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 2025년 11월호 민주노총 30주년 기념 노동운동 특집>
[씨네도모] 잊혀진 항쟁, 사북노동항쟁: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을 보고
얼마 전 다큐멘터리 <사북 1980>이 조용하게 개봉했다. 정선군 사북읍 탄광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이었던 사북항쟁은 어떻게 일어났고, 왜 잊혀졌는가? 민주노총 30주년을 맞은 오늘날, 마땅히 누려야 할 운동의 성취조차 누리지 못하고 역사의 저편에 잊혀진 1980년 4월의 사북항쟁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본래 이번 호 도모에서 필자는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리뷰를 쓰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전 필자가 일하는 창원에서 가톨릭여성회관, 민변 경남지부 등의 공동주최로 열린 본 영화의 상영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어쨌든 이미 많은 사람이 본(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봐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얹기보다는 개봉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이 영화의 리뷰가 지금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큐멘터리, <사북 1980> 이야기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1980년대 강원도 정선군 사북 지역에서 '사북사건' 혹은 '사북항쟁'이라고 불리는 탄광 노동자들의 항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노조 위원장의 아내에 대한 린치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사실 이 정도로만 알고 있더라도 소위 '운동권' 내에서조차 사북항쟁에 대해서는 손꼽히게 많이 알고 있는 편일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귀찮음과 싸우며 상영회에 참석하게 된 계기였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그 때 왜 싸웠고, 왜 잊혔나.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 사북항쟁에 대해 잘 모르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전반부를 사북노동항쟁이라는 사건의 소개에 초점을 맞춰 풀어낸다.
사북에서 일어났던 일을 아시나요?
강원도 정선군, 현재는 강원랜드 카지노가 들어서 있는 곳은 과거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사택이 위치한 곳이었다. 현재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광산은 폐광된 상태이지만 과거 강원도 남부에서 경상북도 북부, 충청북도 동부로 이어지는 지역은 남한 최대의 탄광 밀집지대이자 탄광 노동자 밀집지대였고, 특히 정선군 사북읍 일대는 그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한국 최대의 사유 광산인 사북탄광이 존재했고, 1980년대 사북읍의 인구는 5만 명에 달했다.
탄광의 입지 상 사북탄광 노동자들과 그 가족까지 만 단위의 인구가 거주하던 사북탄광의 사택은 시가지와 격리된 곳에 늘어서 있었다. 시가지와 격리된 사택 지역은 주택의 소유부터 생필품의 관리, 목욕탕 운영까지 모든 것을 사북탄광의 관리사인 동원탄좌가 독점하고 있어 회사 소유의 작은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이 사택에서의 생활은 회사가 노동자들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착취하는 도구였다. 사택은 날림으로 지어져 춥디추운 강원도 산골의 겨울을 이겨내기 어려웠고, 집 안에는 화장실조차 없었다. 사택 지역의 쌀장수는 회사 사장의 친인척이었고, 유일한 생필품 공급자인 소비조합도 독점의 지위를 이용해 폭리를 취했다. 사택 지역에서는 사장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암행독찰'이 상시 돌아다니며 직원과 직원 가족들을 감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환경이 좋았을 리 없다. 탄광은 본래 힘들고 열악한 환경으로 유명하지만, 당시 한국의 탄광은 한층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 일하다 사망한 탄광 노동자들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수치만 매년 200명을 웃돌았다. 3~4일에 2명꼴로 사망한 것이고, 은폐된 사고까지 포함하면 더 심했을 것이다. 당시 탄광 노동자들의 산재 소식은 수십 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대형재해가 아니고서는 기삿거리도 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위해 싸워야 할 사북탄광의 노동조합은 당시 대부분의 노조가 그랬던 것처럼 어용노조였다. 노조위원장은 불과 29명 대의원의 간선으로 뽑혔고, 회사는 대의원들을 포섭하여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사람을 위원장으로 세웠다.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그랬던 것처럼, 열악한 상황에 분노하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모아내고 투쟁할 '노조의 민주화'라는 의제로 모여들었다.
