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란 시위를 바라보는 좌파의 시선 (2부)
경제적 문제로 시작된 이란 시위는 어느새 이슬람 신정 체제의 종식을 요구하는 거대한 반정부 항쟁으로 자리잡았다. 팔라비 왕가의 왕정복고 주장과 트럼프의 무력개입 시사 속, 이란인들의 실제 목소리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와 인권, 반제국주의라는 중첩된 가치 속에 지금 이란을 바라보는 좌파의 시선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이란의 반서방 정서, 단지 신정의 선전일 뿐인가?

(1부에서 계속)
레자 팔라비와 접촉 중인 트럼프 행정부는 이슬람 공화국이 무너지고 팔라비로 대표되는 친서방 인사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 현 이란의 반미·반이스라엘·반서방 대외노선이 폐기되고 과거 샤 체제와 같이 친서방 국가로 전환될 가능성을 내심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현 정부의 정치·외교 노선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대부분의 이란인들은 1953년 CIA와 레자 샤 팔라비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데크 정권을 뒤엎은 것과 같이 과거 이란과 중동 전역에서 이루어진 제국주의적 개입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란에 대해 오랫동안 가해진 미국의 경제제재와 관련해서도 동의하는 의견은 찾기 힘들다.1 이는 미국의 경제제재가 근 20여년 간 이란의 민생을 철저히 파괴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정권에 의해 강조되고 악용된 측면이 존재할지라도, 이란 사회의 반미 정서는 기본적으로 이란인들이 역사와 자신의 삶으로 직접 체화한 미국과 서방의 부정적인 영향에서 기인하고 있다. 물론 현 이슬람 공화국이 북한(조선) 정도를 제외한다면 세계적으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강경한 반미 성향을 띠기에 상대적으로 우호관계가 증진될 수는 있겠지만, 정권의 폭압과 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한 현실적 도움 요청과는 별개로 이란인 대부분이 '선량한 구원자' 혹은 '민주주의의 전파자'로서 미국의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조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더욱 무근거한 것은 '새로운 이란이 이스라엘의 동맹이 될 것이다'라는 일각의 주장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민은 중동 전역, 더 나아가 세계적 이슬람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정서이다. 이집트나 요르단, 아랍에미리트와 같이 이스라엘과 수교하고 비교적 우호적인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일부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반이스라엘 정서가 압도적으로 강하다.2 이란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과거 이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이란인들의 대이스라엘 감정이 압도적으로 부정적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3

심지어 시위 개시 한 달 전의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란 정부 측 책임을 더 크게 본다는 결과가 나온 여론조사에서도, 여전히 절반 가까운 48%의 인원이 이스라엘에 대해 비호감이라 답했을 정도다.4 동일 조사에서 미국의 호감도는 과반 이상인 52.7%를 기록했다. 이란에서 진행되는 여론조사 표본이 현실적으로 서구와의 접촉면이 많은 대도시 중산층에 편중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슬람 공화국 체제에 가장 비판적이며 이번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을 이들 사이에서마저 이스라엘 지지는 결코 주류적인 정서로 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하마스와 헤즈볼라 지원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대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정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예컨대 2009년부터 이란 반정부 시위대에서 자주 외쳐진 구호 중 하나인 "가자도 레바논도 아니다, 내 삶은 이란을 위해"는 이번 항쟁 국면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했다.5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호감이나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이란 대중의 찬반이라기보다, 민생문제는 도외시한 채 대외정책에만 자원을 쏟는 하메네이와 IRGC에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각국 정부가 고물가 등 민생 문제의 해결에 실패하자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지만, 이것이 해당국 국민들의 러시아 및 푸틴 정권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과도 같다.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 축소와 같은 현실적인 조정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과거 샤 체제 당시와 같이 이스라엘과의 동맹 관계 수준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권교체 후에도 미국과 서방,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정권이 자동적으로 들어서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21세기 이후 정권교체를 경험한 타 중동 국가들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각각 2003년과 2011년 미군 주도의 군사개입으로 후세인 정권과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 이라크와 리비아의 경우, 정권교체에서 미국과 서방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문제 등 중동 정세 전반에서 미국과 서방의 노선에 명확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24년 시리아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취임한 아흐메드 알샤라 현 임시대통령의 경우에도 시리아 대통령 최초로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와 회담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에게 군사협정을 포함한 아사드 정권기의 계약을 유지할 것을 약속하는 등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이들 신정부 역시 오랜 세월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누적된, 중동 전역 대중들의 강력한 반미·반서방·반이스라엘 정서를 그리 쉽게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과 서방, 이스라엘에 대한 불신은 이슬람 공화국 체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이란인들 역시 공유하고 있는 정서에 가깝다. 만약 이란에서 팔라비나 그 누구라도 친미·친서방·친이스라엘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경우 이란인들의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심한 경우에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군과 연합하여 조국을 침공해 이슬람 공화국을 뒤엎으려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패퇴했던 반군 인민무자헤딘(MEK)의 사례에서처럼6 외세의 앞잡이이자 매국노로 낙인찍혀 퇴출될 수도 있다. 특정 정치체제의 지지 여부가 지정학적 현실과 역사적 국민감정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민중이 공유하는 기억과 경험을 거슬러 대외정책을 설계할 수는 없다.

