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해방과 투쟁, 공동체의 이야기: 영화 <씨너스: 죄인들> 정치적으로 읽기
최근 아카데미 유력 후보로 떠오른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뱀파이어 영화 <씨너스: 죄인들>. 흑인 음악인들과 아일랜드계 뱀파이어들이라는, 상이하지만 유사한 두 인종 공동체의 대립과 대조 속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본 기사에는 영화 <씨너스: 죄인들>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내 방문을 두드릴 때
난 말했지 어이 사탄이여
이제 갈 때가 되었나 보군"
- 로버트 존슨, <Me and the Devil Blues>
작년 8월 <씨너스: 죄인들>의 예고편이 유튜브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해당 영화의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블의 <블랙팬서> 시리즈로 유명한 라이언 쿠글러가 감독을 맡고 마이클 B. 조던과 헤일리 스타인펠드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사실이 잠시 화제를 모으기는 했지만, 많은 이들은 영화가 배경만 1930년대 미국일 뿐, 그저 흔한 할리우드 양산형 뱀파이어 영화 중 하나일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올해 4월 영화가 개봉하며 달라졌다. 관객과 평단 모두 공포와 액션, 서부극과 뮤지컬이 뒤섞인 이 기괴하고 독창적인 영화에 열광했다. 현재 <씨너스: 죄인들>은 2025년 개봉영화 중 전 세계 흥행 8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벌써부터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강력한 후보 중 하나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1
<씨너스: 죄인들>에 대한 이러한 열광의 원인은 무엇일까? 서로 다른 장르를 능숙하게 엮어낸 쿠글러 감독의 연출력, 마치 그 시절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배우들의 호연, 20세기 블루스와 21세기 힙합을 절묘하게 뒤섞어 아카데미 음악상 2관왕에 빛나는 루드비히 고란손의 음악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블과 디즈니로 대표되는 IP 중심 양산형 시리즈와 리메이크 영화가 대부분인 현재 할리우드 트렌드와는 대조적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정면승부한 영화라는 사실 역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은 원인일 것이다. 어쩌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나 <트와일라잇>처럼 감성적이고 사색적인 뱀파이어를 내세웠던 최근 20~30년간의 영미권 뱀파이어 장르와는 달리 햇빛, 은, 나무말뚝에 약하고 주인의 초대를 받아야만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고전적 절대악 뱀파이어의 설정으로 돌아갔다는 점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영화의 개별적인 장점들 못지않게,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주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쿠글러는 장르영화의 틀을 빌려, 미국 역사에서 '비국민', '2등 시민'으로 밀려났던 흑인과 이민자들의 비탄과 환희의 역사를 재해석한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면모가 트럼프 2기를 맞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미국(과 세계)에 가져다 준 울림이 영화의 흥행에 적잖게 작용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씨너스: 죄인들>은 미국의 지난 핏빛 역사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이는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음악이 불러온 해방과 악의 이중주
영화는 아일랜드,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등 시대와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일정 경지에 오른 음악인들에게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말하는 나레이션과 함께 시작한다. 이 능력은 공동체에 치유의 힘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악의 무리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고 영화는 말한다. 이처럼 음악, 더 나아가 공동체를 통해 계승된 문화적 전통이 지닌 이중적 면모는 영화 전반의 핵심 주제로 다뤄진다.
영화는 대공황과 금주법이 현재진행형이고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32년 미국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한 마을에서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 새미는 목화 소작농 집안의 장남으로 블루스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블루스를 악마의 음악쯤으로 여기는 목사 아버지와 갈등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 그의 사촌 스모크스택 쌍둥이 형제(각각 이름이 '스모크'와 '스택'이다)가 새미의 집을 방문한다. 그들은 새미에게 기타를 선물해 그를 음악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형제는 시카고에서의 갱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블루스 음악과 밀주를 대접하는 클럽을 마을 외곽에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사촌동생 새미는 물론 전설적인 블루스 뮤지션 델타 슬림,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손재주 좋은 보와 그레이스 차우 부부, 스모크의 전 아내인 음식 솜씨가 뛰어난 부두교 주술사 애니, 스모크스택 형제와 새미의 소꿉친구이자 스택의 전 애인인 흑백혼혈 메리, 뛰어난 보컬리스트이자 새미의 짝사랑 상대인 펄린, 덩치가 커 클럽 바운서 역할로 제격인 콘브레드로 이루어진 드림팀을 결성한다. 한때 서로에게 상처를 안기기도 했으나 음악과 문화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함께 뭉친 옛 인연들이 클럽 개장을 위한 만만의 준비를 마친다.
