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결혼과 투쟁의 메들리: 비수도권 최초 성소수자 혼인평등소송의 당사자들을 만나다
4월 8일 대구·부산·울산의 영남권 3개 광역자치단체에서는 동성 부부의 혼인신고 불수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3건의 혼인평등소송 기자회견이 동시에 열렸다. 비수도권 최초로 제기된 혼인평등소송의 당사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각각 대구와 울산에서 성소수자이자 활동가로서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며 결혼과 투쟁의 메들리를 써 나가는 임아현과 오승재를 《도모》가 인터뷰했다.
- 먼저 《도모》 독자들을 위해 각자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승재: 안녕하세요. 오승재라고 합니다. 올해 27살이고 지금은 별정직 공무원(오승재는 현재 이태원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주)입니다. 얼마 전에 울산에서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남편과 혼인신고를 했고요. 반갑습니다.
아현: 만 서른이고요, 대구에서 태어나서 파트너 진아와 함께 지금도 대구에서 살고 있는 임아현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웃음)

- 네, 어차피 바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서요(웃음).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두 분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궁금해하실 독자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각자 그간 어떤 삶을 살아오셨으며 언제, 어떤 계기로 '내가 성소수자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커밍아웃을 비롯한 삶의 궤적을 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현: 승재는 언제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알았어요?
승재: 저는 아주 옛날? 그냥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때부터 은연중에 '나 남자를 좋아하네' 했던 것 같고요(웃음). '게이'라는 말을 사실 좀 늦게 알았어요. 고등학교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네요. 사실 고등학교 때에는 여성인 친구들한테 고백을 몇 번 받았었는데 거절하는 이유를 대면서 "내가 게이라서" 하면 오히려 핑계라고 생각할까 봐, 너무 혼자 그런 걸 신경쓴 나머지 거절할 때도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커밍아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맥락을 설명하자면 먼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제 선배 나이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그 때부터 사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대입 논술전형 준비라는 명목으로 한겨레 구독도 하고, 청년유니온 등의 행사에도 나가 보다가 세월호 1주기 집회 때 처음 무지개 깃발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무지개의 의미 정도는 한겨레 덕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그 때는 가서 말을 붙이거나 하지는 못했고요. 그러다가 2015~16년 박근혜 퇴진 당시 사회운동이 굉장히 활발해지는 상황에 마침 고 3이라 공부도 하기 싫고 해서 행성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1 모임을 처음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관심도 더 갖게 되고, 행성인 활동을 하며 '커밍아웃이 갖는 사회적 의의가 있구나'란 생각을 하고 나서 (커밍아웃을) 하게 된 거죠.

아현: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제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그 때 처음 생긴 거죠. 저는 그 때부터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이미 깨달아 버렸는데, 그 때 인터넷의 힘으로 뭔가 청소년이 봐서는 안 될 것 같은(웃음) 레즈비언 콘텐츠들을 일찍 접했고요. 아무튼 그 당시에는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인식에 더해서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정도밖에 제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즈비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커밍아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한 것 같아요.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조금 친해지면 그런 친구들한테는 거의 '무차별 난사'식으로 다 커밍아웃하고(웃음).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커밍아웃이라는 게 그들에게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게 열심히 여자를 만나면서 살다가도, 아무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서울' 대학에 가야겠다는 정도의 목표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만 해도 입학사정관제 비중이 컸기 때문에 대외활동이 필요했는데 저는 그 당시에 PD가 되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반영된 생각이 아니었나 싶지만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대외활동을 해 봐야겠다 하는 와중에 마침 학교 뒤편에 '영화·영상캠프'를 한다는 전단지가 붙어서 찾아가 봤더니 거기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청소년 '동지'들을 키우는 단체였던 거예요. 약간 불건전한(웃음). 지금은 그 단체가 사라지기는 했는데, 어쨌든 그런 계기들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 지난 4월 8일 대구, 부산, 울산 등 영남권 주요 광역자치단체들에서는 구청의 동성 커플 혼인신고 불수리에 불복하는 3건의 '혼인평등소송'이 같은 날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비수도권 지역 최초로 전개되는 혼인평등소송으로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요. 이 소송이 구체적으로 어떤 소송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아현: 결혼하는 사람들이 혼인신고를 하잖아요. 혼인신고의 근거조항이 되는 법률이 이제 민법과 가족관계등록법인데, 정확히 몇 조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민법상에는 '결혼을 남자와 여자가 한다'는 조문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근거가 될 수 없음에도 그 법 조항을 근거로 해서 혼인신고를 불수리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이건 잘못됐다는 거죠. 그래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구청의 혼인신고 불수리에 대한 불복 신청을 가정법원에 내는 게 지금 진행되고 있는 혼인평등소송입니다.
