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핵잠수함, 달콤함으로 포장된 공멸의 길
트럼프와의 협상을 통해 핵잠수함 도입을 선언한 이재명 정부. 그러나 핵잠수함의 나비효과는 이미 동아시아 전역을 전쟁으로 한 발짝 더 몰아넣고 있다. 핵잠수함의 전략적 무효성부터 핵잠수함 도입이 불러올 동아시아 군사화의 거대한 위협까지, 오늘날 진보가 핵잠수함 도입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하는 이유를 살펴본다.
핵잠수함이라는 '선물'에 취한 한국 사회
2025년 10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국의 핵추진잠수함(핵잠수함, 핵잠) 건조 승인을 알렸다. 전날 APEC 정상회담에 맞춰 치러진 한미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핵잠수함 건조 및 보유 승인을 요구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등장한 트럼프의 답변은 수많은 국내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단연 대중적 관심의 초미에 섰다. 대부분의 언론과 평론가들은 관세 협상의 '선방'과 함께 소위 '자주국방'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꼽혀 온 전략자산 핵잠수함의 도입까지 이끌어낸 회담의 성과를 고평가했다. 대중적 반응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당 친화적인 유튜버나 평론가들은 물론, 심지어는 이재명 개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핵심 콘텐츠로 삼는 우파 성향 커뮤니티에서도 "핵잠만은 잘했다"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핵잠수함 도입이라는 '선물'에 한국 사회가 도취해 있는 사이, 본래도 그리 주류적 정서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던 반전·반핵이라는 가치는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공론장에서는 과거 성주 소성리의 주한미군 사드(THAAD) 배치 논란 당시와 같은 대규모 반전, 반무기 운동은커녕 핵잠수함의 의미 자체에 대한 논쟁마저도 대부분 사라졌다. 최근 NL(자주파) 계열이 주도하는 이른바 '반트럼프' 운동 역시 핵잠수함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는 있지만 '민족국가로서의 자주성'이라는 대전제 아래 트럼프의 경제주권 침탈에 대한 비판에 훨씬 크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핵잠수함 비판이 그리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핵잠 도입은 결코 단순히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핵잠수함의 도입은 어떤 문제를 야기하며, 진보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몇 가지 중요한 쟁점들을 함께 살펴보자.
'국방계의 한강버스', 그러나 훨씬 위험한
모든 비판은 비판 대상의 속성을 알아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핵잠수함에 대해 비판하려면 먼저 핵잠수함이 어떤 무기이며 전술·전략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오해 중 하나는 핵잠수함 또는 원자력잠수함이라고 불리는 이 무기가 핵무기를 탑재하고 투발하기 때문에 '핵잠수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기가 '핵잠수함'으로 불리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핵을 투발해서가 아니라(물론 핵미사일을 직접 투발하는 핵잠수함도 있다) 내연기관과 축전지를 사용하는 재래식 잠수함과 달리 핵분열 반응을 통해 생성된 핵연료를 기동 수단으로 삼는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핵잠수함이 기존 재래식 잠수함 대비 갖는 확고한 우월성은 핵연료의 높은 효율성으로 인해 연료 재보급 및 충전 없이 매우 긴 시간 동안 잠항하여 작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영해가 넓거나 작전반경이 광대하여 오랜 기간 작전 수행이 필요한 국가들에게 이는 전략병기로서 큰 장점이 되었다. 1955년 미 해군이 최초의 핵잠수함인 SSN-571을 도입하며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 리>의 잠수함 이름에서 따 온 '노틸러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병기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미국 이후 러시아(당시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 강대국들은 그 전략병기로서의 우월성에 주목하여 모두 핵잠수함을 도입한 바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역시 핵잠수함 도입은 훌륭한 일 아니냐'라는 반응이 쉽게 나오는 것 역시 이해할 법하다.

