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폭력의 시대 속, 개인에 대한 이해: 영화 <해피엔드> 리뷰
소라 네오 감독의 <해피엔드>는 거대한 사회 문제를 마주한 두 친구의 대립을 통해 '개인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폭력과 혐오로 얼룩진 지금의 시대, 개인에 대한 이해의 실천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의 폭력에 맞서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 본 기사에는 영화 <해피엔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도르노의 질문과 <해피엔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홀로코스트 이후, 사랑과 우정을 아무 일 없다는 듯 노래하는 전통적 감수성이 현실을 가릴 수 있다는 날카로운 자기비판이다. 그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가자지구의 학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 그리고 되살아나는 극우정치까지, '문명'이라 자부한 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폭력의 되풀이 속에 있다. 이처럼 폭력이 일상이 된 시대에, 개별 인간의 감정과 서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소라 네오(空音央) 감독의 영화 <해피엔드>는 바로 그 물음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우정과 구조적 폭력: 유타와 코우의 관계
<해피엔드>는 근미래,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을 배경으로, 비일상적인 사건들 앞에서 두 소년의 우정이 서서히 삐걱거리는 과정을 다룬다. 이 영화의 두 주역인 유타와 코우는 EDM 음악을 즐겨 듣는 고등학생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유타는 시민권을 가진 일본인이고 코우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이 차이는 극이 진행될수록 둘의 관계가 변화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극 초반의 유타와 코우는 정치에 무관심하다. 코우가 경찰에게 소지하지 않아도 되는 영주권 제시를 강요받았을 때도 유타와 코우, 그리고 그의 친구들인 밍과 아타, 톰은 거리의 불을 끄고 도주하는 미봉책으로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유타와 코우가 주동한, 교장이 아끼는 스포츠카를 세로로 세워 두는 장난 이후로 상황이 급변한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교장은 이 장난을 '테러'로 규정하며 범인 색출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유타와 코우가 강하게 의심받게 되고 교장은 코우를 '박 군'이라 부르며 "평범한 일본인이 아니지 않느냐"는 식의 차별적 언어를 쏟아낸다. 코우는 교장의 차별적 언행을 참지 못하고 교장의 부패와 위선을 지적하지만, 유타는 상황이 종료된 후 되려 "왜 교장의 심기를 건드느냐"며 코우를 탓한다. 이러한 사건의 결과로 코우는 유타 대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자신이 겪은 차별에 진심으로 공감해 준 후미라는 여학생과 가까워진다.
소라 네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정치에 무관심한 친구와 멀어졌던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언급은 <해피엔드>가 굉장히 거시적인 일련의 설정 - AI 감시 시스템의 도입, 디스토피아화된 일본 - 등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지만 사실은 '두 소년의 우정'이라는 굉장히 미시적인 플롯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코우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정체성은 그가 겪는 일련의 차별의 원인이 되며, 또한 그를 둘러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즉 누가 '일본 사회'라는 범주 안에 들어간 인물이고 또 누가 그 바깥에서 주변화된 인물인지 가시화되는 계기가 된다. 1
이와 달리 유타는 제도 안의 보호를 받는 '시민'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코우를 절친한 친구로서 대하면서도 코우와 자기 경험을 동일시하며 동시에 배제한다. 코우가 일련의 사건을 거쳐 키토 총리로 대표되는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시위에 나가려 하자, 유타는 그의 행동을 '후미에 대한 연심'으로 축소하며 코우를 놀리는 데에 집중한다. 이때 두 사람의 입장 차는 단순한 우정의 균열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선 정치적 시각의 거리를 보여 준다(감독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갈래로 갈라진 육교, 두 인물 사이를 나눠놓은 창틀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주변화와 이해의 감각: 관계의 재편과 고립의 경험
유타를 둘러싼 주변 관계의 변화는 교장이 AI 감시 체계를 도입하고 난 뒤 더욱 심화한다. 코우는 후미를 비롯한 활동가 그룹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자신이 겪는 차별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면 할수록 유타의 무관심함에 불만을 느끼며 유타와 점점 더 멀어진다. 유타, 코우와 같은 동아리 친구였던 톰은 성인이 된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 한다. 톰은 유타와의 관계를 이미 종결된 관계로 규정하며 코우의 불만에 동의하면서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관조적 태도로 일관한다. 밍과 아타는 둘 간의 새로운 관계에 집중하며 더는 유타와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유타는 톰에게 화도 내 보고, 벌점을 받으면서까지 학교에서 디제잉 장비를 훔쳐 보기도, 밍을 따라 동아리실에 가 보기도 하지만 모두 현실의 벽 - 디제잉 장비를 가져다 놓을 클럽의 재개발, 톰의 설득, 너무 바뀌어버린 밍과 아타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자신 - 에 부딪혀 실패한다. 