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 2025년 8월호 여름 특집>
[씨네도모] <28년 후>를 위한 변론: 망해 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대니 보일 감독의 <28년 후>가 개봉했다. 걸작 좀비 영화 <28일 후>의 후속작이 23년 만에 여름 극장가를 강타했음에도 관객들의 평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작은 변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28년 후>는 통속적인 좀비 영화와 무엇이 다르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가?
※ 본 기사에는 영화 <28년 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에, 앞에, 앞에, 앞에, 지나가는 것을 보지 마라
군화, 군화, 군화, 군화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그걸 보곤 미쳐 간다
전쟁에서는 물러날 길이 없다!"
- 리디어드 키플링, <군화>
'여름 특집'으로 발간되는 도모 8월호, 씨네도모에 어떤 영화를 리뷰할지 고민 끝에 선택한 영화는 지난 6월 개봉해 여전히 극장가에 걸려 있는 대니 보일 감독의 <28년 후>다. 역시 그 무엇보다 가장 여름다운 영화는 관객들의 땀을 쏙 빼놓는 공포영화가 아니겠는가. 그것도 23년 만에 돌아온 걸작 좀비영화 <28일 후>의 계승자라니.
2024년 12월 10일, 영화 <28년 후>의 첫 번째 예고편이 유튜브에 공개되자 전 세계의 영화 팬들은 열광했다. 21세기 대중문화 속 좀비 붐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은 <28일 후>(2002)의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과 알렉스 가랜드(Alex Garland) 각본가가 다시 뭉쳤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리디어드 키플링의 시 <군화> 낭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음산한 분위기를 더한 예고편 자체도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다. 해당 예고편은 3천만 명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그것 2>(2019)에 이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호러영화 예고편 2위에 올랐으며, 영화 예고편 전용 시상식인 골든 트레일러 어워드에서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1 2
영화 <28년 후> 공식 예고편
하지만 2025년 6월 영화가 개봉하자 관객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대니 보일 특유의 화려한 영상미와 편집술로 대표되는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을 높이 평가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많은 관객은 전통적인 좀비 영화의 문법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스토리와 주제의식에 불호를 표시했다. 영화가 관객들의 평가를 종합하는 시네마스코어에서 B라는 다소 어정쩡한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 최종 흥행성적이 시리즈 역대 최고 성적이기는 하지만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는 1억 4천만 달러라는 사실 3은 이러한 관객들의 불만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필자는 영화에 대한 세간의 이러한 평이 다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통속적인 좀비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28년 후>는 <28일 후>를 잇는 계보 속에서, 기존 좀비 장르의 주제의식을 오늘날의 시대적 맥락에 맞게 재해석한 독창적인 걸작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좀비 장르가 어떠한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그리고 <28일 후>가 이를 어떻게 21세기의 정세에 기반해 재해석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28년 후>가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계승하는 동시에 변형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시간은 어떤 것도 치유하지 못했다
영화는 <28일 후>의 '분노 바이러스'가 영국에서 발병한 지 28년 후인 2030년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영국 땅 전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황에서, 국제 사회는 영국을 철저히 봉쇄한 채 안으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모든 움직임을 차단한다. 주인공 일행이 사는 홀리 아일랜드와 같은 극소수의 장소에만 생존자들이 모여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곳에는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썰물 때를 제외하면 육지로 가는 길이 물에 잠겨 고립되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감염자들의 침입에 대한 걱정 없이 작게나마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주인공 스파이크는 홀리 아일랜드에 사는 12살 소년이다. 그는 영국 본토로 나가 섬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오는 수렵인 아버지 제이미와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라일라를 가족으로 두고 있다. 