그러나 '전략병기'라는 이름에서부터 우리가 이미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전략병기의 유용성이 그 자체의 성능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무기를 도입하고 사용하는 국가의 군사전략·전술에 부합하는지 여부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한국 해군의 핵잠수함 도입은 '우도할계(牛刀割雞,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쓴다)'라는 격언에 다름아니다. 타국과의 유일한 물리적 접경이 북한(조선)과의 군사분계선인 한국의 특성상 한국군의 작전교리는 여전히 유사시 '북진'을 상정하고 있을 정도로 항상 육상작전에 무게를 두어 온 반면, 해군 작전의 방점은 육군을 보조하며 영해로의 침공을 방위하는 데 있다. 이는 한국의 영해가 넓지 않아 작전관리 및 보급이 쉬우며 북한 영해로의 침투를 가정하여도 작전 후 복귀 및 재보급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특히 한국 해군의 최대 견제대상인 조선인민군 해군의 전력은 최근 건조 중이라 발표한 핵잠수함1의 존재를 가정하더라도 전력 비교에서 압도적 열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국경 남반부를 한국과 접한 북한은 동해 주둔 함대와 서해 주둔 함대 간 연합작전이 불가능하고, 잠수함을 포함한 주요 함정의 체급이나 수에서도 한국 해군에 크게 밀린다. 잠항 및 작전 시간을 핵심 우위로 삼는 핵잠수함이 전 세계를 작전지역으로 삼는 미군, 남중국해 전체가 작전지역인 중국군과 달리 북한을 대상으로 한 한국군의 군사작전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이유다. 세계적으로 적지 않은 도시들이 수상 대중교통을 운영하고 있지만 수심이 얕고 강 양안을 건널 수 있는 수많은 다리와 터널이 있는 서울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버스'가 무의미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국의 핵잠수함은 이미 가히 '국방계의 한강버스'라 할 만하지만, 문제는 시민들의 세금을 잡아먹을 따름인 한강버스와 달리 이 쪽은 단지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비할 바 없이 커진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와 친 여당 성향 군사전문가들 역시 대북 군사작전에 있어 핵잠수함의 무효성을 인지하고 있다 가정한다면, 이번 핵잠수함 보유가 정말로 시사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역에 있어 한국 해군의 전략적 우위 확보다. 그러나 이는 최근 '신냉전'의 격화와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대중(對中) 정책과 맞물려 양대 강대국의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의 위험성을 오히려 극대화시키는 선택이다.
현재 일본 다카이치 내각과의 대치에 집중하고 있는 중국의 우선순위에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없지만, 과거 사드 논란 당시 중국의 강경한 반발을 떠올려 본다면 미국과 밀착하여 핵잠수함을 보유하게 된 한국군은 중국에 있어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평양을 타격하는 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핵잠수함을 한국군이 보유한다는 것은 한국 해군(과 여전히 한미연합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잠재적 타격 대상이 평양에서 이제는 베이징과 상하이, 남중국해와 대만해협까지 분명히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단순히 '중국의 눈치를 왜 보아야 하냐'는 국민감정의 문제로 소비하지만, 동아시아 화약고의 한복판에 끼어 있는 한국에게 중국이 느끼는 위협은 다시 우리에게 더 큰 실존적 위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의 대미 협상 결과와 핵잠수함 보유 선언은 단순한 군사력의 강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포위 및 봉쇄전략에 명백히 동조하겠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전쟁위기의 시대에 그 위기 속으로 한 발자국 더 빨려들어가는 선택이다. 지금 이 선택에 가장 환호하는 것은 미국 독점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세계 모든 곳에서 전쟁을 책동하고 있는 트럼프고, '한미일 동맹 강화'와 대만 유사시 개입을 명백히 천명하며 평화헌법의 개헌을 추진하고 일본의 군사화를 서두르는 다카이치다.

핵잠수함이 '자주국방'?
이런 와중 여당과 그 지지층 일각에서는 핵잠수함 보유를 '노무현 대통령의 숙원이었던 자주국방의 위대한 진전'이라며 칭송한다. 유도진 극동대 교수2,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3 등 최근 적지 않은 논자들 역시 이러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간 독자적으로 보유할 수 없던 전략병기를 한국군이 보유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이는 일견 일리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논리의 함정은 '자주국방'과 '군사력 증강'이 결코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주국방은 국방을 타국에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국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자주국방을 실현하지 못하는 군대도 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전략자산의 보유 여부, 그 자산의 무효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한국군은 여전히 그 전략자산을 자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이 없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십수년 간 한미관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임기 내 완수하겠다 선언했다.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자주국방이라는 관점에서 분명한 하나의 진전이지만, 설령 한국군이 전작권을 돌려받는다 하더라도 미국은 한국군이 가진 전략자산의 실질적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저농축우라늄 등 핵연료의 공급과 국내 재처리가 비록 트럼프의 허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한미원자력협정의 개정 사항에 해당되고, 협정 개정은 미 의회의 승인을 요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미국 측은 팩트시트 발표와 함께 "한미원자력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핵연료 사용과 재처리를 지지한다"는 언급을 남겼지만, 이 역시 원자력협정을 개정한다는 것인지, 의회에서 예외조항을 비준한다는 것인지 그 방식이 불분명하다.4 핵잠수함 건조에 수많은 절차와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 있을 미국의 중간선거, 대선에서의 정권교체까지를 감안한다면 여전히 핵잠수함의 실질적 보유 가능성은 불투명하고, 보유하게 되더라도 핵연료 문제는 여전히 미국의 