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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모서재

완벽한 고전의 재탄생, 시혜의 서사를 전복하는 지성의 도끼 - 소설 '제임스'를 읽고

by Domoleft 2026. 7. 1.

[도모서재] 완벽한 고전의 재탄생, 시혜의 서사를 전복하는 지성의 도끼 - 소설 '제임스'를 읽고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제임스》는 마크 트웨인의 고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원작의 조연이었던 흑인 노예 제임스의 시선에서 철저히 다시 그려낸다.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일견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과제를 책은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도모서재'에 월간 서평을 연재하게 된 나경채 정의당 기획실장의 글을 싣는다.



고전을 개작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문학의 역사에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는 행위는 찬사보다 혹평을 받기 쉽다. 어설픈 변주는 그저 원작의 거대한 이름값에 무임승차했다는 냉소적인 평가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단 4, 5분에 불과한 노래 한 곡을 리메이크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가수의 곡을 다시 부를 때는 철저한 해체와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재해석이 원곡이 가진 고유의 심상을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자신만의 색깔로 완전히 다르게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노래방 수준의 모창이라는 혹평을 면치 못한다. 하물며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서사와 그 안에 축적된 문화적 무게를 지닌 문학의 고전을 완벽하게 재해석하여 다시 쓴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가. 작가에게는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제임스》는 바로 그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고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현대적 시각에서 완전히 다시 쓴 문제작이다. 처음에 이 책의 소식을 접했을 때는 그리 큰 기대가 없었다. 고전을 비틀거나 시점을 바꾸는 서사적 실험은 이미 문학사에서 흔하게 변주되어 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세계적인 권위의 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후, 일말의 호기심을 안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이 책은 단순한 모방이나 영리한 각색이 아니라, 원작이 지닌 태생적 한계를 내부에서부터 폭파시키는 문학적 봉기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제임스》 삽화 중

 

원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톰 소여의 단짝인 백인 소년 헉이 서사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헉의 눈을 통해 바라본 미국 남부의 풍경과 노예제도의 모순이 작품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원작에서 헉과 함께 미시시피강을 따라 도주하던 흑인 노예 '짐'을 서사의 당당한 주체로 세운다. 이름부터가 다르다. 타인에 의해 불리던 단음절의 호칭 '짐'은 스스로 선언하는 주체적인 이름 '제임스'로 복원된다. 잭슨 섬에서 우연히 만난 헉을 제임스는 모른 체하지 않고 동행한다. 이 지점부터 원작의 익숙한 선율은 전혀 다른 화음으로 변주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이 가진 가장 전율적인 문학적 장치는 제임스가 구사하는 두 가지 언어에 있다. 그는 백인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그들이 기대하는 어수룩하고 문법이 파괴된 노예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백인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는 고도의 수사와 깊은 사유가 담긴 지성의 언어로 말하고 생각한다. 흑인이 똑똑하다는 사실이 목숨을 위협하는 죄가 되는 사회에서, 제임스에게 언어는 생존을 위한 가면이자 가장 날카로운 무기다. 이 극적인 이중 언어의 경계선을 포착하는 것은 번역가에게도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원작이 지닌 언어적 긴장감이 느슨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번역본은 이 두 언어 사이의 낙차를 매우 유려하고 매끄럽게 살려내어, 독자가 제임스의 내면적 지성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원작의 짐과 달리, 에버렛의 제임스는 읽고 쓰는 것에 극도로 능숙한 존재다. 그는 대처 판사의 서재에서 몰래 책을 훔쳐 읽으며 자신만의 정신적 영토를 구축해 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서구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문장들은 제임스의 영혼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자신을 가둔 현실의 쇠사슬과 책 속의 화려한 선언 사이의 괴리를 목격하며 그의 지성은 더욱 단단해진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

 

이러한 제임스의 깊은 내면은 그의 꿈과 무의식을 통해 시각화된다. 소설 속에서 제임스의 무의식에는 간혹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가 유령처럼 등장하는데, 이 둘이 나누는 철학적 논쟁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볼테르는 인류의 해방을 외치며 노예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고 유연하게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프리카인도 유럽인의 방식으로 교육받으면 문명화될 수 있으며, 인간은 타고난 야만을 넘어 예절과 기술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동등해질 수 있다는 서구 중심적 한계를 드러낸다.

 

제임스는 이러한 볼테르의 기만적인 태도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말로는 인간의 동등함을 외치면서도 은연중에 흑인을 계도의 대상, 즉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지 않느냐는 반박이다. 제임스는 "자연적 자유가 사회적, 문화적 압력을 받으면 시민적 자유가 되고, 그 시민적 자유는 계급과 상황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즉, 원래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의 공허한 선언만으로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힌 제도적 불평등과 부자유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 것이다. 백인 사상가가 구축한 지적 성채를 노예의 신분인 제임스가 도리어 해체해 버리는 이 논쟁은 매우 철학적이다. 비록 이 서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주된 줄거리는 아닐지라도, 작품의 문학적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심오한 백미임이 분명하다.


