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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씨네도모

장혜영 전 의원이 말하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을 좋아하는 이유

by Domoleft 2025. 7. 2.

[씨네도모] 장혜영 전 의원이 말하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을 좋아하는 이유

무려 '애니프사'를 달고 있는 전직 국회의원이 있다? 페이스북 프사로 프리렌을 걸 정도로 <장송의 프리렌>을 사랑하는 정의당 제21대 국회의원이자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장 장혜영이, <장송의 프리렌>이 자신의 '인생 애니'인 이유를 밝힌다.


※ 본 기사에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백한다. 나는 오타쿠다. 내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과 배경화면은 일본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주인공 프리렌이고, 그렇게 한 이유는 다른 오타쿠들이 자기 SNS의 프로필을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최애'이기 때문이다. 만일 13개월쯤 전이었다면 나의 유능한 보좌진들이 연합을 결성해 '애니프사 현직 국회의원' 같은 가십성 기사가 나오는 일을 막았겠지만, 지금은 2025년 6월이다. 이젠 내가 프사를 프리렌으로 하건 힘멜로 하건 그 어떤 기자도 신경쓰지 않는다. '제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장혜영'은 마치 전생의 일 같고, 지금의 나는 원외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서울시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 겸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회 애니메이션동아리 회장 장혜영이다.

 

프사부터 핸드폰 바탕화면까지 프리렌으로 도배를 했더니(선거기간 중의 핸드폰 바탕화면은 트위터에서 발견한 이준석 씹어먹는 권영국 사진이었다) 종종 내가 왜 이렇게까지 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며 이유를 추측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여러 가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프리렌과 같은 장씨라서('장 혜영' / '장 송의 프리렌')'였다. 너무 간명해서 하마터면 이 가설을 공식으로 채택할 뻔 했는데, 그랬다가는 앞으로의 모든 정치행위가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까지 <장송의 프리렌>을 좋아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스포일러는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스포일러를 싫어하는 분들은 이 글을 마저 읽기 전에 <장송의 프리렌>을 정주행하고 오실 것을 권한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글쓴이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 및 배경화면


<장송의 프리렌>을 처음 본 것은 국회의원 임기 중의 일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내게 마치 '힘멜처럼' 다가왔다(이 말은 작품을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임기 중에는 가능한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리즈물을 한번 시작하면 밤을 새더라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봐야 하는 성격이라 의정활동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고 보게 될 애니메이션은 결국 보게 된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만난 오타쿠 절친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라프텔(애니메이션 OTT 서비스: 편집자 주)에 취직했다기에, 축하를 건네며 내가 좋아할 만한 작품을 딱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송의 프리렌."

"장.. 장송? 장송곡 할 때 그 장송?"

"응. 그 장송."

"왜 장송이야?"

 

왜 장송(葬送)인지 답하는 대신, 친구는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일단 '프리렌'은 주인공 엘프의 이름이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간 용사와 성직자, 그들보다 오래 사는 드워프와 이 모든 이들보다 훨씬 오래 사는 엘프가 함께 파티를 결성해 마왕을 무찌르는 전형적인 판타지 어드벤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들은 1화 극초반에 마왕을 깔끔하게 무찔러 버린다. 심지어 마왕을 처치하는 장면을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서사에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마왕을 무찌른 후의 이야기'다.

 

'마왕이 없는 세계에서 모두모두 영원히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니. 영업은 대성공이었다. 친구와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모든 것을 작파하고 집으로 돌아가 1화를 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일정에 여유가 있는 날을 골라 대략 이틀만에 전 편을 정주행했다.

