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캄보디아와 한국: 거울을 마주한 문명, 혹은 정리된 야만의 초상
하루가 멀다 하고 캄보디아 범죄단지의 '야만적' 실상을 내보내는 언론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스스로의 야만성을 과연 직시하고 있는가?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가 드러낸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와 '우리 안의 범죄단지'를 비판하는 음성노동인권센터 박성우 상임활동가의 글을 게재한다.
만연한 분노, 사라진 성찰




APEC과 '핵잠수함', 혹은 새벽배송 문제 같이 쏟아지는 이슈에 어느새 또 다시 가려졌지만, 불과 몇 주 전까지 국내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캄보디아 이야기가 나왔다. 납치, 감금, 고문, 인신매매. 뉴스 화면에는 현지의 어둡고 좁은 방, 쇠사슬에 묶인 팔, 가려진 얼굴이 반복적으로 보여진다. 앵커는 "국민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이 반복될수록 마치 분노가 하나의 의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범죄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분노의 주체는 항상 '우리'이고, 언제나 '그들'을 향한다. 그렇기에 "그 나라 사람들은 왜 저러냐"는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오른다.
분노는 쉽다. 사유는 어렵다. 우리는 분노의 기술엔 익숙하지만 성찰의 언어엔 서툴다. 그래서 타인의 범죄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공포나 슬픔이 아니라 '비교'다. "우린 저들과 다르다, 저런 나라는 야만국이다"라는 비교. 그 비교는 곧 우월감으로 변하고, 우월감은 우리를 윤리적 존재로 만들어 준다. 그렇게 늘 한국 사회는 타자의 행위를 통해 자기의 윤리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그 윤리란 얼마나 허약한가. 윤리란 자기 안의 부정을 응시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타인의 악을 욕하면서 자기 내부의 악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했던 때가 떠오른다. 친구의 초대로 말로만 듣던 강남 테헤란로에 간 적이 있다. 인공폭포가 있는 휘황찬란한 아파트단지를 지나며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에 눈이 멎었다. 그러나 그 빛의 끝에는 어둠이 있었다. 간판 없는 오피스텔이 줄지어 있었고, 그 사이를 지나며 나는 물었다. "여기 뭐 하는 곳이야?"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점심 지나면 각국 미녀들이 나오는 아주 아름다운 동네지" 그 말의 무심함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불법이라던 성매매가, 그것도 도시의 중심에서 합법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커튼이 내려진 창문, 무표정한 경비원, 향수와 담배 냄새. 법이 금지한 일이 도시의 한복판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어지고, 도시의 세련된 표면 아래에는 인간의 몸이 자본의 언어로 거래되는 풍경이 있었다.


법이 금지한 일이 도시의 심장부에서 버젓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불법은 숨지 않는다. 사회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성매매, 불법파견, 하청, 임금체불, 불법수수료, 산업재해 은폐 - 그 모든 것이 한국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기름이다. 불법이야말로 합법의 전제조건이 된 사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의 안에서 '문명'을 자처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캄보디아를 욕한다. 프놈펜의 범죄단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납치와 고문이 이어졌다는 뉴스가 나오자 온 나라가 분노했다. "그 나라는 법이 없나?" "정부는 뭐 하고 있나?" "역시 동남아는 후진적이야" 하지만 그런 말들이 귓가를 스쳐 갈 때마다 나는 강남의 오피스텔을 다시 떠올린다. 인간의 몸이 거래되고, 불법이 제도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 숨쉬며, 자본이 윤리를 대신하는 그 장면.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이지만 작동 방식은 똑같다. 불법은 사회의 경계 밖이 아니라 중심에서 자라난다.
프놈펜의 범죄단지에서 음성의 직업소개소까지
나는 전국에서 외국인 비율이 두 번째로 높은 충청북도 음성의 작은 상담실에서 일한다. 문이 열릴 때마다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온다. 각자 사정들은 다르지만 표정은 같다. 피로, 불안, 그리고 체념.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는 말했다. "사장님이 돈 안 줘요. 내가 말하면 내보내요. 도망가면 불법 돼요." 어느 순간 그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는 상황을 인정해 버렸다. 하루 열두 시간을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황량한 숙소로 돌아간다. 그래도 그는 말했다. "괜찮아요. 한국은 그래도 안전해요." 하지만 그 '괜찮다' 속에 어떤 체념이 들어 있는지 나는 안다.

