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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 일반

노란봉투법과 AI의 시대, 산별교섭의 새 가능성을 상상하다

by Domoleft 2026. 5. 4.

[사회] 노란봉투법과 AI의 시대, 산별교섭의 새 가능성을 상상하다

지난 3월 시행된 노란봉투법은 원청과의 교섭을 가능케 했지만, 그만큼 노동조합에 새로운 과제들을 던지고 있다. 한편 AI와 자동화는 노동시장의 구조와 조건을 뒤흔들고 있다. 이 시대에 노동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노란봉투법 이후의, 그리고 AI의 시대 속 산별교섭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오래된 덕트'

 

만약 '한국형 산별교섭'이 시작된다면 그건 어디서부터일까. 국회 토론회장? 노사정 회의장? 대산별노조의 중앙 교섭장? AI 전환 대응 정책 포럼? 말은 좋다. 이름도 크고, 현수막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나는 한국형 산별교섭이 그런 곳에서만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동네 중국집의 낡은 덕트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짜장면 먹으면서 교섭 하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짜장면이 아니라, 그 짜장면을 만드는 사람이 숨을 못 쉬는 주방이다.

 

과거 노동조합 상근활동가로 있을 때 선배들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네 중국집에서도 노동조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가 일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대기업 공장이든 사무실이든 배달 플랫폼이든 동네 중국집이든, 자기 조건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환기가 안 되면 환기를 요구하고, 위험하면 안전을 요구하고, 부당하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당연한 일이 가장 작은 사업장에서 가장 어렵다는 데 있다.

중국집의 짜장면

 

실제로 내가 노동조합에서 일할 때 그런 일이 있었다. 투쟁은 이겼다. 요구가 그리 거창하지 않았던 덕일지도 모른다. 대폭의 임금 인상도, 추상적인 고용 보장도 아니었다. 단지 오래된 덕트 때문에 환기가 안 되니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 일이다. 사람이 일하다 숨을 쉬기 어렵다, 그래서 숨 좀 쉬게 해달라고 한다. 이보다 단순한 요구가 있을까?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에서 이런 요구는 말해지기도 전에 사라진다. 불만으로 남거나, 하소연으로 흩어지거나, "여긴 원래 이래"라는 말 속에 묻힌다. 그러니까 이상한 건 짜장면집에서 노조를 하는 일이 아니다. 이상한 건 사람이 숨 쉬게 해 달라는 요구조차 말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회다.

 

비단 오래된 덕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일터에서는 냉난방이 문제이고, 어떤 일터에서는 물류센터의 더위와 추위가 문제이며, 어떤 일터에서는 설명 없이 올라간 KPI(핵심 성과 지표)가 문제다. 요구는 다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밑바닥은 같다. 노동자가 자기 몸과 시간을 어떤 기준 아래 놓을 것인지를 스스로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바로 여기에 이 시대 노동 문제의 이상한 풍경이 있다. 가장 작은 사업장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가 가장 큰 질문을 꺼내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자기 조건을 말할 수 있는가?" 동네 중국집의 덕트는 단순한 환풍기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조합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노동조합의 출발점은 언제나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몸'이다. 숨 쉬는 몸, 다치지 않아야 하는 몸, 너무 덥거나 춥지 않아야 하는 몸, 부당한 기준에 혼자 놓이지 않아야 하는 몸. 그래서 중국집 이야기는 사소한 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조합이 가장 필요한 곳일수록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워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AI와 자동화가 전면화되면 이 문제는 더 '웃기게' 변한다. 물론 사실은 하나도 웃기지 않다. 어떤 노동자는 업무에 필요한 AI 툴의 구독료를 개인 돈으로 낸다. 그런데 그 도구로 높아진 생산성은 회사의 성과가 된다. 돈은 아래에서 나가고, 성과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알고리즘이 평가 기준을 바꾸고, 또 어떤 곳에서는 자동화 이후 높아진 속도와 기준선이 아무 설명 없이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기술은 새롭지만, 구조는 낡았다. 아니, 실은 낡은 구조가 새 기술이라는 외피를 입고 다시 나타난 것에 더 가깝다.