소설 《제임스》에 수록된 제임스와 헉의 여정 지도

 

제임스와 헉은 원작의 궤적을 따라 미시시피강을 가로지르는 여정에 나선다. 마크 트웨인의 원작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다채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의 색채가 강했다면, 에버렛의 작품은 묵직하고 비장한 여행 혹은 망명의 느낌을 준다. 제임스에게는 헉의 여정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이고 절박한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인 소년의 일탈을 돕는 보조자로서의 움직임이 아니라, 빼앗긴 가족을 구하고 자신의 인간성을 선언하기 위한 투쟁이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며 마주하는 다양한 사건 속에서, 그들은 마침내 거대한 시대의 폭풍인 남북전쟁의 서막과 접하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마크 트웨인의 원작에서 짐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계기는 결국 백인들의 선의와 시혜, 그리고 제도적 인정의 결과물이었다. 백인이 베푸는 자비에 기대어 얻은 자유는 언제든 다시 회수될 수 있는 불안정한 자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 '제임스'에서는 그 누구도 제임스를 시혜적으로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제임스는 도피처럼 시작된 그 거친 여행길을 통과하며, 오직 자신의 의지와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그는 더 이상 쇠사슬에 묶인 피해자가 아니라, 다른 노예들에게 해방의 길을 함께 떠날 것인지를 엄숙하게 묻는 연대와 혁명의 주체로 거듭난다.

 

사실 이 도발적인 재작업은 17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미국 문학사의 거대한 영혼의 대화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찍이 해리엇 비처 스토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을 통해 노예제의 참상을 폭로하며 남북전쟁의 불씨를 당겼다면, 마크 트웨인은 전쟁 이후 《톰 소여의 모험》(1876)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을 통해 남부 사회의 위선과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시험했다. 그러나 스토 부인의 톰이 백인의 자비를 구하는 순종적인 성자였고, 마크 트웨인의 짐이 백인 소년의 성장을 돕는 보조자에 머물렀다면, 에버렛의 제임스는 마침내 스스로 해방의 길을 개척하는 지성의 주체로 우뚝 선다. '제임스'는 앞선 고전들이 지닌 시혜적 서사의 한계를 내부에서부터 전복하며, 미시시피강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흑인의 진짜 목숨과 목소리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린 역사적 응답인 셈이다.

좌측부터: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책의 말미에는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흑백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고수하던 혈통과 인종에 대한 선입관을 완벽하게 파괴한다. 이 반전을 마주하는 순간 독자는 앞서 읽은 모든 장을 다시 해석해야만 하는 지적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저자인 퍼시벌 에버렛이 마크 트웨인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면, 독자인 우리는 소설 말미의 반전을 마주함으로써 이 소설 전체를, 나아가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을 재해석하게 된다. 자신이 예민한 독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반전 부분에서 충격에 빠져 자신의 지적 나태를 반성하게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면, 작가가 정교하게 숨겨놓은 복선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절묘한 배치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편집장과의 상의를 통해 반전의 내용은 소개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을 밝힌다).

 

이처럼 고전의 견고한 서사를 해체하고 주변부 인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여 세계를 전복하는 시도는 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어 온 위대한 전통 중 하나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미셸 투르니에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다시 쓰며 백인 문명주의의 기만을 폭로하고 '야만인' 방드르디를 주체로 세운 서사가 대표적이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속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로 표현된 이에게 진짜 이름을 찾아준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나,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 이면에 가려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다.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바로 이 위대한 전복의 계보를 잇는 가장 최신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문학적 응답인 셈이다.

좌측부터: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이 소설은 그러한 짜릿한 반전 요소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다. 고전에 대한 이보다 더 가치 있고 품격 있는 재해석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마지막에 던지는 대충격은 문학적 쾌감을 넘어, 독자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흑백 인종의 구분, 그리고 인간을 계층화하여 바라보던 은밀한 선입관을 완벽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사정없이 철저하게 부숴버린다. 문학이 왜 여전히 우리 시대에 필요한지, 고전이 어떻게 오늘날의 언어로 다시 숨 쉴 수 있는지를 증명해 낸 도끼 같은 작품이다. 근래 읽은 여러 소설 중에서 타인에게 이토록 자신 있게, 그리고 뜨겁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단연코 없었다.


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저

송혜리 옮김, 문학동네, 2024

 

 

'도모서재'는 다양한 독자들이 추천하는 수많은 책 속에서 때로는 세상을 꿰뚫는 날카로움을, 때로는 마음을 울리는 연대의 따스함을 찾고자 하는 웹진 도모의 도서 리뷰 코너입니다.

'도모서재'에 서평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나경

현재 정의당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 '소설 100페이지 읽기'를 루틴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바쁜 일상에 밀려 이 다짐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책장을 넘기는 시간만큼은 생활을 지탱하는 단단한 버팀목이 됩니다.

북클럽을 만드는 것이 오랜 희망사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