스파이크는 제이미와 함께 본토로 나가는 통과의례 여행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이성을 갖추고 다른 감염자들을 통솔하는 알파,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나뭇잎과 애벌레로 연명하는 슬로우 로우 등 28년의 시간을 거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여러 감염자들을 만나게 된다. 감염자 몇 명을 사살하고 알파를 피해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치고 홀리 아일랜드로 돌아온 스파이크는 영웅이 되지만, 어찌 사람들의 환호는 마뜩찮다. 여기에 제이미가 마을의 다른 여성과 불륜관계인 걸 발견한 것까지 더해지며 스파이크는 큰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 와중 라일라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며 환각 증세마저 경험하게 되는데, 이에 스파이크는 라일라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그를 데리고 본토로 몰래 빠져나간다. 진화한 감염자들이 우글대는 영국 본토에서 낙오된 스웨덴 출신 나토 군인 에릭 순드크비스트부터 감염자와 비감염자 가리지 않고 사망자들에 대한 추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괴짜 의사 이안 켈슨 박사 등 다양한 인연을 만나며 스파이크는 정신적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까지 정리된 줄거리를 보면, 왜 많은 관객들이 <28년 후>의 스토리를 접하고 당황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피 튀기는 좀비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로드무비나 성장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좀비영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가 인간을 공격하여 감염시키는 묘사는 프롤로그 격인 영화의 첫 5분과 중반부 스웨덴 나토군과 감염자들의 충돌, 이렇게 두 번을 제외하면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28일 후>와 <28주 후>에서 주인공들이 좀비에 쫓기는 장면에 쓰여 유명해진 OST <In the House, in a Heartbeat> 역시 영화 내내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 이를 보았을 때 사람들이 좀비 영화 하면 흔히 통속적으로 떠올리는 고어한 액션 신에 영화가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28년 후>는 어떠한 방식으로 좀비 영화의 장르적 전통과 스스로를 연결짓는가? 5
시대의 모순을 고발하는 좀비 영화
영화 역사상 '좀비'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영화는 빅터 할페린 감독의 <화이트 좀비>(1932)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는 우리에게 익숙한 식인 괴물의 모습이 아니다. 영화 속 좀비는 아이티 등 카리브해 지역 흑인들의 종교인 부두교 전설에서 따온 주술적 존재로, 이성이 없이 자신을 되살린 사람에게 복종하는 노예와 같다. 좀비가 부두교 주술에 취한 몽유병 환자마냥 묘사되는 자크 투르뇌르 감독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7) 역시 마찬가지다.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좀비가 등장하는 것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부터다. 이 영화는 기존의 부두교 설정에서 벗어나, 좀비를 현대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로 재구성하며 좀비 장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로메로의 좀비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들은 죽음에서 깨어나 인육을 탐하며, 머리나 목을 공격해야만 제거될 수 있다. 좀비에게 공격당한 사람은 다시 좀비로 부활한다는, 뱀파이어 장르에서 빌려온 설정 역시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여주인공이 좀비 때를 피해 도착한 집의 2층에서 반쯤 뜯어먹힌 집주인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좀비 장르 특유의 고어한 묘사 역시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 좀비 영화의 시금석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장르적인 설정의 차원에만 그치지 않는다. 로메로는 이 영화에서 좀비라는 이질적 존재를 통해 당대의 사회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좀비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전범(典範)을 제시했다. 예컨대 영화 속 긴급재난방송에 따르면 좀비들은 NASA의 금성 탐사 이후 발생한 우주 방사능의 부작용으로 인해 탄생한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당시 핵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냉전 시대 사람들의 편집증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집에 모인 생존자들이 대응방법을 놓고 갈등하는 묘사 역시 베트남 전쟁과 인종갈등으로 인한 분열과 혼란이 극에 달했던 미국 사회의 초상 재현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유일한 생존자인 흑인 주인공이 경찰에 의해 오인사살당하는 결말은 당대 미국의 인종주의에 대한 하나의 고발로 읽힌다. 이처럼 밖에서는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생존을 위협하고, 안에서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닮지 않은 존재들이 실존을 위협하는 모순적이고도 이중적인 공포는 이후의 좀비 영화들에 있어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당대 미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모순에 대한 풍자는 1970~80년대의 주요 좀비 영화들에서도 반복된다. 