많은 이들의 손길에 힘입어 형제의 클럽은 반나절만에 완공되어 그날 저녁 개장하게 된다. 손님 대부분이 현금이 아닌 지역 농장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입장료를 지불하여 적자가 나는 등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새미와 델타 슬림, 펄린이 연주하는 블루스 음악에 힘입어 분위기는 한층 달아오른다. 특히 새미의 기타와 노래는 나레이션에서 말했던 대로 시공간을 허물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게 묘사되는데, 그가 자신의 음악활동을 못마땅하는 아버지에게 바치는 자작곡인 <I Lied to You>를 연주하자 음악에 심취한 클럽 손님들 사이에 과거 아프리카의 주술사와 무희, 미래의 래퍼와 디제이가 등장해 함께 어우러지는 몽환적인 시퀀스는 영화의 최고 명장면 중 하나이다. 2
문제는 세미의 음악에 귀 기울이던 게 클럽 손님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은 아일랜드계 뱀파이어 레믹은 자신이 앞서 전염시킨 KKK 단원 버트 조안 부부와 함께 클럽을 찾아간다.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낀 클럽 일행은 이들의 입장을 거절하지만, 이후 그들은 메리와 콘브레드를 시작으로 회유와 속임수를 동원해 클럽 구성원들을 한 명 한 명 전염시켜 뱀파이어로 만든다. 이에 클럽에 남은 최후의 생존자들은 동이 트기 전까지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 대한 불신을 뒤로 하고 하나로 뭉쳐 뱀파이어들에 맞선다.
위 기본적인 플롯만 놓고 본다면 <씨너스: 죄인들>의 기본 이야기 구조는 외부로부터 온 미지의 적들에 의해 고립된 인물들이 단합과 반목을 오고 가는, 고전적인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광이라면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존 카펜터의 <더 씽>과 같은 명작 할리우드 호러영화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영화이론가 배리 랭포드에 따르면 호러영화 내 이러한 '한계의 경험, 그리고 한계의 위반' 3으로서의 플롯구도는 단순 영화의 서사 진행을 위한 장치를 넘어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영화 내에서 해당 대립 구도를 형성한 두 정체성 집단, 즉 흑인과 아일랜드인의 경험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블루스에 맺힌 흑인들의 피의 역사
먼저 영화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블루스 음악부터 살펴보자. 블루스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강제이주당한 흑인 노예들이 고유의 토착 음악에 미국에서 접한 기독교 음악을 결합해 탄생시킨 장르로 해석된다. 영화 속 인물인 델타 슬림도 "블루스는 기독교처럼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직접 가지고 온 것"이라며 이를 직접 언급한다. 미국 영어에는 '블루스를 부르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too young to sing the blues)'라는 관용구가 있는데, 이는 블루스가 미 흑인들의 삶과 애환이 진하게 담긴 '어른들의 음악'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 델타 지역은 블루스와 각별한 관계를 지닌 공간이다. 20세기 이후 모던 블루스의 원형이 되는 델타 블루스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거친 기타 리프와 하모니카 연주, 투박하지만 호소력 있는 보컬, 그리고 은유적이면서도 미시시피 흑인들의 삶에서 직접 길어 올린 노래 가사로 유명한 델타 블루스는 이후 시카고 블루스 등 중서부 지역의 블루스로 계승되는 건 물론 록과 소울 음악의 탄생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미국 대중문화의 오랜 시원(始原)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그중에서도 27세에 요절하였으면서도 큰 음악적 족적을 남긴 로버트 존슨의 사례가 유명한데, 영화 속 새미의 외모나 음악 스타일의 경우 실제 로버트 존슨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게 묘사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존슨의 생전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음악적 능력을 얻었다'는 루머가 돌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의 노래가사에는 악마나 지옥과 같은 소재들이 빈번히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새미가 목사 아버지로부터 악마의 음악을 한다 핀잔을 듣고, 이후 자신의 음악으로 실제로 뱀파이어들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화는 블루스뿐만 아니라 당시 흑인들이 경험하던 차별과 폭력의 역사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묘사한다. 잘 알려져 있듯 미국의 흑인 노예제는 남북전쟁 이후 철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은 과거 노예제가 존재했던 남부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많은 남부 주들은 '분리되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허울뿐인 원칙을 바탕으로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공간을 분리하는 건 물론 흑인들의 참정권을 필두로 그들의 거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기회를 제한하는 일련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는데, 이를 '짐 크로(Jim Crow) 법'이라고 한다. 영화 내에서도 마을 내에 기차역부터 식료품점까지 백인 구역과 흑인 구역이 나눠진 모습으로 이러한 짐 크로 법의 현실을 고증하고 있다.