이 시점에서 유타는 등장인물과 한 쇼트에 등장하지 못한다. 항상 다른 인물들의 모습을 밖에서 관찰하거나 엿듣는 별개의 쇼트로 등장한다. 유타가 더는 관계를 끌고 가지 못하는 관찰자, 즉 관계의 주변을 겉도는 무력한 인물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변화의 끝자락에서, 톰의 송별회는 유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연결의 기회처럼 보인다. 예전 친구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 과거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러나 그 희망은 곧 무너진다. 밍과 아타는 실내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 벤치에서 둘만의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이미 유타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들만의 새로운 균형 속에 있다. 예전엔 늘 함께였던 톰은 곧 떠나고, 유타는 이 모든 변화 속에서 그 누구와도 이어지지 못한 채 방 안에 홀로 남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우는 이 자리를 떠난다. 그는 교장실을 점거 중인 친구들에게로 돌아간다. 그것은 더 이상 유타와 공유되지 않는 세계이며, 유타는 그 부재 앞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동시에 깨닫는다.
이 순간 유타는 비로소 코우의 입장을 감각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거리, 서운했던 침묵, 갑작스러운 단절 -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말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유타의 고요한 시선과 움직이지 않는 몸은 그 깨달음의 무게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송별회는 단순한 실패의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유타가 처음으로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이다. 코우가 언제나 견뎌야 했던 위치, 그 무게를 유타는 마침내 느낀다.
코우는 대학 장학금이라는 현실과 외국인을 차별하는 불합리한 AI 감시 시스템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잠시 흔들리지만, 끝내 후미와 외국인 학생들이 있는 학교로 발을 돌린다. 이 장면에서 코우는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다가 교장실에 들어오자 벗고 얼굴을 보인다. 코우가 비로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에 진입하였다는 의미이다. 교장이 먹고 있는 음식은 '일본성'을 대변하는 스시이며 코우가 들고 온 음식은 한국 음식인 김밥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교장은 AI 시스템 폐지의 조건으로 자신의 자동차를 세로로 세워 놓은 이른바 '테러 사건' 범인의 자백을 요구한다. 그 사이, 어떤 학생들은 AI 시스템의 존치를 주장하고 또 후미를 비롯한 학생들은 격렬하게 폐지를 주장하며 큰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의 범인으로 보이는 코우(연출적으로 코우가 범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 - 테러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유타와 코우가 창문에 기대어 있는 장면에 코우의 머리 위에는 화살표가 있다 - 들이 많다)는 침묵한다. 그 때 유타는 단상 위에 서서 자신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코우는 무사히 대학 장학금을 받지만, 유타는 퇴학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한다. 유타는 왜 코우 대신 단상에 섰을까?
몰이해의 폭력과 이해의 윤리학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적 축은 '이해하려는 마음'의 유무다. 유타와 코우, 밍과 아타는 모두 각자의 변화를 겪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의 변화와 견해 차이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다. 갈등이 깊어진 뒤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바뀌지만, 이 이질감은 결코 완전한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유타가 코우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겪어 온 '주변화의 감정'을 처음으로 몸으로 느끼는 순간 유타는 그 감정을 말없이 떠안고 단상에 선다. 마찬가지로 밍과 아타는 더 이상 유타의 세계에 머물지 않지만, 예전의 감정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타인의 간극을 느끼려고 한다.
이와 대비되는 인물은 바로 교장과 키토 총리이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이 가진 정체성만을 기준으로 타인의 현실을 단 한 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교장은 스포츠카에 대한 장난을 단순한 '기물 파손'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위협', 나아가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며 극단적으로 반응한다. 또한 그는 "교장실 점거는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행동이다" "내가 도지사를 만나는 건 내진설계를 완벽히 해내어 대지진의 위협으로부터 학생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타인의 비판에도 본인의 입장을 강요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코우에게 "넌 평범한 일본인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이 규정한 '일본성'에 타인을 맞추는 권력자이다.
