립으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영화는 처음부터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치적 질서를 병치하고 있다. 하나는 죽은 자를 정리하고, 고통받는 몸을 돌보고, 최소한의 질서를 복원하려는 세계다. 반면 다른 하나는 죽은 자를 끄집어내 발가벗기고, 혼돈과 잔혹함을 의식으로 만들며, 그 안에서 결속을 얻는 세계다. 이 때 사타니즘은 후자의 세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그것은 악의 실체가 아니라 연민이 조롱으로 치환된 사회의 집단적 스타일이다.
쿨병, 냉소, 가짜뉴스 - '위악의 정치학'
이 영화가 2020년대의 정치와 맞닿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오늘날의 혐오정치는 대개 노골적인 선동의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밈과 농담, 쿨함과 반어, "설마 진심이겠어?"라는 면책의 표정을 하고 온다. 진지함은 촌스럽고, 연민은 위선이며, 공공성은 순진함으로 취급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남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일부러 더럽힘으로써 우월감을 확인하는 태도, 즉 위악이다. 말하자면 위악은 악해지고 싶어서 선택하는 악이 아니라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린 시대가 마지막으로 붙잡는 가짜 생기다.
지미의 세계는 진실을 검증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되는 이미지와 복장, 집단적 호명과 퍼포먼스를 통해 ‘무엇이 사실인가’보다 ‘누가 우리 편인가’를 먼저 결정한다. 현대의 가짜뉴스 역시 그렇다. 가짜뉴스는 단순히 거짓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현실을 견디기 어려운 이들에게 가장 빠르고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의 형태로 불안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진실은 시간이 걸리지만, 신화는 즉시 결속을 준다. 사실은 토론을 요구하지만 음모와 혐오는 즉각적인 적을 제공한다.

대니 보일은 전작 '28년 후'를 두고 홀리 아일랜드의 생존자들이 영국의 과거를 "반쯤 기억된 조각들"과 "오기억된 반쯤의 진실들"로 조합해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애초부터 바로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한번 붕괴된 공동체는 진실 위에 재건되지 않는다. 오히려 폐허 위에서 가장 먼저 복원되는 것은 신화다. 그 신화는 대체로 과거 전체를 기억하는 대신 과거의 상징 몇 개만을 떼어내 현재의 공포와 결합시킨다. 그렇게 기억은 역사적 성찰이 아니라 소속의 장식품이 된다.
지미 집단은 바로 그런 선택적 기억이 극단화된 사례다. 이들이 숭배하는 것은 실제 역사도, 실제 진실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실의 맥락을 잃고 이미지로만 떠도는 잔해들이다. 다코스타의 여러 인터뷰들이 분명히 하듯, 지미 집단은 영국의 방송인 출신 성범죄자 지미 새빌(Jimmy Saville)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캐릭터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빌이라는 개인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한 인물의 공적 이미지를 진실과 분리한 채 소비해왔는가라는 점이다. 권위와 익살, 친숙함과 기괴함이 뒤엉킨 대중문화의 잔상이 폐허 속에서 다시 컬트의 아이콘으로 되살아났다. 이것은 단순한 참조가 아니라 경고다. 사회가 망각 위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부활하는 것은 가장 끔찍한 진실이 아니라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라는 경고.
혐오의 재생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혐오는 어떤 개인의 사적인 감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될 때 비로소 힘을 얻고, 함께 수행될 때 비로소 공동체를 만든다. 모두가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같은 복장을 입고, 같은 폭력의 리듬에 자신을 맞출 때 혐오는 취향이 아니라 소속의 기술이 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소비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일종의 입단 의식이다. 이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단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방식이 된다. 혐오가 곧 정체성이 되는 순간이다. 혐오재생산의 가장 현대적인 방식이란 어쩌면 바로 이런 식으로 악의 역사성 자체를 제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팬데믹 - 망해 버린 세계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는 이 망가진 세계에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지미의 세계가 아니라 켈슨의 세계를 봐야 한다. 지미가 죽음을 흥분과 공연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동안 켈슨은 죽음을 그저 죽은 채로 두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는 죽은 자를 모으고, 뼈를 정리하고, 이름 없는 잔해에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한다. 그의 사원은 죽음의 축제가 아니라 죽음의 종결을 위한 장소다. 다시 말해 그곳은 숭배의 공간이 아니라 애도의 공간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아주 선명하게 노동의 문제로 들어온다. 