법적으로 명문화된 차별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행해지는 폭력 역시 만연했다. 절도나 성폭력 등을 시비로 흑인을 구타하고 고문한 이후 나무에 목을 매다는 '린치(lynching)'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엄연히 불법이었지만 남부 전역에서 행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가 가장 심했다. 작중 델타 슬림이 과거 마을 보안관의 주도로 린치당한 음악 동료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긴 "백인들은 블루스를 좋아하지만, 블루스를 하는 사람(흑인)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촌평은 당대의 이러한 씁쓸한 역사를 반영한다.
스모크스택 형제가 미시시피 마을을 떠나 갱 활동을 했던 곳이 다름 아닌 시카고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 알 카포네로 대표되는 금주법 시대 마피아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무려 600만 명의 흑인들이 남부의 인종차별을 피해 북부로 이주한 '흑인 대이동(Great Migration)'의 핵심 종착지 중 하나가 바로 시카고였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지리적으로 남부와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흑인들이 종사할 수 있는 저숙련 일자리 역시 풍부했다. 남북전쟁 시절부터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등 흑인 인권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했고,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한 링컨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역사적 상징성 역시 있었다.
하지만 남부와 같은 법적인 차별만 없을 뿐 주거와 일자리, 교육과 공공서비스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흑인들을 '2등 시민' 취급하기는 시카고를 포함한 북부 도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제가 새미에게 시카고가 "목화밭 대신 고층빌딩이 있는 것만 빼면 미시시피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매도 아는 사람들에게 맞는 게 낫다"고 자신들의 귀향 이유를 설명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은 1921년에 발생한 털사 인종학살이다. 미시시피의 바로 이웃 주였던 오클라호마 주는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해 많은 흑인들이 이주했는데, 그 중에서도 털사 시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성공한 중산층과 상류층 흑인들이 모여들어 '검은 월스트리트(Black Wall Street)'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한 백인들의 열등감이 1921년 5월 31일 우연한 계기로 폭발해, KKK를 위시한 백인 인종주의 집단들이 흑인들의 가정과 상점, 일터에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천 명이 넘는 사상자와 200만 달러가 넘는 재산 손해를 낳은 것이 바로 털사 인종학살이다. 영화에서 스모크스택 형제는 시카고로 이주하기 전 털사에서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언급되는데, 이 외에도 흑인들이 자체적으로 건설한 공동체가 백인으로 이루어진 침입자 집단에 의해 무너진다는 설정 역시 털사 인종학살 사건에 대한 은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씨너스: 죄인들> 속 흑인의 삶이 단순히 일방적 피해자의 그것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클럽 개장 과정을 담은 몽타주 장면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쿠글러의 카메라는 주요 인물은 물론 말단 조연들의 클럽 건설에 참여하는 크고 작은 노동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포착하며, 이들의 일상에 깃든 근면함과 활력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조명한다. 이들은 단순히 시대에 희생당하기만 한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구조적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 존엄과 삶의 기쁨을 지켜온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에게 클럽의 건설은 단순히 지옥 같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지난한 일상 속에서도 조용히 축적해 온 연대와 자부심, 존엄의 결실에 가까운 것이다.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아일랜드인의 모호한 위치
