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청소년활동가가 바라본 '교복 논란': 교복이 있는 학교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교복 등골 브레이커'를 언급하며 교복 가격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은 학생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교복이라는 제도 자체, 그리고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일상화하는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피해 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교복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청소년 활동가 성령의 글을 게재한다.
교복이라는 제도 자체가 문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내 이야기부터 하려 한다. 나는 2024년 12월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에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 생활이 기대된다며 나에게 이야기했지만 난 중학교에 가는 게 싫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가 싫었던 이유는 빡빡한 학교 규칙과 '교복' 때문이었다. 교복이 입기 싫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보다 '청소년 인권운동'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접했고. 지음의 채움활동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나의 첫 인권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중학교 졸업을 앞에 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난 교복을 입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시작한 활동을 통해 학교 안에서 많은 걸 바꿀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특히 교복 문제에 더 예민하다. 내가 청소년 운동을 하게 만든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최근 이재명 정부의 교복에 관련된 입장은 참기 어려운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지난 2월 12일, 이재명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교복 구입비가 60만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부모들이 '등골 브레이커'라고 얘기하기도 한다"며 대처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1 이 말 한 마디로 교육부는 전국 5,700여 개 중·고등학교의 교복 가격 조사를 시작했고, 일선 학교들은 앞다투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정말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바로 특정한 옷의 형태를 정하여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교복'이라는 제도 자체가 문제라는 점이다.
물론 대통령의 말 몇 마디로 한동안 사그라들었던 교복에 관한 토론에 언론과 교육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이번 발언은 이슈화에는 성공했을지언정,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 대통령은 교복값이 비싸니 업체에 맡기지 말고, 협동조합 형태로 만들어 국내 일자리에도 도움을 주자고 제안했다. 이는 결국 교복을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비용 절감을 위해 정장형 교복을 없애고 생활복을 도입하거나 생산 방식을 바꾸자는 뜻이다. 그러나 정장형 교복을 폐지한다고 해서 체감하는 교복값이 당장 내려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학교생활을 하려면 최소 옷 두 벌이 필요하지만, 학교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 교복은 한 벌뿐이다. 나머지 한 벌은 사비로 사야 하는데, 교복 업체들은 정장형 교복에서 줄어든 수익을 보전하기 위해 결국 생활복 가격을 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지지층에서는 이를 '작은 진보'라 칭찬하지만, 이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이 정책에는 교복이 무엇인지, 교복이 어떻게 학생의 자유를 박탈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정장형이든 생활복이든 학생의 선택권 없이 학교가 의상을 강제한다는 그 본질은 같다. 그러므로 지금 정부 정책이 향해야 할 목적지는 '생활복 전환'이 아니라 '교복 강제의 폐지'여야 한다.

"교복이 빈부격차를 없앨 수 있나요?"
몇 개월 전, 청소년 상담사 지인과 이야기하다 교복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교복 폐지를 하자고 주장했고 그 지인은 그래도 교복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년 상담사로 살며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는 교복 이야기를 나에게 하며 "누군가에게는 교복이 더 좋을 수 있어요. 내가 상담하는 학생 중에 초등학교 때는 맨날 다 해진 옷만 입다가 중학교 때 교복을 입어서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요"란 말을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잠시 머리가 띵해졌지만, 그래도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 결국에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빈부격차 문제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닌가요? 빈부격차 때문에 결국 일어나는데 단순히 교복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빈부격차를 해결해야죠. 그게 정부의 역할인데..." 이렇게 말하니 그 지인은 "그건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이후 수다를 떨다가 해어지고 집에 오니 계속 그 말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말이 맴돌았던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위 대화 속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의 교복이 어떤 의미로 일반 시민들에게 다가오는지다.
어떤 사람들은 "교복을 입히면 학교 안에서 빈부격차 문제가 해결됩니다!"라는 말로 교복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 진짜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현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비판은 들어 있지 않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명백한 빈부격차를 드러내며 또 정당화하고 있지만, 교복 찬성론자 중 누구도 저런 자본주의를 바꿔야 한다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학생들에게만 "빈부격차가 심하니 교복을 입어 해결하라"는 말로 이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이 빈부격차다. 그 사람이 쓰는 지갑, 연필, 가방, 스마트폰, 하다 못해 안경까지도.
자본주의의 빈부격차는 언제나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지만, 교복 찬성론자들은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빈부격차가 덜 보이게' 노력했다고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다. 수풀 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나는 숨었다고 외치는 짓을 그만두고, 자본주의와 빈부격차의 문제에 관하여 청소년들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 학생들이 체감하는 불평등을 줄이고자 한다면 교복보다 훨씬 좋은 제도가 많다. 피복비를 지원할 수도 있고, 아동수당의 확대나 학생수당의 도입을 고려해볼 수 있다. 위화감? 그저 핑계일 뿐이다.

