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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진보정치

조직하는 정당: 선거 이후의 진보정당에 던지는 물음

by Domoleft 2026. 7. 2.

[진보정치] 조직하는 정당: 선거 이후의 진보정당에 던지는 물음

6.3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독자적 진보정당은 다시 한번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조직하는 정당'으로 진보정당을 업데이트하자 주장하는 최상희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의 기고를 게재한다.


발 디딜 땅을 만들어야만, 진보정당을 다시 세울 수 있다

6.3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나고, 독자적 진보정치는 또다시 무거운 패배를 마주했다. 조만간 진보정당에는 이보다 더 매서운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의 전국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득표율은 0.93%(선거연대를 가진 제주녹색당의 득표율을 합하면 0.96%: 편집자 주)였다. 모든 선거의 '승부처'로 꼽히는 수도권에서 광역비례 득표는 경기 0.5%, 서울·인천 1%대에 고착되었다. 거대양당의 당선자 독점은 더욱 심화되어 약 95퍼센트에 달했고, 무투표 당선자도 제2회 지방선거 이후 가장 많았다. 내란을 거치고도, 아니 내란을 거쳤기 때문에 양당 대결의 구심력은 더 단단해졌다.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이 배출한 당선자는 여섯 명, 전원 기초의원, 전원 재선 이상이었다. 당의 이름으로 처음 당선된 후보는 없었다. 초선이 전무하다는 것은 즉 당의 힘으로 새 사람을 당선시키는 능력이 사실상 제로에 수렴한다는 뜻이다. 필자가 선거사무장을 맡아 선거를 치른 춘천의 윤민섭 후보는 지역구에서 21.91%의 득표를 얻었지만, 강원도의 광역비례 정당득표는 1.23%에 불과했다. 열여덟 배의 간극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결과는 유권자들이 정의당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후보 개개인이 지역에서 쌓은 신용에 투표했다는 의미다. 한 사람의 헌신이 만든 표가 정당의 기반으로 옮겨지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좌측부터: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정의당 당선인들 /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당의 입장문. 출처: 정의당

 

진짜 문제는 당선자가 적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바깥, 즉 당의 풀뿌리가 메말라 있다는 데 있다. 중앙에서 결의한 계획은 지역에 닿기도 전에 증발하고, 결의와 실행 사이에 사람도 조직도 없다. 진보정당이 받아들 청구서는 바로 이것이다. 자본이 줄고 당원이 빠지는 것 이상으로, 지역위원장 한 명을 세우지 못하고 남은 활동가마저 소진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영향력을 되찾으려 중앙에서 또 한 번 소요를 기획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어야 할지는 정작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새로운 기획도, 더 나은 메시지도 아니다. 무너진 자리에 다시 땅을 만드는 일, 곧 현장을 구축하는 것이다. 중앙이 무엇을 시도하든 그것을 떠받칠 지역의 시도가 나란히 자라나지 않으면 또 증발할 뿐이다.


땅 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

땅을 다시 만든다는 건 그 땅 위에 설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다시 본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곧 자산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다. 집 없는 청년,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 돌봄노동자, 사라져 가는 지역의 주민, 빚에 묶인 자영업자. 겉보기에는 제각각이지만, 일해서 버는 돈으로는 끝내 자산에 닿을 수 없다는 한 가지 처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같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모순이다. 예전의 적은 분명했다. 공장에서 일은 오래 시키고 임금은 적게 주는 '일터 안의 착취'였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일터 바깥에서 온다. 아무리 월급을 모아도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고, 가진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도 집과 돈이 불어난다. 부모에게 물려받았는가가 한 사람의 평생을 가른다. 마르크스적 착취가 곧 자본이 공장 안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끝간 데 없이 짜내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수탈은 공장 바깥에서 '가진 것이 가진 것을 부르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청년의 절망도, 여성혐오도, 노동착취도, 기후위기도 이 마른 땅 위에서는 더 독해진다.