이와 같은 권력자의 논리는 키토 총리에게서도 반복된다. 그는 재개발을 통해 도시를 효율화하고, 대지진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겠다는 대의를 말하지만, 그 아래에는 소수자의 불편함, 억압받는 감정에 대한 완전한 무지 혹은 무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공익'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이해'란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도시락'은 두 번이나 메타포로서 등장한다. 도시락은 권력자, 즉 교장과 키토 총리에 대항하는 도구로써 사용되지만, 교장과 총리가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시락의 본래 목적인 '먹는 것'에만 집중하여 "아깝게..."라고 반응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의 언어는 늘 일방적이며, 이견은 제거되거나 축소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진정한 갈등선은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의 유무'에 있다. 누군가는 타인의 변화와 거리를 느끼며 조금씩 자신을 바꾸어 나가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기준안에 타인을 가두며 그 차이를 폭력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이 두 태도 사이에서, 유타의 선택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린 너머 현실의 폭력과 <해피엔드>의 시사점
<해피엔드>는 두 소년의 우정이 흔들리는 과정을 통해, 타인의 어려움과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고 연대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필요하면서 또 어려운지를 드러낸다. 영화가 보여주는 갈등의 본질은 정체성·계급·국적의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를 이해하려는 의지를 갖느냐 혹은 외면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스크린 바깥의 오늘날 현실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퀴어의 삶을 '죄'로 규정하며 배제하는 일부 기독교인들, 난민과 이주자를 국가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트럼프식 정치,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민폐'라며 혐오하는 일부 사람들. 이들은 모두 타인의 고통과 처지를 자신의 세계 바깥으로 밀어내는 몰이해의 정치 위에 서 있다. 이해를 거부한 자리에 남는 것은, 혐오, 불신, 배제뿐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건네는 '이해의 윤리'는 단순한 도덕적 외침이 아니라 혐오를 넘어서는 연대의 첫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코우와 유타는 육교의 두 갈래 길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는 초반에 유타가 코우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보도블록이 나눈 육교의 경계를 넘어간 것과 대비된다. 아마 코우와 유타는 두 번 다신 만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코우가 유타에게 남긴 삶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타는 코우가 떠난 자리를 그렇게 길게 응시했던 건 아니었을까?
폭력의 시대, 왜 여전히 개인의 서사가 중요한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 사랑과 우정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서정시를 "야만적"이라고 했다. 그에게 서정적 감성은 현실의 폭력을 감추거나 미화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폭력과 혐오가 일상이 된 지금의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그의 경고를 반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바로 폭력의 시대일수록, 개인의 서사와 감정에 귀 기울이는 일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점이다.
<해피엔드>가 그리는 개인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미미하고 무력해 보인다. 유타와 코우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겪는 우정의 균열은 영화 내 일본의 커다란 정치의 흐름 속에서는 한낱 사소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미시적 감정의 결이자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다. 유타가 느낀 고립과 코우가 마주한 차별의 현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드러나는 이해와 몰이해의 대비는 거대한 정치 담론이 다 담아낼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가장 섬세한 부분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문제의식은 단지 영화 속에 머물지 않는다. 영화에서 묘사된 몰이해의 정치학은 현실 세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퀴어 혐오, 이주민 배제, 장애인의 권리 투쟁을 '민폐'라며 폄하하는 이들의 태도는 타인의 고통과 서사를 끝내 이해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바로 이러한 현실 앞에서, 영화는 조용히 질문한다. 우리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인간다운 공동체를 형성할 방법이 있는가?
<해피엔드>가 이 질문에 대해 제안하는 대답은 개인의 서사를 경청하는 일, 즉 이해의 실천이다. 폭력과 혐오로 얼룩진 세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그들이 서 있는 자리를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다. 개인의 서정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을 감추는 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의 폭력과 대립하며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가 된다.
해피엔드
소라 네오 감독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 113분 / 2024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최정운
전환 회원. 숭실대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세상과 세상 사이의 시차에 21년째 적응 중이다.
각주
- 아이즈매거진, "순간의 경험들이 영화가 돼요" 네오 소라 인터뷰 https://www.eyesmag.com/posts/161211/happyend-neosora-interview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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