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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 일반

방향 없는 실용주의, 무너지는 책임정치 - 이혜훈 장관 후보자 지명에 부쳐

by Domoleft 2025. 12. 31.

[정치] 방향 없는 실용주의, 무너지는 책임정치 - 이혜훈 장관 후보자 지명에 부쳐

이재명 정부의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지명이 논란이다. 내란을 옹호했을 뿐더러 긴축재정을 부르짖어 온 이혜훈의 장관 지명, 정말 대통령이 강조해 온 '국민통합'인가? 방향을 상실한 실용주의가 불러오고 있는 한국 정치의 본질적 위기를 지적하는 김윤기 전환 공동대표의 기고를 싣는다.


'콘크리트' 속에 굳어 가고 있는 정치

12월 29일 인사청문회에 참석하며 기자들 앞에 선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출처: 연합뉴스

 

"내란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불법적 행위'라는 실체를 당시에는 파악하지 못했다면서도, "정당에 속해 정치를 하면서 당파성에 매몰되어 위기의 실체를 놓쳤다"는 말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한 사과라고 주장하는 사람.[각주:1] 바로 지난 28일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지명된 이혜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30일 국무회의에서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긍정해 주며, 의견이 다른 게 불편함이 아니라 시너지의 원천"이라며 이번 인사의 의도를 설명했다.[각주:2] 이 대통령의 이른바 '콘크리트론'이 잊혀 가던 이혜훈을 다시 세상의 화제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그럴듯한 수사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월 "민주당은 원래 진보정당이 아니다. 진보는 정의당, 민주노동당 이런 데가 진보정당이다. 우리는 성장을 중시하는 '중도 보수' 정당이다"라고 했던 이재명 자신의 말을 기억해 내야 한다. '중도보수 실용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이 대통령은 '코스피 5,000'을 깃발로 삼고 과감한 부자 감세와 규제 완화로 내달리면서 국민의힘과의 경계를 지워 왔다. 이번 이혜훈 장관 지명은 그 거침없는 '경계 허물기'의 정점이자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 즉 정당 구도의 재편을 본격화하는 신호탄이다.

혹자는 이를 성공적인 외연 확장이라 하고, 혹자는 유연한 실용주의라고도 한다. 국민의힘이 '윤 어게인'의 늪에 빠져 극우적 퇴행을 거듭하는 사이, 거대 양당 사이의 유권자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이 전략은 정치공학적으로는 완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실용주의'의 퍼포먼스 뒤에서 어쩌면 한국 정치는 그 본질적 기능에 치명상을 입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임의 외주화, 꽃놀이패 이혜훈

지난 3월 세이브코리아가 주최한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서 연설하는 이혜훈. 출처: 세이브코리아 유튜브

 

이 대통령이 강조하던 '국민통합'의 원칙과 정의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상식적인 정치라면, 적어도 이혜훈 후보자의 첫 일성은 입각 소감이 아니라 계엄과 내란, 더 나아가 '윤 어게인'을 초래한 보수정권의 일원으로서 내놓는 처절한 사과와 반성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능력'과 '시너지'를 이유로 이혜훈에 대한 면죄부부터 발행했다. 과거의 실패와 과오에 눈 감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야합이다. '성장과 집권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는 잠시 접어둬도 좋다'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도 나쁘지만, 그 기준마저 이 대통령의 필요에 따라 정해진다는 측면에서 더 나쁘다.

한국 정치에서 '실용'은 이명박부터 떠올리게 하는데, 그의 종착역은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그렇다면 이재명의 실용은 무엇인가? 이는 방향을 설명할 수 없는 정략적 선택을 포장하는 만능키에 가깝다. 예산은 숫자로 표현된 철학이자 노선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으로 지난 수십년 간 재정건전성을 부르짖으며 민주당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보수 인사가, 기본소득 등을 핵심 정책으로 주장해 온 집권 세력의 살림을 맡게 된 이 기묘한 동거 속에서 예산안은 과연 누구의 철학을 담을 것인가? 당연히 대통령의 것일 텐데, 대통령과 철학을 공유하지 못하는 장관은 결국 정치적인 들러리거나, 꺼려지는 일을 대신 처리하는 바람막이로 전락할 것이다.