로메로의 후속작 <시체들의 새벽>(1978)은 좀비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쇼핑몰에 몰려드는 묘사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치하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를 은유적으로 비판한다. 댄 오베넌 감독의 <리턴 오브 더 리빙 데드>(1985)는 생화학무기 개발로 인해 발생한 좀비 사태를 좀비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핵무기로 쓸어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묘사를 통해 냉전 시대 대량살상무기를 둘러싼 군국주의적 광기를 풍자한다. 생명을 오로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위한 대상으로만 대하며 끊임없이 소생 실험에만 집착하는 <리애니메이터>(1985)의 주인공 하버트 웨스트 박사는 성장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레이건 시대 미국의 뒤틀린 초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좀비영화들은 어떨까? 냉전 시대의 선배 좀비영화들에서 핵전쟁과 사회갈등에 대한 묘사가 두드려졌다면, 이들에게는 테러와의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2004) 도입부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유명한 몽타주는 메카에서 무슬림 군중이 기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영화가 9·11 테러로 상징되는 이슬람 극단주의와 좀비 사태를 상호 연결지어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와 더불어 빠르게 달리고 폭력성을 극대화한 좀비의 설정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경쟁과 적대가 일상화된 인간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6
실베스트르 메닝제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쓴 평론에서 21세기 좀비영화들의 이러한 정치적 무의식이 "예전처럼 양대 진영으로 편성돼 있지 않기에 더욱 불가해한,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테러와 건강 환경, 경제 위협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본이 각 개인에게 규칙을 강요하고 우리와 함께 사는 시민, 심지어 우리와 가까운 사람까지 잠재적 적이 되는 상황을 보게 만드는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공포에서 그 에너지를 길어온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7
<28일 후>의 분노 바이러스: 사회 비판을 넘어 문명 비판, 폭력 비판으로
2002년 개봉해 좀비 장르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연 <28일 후> 역시 2000년대 초반에 나온 다른 좀비영화들의 위와 같은 정치적 인식론을 공유한다. 그러나 대니 보일은 이를 현실에 대한 단순한 은유를 넘어 인간 문명과 폭력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까지 확장한다. 여기에는 '분노 바이러스'라는 영화만의 독특한 설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의 공식 설정에 따르면, 분노 바이러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연구진의 생체실험을 통해 개발되었다. 연구진은 인간의 분노를 통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신경세포에서 분노 조절 인자를 분리하고 여기에 에볼라 바이러스를 결합하는 실험을 진행했으나 부작용으로 오히려 인간의 분노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새로운 바이러스를 개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분노 바이러스다. 이 소식을 들은 일부 동물해방운동가들이 연구실을 급습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를 풀어 주다가 이들에게 물려 감염되는데, 이것이 바로 분노 바이러스가 영국에 퍼지게 된 원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노 바이러스가 여타 좀비 영화의 설정마냥 죽은 사람을 되살리거나 산 사람의 신체를 변형하는 게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지고 있는 분노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영화가 좀비(혹은 영화 내에서 쓰는 표련으로는 '감염자')가 단순히 인간을 닮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남들보다 분노에 더 잠식된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묘사는 영화 곳곳에서 반복되는데, 영화 후반부 여성 일행을 강간하려는 군인들을 주인공이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에서 여성들이 오히려 주인공이 감염된 줄 알고 공포에 떠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는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경계가 결정적인 폭력의 순간에서는 흐려질 수 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8