다만 혼인신고 불수리에 대한 불복은 다른 소송들이랑 좀 달라서 '비송'이라고 하는데요, 흔히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소송절차와 달리 법률적으로는 이의신청에 해당한다고 하더라고요. 판결이 아닌 인용이나 기각이라는 결정이 나오는 건데, 법리적인 부분은 변호사 분들이 훨씬 말씀을 잘 해 주실 테고 저희로서는 혼인신고를 하고 불수리 통지서를 받은 당사자들로서 국가를 상대로 불복소송을 하고 있다고 혼인평등소송의 기본적 개념을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승재: 아현이 말해 준 내용을 약간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민법상으로 18세가 된 사람은 결혼을 할 수 있고 18세가 안 되었더라도 특정 연령 이상인 경우에 부모가 동의하면 결혼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결혼이 유효하게 성립하려면 당사자 사이에 결혼하겠다는 의사가 합치되어야 하죠. 여기다가 근친혼 금지, 중혼 금지까지가 조항에 있거든요. 그리고 (앞선 조항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가족관계 등록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혼인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게 민법 내용의 전부인데,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동성 간의 혼인신고를 금지한다거나, 이성 간만 가능하다거나 하는 명시적인 조항은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제 불수리 통지서에는 "현행법상 수리할 수 없는 혼인신고이므로 불수리한다"고 쓰여 있는데, 원래 행정기관에서 처분을 한다는 건 어떤 법의 몇 조 몇 항에 의거하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적어 주게끔 되어 있잖아요. 법으로부터 위임을 받아서만 처분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현행법'으로 퉁쳐서 굉장히 모호한 근거를 대고 있고, 헌법의 평등권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법률에도 정해진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 불수리는 위법하다는 이의신청의 개념인 거죠. 즉 법원이 시·군·구 공무원들에게 가족관계에 대한 사무 처리 권한을 위임해 준 건데 이를 적법하게 행사하지 않았으니까 법원에서 직접 바로잡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소송의 재밌는 점은 만약 법원이 인용을 하잖아요. "너희가 잘못했으니까 바꿔라" 하면 행정청 공무원들은 항고할 수 없어요. 그냥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용을 안 한다면 우리는 항고를 할 수 있는데요(웃음) 아무튼 일반적 소송과는 그런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한편으로 비수도권 최초로 혼인평등소송을 진행하게 된 지역이 영남권이라는 점도 타 지역에서 보기에는 특별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영남권이라 하면 '보수적'이라는 이미지가 굉장히 강한데, 어떻게 영남의 세 커플이 이렇게 모일 수 있었나요?

승재: 동성혼주의자들의 모략입니다(웃음). 농담이고요. 사실 이 소송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모두의 결혼2에서 고민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재작년 10월에 동성 부부 11쌍의 혼인평등소송을 수도권에서 함께 진행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지역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 수도권 중심으로 활동이 진행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소송을 위해 모인 11쌍이 모두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던 부부였던 것이고요.
사실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은 성소수자운동의 대원칙이자 대인식이기도 한데요, 그런 측면에서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도 가시화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소송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도 다양한 지역의 법원에서 판단을 받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고요. 아무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좀 더 다양한 지역에서 이런 혼인평등소송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한편으로 저는 이 부분도 사회운동적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지금 성소수자운동에서 반 발짝, 한 발짝 정도는 멀어진 상태거든요. (아현: 저도 그래요) 다음 주에 행성인에서 무슨 '조상님 활동가 특집'(웃음) 같은 걸 진행한다고 해서 가는데, 거기에도 '이전 활동가'라고 써 뒀더라고요. 아무튼 그런데, 그럼에도 계속 사회운동의 자원이나 네트워크에 기반해서 다른 분들과 관계맺음을 이어가고 소통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사회운동이 필요로 할 때 저희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필요한 자원이나 관계망이 어디에 있을까를 좀 더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소송을 하기로 하면서 농담으로 "아니 호남 것들이 먼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했어요(웃음). 호남권에서 활동하는 성소수자 활동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야 결혼 안 하냐?" 이런 실없는 소리도 하고.

