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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 편집국/편집장의 말

편집장의 말: '비효율의 동맹'을 구축하자

by Domoleft 2026. 7. 2.

편집장의 말 (2026년 7월호)

'비효율의 동맹'을 구축하자



지난 《도모》 6월호를 발간하고(6월 2일) 한 달간 가장 뉴스 지면을 크게 달군 소식이 있었다면 단연 '올림픽공원 시위'일 것이다. 6월 3일 밤 선거 종료와 동시에 알려진 잠실 일부 투표소에서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모았고, 당일 밤부터 올림픽공원은 "재선거"를 외치는 수많은 시위대의 행렬로 뒤덮였다. 그로부터 며칠 간 선관위라는 행정기관에 축적된 무능과 부패는 다양한 보도를 통해 낱낱이 드러났고,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각 정당들과 시민사회는 논쟁과 토론을 이어갔다.

 

그런 논쟁들이 이어지는 동안, 정치적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재선거"만을 외치자고 주장하던 종류의 최초 시위자들 중 대부분은 해소되지 않은 분노를 안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재선거 구호는 '대진연'의 선동"이라 주장하며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달고 "부정선거 이재명 탄핵"을 외치는, 좀 더 익숙한 종류의 시위자들이었다.

 

백가쟁명식 토론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시위의 성격에 대해서도, 향후의 대응 방식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결국 이 시위가 극우의 놀이터로 변해 버린 현재 그런 한 달간의 주장과 토론들이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에 무언가 남긴 것이 있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왠지 답변이 궁해진다는 점이다. 이 사태에 대해 《도모》에 무언가의 분석을 올리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아마도 그건 다른 진영의 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따져 본다면, 이 사태로 정말 '이익'을 본 주체들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잠실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집에 간 사람들은 실제로 참정권을 침해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선관위는 자신들의 행정적 무능과 부패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손해를 입었다(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을 타겟 삼는 극우적 음모론에 빌미를 제공하는 선관위의 행태를 막지 못했다. '아스팔트 극우' 세력은 결국 올림픽공원을 점유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와 동시에 시위가 사그라들면서 자신들의 전술에 확장성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상황 속에서 정말 이익을 본 것은 아마도 구독자 수를 늘린 일부 극우적 성향, 혹은 친민주당 성향의 인플루언서와 유튜버들뿐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보다 나에게 좀 더 놀라웠던 것은 내 주변 지인들의 반응이었다. 인스타그램 등지에서는 계엄 당시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지인들 중 적잖은 수가 올림픽공원에 갔다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업로드했고, 일부는 극단적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의 게시물들을 올리기도 했다. 좀 더 정확해지자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것을 지양하던 종류의 사람들이 이 사태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좀 더 놀라웠다. 그건 아마도 극우와 그들의 주장이 명백한 일반민주주의의 훼손이라는 정세를 만나 일정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리라. 그보다 위험한 것이 있다면, 진보정치가 그 정세를 전유하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우 -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파시즘 - 의 정치방식은 늘 '순수한·순결한 우리'와 '우리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저들'을 구분짓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과 사회주의는 보편주의라는 같은 출발점을 공유한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파시즘과 달리 사회주의는 보편성을 확장하는 싸움을 한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다수 대중에게 어필 가능한 종류의 정체성, 즉 인종주의·민족주의·(보수적)젠더관을 통해 빠르게 보편성을 획득하고 배타적 전선을 긋는 파시즘과 반대로 사회주의는 그 보편성의 범위에 더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고 전선을 다시금 계급으로 돌려놓고자 한다.

 

이 사태를 거치며 진보정치 내부에서도 '재선거'를 방침삼을 수 있는지, 혹은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했다. 재선거를 주장해야 한다는 말, 재선거를 주장하는 것이 극우의 편을 들어 주는 주장이라는 말이 오갔다. '재선거를 하자'는 주장의 현실성과는 별개로, 그런 주장에 일정한 정당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정의당과 녹색당은 '일부 무효 재선거'를 주장하는 것으로 당론을 정리했고, 노동당은 중앙선관위 시스템 개혁과 정치개혁의 전면화에 집중한 입장을 발표했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정치세력의 입장은 정세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재선거 자체에 대한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목표의식을 갖고 어떤 논거와 방식으로 재선거를 주장할 것이냐(혹은 하지 않을 것이냐)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진보정당의 이 사태에 대한 입장에 '본래 참정권을 침해받아 온 이들', 즉 장애인·성소수자·청소년·외국인 유권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은 유의미했고, 앞서 말한 '보편성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문제제기였다.

 

사후약방문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금 와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런 담론을 실제 대중에게 보여 줄 만한 정치기획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진보정당들이 실제로 투표를 하지 못한 보통의 유권자들과 함께 앞서 말한 사람들 - 즉 장애인, (지선 선거권이 있는) 외국인, 청소년들을 모아 합동으로 선거소청을 제기했다면 어떠했을까. 비록 그것이 퍼포먼스에 불과하고 설령 실제 재선거가 있을 확률이 아주 낮을지언정, 최소한 일반민주주의 훼손이라는 보편의 문제를 토대로 다양한 정체성들을 엮어내는 모습을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건 극우의 정치방식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전유가 된다.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극우가 '순수한 일반 유권자'들의 참정권이 '중국-북한-민주당'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방식의 배타적 전유로 일정한 성과를 올린다면, 이 쪽의 전유에서 핵심은 결국 다시 '공공성'이다. '효율성'을 이유 삼은 관료주의의 부패와 무능함은 필요 투표용지 추산 및 분배에 실패하여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불러왔다. 마찬가지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이 효율성에는 유권자 대비 100%의 투표용지를 인쇄할 여유가 없는 만큼 외국인 유권자를 위한 선거공보물을 만들 여력도, 휠체어 사용 유권자를 위해 투표소에 경사로를 설치할 여력도 없다.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선관위의 이 문제는 결코 선관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효율성만을 기조로 한 관료주의의 폐해는 쌓이면 쌓일수록 더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선관위에 대해 아무리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개혁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들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피해자, 효율성의 피해자, 관료주의의 피해자들 간의 '비효율의 동맹'을 만들어내는 것은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이다. 투표용지가 부족하여 투표를 하지 못한 '일반 유권자', 휠체어를 타고 투표소 계단에서 가로막힌 장애인 유권자, 명백히 투표권을 가지고 있지만 후보자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는 데다가 투표를 하려 들면 혐오에 가로막히는 외국인 유권자들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진보정치의 역할일 것이다. 효율성에 가려진 모든 이들의 삶을 엮어내고 '비효율의 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며, 점증하는 사회적 참사를 막아내는 것이고, 공공성의 역할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수의 동맹'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 누구인지에 따라 - 즉 그 동맹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동맹'인지, '비효율의 동맹'인지에 따라 미래는 바뀐다. 야만의 미래가 아닌 평등의 미래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진보정치를 기대해 본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