고용허가제는 그 체념을 제도화했다. 법은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용주의 손에 그들의 삶을 맡긴다. 고용주의 허락 없이는 일터를 옮길 수 없고, 사업장을 떠나는 순간 체류자격이 사라진다. 그 순간 그들은 '불법체류자'가 되고, 국가는 불법이 된 존재를 보호할 이유를 잃는다. 법은 그들의 자유를 봉쇄하면서도 그들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고용허가제는 불법을 막는 제도가 아니라 불법을 제도화하는 장치가 된다.
이렇게 불법적 존재가 된 이들을 외려 반기는 곳도 있다. 바로 100여 개에 가까운 음성군 관내의 직업소개소다. 법정 수수료는 1%지만 실제로는 10~15%를 떼어 가는 것이 관행이다. 수수료가 더 높은 곳에 발을 들이는 사람일수록 더 취약한 노동자들이고, 더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행정기관은 이 구조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노동청의 보고서에는 늘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현장점검 결과 이상 없음" 그렇게 불법은 서류 속으로 흡수되고, 착취는 우리의 일상과 함께한다.
2020년 겨울 여성 이주노동자 누온 속헹은 영하의 강추위 속 경기도 포천시 한 구석의 비닐하우스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그는 고용허가제로 취업한 노동자였고, 그의 국적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캄보디아였다. 지금 한국의 모든 언론이 캄보디아의 범죄단지에서 죽어간 한국인들을 다루지만, 한국의 비닐하우스에서 죽어간 속헹의 죽음은 그의 백 분의 일만이라도 우리 언론에서 다루어졌나? 결국 우리는 '정말로 이 사회가 문명사회인지'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법과 질서를 말하는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명이 아니라 '정리된 야만'일 뿐이다. 캄보디아를 욕하는 우리 사회의 비난은 마치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프놈펜의 범죄단지와 강남의 오피스텔, 포천의 비닐하우스와 음성의 직업소개소 - 이 모두는 결코 다른 세계에 있지 않다.

'우리 안의 범죄단지'를 먼저 직시하자
한국 사회에 만연한 캄보디아를 향한 분노는 단지 흉악범죄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다. 그것은 곧 오랫동안 길러진 인종적 상상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범죄단지'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자, 순식간에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한 국가와 민족 전체가 일반화되었다. 분노의 방향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 개인만이 아닌 그들의 국적으로 향하고, 그 국적은 곧 인종의 표식이 된다. 그렇게 '캄보디아'는 국가가 아닌 하나의 범죄 서사로, '동남아'는 그러한 범죄를 방치하거나 추동하는 후진적 사회의 상징으로 다시 그려진다.
이번 캄보디아 사건 이후 한국 사회의 여론은 이 인종주의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리 국민이 피해를 입었다'는 말은 곧 '그들 때문에 우리가 위험하다'는 감정으로 치환되었다. 언론은 그 분노를 부추겼고, 양당의 정치인들은 '국민 보호'를 내세워 군사작전까지 언급하며 누가 더 캄보디아를 잘 비난하는지 앞다퉈 줄을 섰다. 이는 분명 혐오의 정동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정당화의 구조이기도 하다. '그들보다 낫다'는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한국 사회의 이 불평등한 현실을 견딜 수 있다. 이 믿음이 무너지면 우리 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불법적 구조와 착취의 정당성도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타국의 '야만'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우리의 '문명'이 유지되므로.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는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다. 동남아를 향한 멸시와 조롱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이다. '그들보다 낫다'는 믿음으로 타자를 낮추어야 자신이 높은 곳에 있다는 착각이 유지된다. 그 착각은 불평등의 완충장치다. 이런 말들이 무심히 오가는 동안 인종주의는 체계가 되고 제도가 된다. 그 과정을 통해 한국은 언제나 순수한 피해자이자 떳떳한 문명국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캄보디아 내에서 발생한 범죄를 욕하기 전에 우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봐야만 한다.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착취, 제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차별, 관행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침묵.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매일 통과하는 범죄단지다.

나는 상담을 마친 뒤 창 밖을 본다. 먼지가 떠 있고, 트럭이 지나가며, 그 뒤로 공장의 연기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고향의 가족에게 보낼 생활비를 생각하며 오늘도 일하고, 우리는 그 노동 위에서 소비한다. 도시의 불빛은 그들의 피로를 먹고 자란다.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것은 실은 그들의 침묵 위에 세워진 것이다.
문명과 야만의 경계는 국경이 아니라 윤리의 깊이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며 정의를 확인하는 사회는 결코 문명이라 부를 수 없다. 야만은 원시의 상태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자기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상태다. 우리가 캄보디아를 욕하는 그 입술로 우리 내부의 착취를 외면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야만으로 되돌린다. 이제는 그 거울을 마주해야 한다. 거울 속에는 프놈펜의 어두운 방과 강남의 불 켜진 창이 동시에 비친다. 공장의 이주노동자와 오피스텔의 여성,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는 시민의 얼굴이 함께 들어 있다. 문명은 그 거울을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 얼굴이 낯설더라도, 그 낯섦 속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타인의 범죄를 욕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 사회를 바꾸는 일은 어렵다.
윤리는 외부로 향하는 분노가 아니라 내부로 향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먼저 묻지 않는다면, 그 어떤 분노도 정의로울 수 없다. 캄보디아를 욕하는 입술로 우리는 오늘도 우리 안의 범죄단지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 모순의 거울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 일, 그것이 바로 문명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박성우
음성노동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나름대로 읽고 나름대로 쓰고 나름대로 사는 삶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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