- 당연하겠지만 혼인평등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은 '결혼'에 대한 결심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텐데요. 결혼을 결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쉬운 일이 아닌데, 특히 한국과 같이 동성혼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고 세간의 시선조차 곱지 않은 사회에서 동성 부부로서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계기와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되셨나요? 어느 쪽이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궁금합니다.
아현: 근데 이건 저희 둘 다 비슷할 것 같아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물론 극적인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되니까. 내가 여생을 보내면서 누구와 함께 살게 된다면 이 사람이 내 반려자가 되겠지 하는 자연스러운 생각 정도였고. 저 같은 경우에는 결혼에 대해서 어차피 가족, 친지들과 함께하는 결혼식을 하게 될 거니까 그 때를 위해서 빌드업을 해 가는 과정 정도로 생각해 왔는데, 제 친구 활동가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너네 어차피 결혼할 거 아니냐, (소송을) 하자, 이렇게 얘기하지 말라고 그랬는데(웃음) 하여튼 저한테 결혼은 꽤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승재: 맞아요. 사실 결혼이라는 게 동성과 이성을 떠나서 은연 중에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지, 막 운명처럼 무슨 꽃가루가 날리고 바람이 불어서 결혼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저는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받으면서 그 때 결혼의 의사를 좀 더 확실히 갖게 되기는 한 것 같네요.3 애초에 피부양자 등록을 하려면 '내가 이 사람과 사실혼의 의사가 있다'는 내용과 증인들의 보증을 함께 제출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지, 혼인신고를 포함해서 뭔가 엄청나게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때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을 하면서, 사실 그게 진짜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이성 사실혼 배우자를 가진 사람이 피부양자로 등록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절차인데 회신만 조금 오래 걸렸을 뿐이죠. 근데 그게 인정되고 정말 등록이 되는 걸 보면서 '진짜 별 게 아니네'라는 생각을 했어요. 혼인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렇게 큰 차이가 없는 거라면 나도 언젠가 운동이 부르면 해야지' 이런 마음에서 생겨난 것 같습니다. 사실 운동이라기보다도, 뭔가 누군가 용기를 한 번 내야 될 시점이 온다고 하면 그 때 내가 나서야지 정도. 근데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고(웃음). 그걸 제외한다면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아현 말처럼 살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이 사람이라면 계속 살아도 괜찮겠다, 날 때리지는 않을 것 같고, 적당히 같이 밥도 먹고 농담이나 낄낄대면서 그냥 살다가 흰 머리나 뽑아 주면서 같이 묻히면 되겠다' 이런 정도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현: 저도 완전히 동의합니다. 저는 지금 동거인을 만나기 전에는 사실 혼인신고라든지 결혼식이라든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 친구를 만나고 나서 아빠한테도 커밍아웃을 했는데요. 그 전에는 그냥 이렇게 적당히, 열심히 회피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가족과도 갈등이나 대립을 최소화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만나고 나니까 얘가 이제 결혼식에 미쳐 있는 거야(웃음). 그래서 그와 많은 것을 맞춰 가려고 하다 보니 너무 자연스럽게 결혼하게 된 것 같아요.
진아는 지난 윤석열 퇴진 집회 현장에서 발언할 때 커밍아웃하면서 정체성을 드러냈고, '이 집회 현장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발화로 대구에서 여러 번 인터뷰를 하고 그랬었거든요. 그 시점부터 이 세계에 '데뷔'한 셈이 됐고(웃음) 저는 그런 면에서 한참 전에 데뷔를 했던 격이기 때문에. 어쨌든 동거인도 그런 방향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저도 이미 나서 있는 사람인데다가, 대구 지역에서의 커뮤니티라거나 상호 간에 같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차피 많기도 하니까 '이왕 하는 김에 유난스럽게 하자'고 해서 혼인신고도 하고, 이런저런 기자회견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 것 같습니다.