'둥글다고 다 호두는 아니다'
현재까지 살펴본 이란의 상황을 요약해 본다면 이렇다. 거리로 나선 이란 민중 대다수가 샤 체제의 귀환을 바란다는 증거는 없다. 설사 이슬람 공화국이 무너지고 레자 팔라비가 이란으로 귀국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유의미한 정치적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떨어져 팔레비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다 한들, 과거 샤 체제와 같은 친서방-친이스라엘 대외 정책을 이란인들의 지지 위에 펼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구 언론과 전문가들은 왕정복고를 상수에 놓고 현 이란의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인가?
우선 이란 내의 실제 여론과 유기적으로 연계되기 어렵다는 창구의 한계가 있다. 서구 언론 등은 상대적으로 쉽게 연결 가능하며 입장을 찾아볼 수 있는 팔라비 및 그와 연계된 해외 망명자 커뮤니티의 비중을 과신해, 그들의 의견이 마치 이란인들의 의견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잦다. 이에 더해 앞서 설명했듯 최근 온라인에서 이란 관련 여론전을 주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란 청년층, 특히 해외 망명자 커뮤니티의 MZ세대 사이에서 팔라비에 대한 지지가 매우 강해진 것 역시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정 표본이 과대평가되며 마치 이란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해법으로 단결한 것처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란을 대하는 서구의 담론 상당수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1979년 혁명 이전 샤 치하 이란을 '선'으로, 이후의 이슬람 공화국을 '악'으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관점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서구 언론이나 커뮤니티에서는 1979년 이전 이란 여성들의 서구화된 복장과 1979년 이후 히잡과 차도르를 강제 착용한 이란 여성의 이미지를 대조해 보여주곤 한다. 물론 여성은 스스로의 신체와 용모와 관련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으며, 이를 허용하지 않는 현 이란 정부의 가부장적·여성혐오적인 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혁명 전후의 모든 맥락을 소거하고 오로지 일부의 서구화된 라이프스타일만을 바탕으로 '짧은 치마=자유' 식의 단순한 도식으로 선악을 구별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이란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없다.


1953년 모사데크 정부 전복 이후부터 1979년 이슬람 혁명까지,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이끄는 절대왕정 치하 이란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입법과 행정, 사법이 모두 샤와 황실에 집중되었고, 의회는 황실을 위한 거수기로서만 존재했다. 샤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이란당과 인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언론과 출판은 황실의 전면적인 검열을 받았다. 정부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동원해 자신들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억압적으로 억눌렀다. 모든 발전의 과실은 소수의 대도시 중상류층에게만 집중되었고, 나머지 대다수의 생활수준은 빈곤선에 머물렀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이 서구적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고, 나머지 다수의 민중은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곳 - 이것이 바로 샤 치하 이란의 현실이었다.
1979년 혁명이 이슬람주의자들은 물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더 나아가 이란 민중 전반의 지지를 받은 데에는 바로 샤 체제의 이러한 모순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가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그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지금까지 존속해 온 데에는 과거 샤 체제의 억압에 대한 집단적 기억, 그리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은 이슬람 공화국의 사회적 불만의 부분적인 시스템적 수용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많은 서구와 한국의 언론 및 전문가들은 이러한 맥락을 고의적으로든 무심결이던 은폐한 채, 이란 혁명의 원인을 ‘샤 체제의 세속주의 정책에 대한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발’ 정도로 축소하며 이분법적 서사를 강화하는 데에 일조한다.