흥미로운 장면은 영화 도입부, 실험실의 침팬지 한 마리가 여러 대의 모니터를 통해 폭력적인 뉴스 영상을 반복적으로 시청하는 장면이다. 침팬지가 시청하는 영상 속에는 1990년 영국의 인두세 폭동, 1998년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2001년 한국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 투쟁 강제 진압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세부적인 맥락은 다르지만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폭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우자동차 해고 사태의 경우 IMF 사태 당시 GM에 인수된 대우자동차에서 1,750명의 노동자가 해고되며 벌어진 일로, 공장을 점거하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는 모습이 뉴스로 보도되며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9 우리는 이를 통해 영화가 '분노 바이러스'를 단지 생물학적 감염병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선천적 분노와 이를 자극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폭력성이 결합하여 발생한 사회적 재난으로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
<28년 후>의 인류세 묵시록: 망해 버린 세상 속에서 찾은 새로운 생존의 가능성
<28년 후>는 <28일 후>가 제시했던 반(反)신자유주의적 폭력 비판을 2020년대의 변화한 정세에 맞춰 창조적으로 계승한다. 이 영화는 브렉시트 이후 고립된 영국의 지정학적 위기의식에,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부각된 인간과 자연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성찰을 결합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히 좀비 아포칼립스에 대한 묘사를 넘어 좀비 장르 전반에 대한 메타적 비평으로 확장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 초반 스파이크와 제이미가 홀리 아일랜드를 떠나는 장면에서 약 3분간 이어지는 몽타주는, 폭력의 신자유주의적 기원을 고찰했던 <28일 후>의 도입부 몽타주를 한층 발전시킨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예고편에서도 사용된 리디어드 키플링의 시 <군화>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11, 지난 편에 등장했던 감염자들의 습격 장면과 함께 1·2차 세계대전 시기의 선전 영상, 중세 전장을 묘사한 고전 영화 속 전투 장면 등이 교차편집된다. 이러한 연출은 감염자와 비감염자 사이의 폭력이 단지 분노 바이러스 감염 사태 이후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류 역사 내내 진행되어 온 전쟁과 지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12
진화한 감염자들의 모습 또한 주목할 만하다. 분노 바이러스에 의해 이성을 잃고 파괴욕만을 보이던 지난 영화의 감염자들과는 다르게, <28년 후> 속 감염자들은 차라리 원시 부족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무리를 지여 생활하고, 사냥과 수렵채집을 통해 음식을 섭취하며, 짝을 지어 성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심지어 몇몇 알파 감염자들은 기초적인 형태일지언정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는 감염자와 비감염자가 행태만 다를지언정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이라는 시리즈의 설정을 더욱 심화시켜 준다.
이는 감염자들을 대하는 비감염자들의 태도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반영된다. 좀비가 인간을 먼저 알아보고 공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일반적인 좀비영화들과는 달리, <28년 후>에서는 비감염자가 감염자를 먼저 공격하는 묘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예컨대 스파이크가 제이미와 함께 떠난 통과 의례 여행에서도, 스파이크는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은 슬로우 로우를 향해 먼저 활을 쏴 치명상을 입힌다. 이후 제이미는 해당 감염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다른 슬로우 로우들을 모두 살해한다. 스파이크는 이에 불편한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데, 이는 그가 위와 같은 폭력의 연쇄반응을 단순한 게임이나 통과 의례로 여기지 않고 엄연한 살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감염 사태 전부터 이어져 온 폭력의 대물림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13
반대로 감염자들의 비감염자들에 대한 공격은 비감염자들의 이러한 폭력과 침입에 대한 응보적 조치마냥 묘사된다. 스파이크와 제이미가 슬로우 로우 무리를 살해한 뒤 알파가 이끄는 감염자 무리에게 추격당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출산을 마친 여성 감염자를 죽인 에릭 순드크비스트가 그녀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알파에게 잔인하게 보복당하는 장면 역시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들의 폭력은 마치 비감염자들이 먼저 깨뜨린 자연의 균형에 대한 징벌처럼 느껴지며, 좀비 장르 내에서 인간과 감염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작용한다.
<28년 후>의 이러한 수정주의적 접근은 단순 좀비에 대한 묘사를 넘어 인간 문명과 자연 간의 수직적이고 이분법적인 대립구도 자체에 대한 근원적 고찰로 나아간다. 감염자들이 어느새 인간의 부재로 인해 자연의 원시적 모습으로 회귀한 영국 본토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 비감염자 인간이 이들을 일방적으로 적대하고 살해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영화는 되묻는다. 이때 생존은 최대한 많은 감염자들을 폭력을 동원해 제거할 때가 아닌, 새로운 환경 속 인간이 스스로의 위치를 새로이 정의내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 말하자면 이는 하나의 인류세 묵시록이라 할 만하다.
