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스마트폰 금지법', 청소년을 시민으로 보지 않는 사회의 악몽
8월 27일 국회에서는 '스마트폰 금지법'으로 불리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일견 '합리적인' 듯 보이는 학교에서의 스마트폰 금지, 그러나 명백한 인권침해와 교육의 후퇴를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현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서민준 정의당 청소년위원장이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스마트폰 금지법의 문제점을 말한다.
지난 8월 27일 국회는 이른바 '스마트폰 금지법'이라고 불리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수업시간 중 스마트기기 사용을 금지하고, 교칙으로 교내 스마트기기 소지를 제한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교사의 행위를 아동학대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 이번에 통과된 법안의 골자다. 어찌 보면 마냥 좋다거나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수업시간에 교사의 허락 없이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 소위 '딴짓'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이 '개악'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학생들을 위해서?" 명백한 학생인권과 안전권 침해!
이번 개정안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학칙으로 교내 스마트기기 사용·소지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교내에서 소지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은 수업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 점심시간 등에도 학내 스마트폰 소지를 원천금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는 명백하게 헌법상의 과잉금지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 그 제한은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는 것은 우리 헌법의 분명한 요구이다. 하지만 이 법은 엄연히 학생들의 휴식 시간인 쉬는시간과 점심시간까지 규제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는 점에서 위헌적인 요소가 명확하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에 휴대폰 게임에 몰두한다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쉬는 시간에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 안 좋아 보일 수야 있다. 하지만 그를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갔다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스마트폰이 무슨 권리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우리 삶에서 스마트폰은 권리가 된 지 오래이다. 스마트폰 없이 우리는 대중교통 한 번, 편의점 한 번 이용하기 어렵고, 더 나아가 이제는 재난 알림조차 문자메시지로 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처럼 스마트폰이 가장 중요한 통신·기록수단으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학교에 있는 동안 스마트폰을 원천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학생들을 사회에서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이미 국제적으로도 합의된 사항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대중매체에 대한 접근권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일반논평 25호 '디지털 환경과 아동권리'(2021)에서는 '모든 아동이 그들에게 의미있는 방식으로 평등하고 효과적으로 디지털 환경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9조)', '디지털 환경은 아동의 정보 접근권을 실현할 고유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 부분에서 디지털과 온라인 콘텐츠를 포함하는 대중매체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국가는 디지털 환경 속 아동의 정보접근권을 보장하고(50조)', '국가는 고의적으로든, 기타 행위자를 통해 일부 또는 전체적으로든 그 어떤 지역에서도 아동의 정보 및 통신 접근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기, 이동 통신망 또는 인터넷 연결성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54조)'라고 규정하여 아동의 디지털 환경 접근권이 이미 인권의 영역이 되었으며, 이를 제한함에 있어서는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즉 이번 개악은 아동권리협약 비준국이자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서의 책임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규제는 학생들의 안전에 있어서도 심각한 위험을 불러온다. 대부분의 휴대폰이 스마트폰인 오늘날의 상황에서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은 유사시에 외부와 연락할 수단이 막힌다는 것이다.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모종의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휴대폰이 있다면 그걸 목격한 다른 학생이 바로 119에 구호요청을 할 수 있지만, 스마트폰의 소지가 제한되어 아무도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일단 교사부터 호출하느라 대응이 지체된다.
학생 방어권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과거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교사들의 폭력이 줄어든 것에는 교사들의 자정보다 휴대폰의 보급으로 폭력이 증거로 남게 되고 이를 사회적으로 질타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기 때문이 더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학생이 수업시간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불법의 문제가 되고, 소지에 대한 규제가 강해지면 교사가 폭력을 가하더라도 학생들의 증거 확보와 고발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멀리 갈 필요조차 없다. 지난 2018년 학생들이 학교에 만연한 성폭력과 성차별을 고발하였던 이른바 '스쿨미투'는 교사들의 성폭력과 성차별 사례가 스마트폰을 통해 수집되고 SNS를 통해 고발되었기에 가능했다. 과연 이 법이 그리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학생들은 다시 그런 대응을 할 수 있을까?