혹자는 '권위주의적이고 불평등하며 부패하기로는 이후 들어선 이슬람 공화국이 더한데, 왜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샤 체제 비판을 지금 꺼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샤 체제와 이슬람 공화국 사이의 우열이 아니다. 결국 이란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논하는 서구의 수많은 논자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모두와 거리가 멀었던 팔라비 왕조 시절을 마치 이란이 돌아가야 할 '정상성'의 기준인 양 상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것이 여기서의 핵심이다. 이 기준에는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의 유무'야말로 모범적인 사회의 기준이라는 분명한 함의가 존재한다. 민주와 인권이란 이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에 따라오는 하위 항목에 불과한 것이다.
서구적 문화와 가치만을 참되고 우월한 것으로 여기며, 이와 일치하지 않는 비서구 세계의 삶의 양식을 저열한 것으로 폄훼하며 해당 민중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사고방식, 우리는 이것을 '식민주의'라고 부른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를 '구원자'로 상정하는 서구의 지배적 이란 담론 곳곳에는 이러한 식민주의적 함의가 분명하게 배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란 민중이 이란에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다. 서구가 이란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다.
이처럼 이란을 바라보는 서구중심·식민주의적인 시각은, 오히려 이란 현지 민중의 저항적 목소리가 지니는 복합성과 다채로움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여성, 삶, 자유' 운동 당시 이란 여성들의 머리카락 자르기 퍼포먼스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다. 한국을 포함한 서구의 많은 평자들은 이를 서구 페미니즘적 맥락에서의 '탈코르셋 운동', 즉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했다. 물론 그와 같은 의도로 퍼포먼스에 함께한 이란 여성들 역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해당 행위가 '기수보란(گیسوبران)'이라는 이름으로 이란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애도문화이며, 《샤나메》 등 중세 페르시아 문학에서 여성들이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정치적으로 박해받은 남편을 추모하기 위해 한 행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닿지 못한다.7

이를 정치적 행동에 차용하는 것은 정부가 금지한 국가폭력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사회적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애도로서의 저항', 전통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여성들을 일반적으로 남성들에게 부여되던 '전사', '박해받은 자'의 신분으로 호명하는 페미니즘적 전유, 자신들에 대한 저항을 서방 등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늘 치환하는 정권의 언어에 대한 내재적 반증('우리의 저항은 이란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전통의 반대편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너희들이다')이라는 복합적인 효과를 지닌다. 단순히 '페미니즘 = 인권 = 서구'와 같은 도식적 이분법으로만 보았을 때는 결코 포착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러한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의 문제점은 단순히 담론적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접근이 미국의 대 이란 제국주의 공세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문명'의 바깥에 있는 나라의 주민들이 '비서구'적 독재자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으니, 군대를 몰고 들어가 해당 정권을 쳐부수고 이들을 '해방'시켜 자유로운 서구 라이프스타일의 세계로 다시금 편입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식이다. 이는 미국이 과거 이라크와 리비아를 침공할 때 내건 명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 트럼프 정부는 시위 시작 이후 줄곧 이란에 대한 군사개입을 시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란에 베네수엘라보다 더 거대한 규모의 함대를 보낼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8 그러나 피로 얼룩진 미국과 서방의 지난 중동 개입의 역사를 고려할 때, 미국의 군사개입이 이란에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애초에 현 이슬람 신정 체제 탄생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과거 CIA를 통해 샤의 쿠데타를 지원하며 이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미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개입의 명분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이란에는 '둥글다고 다 호두는 아니다(هر گردی گردو نیست)'라는 속담이 있다. 무언가를 볼 때 겉으로 드러나는 한두 가지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을 얹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의 이란 항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서구는 문명 선, 비서구 이슬람은 비문명 악'과 같은 식의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이분법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이란의 '구원자'로 위치시키며 제국주의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서구의 사고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과 현지에 등장하는 다양한 구호들을 살피고 있는 그대로의 항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 보자'
이란을 바라보는 세계 진보·좌파 세력의 시선은 현재 이란 항쟁의 속성만큼이나 복합적이다. 우선 그 무엇에 앞서,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학살하는 이슬람주의 정권을 분명한 언어로 규탄하며 이에 저항하는 이란 민중과 지속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원칙은 반드시 확인되어야만 한다. 압제자와 피압제자 사이에서 후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은 굳이 진보·좌파가 아니더라도 현대적 관점에서 보편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이란의 경우 헤즈볼라·후티·하마스를 지원하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 패권에 맞서는 '저항의 축'을 표방한다는 것으로 인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으며, 심지어 반미·민족주의 계열의 한국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시위 전체를 미국발 '색깔혁명'으로, 시위대를 '매국노'로 폄하하는 극단적 시각까지도 보여지고 있다.9
그러나 이는 반제국주의를 특정 국가나 정권의 전유물로 착각하는 진영론적 평가에 다름아니다. 그간 이란 정부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 지원이 반제국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공세에 대한 비판적 정서가 정권뿐 아니라 대부분의 평범한 이란인들 역시 공유하는 것이라면, 진보·좌파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아래로부터의 반제국주의'가 정말 가능하도록 이란 민중과 연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이란을 위해"라는 구호가 상징하는 것은 음모론적인 '색깔혁명'이나 '미국의 배후 지원'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반제국주의'가 기층의 동의를 얻지 못할 때 생기는 괴리이기 때문이다.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수의 자국민을 학살하는 정권이 설령 반제국주의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용인될 수도 없다.