-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 혹은 결혼 결심을 이야기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으로 가족을 꼽곤 합니다. 혼인신고서를 접수하고 혼인평등소송을 제기했을 때, 각각의 가족 분들의 반응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아현: 저는 우선 경상도의 딸이고, 저희 엄마, 아빠 모두 아주 충만한 경상도의 소울을 가지고 계시고(웃음). 이런 것을 전제했을 때, 일단 저는 2022년에 《너에게 가는 길》을 보고 엄마한테는 커밍아웃을 했었어요. 반면 아빠한테는 작년에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도 구두로 한 게 아니라 대구 지역신문인 영남일보에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는 기획기사에 성소수자 가족으로 인터뷰를 하게 됐거든요.4 그 지면을 그냥 캡처해서 카톡으로 보낸 게 아빠에게 처음 커밍아웃한 거였어요. 통보였죠. 다행히 아빠가 응원하겠다고 했는데, 구두로는 지금까지도 한 번도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얘기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나서는 지역언론 뉴스민에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엄마·아빠한테 쓰는 편지'라는 내용으로 기고를 했는데5, 그 링크를 그대로 가족 카카오톡 채팅방에 보냈어요. 앞으로 내가 기자회견도 할 거고 혼인평등 소송도 할 거고, 바빠지고 유명해질 거고 TV도 많이 나올 거라는 식으로 썼는데,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더라도 응원해 달라는 맥락이었고요. 사실 경상도 사람들한테 편지를 쓴다는 건 거의 뭐 죽기 전이에요(웃음). 죽기 전에 마지막 편지 쓰는 거야. 결혼 건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드렸는데, 그 편지를 보낸 게 3월 중순쯤이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문제로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편집장: 진짜 경상도스럽네요) 그래도 엄마는 계속 챙겨보고 계신 것 같아요. 지난주에 갔는데 "요새 좀 바쁘게 당기더라" 하시더라고요.
승재: 저도 사실 큰 반응은 없었는데, 이게 별로 (부모님 입장에서) 크게 실감나지 않으시는 면도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반응을 크게 한다는 게 부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시는 것 같아요. 좀 다양한 맥락이 있지 않을까 하고 저도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 결혼을 한 다음 무엇이 바뀌었나요. 자신에게 있어서, 퀴어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나요.
승재: 저는 일단 직장에서 꽤 많은 게 바뀌었어요. 원래 제가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커밍아웃을 거의 안 했었는데, 커밍아웃이라는 게 안 해 봐서 모르시겠지만(웃음) 상당히 골 때리거든요. 어디 가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 제가 사실"로 시작할 수도 없고. 타이밍을 항상 봐야 하는 건데, 동료 조사관한테 결혼 소식과 기자회견 소식을 사내 경조사 게시판에 좀 올려 달라고 부탁을 했죠. 누구나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인데, 오승재 조사관의 결혼을 축하한다. 그런데 동성 혼인신고로 불수리되어서 오늘 기자회견을 하러 갔다. 이렇게 올리니까 전 회사가 다 알게 되어서 난리가 난 거죠. 축의금도 많이 들어오고, 기관장부터 부서장, 동료 조사관들에게까지 격려와 축하를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게 좀 달라진 점인 것 같고요.