 

이제 노동조건의 변화는 한 회사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어떤 사업장에 AI가 도입되면 그 여파는 인근 업종의 인력 수요, 하청 구조, 플랫폼 단가, 지역 상권과 일자리 질서 전체로 번진다. 한 기업의 기술 도입이 한 지역의 노동시장 구조를 흔들고, 한 직무의 자동화가 다른 직무의 노동자에게 더 빠른 속도와 더 높은 기준을 강요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노란봉투법 이후의 질문들

2025년 8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 출처: 연합뉴스

 

2025년 8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이 지난 3월 시행된 이후 현장의 상황은 여러 모로 달라졌다. 모든 원청이 자동으로 사용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는 주체에게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노동쟁의'의 범위도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 결정'까지로 넓어졌다. 여전히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닌 특수고용노동자 문제를 비롯해 수많은 한계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법의 의의를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을 테다.

 

노란봉투법 통과 이전의 질문이 "원청과 플랫폼을 어떻게 교섭장으로 불러낼 것인가"였다면, 이제 질문은 조금 달라져 "그 교섭을 요구할 노동자 주체와 대표성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가 된다. 그간 원청은 하청 뒤에 숨어 왔고, 본사는 가맹점 뒤에 숨으며 플랫폼은 알고리즘 뒤에 숨어 왔다. 정부와 지자체도 다르지 않았다. 지원사업과 기준 변경으로 노동조건을 흔들면서도, 교섭의 자리에서는 자신들이 책임 주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노란봉투법은 이 흩어진 책임을 다시 묶어내어 묻기 위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이 열렸다고 사람이 저절로 모이지는 않는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한 힘은 기존 조직의 간판이 아니라, 흩어진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를 공동의 기준으로 만들고 스스로 대표성을 세우는 데서 나온다.

 

이제는 질문을 좀 더 디테일하게 바꿔 볼 때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만이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가"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노동자는 늘 보호받는 대상이어야만 하는가" "작은 사업장 노동자는 누군가가 대신 말해 줘야만 하는 사람인가" 여기서 전환적 사고가 필요해진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을 하는 구조'일지 모른다. 이 말은 노조를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노동조합의 의의를 단지 법적 형식을 갖춘 단체로서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기 이해를 함께 형성하고, 대표를 세우고, 요구를 만들며 교섭하는 원래의 존재의의로 다시 되돌려 보자는 뜻이다.

2024년까지의 노조조직률 및 조합원수 추이. 출처: 매일노동뉴스

 

한편 "작은 사업장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깥의 누군가가 '대신 싸워 주는' 구조가 되면, 당사자는 보호받는 존재가 될 수는 있어도 자기 권리를 스스로 행사하는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대신 싸워 주는 순간 사람은 주체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 된다. 그것은 구제일 수는 있어도 해방은 아니다. 그렇기에 미조직 노동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선한 대리인'이 아니라 작은 자기정치의 경험이다. 스스로 모이고,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대표를 세우고, 스스로 그 대표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무엇을 요구할지 정하는 구조. 바깥의 노조와 활동가와 지자체는 그것을 지원할 수 있지만 대신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힘은 스스로 행사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친목 모임이나 정보 교환방이 아니라 흩어진 노동의 경험을 공동의 요구로 바꾸는 커뮤니티다. 같은 산단에서 일하는 노동자, 같은 업종에서 쪼개져 일하는 노동자, 같은 플랫폼의 평가 알고리즘에 휘둘리는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를 개별 불운이 아니라 공동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말하면 불만이지만 여럿이 말하면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익명 게시판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곳에서는 하소연이 가능하고 공감도 쌓이지만 기준은 잘 생기지 않고, 대표성이 만들어지거나 분노가 교섭으로 번역되지는 더더욱 않는다. 결국 지금 필요한 커뮤니티는 익명 발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발화를 지역과 업종의 최저선, 공동의 요구, 대표성과 협상력으로 바꾸는 구조여야 한다.

