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주토피아 2 리뷰: 알레고리의 진화가 거둔 작은 승리
디즈니의 '가장 정치적인 프랜차이즈' 주토피아의 2편이 개봉했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었던 1편의 그것에 비해, <주토피아 2>의 알레고리는 식민주의 역사의 은폐와 그에 맞선 연대로 진화했다.
※ 본 기사에는 영화 <주토피아 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토피아 1, 알레고리의 실패가 혐오를 은폐하다
<주토피아>는 디즈니 프랜차이즈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다. 물론 그간 디즈니-픽사의 다른 많은 작품들 역시 소수자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담아내며 혁신적인 시도를 해 왔다. <엔칸토>는 세대 간 트라우마와 라틴 가족 문화를, <코코>는 멕시코의 죽음 문화인 디아 데 무에르토스(Día de los Muertos)를, <모아나>는 서구 식민화 이후 단절되었던 폴리네시아 항해 문화의 복원을 중심에 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에스닉(ethnic)한 재현과 문화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면, 주토피아는 직접적으로 현실 사회를 모방하고 비유를 넘어 구조를 폭로하는 데 중점을 둔 정치적 작품이었다. 엔칸토가 콜롬비아 가정의 내밀한 상처를 다루고 코코가 멕시코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라면, 주토피아는 처음부터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런 지점에서 새롭게 개봉한 <주토피아 2>는 전작보다 더 직설적이고, 직접적이며, 원활한 알레고리(allegory)를 채용함으로써 성공했다. 전작이 스피시시즘(speciesism, 종차별주의)과 레이시즘(racism, 인종차별주의)의 엉성한 비교였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하게 식민주의(colonialism)에 초점을 맞췄다. 1편이 종 간의 본질적인 차이에 기반해 실패한 알레고리였다면, 2편은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불평등에 초점을 맞춰 비판의 지점을 근본적으로 옮겼다.
주토피아 1편의 중심 주제는 인종주의였다. '여우는 영악하고, 토끼는 멍청하다'는 편견, '여우 퇴치 스프레이'가 버젓이 판매되는 사회. 어린 시절 닉 와일드의 스카우트 입단식에서 입마개가 강제로 씌워지는 장면은 흑인 남성에 대한 범죄자 낙인을 떠올리게 하고, 경찰이 되겠다는 주디 홉스의 꿈이 비웃음당하는 장면은 유리천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같은 종 내의 사회적 구성물에 대한 차별이라는 점에서, 포식자와 피식자의 역학 관계를 중심에 둔 1편의 알레고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인종(race)은 생물학적 실체로만 규정할 수 없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범주다. 현실에서 피부색의 차이는 신체적 능력이나 성향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토피아 세계에서 사자와 토끼의 차이, 포식자와 피식자의 차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차이다.


그러나 이런 엉성하고 이중적인 알레고리 형성 시도에 대한 가장 큰 비판점은, 실재하는 인종주의의 문제를 '종적 차이'로 전환해 버리면서 이들(포식자/흑인 등)의 위험성은 실존하고 이것을 개인적·시스템적 차원에서 억압하는 것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메세지로 전유되기 쉽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표현된 것처럼 맹수들의 잠재된 본능이 실제로 위협이 되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설정, 초식동물들이 먼저 문명을 이루고 포식자를 평화로운 문화에 길들였다는 서사는 직접적으로 식민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담론이다. 이는 '그들은 원래 야만적이었고, 우리가 문명화시켰다'는 제국주의의 오래된 정당화 논리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이런 류의 비판은 주토피아 1편의 상영 직후부터 제기되었고, 한국에서도 이런 문제는 (인종 문제는 아니었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지난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 현장에는 한 남성이 주토피아에서 영감을 받고 핑크색 코끼리 탈을 쓴 채 나타난 이른바 '핑크코끼리' 사건이 있었다.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거'라는 핑크코끼리의 구호는 일견 옳아 보이지만, 뿌리깊은 여성혐오와 여성살해의 구조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동물 알레고리를 통해 차별을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본래의 맥락을 흐리고 탈정치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진보적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1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깊이 다뤄진 바 있다.


