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말 (2026년 8월호)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길


웹진 《도모》 8월호가 독자들에게 발송되는 8월 4일 오늘로부터 5일 전인 7월 31일은 두 명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의 기일이었다. 프랑스의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 그리고 한국의 조봉암(1858~1959)이 그 주인공이다.
장 조레스는 현대 프랑스 좌파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인물이다. 1859년 제2제국 치하의 프랑스에서 태어난 조레스는 철학 교수로 일하다가 20대 후반인 1885년 하원인 국민의회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처음 조레스는 중도개혁 세력인 공화주의자들(아돌포 티에르 등)과 정치활동을 함께했지만, 1880년대 후반 당대 광산노동자들의 실상을 보고 사회주의자로 전향한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은 1871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이자 '프랑스 혁명 전통의 최후'였던 파리 코뮌의 패배와 붕괴 이후 지리멸렬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코뮌을 제압하고 다시 들어선 제3공화국 정부는 십여 년간 사회주의자들을 거세게 탄압했다. 1880년대 초반 티에르 대통령의 이른바 '대사면령'으로 사회주의 정당들의 정치활동이 재개되었지만, 분열한 좌파 내의 노선적 대립은 여전했다. 일부는 주류 정치세력인 공화주의자들에 합류했고, 좌파의 기치를 지키고자 했던 정파들은 프랑스 사회주의노동자연맹(FTSF), 프랑스 노동자당(POF), 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당(POSR) 등으로 분열했다. 개별적으로 선거에 도전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군소정당 혹은 원외정당 신세를 면치 못했다.
초기 공화주의자들과 함께했던 조레스가 독립적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전향한 후 가장 핵심으로 삼았던 지상과제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창당'이었다. 파리 코뮌의 후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증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힘 속에 당대 좌파 정파들은 혁명노선에 대한 이견부터 그에서 비롯된 감정의 골로 인한 지속적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조레스는 1902년 FSTF와 POSR, 본인을 비롯한 일부 무소속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프랑스 사회당(PSF)을 창당하고, 이는 1905년 오늘날 사회당의 직접적 전신이 되는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의 창당으로 이어진다.
조레스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창당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당시에도 가장 이름 있는 정치인이었던 스스로의 권한과 역할을 축소하며 타 정치세력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SFIO의 통합 과정에서 다양한 정파들이 참여했고 이들의 정치적 이견은 여전히 100%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SFIO는 명확한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되는 데 성공하고 이후 1936년 총선에 이르러서는 제1당의 위치에 오를 정도로 주요 정치세력으로 도약하게 된다. 현대 프랑스에서 극우의 도래 속에서도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신인민전선(NFP)이 제1당을 차지하는 힘의 저변에는, 공화주의자들로부터 '무용한 시도'라 조롱받았고 극좌파들로부터는 '반동'으로 비난받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좌파정당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조레스의 공이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조봉암은 상대적으로 한국의 우리에게, 특히 도모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더 익숙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의 역할을 축소하는 주류적 역사교육과 해석에서 조봉암은 '사법살인의 피해자', '이승만 독재의 반대자' 정도로만 소개되고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단순한 '체제의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조봉암의 정치운동을 소개하는 것은 그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의 활동가였던 조봉암은 8.15 광복 이후 박헌영·김일성 등과 결별하며 한반도 남쪽에 남기를 선택한다. 당시 조봉암의 판단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그보다 더욱 살펴보고 싶은 것은 남한에 남은 조봉암의 정치활동이 어떤 것이었느냐다. 일반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남한행을 선택한 정치인들과 달리, 조봉암은 '민주주의 내 사회주의의 구현'을 목표로 한 정치활동을 일관성 있게 전개했다.
농지개혁 등으로 자신의 방향성을 실현시키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조봉암에게 있어, 일제 시기 한반도 사회주의 운동의 본산이었던 조선공산당의 대다수 정치인과 활동가들이 월북을 택한 상황 속에서 그가 집중하지 않을 수 없던 지상과제는 장 조레스의 그것과 동일하게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이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지리멸렬하게 나뉘어 있던 남한의 혁신정당(당대의 진보정당) 세력을 규합하여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대중적 진보정당이었던 진보당을 창당한다.
조봉암이 창당 과정에서 마주했던 난관과 딜레마 역시 장 조레스의 그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점차 혁신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던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과 사법살인 이전에도 이들을 공산주의자라 비난했고, 창당 과정에서 혁신정당운동의 다른 한 축이던 서상일 계열의 민주혁신당파가 이탈하며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한다. 1958년 진보당의 해산 이후 한국 진보정당운동은 40여 년 동안 독자적인 대중정당을 구축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이후 진보정당운동 초창기 활동가들이 참고하고 반성했던 것들 중 당시 진보당의 경험과 역할, 무엇보다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위한 조봉암의 헌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봉암과 장 조레스에게는 모두 그들이 실제 했던 것과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다. 조레스는 주류 정계의 공화주의자들과 계속 함께하며 그 '내부에서' 좌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고, 조봉암 역시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했던 만큼 자유당, 혹은 한국민주당이라는 보수정당에서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을 수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것은 명확하게 '독자적 진보정치'였고, 또한 '가보지 않은 길'과 '해보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금 독자적 진보정치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명확한 원칙과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신념이 그들에게는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한국의 진보정치는 또 한 번의 갈림길에 서 있다.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참여한 정당들과 그렇지 않았던 '독자적 진보정당'들 간에 하나의 전선이 그어진 이후, 노동당·녹색당·정의당은 '사회대전환 연대회의'를 구축하여 새로운 독자적 진보정당의 창당 기획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연대회의의 구성원들은 분명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으며, 현실의 벽을 체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획이 일정하게 공전할지언정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는 명백한 인식을 가진 주체들이 각 당과 세력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또한 특히 정의당의 입장에서, '가본 길'의 끝에 또 한번의 종속과 독자성·정체성의 상실이 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오는 8월은 정의당의 9기 지도부를 선출하는 당직선거가 있는 달이다. 지금 한국의 진보정치가 마주한 과제는 명료하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창당'이 바로 그것이다. 조봉암과 조레스가 겪었던 것처럼, 이 길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동시에 지난한 어려움과 상호 설득의 과정이기도 하다. 걸었다가 돌아온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그 길을 다시 걸어갈 것이냐, 해보지 않은 일과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갈 것이냐. 그 선택을 앞두고 있는 정의당에 대해, 도모를 읽는 모든 독자들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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