실제로 이혜훈 카드는 이 정부가 감당하기 곤란한 예산을 삭감하거나 구조조정의 악역을 떠맡게 될 청부업자이자, 국민의힘을 자중지란에 빠뜨리는 꽃놀이패다. '보수 경제통'이 휘두르는 칼질은 '건전재정을 위한 결단'으로 포장되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줄 것이고,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배출한 전문가를 공격할 명분을 잃은 채 내부 분열만 가속화할 것이 뻔하다. 결국 이 대통령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판 전체를 흔드는 능수능란한 통치술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판 '55년 체제', 고인 물은 썩는다

'각복전쟁'의 주역, 다나카 가쿠에이(좌측)와 후쿠다 다케오(우측)

 

결국 이 전략의 종착지는 자명하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1.5당 체제'의 완성이다. 국민의힘이 극우화되어 스스로 붕괴하는 사이, 민주당은 유일하게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자리잡으려 한다. 지난 총선에서 지도부 스스로가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다시 감행했던 위성정당은 단순한 의석 확보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선 승리에 있어 조금의 위험요소조차 배제하기 위해 포섭 가능한 소수정당을 포섭하고, 집권 후에는 그들을 여당의 '그림자 정당'으로 묶어두기 위한 명분과 구조적 토대였다. 이는 명백한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식 장기 집권 모델의 한국적 변주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과거 1955년부터 시작된 일본 자민당의 독주 체제, 이른바 '55년 체제' 에서 국민들의 투표는 무력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일본 제64·65대 총리)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제67대 총리)가 벌인 일명 '각복전쟁'처럼, 국가의 운명은 광장이 아닌 밀실에서 자민당 주요 파벌 보스들의 돈봉투와 지분 나눠먹기로 결정되었다. 1.5당제의 일당우위정당이 된 민주당이 이와 얼마나 다를까? 최근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재명-정청래의 당-정 대결구도와 김병기 전 원내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의 부패·비리 의혹은 이미 민주당이 그런 상황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상황에서 더욱 끔찍한 것은 구조적 부패다. 1988년 일본을 뒤흔든 '리크루트 사건'의 뇌물 리스트에는 당시 총리였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물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아베 신타로 간사장 등 자민당 정권의 심장부가 총망라되어 올라왔다. 고인 물은 윗물부터 썩기 마련이다. 심지어 당시 야당인 민사당의 쓰카모토 사부로 위원장마저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 사퇴했다. 거대 여당이 독주하며 주요 야당들에게 던져 주는 콩고물 앞에서, 야당은 감시와 견제의 고단한 역할을 포기하고 그 달콤한 유혹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재명 대통령이 꿈꾸는 '초거대 여당'의 서늘한 미래다.


견제 없는 독주 속, 밀려나는 노동자·기후위기·차별금지법

더불어민주당이 발족한 '충남·대전 통합 및 충청지역 발전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사진을 찍는 정청래 대표. 출처: 뉴스1

 