그 외에는 이제 자연스럽게 '남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유부남이라는 정체성이 생겨서 좀 더 행실을 조심하게 된다는 점? (웃음) 아,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는 나름대로 반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역 언론에서도 보도가 꽤 나왔고, 개인적으로는 지역 시민사회단체 분들이 많이 연대해 주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울산 같은 경우에는 현재 퀴어 단체가 없는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떤 한 케이스로 이렇게 나선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지역사회의 큰 일로 받아들여 주시고 연대해 주신다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현: 저는 혼인신고를 하면서 뭐가 엄청나게 바뀌었다기보다는, 그 전에 이 사람과 내가 결혼생활을 하겠다고 여겼을 때부터 뭔가 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신축 아파트인데, 입주할 때 같이 전자제품도 고르고 하면서 굉장히 신혼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그 때를 기점으로 저와 와이프가 같이 살아가는 부부의 형태를 꾸렸고, 그 때 참 많이 싸우기도 했죠(웃음). 혼인신고 이후에 달라진 게 있다고 한다면 승재처럼 지역 시민사회 선배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대단히 응원을 받는, 그런 것들이 많았고요.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건, 인스타그램 친구들 중에 학교 다닐 땐 잘 몰랐다가 나중에 서로 팔로우하게 된 중학교 친구들이 있거든요. 평상시에는 거의 서로의 게시물에 반응하지 않는 그런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너무 축하한다고 얘기해 주는 게 엄청 반가웠습니다. 사실 저는 중학교 때 제 커밍아웃 횟수에 비례해서 당연하게도 엄청나게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시절이 엄청 즐거운 시절로 기억에 남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그 친구들은 제 과거와 맥락을 아는 친구들이잖아요. 나의 역사와 나의 과거를 아는 친구들이 나를 응원하려 그 메시지를 애써 보내준 게 너무 감사했고, 마치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치유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 '지역'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닌 지역,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더욱 '보수적'이라 여겨지는 영남권에서 성소수자 커플로서 살아오셨고 또 다양한 활동을 해 오셨는데요. 이번 소송도 비수도권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기도 합니다. 각 지역별로 어떤 특수성을 느끼시나요? 지역에서의 성소수자 운동에 있어 힘든 점 혹은 오히려 지역이기에 더욱 가능한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승재: 저는 사실 동네에서는 걸림돌이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다 별로 거리낄 것 없이 생각하는 거예요. 뭘 물어보지도 않고, 사실은 그냥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웃음). "아 맞나" 이러고 그냥 넘어가는 거죠. 그렇긴 한데, 기자회견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저는 오히려 지역사회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친구들도, 가족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경상도는 꼭 이름을 불러 주거든요. "승재야" 이렇게 불러요. 사실 서울에는 별로 그런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래서 나름대로의 정도 느껴지고요.
한편으로 울산 같은 경우에는 노동운동이 아직까지 활발한 지역이라서 이번 기자회견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조금 아이러니한 점은 노동운동의 활발함과 '대공장 노동자의 커밍아웃'이 조금은 다른 영역인 것 같다는 점입니다. 배우자 같은 경우에는 이번 소송을 하면서 가명으로 언론 홍보에 참여했는데, 이 분도 사실 그렇게 클로짓(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주변에 공개하지 않는 성소수자: 편집자 주)이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주변에서 다 알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노동운동의 활동가로 여겨지는 이 사람이 그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는 게 약간 아이러니한 거죠. 대공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는 젊은 노동자가 정체성을 밝히고 활동한다는 게 공장 안에서도 그렇지만 사실 노동운동 안에서도 여전히 어려운 일로 여겨지고 있다는 건 지역사회의 노동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부여받은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현: 저는 대구라는 지역에 오래 살아 오면서 딱히 이 지역이 엄청나게 보수적이어서 (내가 성소수자라고 할 때) 사람을 밀어내는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어요. 특히 성소수자 관련 이슈에 대해서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말인데, 주변 아저씨들이 저 같은 사람이 열심히 결혼 운동한다고 하면 아마 "아가씨들 열심히 하는데 한번 해 주이소" 하실 것 같다고 말하거든요(웃음). 지역의 (정치적) 보수성과 성소수자 이슈는 조금은 다른 맥락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사실 제가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었던 자원이 어떻게 보면 대구의 보수성이라고도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면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누군가의 바운더리라는 개념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대구는 그게 엄청 강한 곳이라서 누군가가 대구 사람인지 아닌지가 많이 중요하고 내 사람인지 아닌지도 중요하다는 문화가 있거든요. 그런 대구에서 태어나서 대구 사람들과 쭉 살았고, 지역성을 가지고 돌파할 수 있다는 게 제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대구 사람들이 제 편을 들어 줄 거라고, 믿을 만한 언덕이라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저한테는 이 지역이 주는 장점인 것 같습니다.
승재: 무슨 소리예요, 대구는 신세계(백화점)도 있고 완전 도시잖아요. 울산은 지하철도 없고(웃음) 하지만 저는 그래도 울산이 좋습니다.