 

그런데 정작 밀려난 이들 스스로는 이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내가 게을러서',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 생각한다. 능력주의라는 이 이데올로기가 강한 까닭은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반쯤 진실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서 집을 산 사람이 실제로 있고, 그 몇 안 되는 예외가 신화 전체를 떠받친다. 진보정치가 할 일은 이들의 등을 떠밀어 다시 사다리에 올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가난은 당신의 부족이 아니라 기울어진 판의 결과이며, 사다리를 타지 않고도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께 깨닫는 일이다. 억압을 자기 탓으로 알던 사람이 그것을 구조의 문제로 다시 읽어내는 전환, 그것이 모든 조직화의 출발이다.

2015년 그리스 시리자의 선거캠페인에 함께한 알렉시스 치프라스(좌측) 전 그리스 총리와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전 포데모스 대표. 출처: 로이터

 

가장 흔한 해법은 이 약자들을 한 줄로 묶자는 것이다. 세입자와 돌봄노동자, 청년 여성과 기후시민과 자영업자를 '소수 기득권 대 다수'로 묶자는 좌파 포퓰리즘은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론을 업은 스페인 포데모스(Podemos)와 그리스 시리자(SYRIZA)의 돌풍 이후 좌파의 새 비전처럼 그려졌다. 누구를 '우리'로 부르고 누구를 적으로 지목하느냐, 그 적대 담론의 구성만으로 흩어진 다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는 짧은 집권과 빠른 우경화를 거쳐 불과 10년 만에 유권자들의 모든 신뢰를 잃어버렸다. 포데모스는 제도 안에 들어간 뒤 빠르게 분열했고, 더 온건한 수마르(Sumar)로 변용되었다가 계파 다툼과 내외부적 스캔들 속에 주저앉았다. 한때 남유럽을 뒤흔든 좌파 포퓰리즘은 지금 둘로 갈려 바닥을 긴다. 담론으로 묶인 다수는 선거와 선거 사이를 버티지 못했고, 그 빈자리는 극우정당 복스(VOX)가 차지했다. 적을 호명하는 말의 기술만으로는 사람이 묶이지 않았다.

 

그러나 포데모스가 무너졌다고 라클라우까지 묻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러워서 그대로 따라했다가 주저앉는 데서 멈출 일은 더더욱 아니다. 라클라우가 옳게 본 것이 있다면,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자리가 누구의 것으로도 예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랜 좌파들은 그 자리가 노동계급의 몫이라 믿어 왔다. 그러나 2026년 오늘 그 자리를 '타고나는' 위치는 없다. 비어 있는 자리는 누군가 다가가 "내가 당신들을 대변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채워진다. 그래서 비어 있다는 건 약점이 아니라 열린 문이다. 임자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먼저 다가가 사람을 엮는 쪽이 그 자리를 갖는다. 빈 자리는 불려서가 아니라 조직해서 채워진다. 적을 호명하는 말의 기술만으로 사람이 묶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하수도 사회주의(Sewer Socialism)'를 슬로건으로 삼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의 홍보물. 출처: DSA

 

흥미로운 것은 그 폐허 위에서 되살아나는 흐름이다. 2026년 뉴욕시장이 된 조란 맘다니는 자신의 정치를 '하수도 사회주의(Sewer Socialism)'라 부른다. 20세기 초 밀워키의 사회주의자 시장들이 혁명의 수사 대신 상하수도를 깔고 부패를 걷어내며 도시를 바꿔낸 전통에서 착안한 슬로건이다. 맘다니의 무기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공짜 버스와 보육, 공공 식료품점처럼 손에 잡히는 것들이다. 오래되면서도 새로운 사상인 사회주의를 정비하고,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 현장에서부터 고민한 결과다.

 

이 대비가 알려주는 것은, 출발점이 '누구를 적으로 부를 것인가'라는 명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충족되지 못한 필요'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안정된 고용, 아이를 맡길 곳, 아플 때 쉴 권리, 살 만한 집, 혐오 없이 존재할 공간을 욕망하지만 충족하지 못한다. 계급과 정체성은 바로 그 필요 안에서 만난다. 무엇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노동의 요구일 때도, 퀴어의 자긍심일 때도, 한 지역의 생존 문제일 때도 있다. 자리가 비어 있으니 무엇이든 사람을 묶는 끈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이름이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끈이 실제로 사람을 묶어내는가다. 이 구체적 필요를 포착하고 계급과 정체성이 한 쟁점 안에서 만나게 하려면, 진보정치에게는 다시 '현장'이 필요하다.