영화에서 이러한 재난 이후 세계에서의 새로운 공존법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인물은 라일라와 이안 켈슨 박사이다. 라일라는 병으로 인해 본인의 정신과 육체 모두 극도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처음 보는 임산부 감염자의 출산을 도우며, 태어난 아기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이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켈슨 박사는 감염자와 비감염자 모두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하에 이들을 화장한 후 남은 유골을 모아 뼈의 사원을 만든다. 그는 감염자를 마주치게 되는 경우에도 모르핀으로 이들을 마취시키기만 할 뿐 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원 근처에 사는 알파에게 삼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그를 친근하게 대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분노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에서 레베카 솔닛이 말한 재난 이후의 새로운 윤리, 즉 "회복력과 관용, 다른 종류의 사회를 즉석에서 꾸려나가는 능력"을 바탕으로 "재난이 지나간 뒤 거기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평상시에 이런 갈망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깨닫는 일" 14을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좀비를 통해 돌아보는 현 생태 공동체 속 인류의 위치
호주의 페미니스트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는 자신의 저서 <악어의 눈: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략>에서 과거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통해 자연 공동체 내 인간의 위치를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악어의 눈에는 인간도 하나의 먹잇거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연 위에 군림하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두 우주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고 우리를 양쪽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통해 "다른 존재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존재를 존중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모든 다른 생명 존재에게 관대해지는 법" 15을 배울 것을 요청한다.
<28년 후>는 좀비 장르의 틀을 통해 플럼우드의 문제의식을 재정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장르 내 관습화된 묘사들을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에 발맞춰 전복적으로 재해석한 영화의 시도는, 시대의 모순과 끊임없이 불화했던 좀비 영화의 반골 전통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난이 만성화되고 일상화된 위기의 시대, 우리는 서로를 적대하고 환경을 따돌리지 않는 방식으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 속 감염자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 <도모>는 혹서기를 맞아 2025년 8월호를 '여름 특집호'로 하여 특집기사들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8년 후
대니 보일 감독
조디 코머, 애런 테일러존슨, 랄프 파인즈 / 115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전 회장, 전환 국제연대팀장.
동국대학교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
각주
- 소니 픽쳐스, <28년 후> 공식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mcvLKldPM08 [본문으로]
- CBR, 28 Years Later Dominates With Most Wins at Golden Trailer Awards https://www.cbr.com/28-years-later-dominates-golden-trailer-awards/ [본문으로]
- Cinemascore, 28 Years Later https://www.cinemascore.com/ [본문으로]
- Boxoffice Mojo, 28 Years Later https://www.boxofficemojo.com/title/tt10548174/ [본문으로]
- In the House, in a Heartbeat https://www.youtube.com/watch?v=ST2H8FWDvEA [본문으로]
- Dawn Of The Dead (2004) - Intro https://www.youtube.com/watch?v=dTYNwwPQH4k [본문으로]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좀비 영화의 정치학, 텅빈 눈으로 응시한 팍스아메리카나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874 [본문으로]
- 28 Days Later - Jim's rampage https://www.youtube.com/watch?v=JbcuK8WBKE8&t=320s [본문으로]
- Opening Scene | 28 DAYS LATER (2002) Movie CLIP HD https://www.youtube.com/watch?v=dzOiZAkB1pc [본문으로]
- 매일노동뉴스, [왜냐면] 4·10 대우차 폭력진압후 1년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599 [본문으로]
- 28 Years Later - Boots poem scene https://youtu.be/KNkbgRuYQdE?si=dYEYYj22mJBHEETW [본문으로]
- Young Fathers - Boots | 28 Years Later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https://www.youtube.com/watch?v=s53vxnPxSRc [본문으로]
- 28 Years Later - Jimmy and Spike hunting on slow-low infected scene https://youtu.be/ddgdNqn_gWQ?si=RDqzpqrLwFTAi6vm [본문으로]
- 레베카 솔닛, 정해영 옮김,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타그램, 2012, p 454-456 [본문으로]
- 빌 플럼우드, 김지은 옮김, <악어의 눈: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략>, 연두, 2023, p 105-1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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