'학칙'으로 제한한다는 것 역시 문제이다. 국민의 권리를 법률으로 제한하도록 한 헌법의 취지를 몰각하는 것부터 문제이고, 현재 학칙 개정에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학칙은 크게 두 단계를 거쳐 개정되는데, 먼저 '규정개정심의위원회'를 거친다. 이곳에서는 학생의 참여가 보장되어 형식적, 실질적으로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가 있지만 제도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더 문제는 학교운영위원회다. 규정개정심의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를 바탕으로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논의·수정 후에 학칙이 최종 확정되는데, 학교운영위원회의 구성에 학생 참여를 보장하는 규정이 없어 학생이 참여하지 못하거나 참여하더라도 1명이 참여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 외 위원은 다수의 학부모와 소수의 교사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리 학생이 의견을 전한다 한들,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얼마든지 입맛대로 교칙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법 개정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학생의 참여'를 강조하였지만, 실상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시대착오적 교육, 청소년을 습격하다
한편 스마트기기의 완전 배제가 현실적으로 교육적 퇴행을 불러온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코로나 이후, 스마트기기 활용은 이미 많은 수업에 녹아들어 있다. 전국 대다수 교육청에서는 스마트기기 보급사업을 진행하는데, 필자가 다니는 학교의 경우에는 1인당 1개씩 크롬북이 배부되었다. 거기에다가 요즘에는 수행평가나 지필평가 공지가 각 반에 종이로도 게시되지만 '구글 클래스룸'을 통해서도 공지된다. 학생들은 배부된 크롬북이나 각자 가져온 노트북을 통해 보고서를 쓰는 수행평가를 하며, 수업 중에도 각자의 스마트기기로 패들렛이나 퀴즈 프로그램에 접속하여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교육 환경은 스마트 기기를 배제하기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 법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위한 사용은 허용'한다고 하지만, 각자가 휴대할 수 있다는 스마트 기기의 장점이 배제된 조치는 비효율만을 키울 뿐이며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두고 현장에서의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리터러시(매체 이해력) 교육의 측면에서도 한계가 크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공교육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 법에 의해 교내에서 휴대폰의 소지가 제한되면 학내와 학교 밖에서 학생들의 미디어 활용이 분리되게 되고 결국 학생들은 교사와 학교를 더욱 배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중요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런 와중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때문에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취약해지면 청소년들은 더 취약한 상태로 인터넷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와는 달리, 이 법은 인터넷 세계에서 청소년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시대착오적인 법일 뿐이다.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 자본의 책임을 묻다
이 법의 가장 문제는 '만만한' 청소년을 규제함으로써 청소년의 스마트폰 의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의존이 문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요즘 얘들은 놀이터에서 놀지 않고 죄다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왕왕 하는 이야기이다. 맞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왜 청소년들이 스마트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 무엇이 청소년을 스마트기기에 의존시키고 있는지는 살펴보지 않는다.
우선 짧은 여가시간과 여가환경의 문제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경쟁교육과 긴 학습시간의 문제로 여가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고, 서울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제한되어 있는 청소년 공간의 문제도 있다. 휴대폰을 그만 보고 나가 놀라고 하지만, 운동장을 빼면 청소년이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다. 결국 이런 시공간적 제한 하에서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의 도파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적으로 제한이 없는 검증된 방식으로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자본의 책임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한 길게 머물게 하면 돈이 된다는 테크 기업들의 발견은 사람의 심리적 취약점을 공략해 최대한 자기 어플에 중독되도록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혁신'이라 이름붙였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 앱들과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들을 한 번만 들어가 보면 타임라인, 좋아요 알림 등등 사용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머물게 만드는 세심한 기술들과, 자기와 비슷하면서도 자극적인 의견들을 계속 띄워 극단화를 유도하는 악의적 알고리즘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청소년에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 전반에 있어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빅테크 기업들은 이 모든 문제를 조장함으로써 떼돈을 벌고 있다. 스마트기기에 의존하는 청소년을 걱정하지만 국민연금이 청소년을 스마트기기에 의존시킨 기업들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자본주의의 모순, 우리나라에서도 조금 더 '잘 중독시키는' 기업을 만들어 보자고 달려드는 그 내적 모순은 논리적 기예 끝에 학교에서만 어떻게든 금지시켜 보자는 스마트폰 금지법을 낳았다.