<1980 사북>의 이야기는 부마항쟁 등 민주화운동이 격화되는 와중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그로 인해 정국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며 독재 체제가 균열을 보이고 있던 1979년 말 시작한다. 당시 사북탄광의 노조위원장 선거에는 이원갑이라는 노동자가 대안 후보로 출마했다. 비록 간선제 선거에서 기존 노조위원장이었던 이재기에 밀려 낙선하였지만, 이 선거는 노조위원장 직선제 운동이 급속도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북탄광의 조합원들은 수천 명의 연서명을 조직해 전국광산노동조합에 항의했고, 결국 선거를 무효화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회사는 노조위원장 직무대리로 기존 위원장을 임명하는 꼼수를 부리며 조합원들의 요구를 좌절시켰고, 그렇게 임명된 이재기 위원장은 1980년 임금협상에서 40% 임금인상을 요구하라는 전국광산노조의 가이드라인에도 불구하고 회사와 20% 인상 안을 합의해 버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노조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위원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정도였던 시위는 곧 경찰의 집회 불허로 인해 더욱 격화되었다. 그러다 1980년 4월 21일, 노동자들의 항의를 채증하던 사복경찰이 조합원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지프차로 조합원들을 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같은 처지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만이 외부와 격리된 채 모여 살던 환경은 순식간에 노동자들의 분노를 한 지역을 장악하는 항쟁으로 바꿔 놓았고, 노동자들은 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관들을 사북 밖으로 몰아낸 뒤 식량을 풀고 밥을 나누어먹었다. 회사의 왕국이었던 사북의 사택 지역은 단숨에 노동자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승리한 노동자들, 그러나
당시 사북의 탄광 지역 및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읍내와는 태백선 철도에 의해 분리되어 있었으며, 사북 읍내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태백선 철로 밑으로 뚫린 '안경다리'라 불리는 굴다리뿐이었다. 다시 말해 사북탄광은 공성전에 최적화되어 있는 지형이었다. 항쟁 2일차인 1980년 4월 22일, 사북탄광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안경다리를 통해 진입해 항쟁을 진압하려는 347명의 경찰을 상대로 투석전을 벌여 완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고, 이는 전국적인 이슈가 되며 당시 권력을 장악해나가고 있던 전두환 계엄사령부의 이목을 사북으로 집중시켰다.


계엄사는 4월 25일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학살을 시작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으나, 작전 시작 불과 몇 시간 전 강원도청이 주도한 노사정 협상이 타결되며 군부대 투입은 무산되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킨 사북의 탄광 노동자들은 승리한 듯 보였다. 하지만 전두환을 필두로 한 계엄사는 노동자들에게 승리의 경험을 남기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형사 처벌을 자제하겠다는 노사정 협상에서의 합의를 어기고, 사건 종결 직후부터 노동자들에 대한 피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우선 계엄사는 수습 대책을 논의하자며 십여 명의 민주노조 지도부를 불러낸 뒤 폭력적으로 연행하였고, 그다음에는 백 명 이상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밤 사이 납치하는 방식으로 끌고 갔다. 이후에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연행된 노동자와 가족들에 대한 잔혹한 고문이 벌어졌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당시 사북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여성들에게는 성폭력을 포함한 성고문까지도 행해졌다는 것이다. 당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은 여성억압적·가부장적이던 당대 사회 속에서 민주화 이후까지도 한동안 그 피해를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 채 한층 더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은 이와 같이 노동자들에게 격렬한 고문을 가하며 사북항쟁과 당시 서울의 봄으로 격화된 민주화운동 간의 연계성을 만들어 '반국가세력'으로 몰아가고자 노력했고, 특히 전라도 출신 노동자에게는 한층 더 가혹한 고문을 가하며 당시 계엄사가 내란 혐의를 씌우려고 노력하고 있던 김대중과의 관계를 조작하고자 했다. 그리고 4월 25일 사북에 투입되지 않은 공수부대는 그로부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북 대신 광주에 투입되었다.
사북노동항쟁의 기억
영화의 전반부가 사북노동항쟁이 무엇이고 그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후반부는 그 때의 국가폭력이 이후 당사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와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하기 위한 오늘날의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당시 고문을 당했던 다양한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고문을 비롯한 국가폭력이 무엇보다도 그 상흔을 오래 남긴다는 것을 말한다. 필자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인터뷰는 그 당시 부모 모두가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한 남성의 인터뷰였는데, 사북항쟁으로 잡혀 갔다 돌아온 이후의 아버지는 과거의 다정함을 잃고 폭력적으로 변해 함께 고문을 받았던 어머니와 자신에게까지 가정폭력을 가하는 가해자가 되어 가족 모두를 망가뜨렸다는 것을 진술했다. 그의 진술은 세대를 타고 넘어오는 국가폭력의 상흔과, 그 과정에서 이중의 폭력을 경험해야 했던 여성 피해자들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다. 바로 어쩌면 사북항쟁 자체보다 더 유명할 수도 있는 '노조위원장 아내 린치 사건'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사북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어용 노조위원장이었고, 당연히 항쟁 당시 분노는 노조위원장에게로 모였다. 그러나 당시 오랜 기간 어용 노조위원장으로 있었던 이재기는 항쟁의 발발과 동시에 빠르게 도피해 버렸고, 노조위원장을 잡으러 그의 집으로 간 노동자들이 마주한 건 위원장의 아내뿐이었다. 분노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노조위원장의 아내를 끌어내 광업소 정문 앞 전봇대 기둥에 묶어 두고 폭행과 성추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찍힌 것이 바로 무척 유명한 아래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당시 계엄사의 언론 통제 아래에 있었던 언론들에 의해 대서특필되며 사북항쟁의 상징적 이미지로 굳어진다. 정부는 이를 통해 이 사건의 이미지를 '무고하고 연약한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무도하고 폭력적인 남성 광부들'로 만들어냈고, 사북에 대한 폭력적 대응을 정당화했다. 탄광 노동자들과 항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 역시 이 사건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이루어졌고, 뿐만 아니라 사북항쟁 참여자에 대한 민주유공자 지정 과정에서 노조위원장 아내와 그 가족들은 이들의 유공자 지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여전히 이 사건을 둘러싼 갈등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어용 노조위원장에 대한 분노는 정당했으나 그의 잘못은 아내의 잘못이 아니었고, 결국 노조위원장의 아내도 열악한 사택 지역에서 함께 살던 이웃이었다. 그런 그가 표적이 된 것은 당시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사측 사람들이 이미 다 도망간 뒤 남은, 도망갈 수 없을 만큼 약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여성'이었다는 점 역시도 부정할 수 없다. 린치 과정에서 벌어졌던 성추행은 이를 증명한다.