결론은 청소년을 감시하고 싶은 것
교복과 관련한 대응을 해 나가다 보면 흔히 이런 말이 나온다. "교복은 학교 밖에서 학생들의 일탈과 범죄를 막아주니 필요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허허"라 웃으며 넘기지만, 사실 이 말은 이 사회가 교복을 유지하는 진짜 목적이 청소년을 향한 감시와 혐오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준다. 겉으로는 범죄를 줄이고 빈부격차를 줄인다는 미사여구를 붙이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학생을 감시하여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다름없다. 결국 학교는 교복 착용을 강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를 시전하는 것이다.
과거 교사가 번화가 근처를 순찰하며 교복 입은 청소년이 영화관이나 콜라텍 등을 출입하는지 감시하고 문화생활을 제약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한국 현대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집회에 참여하는지 교사들이 감시하였던 것 역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교복은 이를 입은 사람이 이 사회에서 제한된 권리만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이라는 사실, 그리고 소속, 때로는 이름까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게 함으로써 용이한 감시와 청소년 당사자의 자기검열을 유도하는 핵심적 도구다. 시민이 집 밖을 나서며 두발 단속에 걸리지 않을지, 복장은 괜찮은지 걱정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꽃 필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평등한 존재적 권리를 갖는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누구도 신분, 복장을 이유로 감시받고 무시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단지 학생이라는 이유로, 교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감시받고 무시당한다. 우리는 이것을 거부한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나의 신상 정보를 알게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청소년의 모습'에 어울리는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감시받는 것도 거부한다. 또한 누군가와의 갈등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알리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것 역시도 단호히 거부한다.
권리는 다수결의 문제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청와대에서부터 교육부, 교육청, 일선 학교까지 그 누구도 교복 정책을 논의하며 당사자인 학생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책을 수립할 때는 그 정책의 영향을 직접 받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조율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정부의 교복 정책은 정작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비청소년끼리만 모여 탁상공론하고 있다. SNS 상에서는 "왜 교복을 입는 학생의 의견은 묻지 않느냐"는 분노 섞인 반응이 쏟아진다.

한편 교복의 문제에 학생 당사자들의 의견이 최우선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 보자. 만약 다수의 학생이 교복 착용에 찬성한다면 교복은 정당화되는가? 예컨대 학교에서 교복 존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학교 측의 입맛에 맞는 학생회 학생들을 불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일명 '모범생'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 학생들이 만약 교복 착용에 대한 찬성 의견을 이야기한다면, 모든 학생들은 계속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인가? 이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믿는다. 복장을 통한 개성 실현의 자유는 모든 인간의 기본권이다. 안전 및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최소한도로 제한할 수 있을 뿐이고, 기본권을 덜 침해할 수단이 존재한다면 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학생들의 다수가, 혹은 학생 대표가 "우리 학생들은 오늘부터 불교(혹은 어떤 종교)를 믿기로 했다"고 하여 다른 학생들이 이를 따라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학생의 복장 역시 그렇다. 학생에게 편리한 '학생복'을 정할 수는 있을 것이고, 그 학생복의 형태를 정하는 데에는 학생들의 의견 수렴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학생 다수의 동의가 있었다고 하여 모든 학생에게 그 옷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을 우리는 '정의'라고 부른다.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반헌법적인 규정을 비판 없이 유지할 수는 없다. 2024년 겨울, 교복이 입기 싫었던 성령에게 교복을 강요했다면 이는 그 누가 거기에 동의했더라도 불의이다.
"갈아엎자, 불평등 학교"

누군가에게 교복은 그 자체로 불평등과 낙인을 상징한다. 많은 성소수자는 성별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교복 때문에 힘들어한다. 교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행여나 혐오의 소리를 들을까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다. 현재의 교복과 관련된 논의는 이런 소수자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 "갈아엎자, 불평등 세상" 지난 대선 시기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의 슬로건을 떠올려 본다. 이 외침은 우리의 일상과 학교 현장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지금의 학교는 너무나 불평등하고 억압적이다. 강제로 지정된 옷을 입고, 아침마다 스마트폰을 압수당하며, 교사에게 두발 상태를 검사받는 현실은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방불케 한다.
누군가는 교복을 학창 시절에만 입을 수 있는 '그 때의 좋은 추억' 혹은 '낭만'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상벌점제로 학생이 학생을 감시하게 만들고 억압적인 생활 지도가 난무하던 과거의 교실에 낭만 따위는 없었다. 서로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시대에 대한 '그 때의 좋은 추억'도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낭만은 인권침해를 덮기 위한 허구의 감성일 뿐이다. 누구도 인권침해를 낭만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는 없다.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교복을 불편해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보수성과 '학생은 단정해야 한다'는 낡은 관념은 시대착오적인 교복을 아직도 강제하고 있다. 교복 유지로 이익을 보는 것은 학생도, 학부모도 아니다. 담합으로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몇몇 거대 교복 업체들뿐이다. 우리는 교복이라는 자본의 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불평등 학교를 갈아엎자.

이준원 (성령)
대전에서 교회 다니면서 청소년 운동 합니다.
한로로와, 사랑과, 평등을 좋아합니다.
각주
- 경향신문, 이 대통령 “교복비 60만원, 부모 ‘등골 브레이커’…가격 적정성 살펴보라” https://www.khan.co.kr/article/2026021216070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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