방침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핵잠수함의 보유 과정과 실질적 운용에 있어서도 '자주'라는 말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앞서 말했듯 핵심은 결국 핵잠수함의 보유 자체가 '한미(일)동맹과 그 외부의 적'이라는 구도를 강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한국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택할 수 있는 '자주적 옵션' 자체가 현저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자주권'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는 미국 역시 한국군의 핵잠수함 보유를 분명한 대중 견제용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조나단 프리츠 미국 국무부 선임 부차관보는 지난 12월 3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포럼에서 "한국의 핵잠 건조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역내 위협들'에 대한 양자 협력의 명백한 사례"라 발언한 바 있다.5
핵잠을 보유하게 된 한국군은 과연 미국이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의 '역내 위협'이 극대화되었다고 판단할 때 미군 파병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견 '자주적'인 것처럼 보이는 핵잠 보유의 함정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전쟁위기의 시대에 언제든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과거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에 대해 역내 안보 리스크를 거론하며 앞장서 반대했던 현 집권여당 민주당이 사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안보 리스크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핵잠 보유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자주국방'이 지극히 근시안적이며 실체가 없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군비증강과 핵전력 확대, 동아시아 군사화의 위태로운 도미노

최근 몇 년간 전쟁의 시계는 냉전의 종식 이후 가장 세계대전에 근접하게 흘러가고 있고, 오늘날의 동아시아는 그 첨병에 있다. 그 어느 국가도 단지 자국만을 사고할 수 없는 세계화의 시대 속 한국의 안보는 더 이상 한국만의 안보가 아니다. 한국의 핵잠 보유 역시 비록 핵무기를 직접 보유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위태롭게 서 있는 동아시아 군사화의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하나의 손길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일본의 우익 정당 일본유신회는 얼마 전 다카이치 사나에와의 연정을 수립하며 공식적으로 '평화헌법 폐기와 군대 보유를 통한 보통국가화를 추진한다'를 연립정부 합류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수용하여 수립된 다카이치 내각은 과거 평화헌법 개헌을 반대하던 공명당이 연립 파트너로 존재하던 아베 내각 당시보다도 훨씬 더 군사화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다카이치와 유신회의 연정 합의에 '차세대 추진력을 갖춘 VLS(수직발사장치) 탑재 잠수함 보유 정책을 추진한다'의 항이 존재하는 것6은 이미 일본 우익 세력이 핵잠을 '보통국가화'의 중요한 카드로 여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차세대 추진력'은 원자력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고, 'VLS'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발사 장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핵잠 보유는 일본 우익 세력에게 '우리도 보통국가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하나의 거대한 근거로 작용한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1월 6일 인터뷰에서 "주변 국가들이 모두 핵잠을 보유하는 상황이 왔다"며 핵잠 보유 논의의 운을 띄웠다.7 비핵 3원칙과 원자력기본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발언이 공공연하게 등장한 시점이 트럼프의 한국 핵잠 보유 허가 직후라는 점에서 이미 동아시아 군사화의 거대한 도미노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대중 견제라는 목표를 위해 '한미일 동맹'을 추진하고자 하는 트럼프 행정부 역시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묵인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핵잠수함이 비록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은 아니더라도 핵무기를 만들고 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주는 하나의 플랫폼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재명 정부는 야권 일각의 '독자 핵무장론'에 대해 아직 선을 긋고 있지만, 핵잠 보유의 핵심인 핵연료 재처리는 핵무기의 핵심 원소인 플루토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 이미 핵연료 공급 제한만 없다면 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평가받는 한국에 걸려 있던 하나의 물리적 제한이 더 사라지는 것이다.
설령 미국의 핵우산과 주한미군을 포기하더라도 독자 핵보유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우익 자주파' 세력이 등장하고 정권을 잡게 된다면, 혹은 현재도 국민의 7할 이상이 찬성하는 독자 핵무장을 어떤 정권이든 포퓰리즘적 접근법으로 대하게 된다면? 한국의 핵무장은 가시권에 들어올 것이고,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막는 마지막 브레이크는 사라질 것이며, 동아시아의 핵사일로는 심화되는 전쟁위기와 함께 끝간 데 없이 확장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해서도 인정하되 추가 생산 동결을 전제로 협상을 시작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한국의 독자 핵무장은 결국 북한의 핵전력 확장에 대해 한국이 가지고 있는 비핵화라는 최대의 명분을 스스로 지워내고 한반도 전역에서 핵의 무한한 확산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자
소위 '파라벨룸'이라 불리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4세기 로마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쓴 <군사학 논고>에 처음 등장한 이 격언은 현대에 들어 9mm 권총탄 이름의 유래가 되거나 심지어는 필자가 근무했던 육군 부대 화장실에까지 붙어 있었을 정도의 대중적인 어록으로 자리잡았다. '파라벨룸'은 '힘에 의한 평화', 즉 평화를 지키려면 국방력 증가가 필연적이라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전제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격언이다.