- 두 분 다 진보정당에서 성소수자 정치에 대해 고민하신 경험이 있습니다(임아현은 전 청년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 오승재는 전 정의당 대변인으로서 모두 2022년 지방선거 출마 경험이 있다: 편집자 주). 그 경험과 고민이 지금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요? 한국에 성소수자 정치가 더 뿌리내리고 진보정당이 더욱 성소수자들의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현: 저는 2022년 지방선거에 구의원 후보로 출마했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당 활동을 하면서 지역 선배들 사이에서 나의 역할이 없다는 걸 답답하게 여겼고, 청년 선대위원장이라거나, 심지어 나도 SNS를 잘 아는 게 아닌데 홍보나 이런 것만 해야 되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뭔가 더 잘 해야 할 것만 같은데, 하는 그런 생각도 같이 들었죠. 저는 사실 2018년에 선거사무장을 했었고 당 활동도 해 오면서 이제는 그 다음으로 스텝업을 하고 싶은데 그런 역할이 안 올 것 같아서 출마를 했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4년 동안 저는 당에서의 활동을 거의 안 했고, 여러 풍파를 거치면서 그 때의 동료들도 다 당을 떠나서 즐겁고 힘차던 그 때의 동력으로는 (당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거죠. 지금 하고 있는 분들과는 경험적인, 시대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꾸 조언하는 형태가 되는 것도 조금은 불편하고.
하여튼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왔는데, 요즘에는 혼인평등운동을 하면서 당사자로서 기자회견도 하고 이러저러한 준비도 하면서 '나는 아직 당사자로서 기능하고 싶구나, 나에게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구나' 이런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과거에는 20대의 정치인으로, 정당인으로서 누군가를 대표해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역할의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나 자신도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고 해결해 나가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걸 활동으로 풀어나가고 싶었는데, 물론 퀴어 동아리 같은 활동들을 하기는 했지만 그 때의 대구에서는 그걸 활동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 만큼의 돌파구들이 없었던 거죠. 어쨌든 지금은 돌고 돌아서 나는 여전히 당사자로서 할 게 더 많다는 생각을 지금은 다시 하고 있습니다.

승재: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오히려 저는 동성혼 법제화 운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러니까 소기의 목적과 성과 달성에 가까워질수록 일종의 도전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까지 진보정당이 성소수자 인권과 정책에 관해서 가져 온 스탠스는 양당이 말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말한다, 양당이 없는 입장을 우리는 가진다 정도였거든요. 지금 제3자로서 본다면 이보다 더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는 거죠. 진보정당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넥스트 레벨로 가려면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체감 가능한 메시지나 정책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팔로업이 가능하게끔 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미국은 동성혼 법제화가 되었지만 여전히 성소수자운동과 당사자 정치의 몫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유색인종 트랜스젠더의, 이주민 성소수자의 권리 운동이 지속적으로 화두가 되고, 그런 식으로 늘 영역이 남아 있어요. 그것은 보통 계급과 연결되어 있거나 내가 바꿀 수 없는 이중적, 삼중적 정체성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인 것이고요. 그런 문제일수록 보수 양당 정치가 해결할 수 없거나 의의를 두지 않는 문제들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영역들에 있어서 진보정당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는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정치인을 키우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법을 통해서 변화를 모색하는 방식의 종착지는 결국 또 입법부거든요. 결국에는 국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어떤 제도화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다시금 역할을 요구받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만의 사례를 보면 그렇죠. 보수정치나 소위 반성소수자 운동은 국민투표를 통한 부결이든, 다른 제도나 특별법을 입법하는 방식이든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들의 전략을 모색할 텐데, 그에 대응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물론 진보정치가 원내에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정치와 사회운동의 가교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지금 제대로 되고 있냐는 점에서는 조금은 아쉬운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지난 2024년 7월 대법원은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한 바 있습니다. 제도적 변화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투쟁으로 어떻게든 변화를 만들어 온 것이 성소수자운동의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혼인평등소송의 당사자이자 성소수자 활동가로서 두 분이 생각하시는 향후 한국 성소수자운동의 전망, 그리고 만들어나가고 싶은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아현: 저는 그냥 열심히 살고 싶고요, 결혼만 되면 땡이예요(웃음). 농담이고요.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고, 그렇게 할 수도 없죠. 물론 그렇게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게 모든 사람들의 최종 목표가 될 수야 있겠지만, 한편으로 저는 지금 우리의 결혼을 다큐로 만들려 하고 있는데요. 결혼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다큐에 담게 되는 것에 약간의 가책이 있나 봐요. 그럼 결혼을 안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런 질문들이 따라붙어요. 결혼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고, 계속 투쟁하겠죠. 무엇이든. 성소수자가 기본적으로 누리는 시민성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앞으로 추진해야 할 것들이 당연히 많습니다.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들이나 혹은 파편화되어 있는 여러 성소수자들이 정치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거나, 지역의 주체가 되어 연대하면서 활동한다거나 이런 것들이 특히 지방에서는 너무나도 전무한 상태예요.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지역이라면 기껏해야 거기 오는 사람들끼리 조금 만나는 정도? 근데 퀴어문화축제에 가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성소수자들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좀 더 문화적인 맥락으로 마이너리티, 소수자들의 결집이 가능한 작은 커뮤니티를 계속 지역에서 만들고, 그런 것들이 좀 느슨한 안전망으로 작동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대구에서 쭉 역할을 하고 싶어요. 사실 그냥 나는 나대로 사는 거고 내가 재밌는 걸 하고 사는 건데, 다만 재밌는 것들을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형태의 성소수자들, 사람들이 그걸 통해 그래도 이 세상이 나에게 다정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다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이 있죠.