한편 버디 캅(buddy cop)이라는 장르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진다. 여우와 토끼의 알레고리는 백인 경찰과 흑인 범죄자 출신 경찰의 조합처럼 읽힌다. 198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했던 <48시간>(1982)이나 <리썰 웨폰>(1987) 시리즈 같은, 인종적 편견이 아직 농담처럼 소비될 수 있었던 시절의 장르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이 장르에서 흑인 캐릭터는 종종 거칠고 규칙을 어기는 인물로, 백인 캐릭터는 얌전하고 규범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둘의 충돌과 화해가 서사의 중심이 된다. 주디와 닉의 첫 만남도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주디는 닉의 영악함에 속아 그가 범죄자가 아닐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그는 사기꾼임이 밝혀진다. 이 캐릭터들이 토끼와 여우여서 귀엽게 보이지, 만약 이 장면을 흑인 배우와 백인 배우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2016년에 그런 영화가 나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히려 인간계에서 동물 세계로의 치환은 영화로 하여금 이 비판 - 아마도 주토피아 1편에 대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비판 - 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게 만들었다. 관객들은 피상적인 메시지, 즉 편견을 극복하고 인종차별을 극복해나가는 개개인의 서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Anyone can be anything)'라는 주토피아 1편의 대표 슬로건은 구조적 차별보다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로 쉽게 전유된다.
물론 여기에 주디의 개인 서사('초식동물은 경찰이 될 수 없어')와 같이 복잡한 층위가 겹쳐지면서, 주토피아 1편의 서사를 단순히 보수적이고 엉성한 알레고리라고만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디 역시 토끼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작은 체구 때문에 무시당하며, 여성 경찰관으로서의 어려움까지 암시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작품 전체의 알레고리 구조와 내재적 서사를 교차 배치하면서 만들어낸 또 다른 엉성함이다. 피식자가 포식자를 순치시켰다는 세계관에서, 정작 피식자인 주디는 어디선가 또 차별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 것인가? 포식자가 피식자를? 피식자가 포식자를? 이 혼란 속에서는 그 어떤 명확한 차별의 구조도 흐려지고 은폐되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의 문제에서 구조와 역사로

주토피아 2의 시작은 1편의 마지막 장면, 경찰학교를 졸업하는 닉의 모습에서 이어진다. 주디와 닉은 이제 절친한 친구를 넘어 공식적인 경찰 파트너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전작에서 '덤 버니(dumb bunny, 멍청한 토끼)'라고 불리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던 주디는 여전히 온갖 열정을 다해 '토큰 버니(token bunny)' - 다양성을 위한 상징적 존재 - 를 넘어서려 한다. 여기에 2편에서 새롭게 추가된 설정은 여우인 닉이 본래 '단독생활 동물(solitary animal)'이라는 것이다. 원래 혼자 사는 것이 본성인 종으로서, 파트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자체가 낯설고 불편하다. 그래서 주디에게 마음을 열면서도 계속 그런 자신을 비꼬거나 거리를 두려 한다. 이 설정은 단순한 캐릭터 특성을 넘어 '연대와 파트너십'이라는 2편의 핵심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런 갈등은 작중의 핵심 사건인 '기후장벽 개발일지'를 지키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표출된다. 기후장벽은 주토피아를 다양한 기후대로 나누어 모든 종이 살 수 있게 만든 핵심 기술이다. 이 기술의 원천이 담긴 개발일지를 둘러싼 음모가 2편의 중심 플롯이다. 100년 전 실제 개발자였던 아그네스 드 스네이크에게서 특허권을 빼앗고 스스로 기후장벽과 주토피아 건설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한 에버니저 링슬리와 링슬리 가문. 아그네스의 증손자인 게리 드 스네이크는 파충류가 소개(evacuated)된 주토피아에 밀입국해 증조할머니의 명예를 되찾고 가족들을 다시 주토피아로 데려올 수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개발일지를 훔치게 된다. 주디와 닉은 개발일지를 둘러싼 이 음모를 모두 알게 되지만, 링슬리 가문에 의해 경찰서장 살해미수 의혹을 받고 수배령이 내려진다. 고난과 역경 끝에 둘은 진실을 담은 기후장벽 특허 원본의 위치를 알게 되고, 링슬리 가문과 배신자였던 포버트 링슬리를 잡게 된다.