 

물론 이런 구조에도 위험은 있다. '말 잘 하는 사람'만 대표가 되거나, 지자체가 이를 자기 치적으로 흡수하거나, 커뮤니티가 또 다른 권위로 굳어질 수 있다. 그래서 대표는 순환 가능하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어야 하며, 협상 내용과 결론은 당사자들에게 공개되고 승인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계속 설명되며 수정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넓은 노동조합, 더 넓은 산별교섭을 상상하자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존 노조의 역할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기존 노조가 대표권을 자기 안에만 가두면, 노조 바깥의 노동은 계속 바깥에 남는다. 하지만 바깥의 기준이 낮으면 내부의 교섭 역시 압박을 받게 된다. 미조직 노동자의 조건이 무너지면, 조직노동도 언젠가는 그 무너진 기준을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대'는 결국 공감뿐 아니라 이해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바깥의 최저선을 올리는 일은 안쪽의 조건을 방어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존 노조는 '대신 말해 주는' 조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더 넓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말하고, 요구를 만들고, 대표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대표 구조가 이 문제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최저임금과 사회적 대화의 장에는 노동의 이름이 있지만, 작은 사업장·하청·플랫폼·미조직 노동자가 자기 언어로 자신을 대표할 통로는 여전히 좁다. 문제는 제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제도가 바깥의 노동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간과하기 쉽지만, 그 통로를 넓혀내기 위한 출발점은 이미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근로자복지관, 노동자 지원시설, 노동복지센터 같은 공간들이 그것이다.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조금만 확장한다면, 이들은 단순한 '상담 창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고, 의제를 모으고, 대표를 세우는 커뮤니티의 허브가 될 수 있다.

서울특별시 곳곳의 노동자 종합지원기관 지도. 출처: 서울노동포털

 

지자체가 노동자를 대신 대표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대표될 수 있는 조건은 만들 수 있다. 온라인 토론·결정 공간, 교통과 돌봄 지원, 지역 산업 데이터와 협의 채널은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인프라다. 중앙정부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지역이 만남의 장소를 만든다면, 중앙정부는 그 장소가 권리행사의 공간이 되도록 법과 예산의 바닥을 깔아야 한다. AI 도입과 자동화 전환으로 노동조건이 바뀔 때 사전 고지, 설명 책임, 재배치와 교육·훈련, 비용 전가 금지 같은 최소 기준의 전국적 보장을 명시해야 한다. 이 구조가 실제 힘을 가지려면 책임 있는 주체들이 교섭장에 나오도록 강제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법이 길을 조금 넓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바뀌진 않는다. 흩어진 사람들이 각자 한숨만 쉬고 있으면, 원청도 플랫폼도 지자체도 알아서 나오지 않는다. 길은 걷는 사람이 있어야 길이다. 흩어진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를 공동의 기준으로 바꾸는 순간, 그 길은 현실이 된다. 산별교섭 역시 아래에서부터의 기준이 만들어져야 한다. 덕트, 냉난방, KPI, AI 비용 전가 반대와 같은 작은 요구들이 노조 바깥의 노동자들에게 '우리 업종에서는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최소선이 될 때, 산별교섭은 종이 위의 제도가 아니라 현실의 힘이 된다.


중국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산별교섭

결국 다시 중국집의 오래된 덕트로 돌아오게 된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처음 요구한 것은 대단한 선언이 아니었다. 낡은 덕트를 바꿔달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그 덕트는 단순한 환풍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작은 사업장에서도 노동자는 자기 조건을 말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AI 시대라고 하여, 혹은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다고 하여 노동의 출발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일하는 사람이 당당히 자기 조건을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다. 기술은 커지고, 기업은 더 멀리 움직이고, 비용 전가는 더 빠르게 번진다. 그렇다면 노동도 더 넓어져야 한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직 가입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일하고 있고, 흔들리고 있으며, 또한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까지 포괄하여 함께 말하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한국형 산별교섭은 중국집에서 시작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집에서 시작되는 것은 교섭이 아니라 감각이다. 노동자는 보호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일터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감각. 노란봉투법이 열어젖힌 작은 문을 그 감각이 통과할 때, 그 때 한국의 노동도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김성은

비정규직 노동운동 활동가.

어디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지만, 멈춰서야 할 때는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