앞서 언급했듯, 클럽을 습격하는 뱀파이어 집단의 수장인 레믹은 아일랜드 출신임이 영화 곳곳에서 암시된다. 그는 정체를 숨길 때는 전형적인 미국 남부 백인 억양을 사용하지만, 뱀파이어로서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아일랜드 억양으로 말한다. 새미의 블루스에 대응하듯 <Will Ye Go, Lassie, Go?> 나 <Rocky Road to Dublin> 같은 아일랜드 포크 음악을 즐겨 부르기도 한다. 영화 종반부에서 겁에 질린 새미가 주기도문을 외우자 레믹은 이를 "우리 선조들의 땅을 빼앗은 이들의 언어"라고 일축하는데, 이는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오랜 식민지배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레믹의 이러한 배경 설정은 미국 역사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차지했던 위치에 비춰 보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미국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역사는 184~5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을 경험한 아일랜드인들의 미국으로의 대거 이주로부터 시작된다. 본국에서도 영국의 식민지배 치하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억압을 경험했던 그들은, 새 삶의 터전인 미국에서도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색슨 계열 백인들로부터 차별받아야만 했다. 이들 대부분은 저임금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북부 대도시와 남부 대농장 모두에서 하류층의 구성원이 되었고, 주류 사회로부터 백인이지만 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간주되었다.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일상적 차별과 경제적 배제로 인해 사회적 이동의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주류 백인 사회가 아일랜드인들이 자신들에 맞선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이들에게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했다는 것이다. 차별을 경험하던 아일랜드계 하류층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과 동병상련을 느껴 이들과 연대해 저항할 가능성은 백인 지배계급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아일랜드계로 대표되는 하류층 백인들의 계급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단일한 '백인종'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첬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백인 지도층의 이러한 갈라치기 시도가 대단히 효과적이었으며, 미국에서 유럽이 경험한 것과 같이 노동계급에 기반한 보편적이고도 진보적인 정치사회운동의 출범을 저해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4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흑인과 아일랜드인 공동체 사이에 반목과 분열의 역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두 집단은 19세기와 20세기 노동운동에서 공동의 전선을 형성해 자본가 계급의 탄압에 맞섰으며, 1960~70년대 활동한 '흑표당(Black Panther Party)'과 같은 일부 급진 사회주의 성향의 흑인 민권운동 단체들은 백인 빈민운동 단위들과 함께 경찰폭력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는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정치 이슈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 역시 활발했는데, 뉴욕과 보스턴, 시카 같이 흑인과 아일랜드인 인구가 모두 많은 도시들에서는 이들 간 활발한 예술적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위와 같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레믹이 영화 속에서 흑인 공동체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미국 아일랜드 공동체의 중간자적인 위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블루스 클럽과 뱀파이어 무리 간 대치가 고전적인 흑백 대립구도를 연상시키는 것과 별개로, 정작 해당 무리의 우두머리 레믹은 흑인들에 대한 별다른 인종주의적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쫓는 아메리카 원주민 뱀파이어 헌터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KKK 단원이던 버트 조안 부부의 호의를 샀다가 그들을 감염시키는 등, 남부 백인 공동체의 인종주의를 상대화해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클럽 내 여러 흑인들을 감염시킨 이후에는 뱀파이어 공동체는 인종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이며, 함께 힘을 합쳐 마을에 남아있는 KKK단을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하는 방식의 반인종주의적 수사를 동원해 아직 전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회유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레믹은 버트가 뱀파이어로 변한 이후 조안에게 "이제 그는 더 나아졌어"라고 말하는데, 뱀파이어 공동체의 이러한 유사 반인종주의적 평등주의 면모를 고려하면 이는 단순 농담이나 빈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새미의 블루스 음악으로 대표되는 흑인문화 일반에 대한 레믹의 태도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음악 소리를 따라 버트 조안 부부와 함께 클럽 앞에 도착한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는 단순 먹잇감을 노린 포식자의 미소라기보다는, 오랜 여정 끝에 마침내 몸을 녹일 거처를 찾은 나그네의 안도에 더 가깝다.