승재: 사실 저는 질문의 전제에 좀 동의하지 않아요. 일단 늦진 않다. 사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너무 빠르다, 지금 멀미 난다(웃음) 싶기도 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에 저는 '인식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사실 15~20년 전만 해도 성소수자운동이 굉장히 무력해져 있었거든요. 특히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정부 후기부터는 차별금지법도 좌절되고, 서울시 인권헌장도 사실상 폐기되고. 그리고 성소수자운동 같은 경우에는 사실 노동운동만큼이나 부고가 많은 운동이어서 좌절감과 우울감이 늘 있는 사회운동 중에 하나란 말이죠.
인터뷰를 하러 오는 길에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예를 들면 호주제 같은 경우에는 1953년부터 존재한 법이었는데 최종적으로 폐지된 게 2008년이에요. 폐지 후 대체입법이 최종적으로 시행될 때까지 55년 걸렸고, 동성동본 금혼 조항도 1960년 민법 규정에서 시작되어서 1997년까지 37년 동안 있었단 말이죠. 이렇게 생각했을 때 사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성소수자 운동이 시작된 것을 1990년대 후반 정도라고 가정하면 지금 한 30년차 정도가 된 거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굉장히 많은 성취를 이루고 있는 사회운동 중 하나다. 사실 그 전에는 그냥 다 '호모'였고 '치마씨'(레즈비언 중 펨을 이르는 비칭: 편집자 주), '바지씨'(레즈비언 중 부치를 이르는 비칭: 편집자 주)였는데 지금은 최소한 성소수자라는 단어가 중립적인 표현으로서 이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했잖아요. 꼭 피부양자 소송 승소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곳곳에서 굉장히 다양한 성과들을 이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과를 만들어낸 대만의 경우에도 동성혼 법제화 투쟁은 가장 뜨겁고 큰 투쟁이었습니다. 저는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고 봐요. 다만 이 과정을 어떻게 가져가느냐가 앞으로 성소수자 운동이 유의미한 사회운동으로서 성과를 계속 내느냐, 아니면 동성혼 법제화라는 결실을 맺고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느냐를 정하는 중대한 기로라고 봅니다. 계속 대만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저는 대만의 《비 온 뒤 맑음》이라는 혼인평등소송 관련 책을 항상 추천해요. 모든 사회운동가들한테 정말 역동성을 주는, 울림이 있는 책이거든요. 대만의 동성혼 법제화 과정도 실패의 연속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얘기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래서 저는 이 운동에 어쨌거나 당사자로서 참여하기로 한 이상, '이 과정을 어떻게 우리가 잘 만들어 갈 거냐'는 질문에 스스로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는 1인분을 하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성소수자 운동에 그런 정도의 기여를 하고 싶고, 그 이상은 제가 역량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남편 몫까지 같이 해야 한다면 2인분까지는 해 볼게요(웃음).