'헤테로토피아'로서의 현장

여기서 말하는 '현장'은 기본적으로 지역을 이야기하면서도, 또한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공간이어야만 한다. 그 속에서 진보정치는 구체적인 필요를 기반으로 스스로가 필요한 지점을 창출해낼 수 있다. 미셸 푸코는 이런 자리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 불렀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곳'이다. 이 사회 안에 실재하면서도 지배 질서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공간, 묘지와 정원과 극장처럼 같은 세상에 있되 문지방을 넘는 순간 다른 규칙이 흐르는 자리다. 능력주의가 모든 것을 사고팔 한 장의 평면으로 깔아놓은 세계에서, 헤테로토피아는 그 평면에 패인 주름이다. 그 안에서 경쟁의 시간은 잠시 멈추고, 값이 매겨지지 않던 것이 값을 얻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와 그의 저작 《헤테로토피아》

 

다만 이 아름다운 단어에는 정직한 단서를 달아야 한다. 푸코가 든 묘지와 정원, 정신병원과 감옥의 공통점은 차이가 격리되어 봉인된 공간이라는 데 있다. 현실의 헤테로토피아는 지배 질서에 균열을 내기는커녕 차이를 안전하게 가둠으로써 바깥의 질서를 오히려 떠받치곤 한다. 거대한 자본은 퀴어문화축제라든지, 제로웨이스트라는 이름의 '다른 삶의 정원'들을 기꺼이 허락한다. 축적의 본체를 건드리지 않는 한 예쁜 보호구역을 하나쯤 남겨 두는 편이 이롭기 때문이다. 체제는 대안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전시함으로써 무력화한다. 그러나 관상용으로 허락된 정원은 담장 안에 있는 한 끝내 숲이 되지 못하고 정원에 머문다.

 

그렇다면, 이 자리들이 단순한 관상용을 넘어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원을 텃밭으로 만들어야 한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공동체의 식탁을 차리고 마을 아이들을 불러올 수 있을 때, 정원은 관계라는 권력을 갖는다. 격리된 예외가 아니라 바깥을 향해 "여기서는 이렇게 산다"고 내미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가 꼭 텃밭이나 공동주택일 필요는 없다. 세입자들이 함께 집주인과 협상하는 모임일 수도, 아이를 함께 돌보는 품앗이일 수도, 시 조례를 바꿔내는 일일 수도, 매주 만나는 독서 모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작동하는가이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으로,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버티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더 잘 살게 될 때 그 자리는 관계의 장소가 된다. 그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갈 활동가가 지금 진보정당에는 필요하다.


한 사람부터 조직하는 정당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출처: 오마이뉴스

 

독자적 진보정치가 서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변혁적 대중운동의 기반, 그리고 진보정치 자체의 민중적(대중적) 지지기반이 곧 그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되던 당시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는 이 둘이 모두 존재했다. 당이 운동을 만든 게 아니라 운동이 당을 요청했고, 활동가들이 그 요청에 응답하며 땅 위에서 정당을 세운 것이다. 지금 무너진 것은 두 번째다. 그러니 순서를 바꿔야 한다. 당을 먼저 세우고 운동을 갖다붙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적인 운동을 먼저 일구고 그 운동이 당을 부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저절로 솟아 당을 부르는 낭만은 현실에 없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뜻이 분명한 활동가가 제 색깔을 지킨 채 지역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하는 정당의 출발점은 거창한 연대체도, 새 강령도, 창당대회도 아니다. 한 곳을 책임질 한 명의 활동가, 혹은 서로를 지탱하는 두세 사람이다. 또한 이들이 한 동네에 스며 사람을 만나고 작은 거점 하나를 일구는 일이다. 활동가 하나 없이 거점 없고, 거점 하나 없이는 전국이라는 개념 또한 없다.