기본적으로 서사의 중심은 주디와 닉의 파트너 관계에 맞춰진다. 둘이 파트너 상담을 받는 장면은 아마 영화 전체에서 가장 웃기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일 것이다. 상담실에는 다른 경찰 파트너들도 와 있다. 코끼리와 쥐 파트너는 오래된 농담(코끼리는 쥐를 무서워한다)을 재현하고, 벌꿀오소리와 사슴 파트너는 사슴의 미소를 공격으로 인식하는 오소리의 과격한 반응으로 인해 안전단어(safe word)까지 만들어야 하는 지경이다. 작중 경찰서에서 합이 좋은 파트너들은 대부분 같은 종끼리 맺어진 파트너다. 멧돼지 파트너, 숫양 파트너, 얼룩말 파트너(물론 이 얼룩말 파트너에게는 마지막에 반전이 있다). 이런 대비는 1편의 문제의식 - 서로 다른 종이 함께 일할 수 있는가 - 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개인의 노력이 아닌 관계의 문제로 재설정한다.

1편에서 '여우가 토끼를 잡아먹지 않고 함께 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개인 단위의 편견 극복 서사로 귀결되었다. 닉이 '좋은 여우'임을 증명하고, 주디가 편견을 버리면 된다는 식이었다. 2편은 이 질문을 파트너십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함께 일하는 것은 단순히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보완하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토피아 2의 진짜 핵심 주제의식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주토피아에서 추방되고 쫓겨났던 파충류, 특히 뱀을 등장시키면서 아예 다른 구조를 열어가는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인 게리 드 스네이크의 등장과 함께 주토피아 2는 1편과 완전히 다른 지평을 연다. 그의 서사는 미국 역사의 정착민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와 추방을 그대로 빼닮았다.
작중에서 밝혀지는 역사는 이렇다. 기후장벽 기술은 원래 파충류 과학자가 개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포유류 중심의 주토피아 사회는 이 기술을 빼앗고 파충류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그들의 기여는 역사에서 지워졌고 링슬리 가문은 기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부터 원주민 강제이주법(Indian Removal Act, 1830), 그리고 1921년 툴사 인종 학살(Tulsa Race Massacre)에서 번영하던 흑인 커뮤니티 '블랙 월스트리트(Black Wall Street)'가 파괴되고 그 역사가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것까지, 미국 역사의 어두운 장들을 명확하게 연상시킨다.
게리 드 스네이크의 서사는 또한 분명한 이민자 서사다.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설정상 다수의 뱀들은 먼 대륙으로 떠났지만, 주토피아에 숨어 사는 파충류도 존재한다. 파충류 커뮤니티가 도시가 아닌 난파선에 숨어 살며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하는 모습은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구역 혹은 미국 대도시 지하경제에서 살아가는 비등록 이민자 커뮤니티를 떠올리게 한다. 도시의 화려함 아래 숨겨진 지하 세계에서 파충류 커뮤니티가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미국 대도시 지하경제에서 살아가는 비등록 이민자 커뮤니티를 떠올리게 한다.
캐릭터의 성우 캐스팅도 의미심장하다. 키 호이 콴(Ke Huy Quan).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배우다. 베트남 전쟁 난민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인디아나 존스>와 <구니스>에서 활약했지만 아시아계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사라져 있었다. 20년 만의 복귀작에서 그가 연기한 것은 평행우주를 넘나들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이민자 가장이었다. 디즈니가 이 배우를 추방당한 파충류 캐릭터의 목소리로 캐스팅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디즈니식 왕도 서사, 반식민주의와 연대를 입다
네이티브 아메리칸 원주민의 추방 서사와 아시안 이민자의 비가시화 서사. 이 두 가지를 겹쳐 놓으면서, 주토피아 2는 이제 종적 차이가 아니라 시스템적 착취와 식민주의에 대한 정직한 비판을 서사의 중심 구조로 가져간다. 1편에서 문제가 되었던 '그들은 원래 위험하다'는 본질주의적 논리는 사라지고, '그들은 착취당하고 추방당했다'는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분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듯 알레고리의 구조는 2편이 명확하게 가져갔지만, 반전이라는 내러티브 관점에서는 다소 아쉬운 지점도 확인된다. 1편과 2편 모두 처음에 등장한 조력자 캐릭터가 결국 빌런으로 드러나는 반전 구조를 사용한다. 1편에서는 벨웨더 부시장이, 2편에서는 링슬리 가문의 포버트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2편의 이 반전이 더 작위적이고 엉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포버트의 문제는 그의 동기와 행동이 서사적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입으로 "가족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동기를 대놓고 설명한다. 영화 서사에서 이렇게 직접적인 동기 설명은 보통 복선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그가 게리를 독으로 해치려 할 때, 그와 파트너였던 게리의 관계는 갑자기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둘의 파트너십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포버트의 배신이 게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포버트의 대사와 행동으로만 급하게 처리된다.