영화는 사북항쟁을 다루면서 빠질 수 없는 이 사건을 피하지 않는다. 노조위원장 부부의 자식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당시 노동자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역시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는다. 당시 국가는 이 사건을 폭력의 명분으로만 소비했기에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가두어 고문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실제 노조위원장 아내에게 폭행과 성추행을 가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노조위원장에게 린치를 가한 일이 옳았는지에 대한, 그리고 당사자들의 집단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고문과 그 후유증 속에서 설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카메라는 국가폭력으로 인해 더욱 제대로 된 반성과 화해가 어려워진 상황까지 담담하게 담은 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사북항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에게 직설적으로 질문한다. "무슨 말인지는 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국가도 자본도 아니고 언제까지 노조위원장 가족들과 싸우실 건가요?"
영화는 어느 겨울날 사북항쟁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노조위원장 출마자 이원갑이 이미 사망한 노조위원장 아내와 그 아들들에게 사과의 뜻을 담은 긴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편지가 진짜 전해졌을지, 편지를 받은 가족들이 어떤 반응이었는지까지 이 영화는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사북항쟁을 비롯한 항쟁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확장시킨다. 항쟁의 과정 속에 떳떳한 일만 있던 것은 아니고 과오도 존재했으며, 그 과오까지 받아안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페미니즘과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의 평가까지 수용할 때 비로소 항쟁은 항쟁으로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잊혀진 항쟁, 사북노동항쟁
영화가 끝난 뒤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나온 질문 중 하나는 '대체 이런 큰 규모의 노동항쟁이 왜 이렇게 안 알려져 있을까'였다. 감독의 답변과 별개로, 그 이유는 어쩌면 사북도 탄광 노동도 그 이후 너무나 쇠퇴하며 기억이 고립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독재 치하의 수많은 다른 항쟁의 역사들이 민주화 이후 당사자들과 지역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운동으로 기억되며 재평가되었던 반면, 사북과 탄광노동자들은 민주화 이전인 1986년부터 시작된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빠르게 쇠락해 갔다. 민주화 이후 지역도 산별노조도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할 동력 자체를 가질 수 없었다.
사북항쟁 이후 사북 지역이 다시 불타올랐던 것은 1995년, 폐광지역 생존 대책을 요구한 3.3 투쟁이었다. 해당 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내 유일의 합법적 카지노인 강원랜드였고, 과거 탄광노동자들의 사택이 있던 곳은 카지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카지노도 노동자가 사라진 지역 경제를 어찌해 주지는 못했다. 항쟁 당시 5만 명을 넘겼던 사북읍의 인구는 현재 4천 명에 불과하다. 사북항쟁 당시의 사북읍 주민들과 그 후손들은 대부분 이제 사북을 떠나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독재권력의 폭력 속에서도 계속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 노동운동이 한국전쟁과 1987년 노동자대투쟁 사이에 가장 크게 폭발했던 노동항쟁이었다. 사북항쟁은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고통받고 감시받으면서도 언제든지 새 시대의 주인이 될 가능성을 분출할 준비가 되어 있던 한국의 노동계급, 특히 언제나, 어디서나 특유의 활동력을 보여 준 탄광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과시한 사건이었으며, 비슷한 시기의 광주민중항쟁과 함께 군부독재를 이어가고자 했던 신군부의 폭력에 의해 민중의 열망이 좌절되었던 1980년의 아픔이었다.
올해는 민주노총 창립 30주년을 맞는 해다.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소멸 직전까지 몰렸던 한국 노동계급의 역동성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아 축적되어 갔고, 그렇게 쌓인 에너지는 민주화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했다. 그 때 폭발했던 에너지와 착실히 쌓아올려진 역량은 1995년 한국 노동계급의 대표 조직인 민주노총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30년, 비록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민주노총과 그로 대표되는 한국의 노동계급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주체가 되었고 수십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풍요와 복지가 갖추어진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보면 수많은 고민과 과제들을 잠깐 잊고 기쁘게 이 30주년을 축하할 만도 하다.
하지만 모든 한국 노동계급이 운동의 성취를 누릴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산업과 지역의 노동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성과를 누리기도 전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 이어지는 데 성공한 노동계급의 역사를 기념하며, 현재로 이어지지 못하였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상영관이 많지는 않아 기회를 찾기 어렵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기억들이 이 영화에는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80 사북
박봉남 감독
다큐멘터리, 128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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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근 (목성돼지)
전환 회원, 도모 기관지편집위원회 편집위원.
어쩌면? 전 청소년활동가이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급진적 정치를 고민하는 말 많은 성소수자.
사회주의를 목적하고, 귀여움을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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