 

그 한 사람은 어디로 들어가는가. 멀리서 전선을 설계할 필요는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자라난 사람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춘천에는 보수적인 도시 한복판에서 기어이 퀴어문화축제를 세우는 이들이 있다. 원주에는 1963년에 문을 연 단관극장의 철거를 막아서며 그 공간을 시민의 것으로 되살리려는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있다.[각주:1] 삼척에는 기후위기에 맞선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떠나는 대신 눌러앉기를 택한 청년들이 청년기후긴급행동을 이어간다.[각주:2] 인제에는 아홉 해째 책을 함께 읽어온 '자치와 자급'이 있다.[각주:3] 이들은 읽은 것을 머리에만 두지 않겠다며 매달 만 원씩 모아 밀양으로, 홍천 송전탑 현장으로, 조선소 하청 노동자에게로 연대 기금을 보내고, 텃밭에서 기른 것으로 이웃과 한 상에 둘러앉으며 그 작은 공간을 저항과 돌봄의 거점으로 삼는다.

좌측부터: 원주 '아카데미의 친구들'의 모임 사진 / 인제 '자치와 자급'의 텃밭. 출처: 페이스북 아카데미의 친구들(www.facebook.com/wonjuacademy) / 페이스북 자치와 자급(www.facebook.com/profile.php?id=61566806882324)

 

이들은 어떤 조직의 지시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시장이 끝내 내어 주지 않는 삶의 조건을 제 손으로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이다. 조직하는 정당이 할 일은 이들을 새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돋아난 자리를 알아보고 곁에 서며 이어내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함께 싸울지는 그 땅에 선 사람만이 안다. 의제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의제를 낳는다. 이들과 함께 하면 된다. 이들에게 다가가고, 이들을 이어내며 또한 영감을 받아 새로운 방식과 형태의 지역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데도 원칙이 있다. 사람을 키우러 들어가는 것이지, 일손을 빌리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 편'인 사람을 자꾸 불러모으는 것은 동원이고, 아직 우리 편이 아닌 사람과 새 관계를 맺어 주체로 세우는 것은 조직화다. 좋은 조직화는 활동가가 떠난 자리에 더 단단해진 사람과 운동을 남긴다. 기존의 조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이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데 몸과 힘을 써나가는 활동가를 만들어야 한다.

 

가장 현실적인 질문 역시 피할 수 없다. '그 한 사람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조직화란 결국 전임 조직가의 시간, 곧 인건비를 전제로 굴러간다. 중앙에 남은 자원을 지역 활동가를 키우는 데 돌리는 방안도, 당원과 연대체가 특정 지역의 활동가를 후원하는 플랫폼을 구축하여 지원하자는 논의도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길은 지역 공제회다. 중앙의 시혜가 아니라 조직된 사람들 스스로 매달 적은 돈을 모아 제 지역의 전임 조직가를 먹여 살리는 상호부조를 고민해 보자. 상호부조의 과정이 설령 지난하고 현실성이 없어 보일지언정, 그 자체로 하나의 거점을 만들고, 사회를 기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사상을 실현하는 일이라는 점을 유념하자.


'조직하는 극우'에 맞서 '조직하는 진보정치'로

이렇게나 중요한 조직하자는 말은, 오늘날의 진보정치에 있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붙이는 당위적 맺음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더 이상 '조직화'라는 단어를 그렇게 방치할 수 없다는 사실은 2026년 6월 3일 이후 올림픽공원의 모습을 본다면 명료해진다. 투표용지 부족에 분노한 평범한 청년들은, 불과 며칠 만에 조직된 극우에게 그들이 있던 자리를 내어 주고 떠나갔다.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관료제에 환멸을 품은 이들에게 분노할 이유와 가짜 효능감을 쥐어 주는 일을 극우정치가 해낸 것이다.

'부정선거' 구호를 사용하며 반대자들을 '대진연'으로 몰아세우는 올림픽공원의 극우 세력. 출처: 연합뉴스

 

극우를 '어쩌다 튀어나온 돌출'로 여기면 이 패배를 포착할 수 없다. 극우는 근대가 태어나던 순간 근대에 대한 반동으로 함께 태어났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내건 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약속이었고, 극우의 원형은 그 약속의 거부에서 시작되었다. 반혁명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추상적 '인간'이란 없으며 오직 프랑스인과 러시아인만 있을 뿐"이라 썼다. 20세기의 파시즘은 그 반동을 이어받았다. 이들에게는 늘 하나의 서사가 있었다. '오염되기 전의 순수한 공동체', '외부자가 들어오기 전의 순결한 우리'라는 상실의 신화다. 그 신화는 '평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향한 분노를 조직하는 연료였고, 오늘의 능력주의는 그 연료의 최신판이다.