- 여전히 수많은 동성 커플이 결혼을 고민하고, 또한 제도의 벽 앞에서 좌절하곤 합니다. 어쩌면 이 인터뷰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부부로서의 삶을 꿈꾸는 모든 동성 커플들, 혹은 그냥 내 주변을 비롯한 모든 성소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현: 제일 어렵네요. 뭔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제 삶을 돌아보자면 누군가가 나를 보고 "되게 힘들었겠다" 이러면 사실 짜증이 난단 말이예요. 근데 실제로 안 힘든 건 아니야. 근데 누군가가 나를 연민하는 건 또 되게 짜증이 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진짜 아무 힘듦이 없는 것처럼 대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짜증이 난단 말이죠.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것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스트레스가 되고 많이 괴로운 것인데, 어디 이야기할 데도 많이 없었고요. 그럼에도 '내가 성소수자로서 대표되기 때문에 씩씩하게, 당당하게 살아가야 된다'는 그런 주문 혹은 나름의 이미지메이킹을 저는 계속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커밍아웃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20대 내내 그런 게 족쇄처럼 묶여 있었지 않나 싶고요.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쨌든 저처럼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만약 나의 20대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고, 너무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 주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얘기를 하고, 다 털어놓고, 무게감을 덜어놓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공동체들을 계속 만들면서 살아가는 게 제 나름의 생존 비법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계속 커밍아웃을 했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이 안 맞는 사람을 일찍 쳐내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계속 애를 썼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야 너 되게 운 좋다" 이러면 물론 그것도 맞는데, 그냥 진짜 운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저도 이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맥락을 모르고 납작하게 말하면 사실 열 받기는 해요. 그렇지만 결국 그런 노력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끔은 억울하다 하더라도 삶의 자원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잘 만들어나가는 것이 나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20대의 저에게 하는 말이었어요.

승재: 저도 동의해요. 본인을 지탱할 수 있는 삶의 안전망으로서의 관계를 잘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결혼을 결심했는데 고민하시는 분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적어도 한 명의 안정적인 관계망이 있는 상태인 거잖아요. 그러면 제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미 그 관계는 명명된 관계로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들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 제도가 막혀 있는 게 불만이시면 이제 모두의 결혼에 전화하셔서 소송을 하시면 되고요(웃음). 내가 나서기 싫으면 제도를 기다리시면 되고, 그러면서 응원하고 후원해 주시면 더 좋고요.
그런데 저는 그 관계망이 단순히 애인이나 파트너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친구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동네에 지나가는 아저씨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는 그 관계를 하나하나 형성하는 것이 그 다음 관계를 겹겹이 형성하고 결국 얽혀 있는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거든요. 처음 아무런 관계망이 없이 울산에 내려왔을 때는 사실 남편과도 '이 사람이랑 평생을 같이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조금은 더 불투명한 관계였어요. 돈이 없어서 같이 살려고 내려오기는 했는데(웃음). 아무튼 그런 관계들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게 생각보다 별 게 아니더라고요. 소송도 그렇고, 기자회견도 그렇고. 사실 한 사람이 살면서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있나요. 이것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인 거예요. 사실 지금이 지나가면 5년쯤 뒤에는 '그 때 그랬던가' 싶고 추억 같기만 할 것 같네요.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 여정에 함께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저도 이 여정을 시작하면서 불안과 고민들이 있었는데 앞에서 시작해 준 11쌍의 부부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두 쌍의 부부, 그리고 활동가 선생님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쉽지는 않겠지만 마음을 먹으시면 오히려 일생에 있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한번 하실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동료로 오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 진행 및 편집: 이도영(도모 편집장)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각주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 https://lgbtpride.or.kr/xe/ [본문으로]
- 모두의 결혼 https://www.marriageforall.kr/ [본문으로]
- 도모, 동성 배우자 피부양자 자격 인정, 그리고 그 후의 세상 https://www.domoleft.net/entry/%EB%8F%99%EC%84%B1-%EB%B0%B0%EC%9A%B0%EC%9E%90-%ED%94%BC%EB%B6%80%EC%96%91%EC%9E%90-%EC%9E%90%EA%B2%A9%EC%9D%B8%EC%A0%95-%EA%B7%B8%EB%A6%AC%EA%B3%A0 [본문으로]
- 영남일보, [넓어지는 가족 스펙트럼]"우리가 선택한 가정…이성커플 결혼 혜택 부럽지 않아요"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50528022160649 [본문으로]
- 뉴스민, [결혼일기] ① 우리, 동성결혼할 거다 https://www.newsmin.co.kr/news/12809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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