가장 어색한 장면은 방금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던 포버트가 갑자기 닉에게 "(시스템에 맞서려고) 죽기를 각오할 필요까지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대사는 2편의 핵심 주제 - 시스템적 억압에 맞서는 연대 - 를 담아내려는 의도가 너무 명확하게 보인다. 캐릭터의 입이 아니라 각본가의 입에서 나온 대사처럼 들린다. 주디-닉의 파트너 관계에 대한 대립항으로 게리 드 스네이크-포버트를 배치한 것은 좋은 구조적 선택이었다. 성공한 파트너십과 실패한 파트너십의 대비. 하지만 이 대비가 포버트의 빌런 반전으로만 해소되는 것은 예측 가능했고, 그 반전이 작품 내 포버트의 발언이나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암시되기보다는 주인공 버디와의 구조적 대조를 통해 역산해야 읽히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작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한계들조차 1편보다는 훨씬 발전한 결과다. 2편은 1편의 서사였던 종적 편견에 굴복하거나 도전을 포기한 사례들(시스템에 짓눌려 꿈을 포기했던 닉, 그리고 2편에서 결국 시스템의 논리를 내면화한 포버트)을 끝끝내 극복해 버리는 영웅적 서사를 켜켜이 쌓는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의 폭력성을 계속 강조하며, 적어도 작품 내적으로는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를 완성한다. 끝까지 가족의 인정과 시스템 내 성공을 좇았던 포버트는 몰락한다. 교활하고, 폭력적이고, 역사를 은폐하는 링슬리 가문의 논리를 받아들인 대가다. 반면 각자의 본성과 성향을 넘어 파트너로서 서로를 이해하기로 선택한 주디와 닉은 완벽한 케미를 보이며 다시 한번 주토피아를 구해낸다. 디즈니식 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그 영웅주의가 두 편에 걸쳐 이만큼 사랑스럽게 구현된 경우는 잘 없다. 만화적 상상력의 승리일 것이다.
디즈니는 주토피아 2를 통해 디즈니적인 왕도 서사를 유지하면서도 1편의 엉성한 알레고리를 명확하게 보완했다. 네이티브 아메리칸과 아시안을 연상시키는 추방자·이민자 그룹을 등장시켜 반식민주의 서사를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훨씬 더 성공한 정치 만화를 만들어냈다. 1편에서 실패했던 '본질적 공존'의 은유 - 서로 다른 종이 본성을 억누르고 함께 살아간다 - 는 2편에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불평등에 맞서는 이성적 행동자들의 연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본성의 억압이 아니라 역사적 부정의를 인식하고 바로잡으려는 공동의 노력이라는 것. 주디와 닉의 파트너십은 이제 단순한 종 간 화해의 상징이 아니라, 역사를 은폐하고 억압하는 시스템에 맞서는 연대의 모델이 된다.
주토피아 2가 1편에서 시작한 현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미비했던 점을 영리하게 보완했다는 점에서 이 프랜차이즈의 생명력은 박수를 받을 가치가 있다. 많은 속편이 전작의 성공을 소비하기에 급급한 것과 달리, 주토피아 2는 전작에 대한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정치적 서사를 구축하려 시도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트럼프 2기 시대에 이 영화가 제작되고 개봉했다는 사실이다. 이민자 추방 정책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다양성에 대한 백래시가 거세지는 시기에, 디즈니의 가장 정치적인 프랜차이즈가 반식민주의와 이민자 연대의 서사를 전면에 들고 나왔다는 것. 거기에서 어떤 작은 승리를 읽어내고 싶다.


주토피아 2
재러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감독
지니퍼 굿윈, 제이슨 베이트먼, 키호이콴 / 108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최상희
현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전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지역운동, 지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참고문헌
- Goffe, Nadira. "Zootopia 2 Is Totally About Colonialism." Slate, November 26, 2025. https://slate.com/culture/2025/11/zootopia-2-disney-movie-reviews-box-office-colonialism.html
- Troughton, John. "'Zootopia 2' Did This Better Than 'Zootopia'." MovieWeb, December 2025. https://movieweb.com/zootopia-sequel-improved-important-allegory/
각주
- 비마이너, '핑크코끼리'와 '주토피아'가 공유하는 혐오의 사상, 사회진화론적 문명사관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98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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