또 한편으로는 이란 사회의 목소리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서구 미디어에 의해 재생산되지 않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이란 내에는 항쟁을 지지하고 노동계급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미국과 이스라엘에 이용당하는 것을 경계하는10 공산주의 정당 투데당,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외세의 개입에 대해 "시민사회의 파괴와 인명 살상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정부의 폭력과 탄압 지속을 위한 또 다른 구실을 제공한다"11며 강도 높게 비판한 테헤란 버스 노동조합의 성명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서방 주도 정권교체 혹은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만이 이란인들의 요구라는 주장은 이러한 수많은 경향성을 결코 대변하지 못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와 같은 입장은 그리 널리 환영받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입장을 '반제국주의 동지'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돕지 않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논리에 부역하는 것으로, 또 누군가는 반미·반서방 노선에 함몰되어 지금 당장의 시급한 정권교체에 협조하지 않는 입장으로 폄하하곤 한다. 그러나 인권 옹호와 반제국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가 어렵게 쌓아올린 모든 종류의 가치와 규범이 흔들리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에, 이란 민중과 연대하며 국가폭력과 제국주의 모두에 맞서는 일은 곧 인권과 자결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 시절부터 문학, 특히 시로 중동에서 이름을 떨쳐 왔다. 이러한 이란의 문학적 전통은 정치적 저항의 순간에도 여러 차례 소환되었는데, 특히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포루그 파로흐자드(1934~1967)의 시들이 대표적이다. 팔라비 왕조 시절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고발의 정서가 강하게 담겨 있는 그의 작품들은, 1979년 혁명 이후에도 페미니즘적 경향으로 인해 이슬람 공화국 당국으로부터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이란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란 민중이 내부적·외부적인 모든 압제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날이 곧 오기를 바라며, 그의 시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 보자》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믿어 보자
추운 계절의 시작을
상상 속 정원의 파멸을
게으르게 엎어져 있는 낫들과
감옥에 갇혀 있는 씨앗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리는지
아마도 진실은 그 젊은 두 손이었는가
그 손은 한바탕 내린 눈 아래 파묻혔다
그 이듬해, 봄이
창문 너머 하늘과 사랑을 나눌 때
또한 그의 몸속에서 끓어오를 때
짐을 덜어 낸 나무줄기들의 푸르른 분수대가
꽃을 피울 것이다
오 친구여
하나밖에 없는 친구여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 보자
- 포루그 파로호자드,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 보자》 中

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전 회장, 전환 국제연대팀장.
동국대학교와 고양시, 대학원생노조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
각주
- Center for International and Security Studies at Maryland, Iranian Public Opinion, At the Start of the Raisi Administration https://cissm.umd.edu/sites/default/files/2021-10/Final-Iranian%20Public%20Opinion%20Sept%202021.pdf [본문으로]
- Arab Center Washington DC, Arab Public Opinion about Israel’s War on Gaza https://arabcenterdc.org/resource/arab-public-opinion-about-israels-war-on-gaza/ [본문으로]
- Middle East Institude, New polling highlights Iranians’ views on Iran’s foreign policy and regional role https://mei.edu/publication/new-polling-highlights-iranians-views-irans-foreign-policy-and-regional-role/ [본문으로]
- GAMAAN, Iranians’ Attitudes Toward the 12-Day War, https://gamaan.org/2025/11/05/12-day-war-survey-english/ [본문으로]
- The Conversation, ‘Neither Gaza nor Lebanon!’ Iranian unrest is about more than the economy − protesters reject the Islamic Republic’s whole rationale https://theconversation.com/neither-gaza-nor-lebanon-iranian-unrest-is-about-more-than-the-economy-protesters-reject-the-islamic-republics-whole-rationale-265696 [본문으로]
- Wikipedia, People's Mojahedin Organization of Iran https://en.wikipedia.org/wiki/People%27s_Mojahedin_Organization_of_Iran#Operations_Shining_sun,_Forty_Stars,_and_Mersad [본문으로]
- Geschichte der gegenwart, Mourning as Resistance. On a Symbol of the Revolutionary Movement “Woman Life Freedom” https://geschichtedergegenwart.ch/mourning-as-resistance-on-a-symbol-of-the-revolutionary-movement-woman-life-freedom/ [본문으로]
- 중앙일보, 이란 겨냥 군사옵션 열어둔 트럼프 “대규모 함대 이동, 상황 주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99765 [본문으로]
- 자주시보, '팔레비 재건' 외치는 이란 반정부 시위의 배후는? https://www.jajusibo.com/69391 [본문으로]
- Tudeh Party of Iran, 『Name-ye Mardom نامه مردم』, No. 1951, https://www.tudehpartyiran.org/wp-content/uploads/2026/01/1251.pdf [본문으로]
- MENA Solidarity Network, Tehran bus workers: ‘workers must lead fight for liberation, not authoritarian forms of power or foreign states’ https://menasolidaritynetwork.com/2026/01/12/tehran-bus-workers-workers-must-lead-fight-for-liberation-not-authoritarian-forms-of-power-or-foreign-state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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