스마트폰 중독 방지를 위해서는 빅테크 기업들을 통제하여 알고리즘을 공개하고 기본적으로 중독을 방지하기 위한 구성을 강제하는 등의 규제를 할 필요가 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손쉬운 금지뿐이다. 비슷한 정책을 사용했던 해외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법으로 인한 스마트폰 사용 시간의 변화는 크게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법의 유일한 의의는 청소년 여가시간에 대한 고민도, 청소년 공간확보를 위한 예산도, 빅테크 기업 규제도 없이 스마트폰 중독 예방을 위해 국가가 할 일을 다했다고 이야기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스마트폰에 의존하게 되는 청소년에 대해 '개인의 문제'라며 자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물론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청소년의 SNS 사용 금지 역시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이는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들을 더 취약한 위치에 몰고갈 뿐이다. n번방 사건의 사례에서 '너희가 이러는 걸 부모님도 알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이 청소년들에게 효과적인 협박 수단이 되어 일련의 도움 요청을 가로막았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 SNS의 제도적 금지가 청년·청소년층의 분노를 사 대규모의 항쟁과 정부 전복을 불러온 현재 네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특정 계층을 타겟팅한 SNS 금지가 당연히 수반될 전사회적 반발을 극복하고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MISSON: 청소년의 시민권을 쟁취하라!
결국 이 법은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청소년의 스마트폰 의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결국 교사들에게는 스마트기기 단속 업무가 계속 부여될 것이므로 일부 교사단체들의 기대와 달리 교사들의 부담을 덜어 주지도 못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스마트기기를 둘러싼 더 많은 혼란이 이미 예고되어 있다. 스마트기기 소지를 법률로 규제하며 이것이 아동학대에 해당하지 않는다 규정한다고 법적 분쟁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는 너무 한가한 발상이다. 학생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률적 금지는 갈등을 키울 것이고, 법으로 금지하겠다는 발상은 법률 문구의 해석 하나하나를 가지고 법정으로 향하게 만들 것이며, 휴대폰 소지 제한을 위해 휴대폰을 압수·수거하는 것은 분실 및 파손에 따른 배상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어설프고 문제투성이인 법이 거대 양당의 찬성 속에 초고속으로 통과된 것은 결국 그 대상이 청소년들이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인 존엄한 시민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인 '비시민'으로 바라보았기에 누군가의 권리를 제한하는 중대한 법이 깊은 생각 없이 ‘안 되면 말지’ 식으로 만들어졌고, 청소년을 주체로 인식하는 '청소년정치'의 힘이 미약했기에 이런 문제투성이의 법을 거르지 못하고 사회의 비효율성만 키우게 된 것이다.
결국 그 비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운동과 정치의 힘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법으로 인한 분쟁은 계속 발생할 것이고 청소년들의 불만은 쌓일 것이다. 우리 앞에는 그 분쟁을 비집고, 불만을 모아내 이 법을 폐지하고 자본의 책임을 묻는 과제가 놓여 있다. 이는 곧 청소년정치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과제이기도 하다. 청소년정치의 의의는 청소년이 존엄한 권리와 정치의 주체임을 확인하며 '온전함'을 기준으로 '비시민'을 선별하여 배제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것에 있다. 이는 결국 진보정치의 의의와도 다르지 않다. 비시민, 비국민의 위치에 처한 청소년의 시민권을 쟁취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 속 시민의 틀을 넓히는 작업이며, 동시에 청소년뿐만 아니라 그 틀에 들어오지 못하는 수많은 소수자들의 자리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민준
정의당 청소년위원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아이돌을 좋아한다.
김현근 (목성돼지)
전환 회원, 도모 기관지편집위원회 편집위원.
어쩌면? 전 청소년활동가이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급진적 정치를 고민하는 말 많은 성소수자.
사회주의를 목적하고, 귀여움을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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