 

정치학자 카스 무데는 전후 극우를 네 개의 물결로 정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선 네 번째 물결의 특징은 '주류화'다. 극우는 더 이상 변방에서 쳐들어오지 않는다. 중도우파가 그 의제를 슬그머니 흡수하고, 어제는 충격이던 말이 오늘은 상식이 되어 정치 전체를 오른쪽으로 끌고 간다. 쳐들어오는 적은 보이지만 스며드는 물은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진짜 극우'로 지목해 격리하면 된다는 발상은 안쪽이 이미 젖어 버린 사회에서는 한 발 늦은 전략이다. 우리는 추상적 위험을 말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윤석열이라는 극우를 대통령으로 세운 나라다.

 

지금 직시해야 할 것은 극우의 준동이 돌출이 아니라 기획된 조직화라는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점도, 점조직화된 행동망도 모두 그렇다. 극우는 환멸과 불안을 품은 이에게 분노할 이유("너는 빼앗겼다")와 도덕적 우월감("너는 진실을 깨달았다")을 쥐어 주고, 빨갱이·중국·외국인·선관위라는 '외부의 적'까지 또렷이 지목한다. 능력주의가 "네가 못 사는 건 네 탓"이라는 자책을 만들어내면, 다른 한편에서 극우는 "저들이 빼앗은 탓"이라며 그 자책을 혐오로 번역한다.

 

흔히 많은 이들은 좌파를 극우의 균형추로 여긴다. 그러나 추는 상대가 정한 무게를 따라갈 뿐이다. 진보정치의 일은 극우를 규정하고 격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이 먼저 손을 뻗은 사람들의 충족되지 못한 필요를 실제로 채워 보이는 데 있다. 봉쇄조항이 사라진 2028년 총선, 원내진입의 문이 넓어진 것은 진보정당에게만이 아니라 극우정당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미 제1야당이 극우에 잠식된 상황에서 더욱 급진적인 극우주의자들에게까지 국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 문을 누가 먼저 통과하느냐는 저 빈자리를 누가 먼저 조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우파 4당 연대'를 선언하는 극우정당(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자유통일당)의 대표자들. 출처: 뉴데일리


전위에서 인프라로

결국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다. 진보정당의 체질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정당은 스스로를 표를 긁어모으는 선거 기계로, 혹은 옳은 길을 가르치는 '전위'로 이해해 왔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라는 진보정당의 출발점은 정작 촌스럽거나 순진한 것, 대중에게 닿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민주화 이후 87체제의 성과가 '실용'과 '중도'라는 매끈한 말로 다듬어지는 동안 진보정치의 사상은 함께 무너졌다. 그 빈자리를 능력주의와 공정에 대한 집착이, 끝내는 극우의 분노 서사가 채우고 있다.

 

그렇기에 사상을 되살려야만 한다. 다만 그 사상이 정말 살아나려면, 그것은 책상 위의 논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한 동네와 거점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활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정당은 대중을 이끄는 전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갈등을 떠받치고 조직하는 인프라의 역할을 해야 한다. 조란 맘다니의 말처럼, 이념의 값어치는 그것이 무엇을 전달했는가로 매겨진다. 한 사람을 세우고, 한 자리를 일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함께 묻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느리고 지루하겠지만, 지금 진보정치에 남은 길은 그것뿐이다.

 


최상희

현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강원도 춘천에서 지역운동, 지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각주

  1. 페이스북 '아카데미의 친구들' https://www.facebook.com/wonjuacademy [본문으로]
  2. 페이스북 '김공룡과 친구들 - 청년기후긴급행동' https://www.facebook.com/kimgongryong [본문으로]
  3. 페이스북 '자치와 자급'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6156680688232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