과거에는 '적폐청산', 현재는 '내란청산'을 앞세우는 민주당의 구호는 항상 '새누리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 퇴출'이다. 물론 국민의힘과 같은 시대착오적 극우 반공주의 정치세력이 사라져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국민의힘 퇴출의 전제조건은 '정치개혁'이다. 철학·노선으로 민주당과 경쟁할 건강하고 강한 야당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이 될 때까지는 특정한 세력을 대표하지만, 대통령이 되는 순간에는 모두를 대표해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말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부의 인사권으로 인사들을 - 심지어 그 인사들의 출신이나 이념, 지향, 내용은 신경쓰지 않고 단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 충원하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야합이자 정략일 뿐이다. 정부를 견제할 국회 안에 더 다양한 세력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선거제도와 정당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진짜 통합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대통령은 정치적 다양성 확대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인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논의되어야 할 단체장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광역·기초의원 대선거구제, 복수공천 금지 등의 정치개혁 과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오히려 주권자인 주민들의 의사들을 반영하기 지극히 어려운 조건임에도, 개발·성장주의를 자극할 대전·충남 통합이나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등 화제성 이슈들만 띄우고 밀어붙이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우리의 미래는 감시와 견제 없는 민주당 독주 체제여서는 안 된다. 다양한 목소리가 경합하고 토론하며 합의를 이뤄내는 정치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새로운 정치구조는 반드시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의견과 요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구조여야 한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혐오와 배제 등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까지 '주변부'로 밀려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는 진보야당의 부재는 과감한 탄소 감축이나 자산 불평등 해소, 차별금지법 같은 급진적이지만 절박한 의제들이 설 자리마저 빼앗았다. 이런 독주 체제가 강화된다면 앞으로도 민주당은 "중도층이 싫어한다", "경제가 우선이다"라는 핑계로 이 절박한 과제들을 끊임없이 유예할 것이다.


2026년, 정치가 정말 대변해야 할 것들

좌측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베트남 이주노동자 뚜안 사망 40일 추모 기자회견 / 홍천 양수발전소 건설 전면 중단 기자회견 / GM부품물류지회 집단해고 철회 및 고용승계 촉구 기자회견. 출처: 노동과세계 / 오마이뉴스 / 충청리뷰


보수는 파편화되어 거리로 밀려나고, 진보는 비현실적 세력으로 낙인찍혀 고립되는 현실. 그 한가운데서 대통령과 민주당은 '모두를 위한 정치'를 자처하지만, 정작 불평등과 기후위기, 차별과 혐오에 고통당하는 시민들의 삶은 그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 초유의 계엄과 내란 정국으로 시작되어 정권교체로부터도 다시 6개월이 지난 2025년을 떠나보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센 자들의 잔치에 숟가락을 얹는 기술도, 상대방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묘수풀이도 아니다. 정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이들의 삶을 돌보는 것이다.

 

혐오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베트남 이주노동자 뚜안[각주:3], 토건자본의 이해로 지역민들의 동의 없이 추진되는 양수발전소와 송전탑 건립 속에서 삶의 터전을 위협받고 있는 홍천 풍천리의 주민들[각주:4], 그리고 새해를 해고로 맞아야 하는 GM부품물류센터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각주:5] 이들의 곁을 지키고 대변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지금 '코스피 5,000'이라는 화려한 숫자와 '중도 장악'이라는 실체 없는 목표 앞에서, 정치의 본령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방향을 상실한 실용은 실용이 아니다. 그저 가장 약한 고리부터 끊어내고 달리는, 가장 잔인한 각자도생의 선언일 뿐이다.


김윤기

전환 공동대표, 전 정의당 부대표.


각주

  1. 한겨레, 국힘 금지어 “내란” 입에 올린 이혜훈…3번이나 반복한 속뜻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237199.html [본문으로]
  2. MBC 뉴스, 이 대통령, '이혜훈 논란' 정면돌파 의지‥"다름은 시너지의 원천" https://imnews.imbc.com/news/2025/politics/article/6789780_36711.html [본문으로]
  3. 한겨레21, 누가 25살 뚜안을 죽였나…실적 채우기 단속에 희생된 베트남 청년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360.html [본문으로]
  4. 프레시안, '양수발전 반대' 풍천리 칠십 노인들은 왜 전과자가 됐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111117201617280 [본문으로]
  5. 프레시안, "20년 일했는데 갑자기 버려졌다" 한국GM 하청노동자들의 절규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755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