이외에도 레믹이 클럽에 입장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하며 부르는 노래인 <Pick Poor Robin Clean>이 흑인이 작곡한 포크 블루스라는 점, 그가 클럽 일행 중에서도 새미에게 유달리 관심을 보이며 "이 아이만 넘겨 주면 나머지는 풀어주겠다"고까지 제안했다는 점, 새미에게 "난 이곳에 갇혔다. 우리 민족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너의 재능이라면 가능하다"며 그를 끝까지 회유하려고 시도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새미의 음악을 통해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자신의 옛 아일랜드 전통과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쿠글러는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흑인 문화와 아일랜드 문화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며 레믹을 아일랜드인으로 설정한 이유를 직접 밝히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영화는 구도상 대립적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동질적인 두 공동체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5
공동체가 전통을 계승하는 두 가지 방식
물론 클럽 공동체와 뱀파이어 무리 사이에 이러한 공통점만 있는 건 아니다. 둘 사이에는 두 민족집단 간 경험의 동질성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두 공동체의 작동원리 자체가 다르다. 먼저 뱀파이어 집단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그 어떤 분열이나 반목의 기색도 없이, 흡혈을 통한 동족의 증가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들의 이러한 통합은 감동적이기라기보다는 차갑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레믹이 과거로부터 계승해 온 기억과 정서를 공유하지만, 이는 상호 간에 조정과 타협을 통해 얻어낸 성취가 아니라 뱀파이어로 전염될 당시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이기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평등하고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레믹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이로부터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뱀파이어 집단의 이러한 몰개성한 단합은 어수선하지만 풍부하고, 투박하지만 진정성 있으며, 왁자지껄하지만 활력 넘치는 클럽 내 공동체의 모습과 분명히 대조된다. 이러한 두 공동체 간 차이는 단순 뱀파이어와 인간이라는 종족적 차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핵심은 지난한 세월을 함께 이겨내고 몸을 부대끼며 함께 노동하면서 체득한 '공통의 경험'의 유무이다.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클럽의 경험은 알고 보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뱀파이어 집단의 단합된 경험은 사실 오직 레믹 혼자만의 것이다.
위와 같은 두 집단의 차이는 각자의 음악 장면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블루스 클럽에서 펼쳐지는 새미의 <I Lied to You> 연주장면에서 카메라는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추고, 술과 음식을 나누고, 룰렛과 카드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담는다. 관객은 클럽 사람들의 생생한 개별적인 표정과 움직임을 통해 이들이 구태여 발 맞추지 않아도 이미 하나의 공동체로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음을 느낄 수 있다. 반면 뱀파이어들이 부르는 <Rocky Road to Dublin> 장면의 경우, 스텍의 주도 하에 마치 미리 짠 것만 같은 정교한 군무가 펼쳐진다. 그러나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포착할 생각조차 않고 화면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관객이 이 장면에서 보게 되는 건 개별성이 지워진 일사불란함, 통제된 집단의 위계와 긴장감이다. 6
쿠글러가 선사한 선과 악, 인간과 뱀파이어, 다양성과 통제 간 하룻밤 쫓고 쫓기는 추격전. 여기에는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휴머니즘적인 통찰은 물론, 단일한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여기에 모두를 일방적으로 우겨 넣는 게 아닌, 서로의 경험과 서사를 골고루 인정하면서도 그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야말로 전통을 계승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는 가장 모범적인 방법이라는 정치사회적 지론마저 담겨 있다. 영화의 주제인 인종 문제를 넘어, 분열과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무겁게 다가와야 할 메시지다.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감독
마이클 B. 조던, 헤일리 스테인펠드 / 137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전 회장, 전환 국제연대팀장.
동국대학교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
각주
- Top 2025 Movies at the Worldwide Box Office https://www.the-numbers.com/box-office-records/worldwide/all-movies/cumulative/released-in-2025 [본문으로]
- "I Lied to you" Surreal Montage - Sinners movie clip https://www.youtube.com/watch?v=0kwUeO3CxyA [본문으로]
- 배리 랭포드, 방혜진 옮김,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 한내래, 2010, p 265 [본문으로]
- 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 이후, 2009, p 80-82 [본문으로]
- Indiewire, Why Is There Irish Music in the Very Bluesy ‘Sinners’? Ryan Coogler Explains https://www.indiewire.com/features/interviews/sinners-irish-music-ryan-coogler-explains-1235115635/ [본문으로]
- "Rocky Road to Dublin"- Vampire Dance Scene - Sinners Clip https://www.youtube.com/watch?v=8k4xWqF9yD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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