<장송의 프리렌>의 용사 힘멜 파티


10년 간의 모험 끝에 마왕을 무찌른 용사 일행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시간은 평화롭게 흐른다. 인간의 수명은 엘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기에, 결국 가장 먼저 파티의 리더 격인 인간 용사 '힘멜'이 세상을 떠난다. 슬퍼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누리는 프리렌은 힘멜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내내 무덤덤한 얼굴이다. 그러나 힘멜의 무덤 위에 흙이 덮이려는 순간, 프리렌은 이제 정말로 그를 만날 수 없고, 자신이 그에 대해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그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음을 문득 깨닫고 오열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인간을 더 알아가기로 결심한다(여전히 1화다). 마왕을 무찌른 전설의 용사 일행의 마법사 프리렌의 진정한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내가 <장송의 프리렌>과 사랑에 빠진 순간이기도 하다. 프리렌이 불멸자에 가까운 자신과 필멸자인 인간의 삶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괴리 속에 무언가 무척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었음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을 흘릴 때, 나도 펑펑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울지? 난 엘프도 영생도 아닌데? 천천히 마음을 되짚어보니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심하게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과 엘프와 마족이 공존하는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인간 세계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우리는 비슷한 수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무수한 이유들로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실은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더 잘 해주고 싶으면서도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혹은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제때 깨닫지 못해 그저 스쳐 가는 하나의 인연처럼 생각해 버린다. 반대로 누군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라도 상대의 무심함에 기가 질려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소중한 인연들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가끔 아주 나중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불현듯 깨닫고 깊이 후회한다. 뒤늦게 상처받는다.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받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이 모든 사실들이 자아내는 강물같은 슬픔에 잠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헛된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기억과 상실의 슬픔을 품에 안고 현재를 마주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시간의 총합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만든다. 최근 출간된 은유 작가의 책 <아무튼 인터뷰> 에 적힌 문장처럼 "나는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다."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중


프리렌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무심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내가 정말로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아마도 방어기제일 것이다. 가족에 대한 마음이든, 친구나 연인에 대한 마음이든 타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마음을 되돌려받고 싶은 순수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만들어지는 단단한 마음의 껍질 말이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겠다는 마음 자체를 버리자. 소중한 존재를 갖지 말자. 그것은 고통이니까. 운 좋은 사람들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나는 그 행운의 그룹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바라지 않은 채로 친절하고 무심하게 살아가자.

 

그러나 그게 될 리 없지 않은가. 우리는 타인이 남겨놓은 마음들로 지어진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미움이든 사랑이든 탐욕이든 무심함이든 그렇다.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 인간 세계를 살아가며 나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았으면 헤쳐나갈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이 정말로 많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상실의 상처를 알면서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모험이었다.

 

프리렌의 모험은 내게 그 모험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아채거나 내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지만(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렇다. 죄송합니다 친구 여러분..), 그래도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프리렌이 유한한 존재로서 사랑의 본질에 관한 깊은 통찰을 지닌 힘멜을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기억과 사건들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배워 가듯이, 나 역시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배워 가고 있다.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가고 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배움은 계속될 것이다. 모험처럼.

마포녹색당과 정의당(현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회가 함께한 행사를 진행 중인 글쓴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인류의 모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인간 동지에 대한 사랑은커녕 동족을 마족처럼 여기고 증오하며 적대하는 일들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금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과 공감을 갈구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마음에 닿는 모험,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모험, 자기방어의 알을 깨고 나와 사랑을 잃지 않고 이 불확실한 세상을 마주하는 모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우리의 모험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수많은 '현세의 힘멜들'의 존재를.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라는 대사는 모르더라도 삶의 순간에 스쳐지나가는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빛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일 수도 있다. 인생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라도 충분히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힘멜 같은 당신이 있기에, 지금은 그 사실을 잘 몰라도 언젠가는 깨달을 프리렌 같은 당신이 있기에 나는 우리의 모험이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장송의 프리렌>은 그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장송의 프리렌>을 좋아한다.


 

장송의 프리렌

 

야마다 카네히토, 아베 츠카사 원작 / 사이토 케이이치로 감독

타네자키 아츠미, 이치노세 카나 / 28화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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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장, 마포구위원회 애니메이션 동아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