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세계의 주인' - 진보한 피해자 재현, 여전한 타자화의 역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은 열여덟 고등학생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주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리거 워닝 없는 '무스포' 마케팅으로 논란이 된 이 영화는 피해자의 위치를 '시혜와 동정의 객체'에서 '평범한 주변인'으로 이동시켰지만, 동시에 여전히 제3자의 관점에서밖에 피해자를 바라볼 수 없게끔 하는 타자화의 역설을 재생산한다.
※ 본 기사에는 영화 《세계의 주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정받는 존재에서 평범한 주변인으로
윤가은 감독이 2019년 작 《우리집》 이후 6년 만에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이주인'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세계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전작 《우리들》, 《우리집》 등을 통해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려온 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다루는 대상을 청소년·성인으로 확장하면서도 '관계 속의 개인'이라는 주제의식을 특유의 세심한 관찰력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열여덟 살 고등학생 이주인의 일상을 천천히 따라간다. 주인의 동네에 살던 아동 성범죄자가 출소해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교회장 '수호'의 주도로 반대 서명운동이 진행된다. 주인도 서명 용지를 받아들지만, 용지 속 '성폭행은 한 인간의 삶을 망가뜨린다...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 같은 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부하고 실랑이를 벌인다. 이 갈등을 따라가며 관객은 점차 주인이 성폭력 피해자일 가능성을 짐작하게 된다.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어디에도 직접적인 범죄 장면이나 이를 암시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주인의 피해 경험은 주인공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 명시되지 않으며, 영화는 가해자의 잔혹함이나 피해자의 고통과 같은 '과거'를 강조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주인에게 시선을 둔다. 이는 기존 한국 영화들이 주로 성폭력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었던 직접적인 강간 묘사와 감정의 극대화와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영화 중반부가 지나며 수호는 문구를 수정했다며 주인에게 다시 서명을 요청하지만, 주인은 자신에게만 수정된 용지가 전달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벌어진 몸싸움은 학부모·교사 면담으로 이어지고, 주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왜 서명 용지에 서명하지 않았는지 설명한다. 본인 역시 성폭력 피해자임을 밝히며 "피해자인 나의 삶은 망가지지 않았다. 함부로 단정짓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영화가 일관되게 취해 온 '피해자의 현재에 집중하는 시선'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처럼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를 고통의 상징으로 고정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린다. 이로써 관객은 주인을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인물로 마주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기존의 피해자 재현을 한 단계 갱신한다.
'무스포'와 스크린 밖의 타자화
'세계의 주인'의 피해자 재현 방식은 그러나 동시에, 정확히 동일한 지점에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한계를 발생시킨다. 영화는 관객에게 끝내 특정한 자리를 요구한다. 의도적으로 주인을 수호, 친구들, 어른들의 시선 - 즉 제3자의 시선 - 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관객은 끝까지 주인이가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주변인'의 자리에 머문다.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의 위치를 '불쌍한 타자'에서 '내 주변의 평범한 사람'으로 이동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관객 자신을 그 서사 안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객의 위치는 영화 외부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스포일러'에 대한 범사회적 지탄 분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세계의 주인'은 배급 단계에서부터 감독이 직접 나서 '무(無)스포'를 강조한 작품이다. 윤가은 감독은 언론과 배급 관계자들에게 주인의 과거를 가급적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손편지를 전달했고, 개봉 후 관객들 사이에서도 스포일러를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이 주인을 먼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길 바랐다고 밝혔다.

그러나 성폭력을 다루는 영화에서 이와 같은 전략은 결코 유효하지 않고,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를 철저히 타자화하고 선을 긋는 것에 다름아니다. 오늘날 많은 컨텐츠들이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 해당 소재에 대해 트라우마를 갖는 관객이 있을 수 있음을 사전에 알리는 장치: 편집부)을 제공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콘텐츠에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리는 것은 혹시 모를 관객의 정서적 안전과 선택권을 존중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그럼에도 '세계의 주인'은 '반전의 효과'를 위해,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진지해 보이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관객들에게 관람을 권하고 나아가 '무스포'를 미덕처럼 홍보하는 마케팅 전략을 취한다.
영화에서 '반전'처럼 기능하는 주인이의 피해 경험은, 누군가에게는 실제로 겪은 사건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현실이다. 성폭력은 서사의 장치나 반전의 요소로 간편히 소비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이 영화의 주제와 내용을 밝히지 않고 사전정보 없이 관람을 권장하는 것은 이 영화를 어떤 경로로든 보게 될지 모르는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다. 더 나아가, 애초에 피해당사자뿐 아니라 모든 관객은 사전에 제공되는 정보에 따라 관람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실제로 영화의 높은 별점과 유명인들의 추천사, 화려한 수상경력을 걷어내고 보면, 영화에 대한 당사자들의 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상업적인 재미를 위한 요소를 배치해 놓고, 그 설정을 비판할 수 없는 요소를 함께 배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평가를 어렵게 한다. 감독의 명성·쉽게 반대할 수 없는 주제·평단의 극찬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이 영화를 비판하고 감상을 말하기란 어려워지고, 결국 자신을 보호하고 발언의 신빙성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피해 경험을 먼저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고백을 하게 만드는 이 상황은 피해자들을 다시 한 번 영화 속 주인이의 자리에 세운다.


물론 성폭력 피해를 다룬 영화를 반드시 피해 당사자만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 말하기가 관객에게 '어떤 위치를 요구하는가'이다.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를 고통의 상징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관객을 끝내 안전한 거리 밖으로 끌어내는 데에는 주저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철저히 분리된다. 마치 자신들은 처음부터 이 영화의 관객으로 고려된 대상이 아니었다는 듯이.
이해를 넘어 연대에 이르도록
결국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피해를 철저히 남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주인이를 기꺼이 '가여워하거나' '대견히 여길' 수 있고, 심지어는 그의 용기에 '감동'마저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로 보인다. 영화 속 수호의 서명운동이 선의에서 출발했듯, 이 영화 역시 분명히 선의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선의로 시작된 수호의 서명운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영화 속에서 확인했다면, 영화 바깥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의로 만들어진 작품 역시 누군가에겐 그 자체로 기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무스포'를 강조하는 영화의 홍보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의 개봉 이후 영화를 매개로 성폭력과 관련한 공론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시점임에도, 사람들은 '무스포'와 '다음 관객에 대한 배려'라는 명목 아래 토론을 유예한다. 이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의 주인'은 현실의 주인이가 아닌, 침묵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수호가 된다. 영화는 작품 안팎으로 관객에게 불편함을 요청하기보다 이해와 감동이라는 안전한 출구를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현재는 존중되는 동시에 관객이 직접 감당해야 할 윤리적 책임에서는 분리되며 타자화된다.

피해를 다루는 영화라고 해서 고통을 과시할 필요도, 침묵으로 보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통이 관객에게 단순히 '반전'이나 '깨달음의 장치'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하는 윤리적 상상력은 필요하다. '세계의 주인'은 토론의 여지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가 던진 질문이 서사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람의 조건과 말해지는 방식, 그리고 침묵과 발화의 구조까지 확장될 수 있다면, 그 때 이 영화는 비로소 하나의 완결된 윤리적 시도가 될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옆에 서는 일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서수빈, 장혜진, 김정식 / 119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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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진
전환 회원, 전 정의당 청소년위원장.
한국 영화가 망했다는 사람들에게 《장손》부터 보고 오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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