이 격언은 그 자체로 수많은 논쟁을 수반해 왔지만, 설령 그 명제적 현실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현대에 '파라벨룸'이 발화되는 경우 그 중 대부분의 발화 의도가 정말 '평화의 확대'를 부각함이 아니라 '전쟁 준비의 정당화'를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기란 어렵다. 예컨대 지난 2022년 윤석열이 했던 "평화를 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발언8은 결국 스스로의 정권 유지를 위해 평화를 깨고 북한의 도발을 유도했다는 것이 계엄 이후 밝혀지며 그 진의가 증명된 바 있다. 전제와 판단의 도치는 필연적으로 전쟁 준비의 정당화를 위한 정세진단의 의도적 왜곡을 낳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빠진 '국방력 강화'의 함정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끝없이 전쟁의 원심력에 끌려가고 있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도 여전히 전쟁의 비참함을 다시 기억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내자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 줄기 희망이나 다름없다. 모두가 핵잠의 달콤함에 취해 있는 지금도 여전히 핵잠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은 지난 11월 4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핵잠수함 도입을 즉각 중단하라며 목소리를 냈다.9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 역시 "핵잠은 강대국의 환상에 취한 허영"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가고 있으며10 진보당 역시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핵잠수함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며 비판한 바 있다.11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원수폭피해자협의회 등의 단체들이 일본 정부의 '비핵 3원칙' 재검토를 강하게 비판하며 반대하고 있다.12 그러나 연결된 세계 속 이러한 운동들이 일국적 차원의 반대 운동에 머물러서는 큰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동아시아 전반의 비핵화와 반전평화 원칙의 재수립을 위한 국제적 연대가 지금 절실한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지난 80년 동안의 냉전, 그리고 근 3년 동안 격화되고 있는 '신냉전'은 수없는 전쟁위기를 낳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낳고 있지만,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끝없이 평화를 외치는 이들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은 그 어느 때에도 진정 평화를 원하는 이들에 의해 말해진 적이 없다.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자들은 항상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뿐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원하고 준비한다'는 솔직한 자기고백의 그럴듯한 포장일 뿐인 '파라벨룸'의 허위의식을 이제는 걷어치워야 한다. 평화를 위해 정말 준비할 것은 전쟁도 핵잠수함도 아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자.

이도영
전환 집행위원, <도모> 편집위원.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각주
- KBS 뉴스, '핵추진잠수함' 건조 공개했던 북한…‘적반하장’ 반발 왜?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410856 [본문으로]
- 오마이뉴스, 한국형 핵잠수함 건조 승인, 자주국방 노력의 결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78536 [본문으로]
- 경향신문, 자주국방 완성의 길, 핵추진 잠수함 확보의 필요성 https://www.khan.co.kr/article/202511122021005 [본문으로]
- 한국일보, 자주국방 견인차 '핵잠' 건조... 원자력협정 개정도 속도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415050001430 [본문으로]
- 해럴드경제, [사설] 한미협상 이행국면, 민간협력과 정부부처 효율대응 긴요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629517?ref=naver [본문으로]
- 중앙일보, 한국은 반대하더니...핵잠 눈독 들이는 일본, 반기는 美 속내 [이철재의 밀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76684 [본문으로]
- 해사신문, 일본의 ‘핵잠수함 논쟁’ 개시… 차기 잠수함 추진체계 선택 갈림길 http://www.haes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358 [본문으로]
- MBC 뉴스, "평화 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 준비해야" https://www.youtube.com/watch?v=5RHEe0Emslo [본문으로]
- 뉴스1, 평통사 '핵추진 잠수함 도입을 즉각 중단하라' https://www.news1.kr/photos/7581873 [본문으로]
- 한겨레, 김종대 “핵추진잠수함, 강대국 환상에 취한 허영”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226706.html [본문으로]
- 오마이뉴스, "원자력 추진 잠수함, 과연 필요한가"… 전문가들, 우려 목소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0844 [본문으로]
- 동아일보, 다카이치, 日 ‘비핵 3원칙’ 중 ‘비반입 원칙’ 재검토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51116/132775948/1?utm_source=chatgpt.com [본문으로]
'정치 > 정치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국이 불러온 것들, 조국이 남긴 것들 (0) | 2025.09.01 |
|---|---|
| '나중에'와 '다 했죠?'가 낳은 '인류 지속가능론': 김민석 총리 후보자의 차별금지법 망언에 부쳐 (3) | 2025.06.25 |
| 정치인 이준석은 '배나사'를 기억하는가? (0) | 2025.06.02 |
| 이준석의, 그리고 혐오정치의 정치적 파산을 위해 (0) | 2025.05.30 |
| 윤석열, 그 다음에는? (1) | 2025.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