켈슨은 사상가이기 이전에 노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체를 수습하고, 감염자(삼손)를 관찰하고, 약을 투여하고, 기록하고, 돌본다. 그는 영웅적으로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너진 세계가 완전히 짐승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도록 가장 밑바닥의 일을 한다. 이것은 돌봄 노동이고, 애도 노동이며, 기억 노동이다. 지미의 세계가 생산하지 않고 오직 파괴와 약탈, 연출과 과시로만 결속을 유지한다면 켈슨의 세계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노동을 통해 겨우 유지된다. 영화는 켈슨의 발버둥이 가져온 결과가 희망적일 거라고 확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의 결말을 보건대 보일과 가랜드가 그것의 가능성을 여전히 믿고 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이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자. 팬데믹은 우리에게 단지 바이러스와 면역의 악몽만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타인의 고통을 사적 문제로 축소시키는 습관을 남겼다. 죽음은 숫자가 되었고, 애도는 피로가 되었으며, 공포는 각자도생의 윤리로 번역되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지 감염을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이 여전히 공적 문제라는 사실을 끝까지 붙잡는 일이다. 세계를 다시 살아낸다는 것은 곧 공공성을 다시 발명하는 일이며, 그 공공성의 핵심에는 늘 돌봄과 기억과 교육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을 덧붙이고 나면 켈슨의 사원은 단순한 폐허 속의 종교시설이 아니라 사실상 무너진 공공기관의 잔해 같은 것으로 읽힌다. 병원도, 학교도, 장례 제도도, 복지 체계도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혼자서 의사이자 장의사이자 기록자가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희망은 놀라우리만큼 소박하다. 희망은 총을 더 잘 쏘는 데 있지도 않고, 더 근사한 신화를 만드는 데 있지도 않다. 그저 죽은 자를 죽은 자로 남게 하고 산 자를 다시 인간으로 대하는 법을 잊지 않는 데 있다. 즉 희망은 영웅주의가 아니라 재생산의 윤리에서 온다.
나가며: 역사를 잊은 공동체에게
영화의 결말부에서, 24년 만에 재출연한 '28일 후'의 주연 짐은 딸에게 바이러스 이전의 역사를, 특히 1·2차대전 사이의 역사와 그 참상을 가르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는 "신화"와 "반쯤 기억된 진실"이라는 앞서 언급된 보일의 인터뷰를 생각하면 보다 의미심장해지는 대목이다. 그것은 영웅의 귀환이라기보다는 기억의 귀환에 가깝다. 더는 망각해서는 안 되고, 모두에게 다시금 전해져야 할 기억의 귀환 말이다.

스파이크의 고향인 홀리 아일랜드는 바이러스 이전의 과거와 단절하고 영국 본토로부터도 거리를 둔 채 자신들만의 낙원을 꾸려나가려던 공간으로 묘사된다. 스파이크가 아버지와 첫 출정을 나갈 때 삽입되는 전쟁 푸티지와 잉글랜드의 오랜 국가신화들은 그런 홀리 아일랜드의 유토피아적 '신화'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를 포기하고 과거와 단절한 채 만들어낸 신화적 낙원이 건강하고 대안적인 공동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보일은 실제로 이 새로운 신화의 공동체에 거리감을 두는 투로 인터뷰했고, 그런 왜곡된 신화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사례가 지미 집단과 같은 위악의 공동체로 이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2026년 동시대를 경유해 20세기의 현대사를 은유하는 듯 느껴진다는 점에서 더욱 주의깊게 지켜봐야 하는 대목이다.
짐은 딸에게 1차대전 이후 전범국에게 반성의 기회와 온정을 베풀지 않은 결과가 2차대전이라는 또 다른 참상으로 이어졌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지적한다. 어쩌면 이것이 보일과 가랜드가 2026년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가장 주요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외집단에 대한 배격과 공격성으로 무장한 공동체의 신화를 덜어내고 그 자리에 기억과 애도에 기반한 온정의 정치학을 자리하게 해야 한다는 윤리적 메시지 말이다.
역사가 곧바로 희망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과거를 안다고 해서 인간이 자동으로 더 선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적어도 한 가지를 분명히 말하는 듯하다. 망각 속에는 희망이 없다. 역사를 잊은 공동체는 신화를 만들고, 신화에 기대어 버틴 공동체는 끝내 누군가를 숭배할 것이다. 정치가 숭배의 방식을 띠는 순간 죽음은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신화가 아니라 더 정확한 기억이다. 죽음을 사랑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지 않고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세계는 아마도 거기서만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28년 후: 뼈의 사원
니아 다코스타 감독
랄프 파인스, 잭 오코넬, 알피 윌리엄스 / 109분 / 2026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김노엘
경희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현재 동대학원에서 서양고대후기철학 전공 중.
영화와 문학을 중심으로 한 비평 및 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2020년대 이후의 동시대성을 포착해내기 위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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