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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씨네도모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이상하지 않은 흥행과 이상한 비평

by Domoleft 2025. 10. 31.

[씨네도모]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이상하지 않은 흥행과 이상한 비평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과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한국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돌연변이 흥행물'이라 규정하며 '한국 극장의 일본화'를 우려한다. '이상 흥행'이라는 문화 종족주의적 프레임을 걷어내고,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정말 이상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자 한다.


※ 본 기사에는 만화·애니메이션 <체인소 맨>, <귀멸의 칼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좌측부터: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포스터 /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포스터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레제편)이 벌써 한 달째 한국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이 글이 탈고되는 10월 말 기준으로 <레제편>의 국내 관객은 262만 명을 돌파했고, 배급사가 11월 13일 치러지는 수능 이후까지 본작을 상영할 계획임을 감안한다면 270만을 넘어 300만 관객 돌파까지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는 올해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하 무한성편, 554만 명)에 이은 2위의 수치이며 200만 명을 동원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220만 명이 본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등 과거 흥행작들까지도 이미 앞지른 수치다. 훨씬 많은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에는 아직 근소하게 밀리지만, 흥행 추이를 본다면 곧 <레제편>이 <어쩔수가없다>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앞서 5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무한성편>에 이어 <레제편>까지 대흥행에 성공하면서,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 극장가 점령'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다시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평론가 오동진이 경기일보에 기고한 칼럼[각주:1]이다. "돌연변이 흥행물들의 흥행은 그다지 좋은 시그널이 아니"라는 오동진의 주장은 적잖은 비판을 불러왔다. 확실히 항상 비주류 내지 아동물로 취급되었던 '애니메이션', 그리고 오동진 평론가와 유사한 유형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경계 대상'으로 치부되어 온 일본 문화의 속성을 모두 가진 두 편의 영화가 하반기 흥행작 투톱을 달린다는 것이 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편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에서 흥행작이 되는 영화는 그 사회의 일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더라도, 흥행의 이유에 대해 작품 외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평론의 기본이자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지금 <레제편>, <무한성편>의 규격 외 흥행과 그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몇 가지 기초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 보고자 한다.


'서브컬처', '컬처'의 보편성을 획득하다

다른 질문들을 던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은 "왜 일본 애니메이션인가?"라는 질문이다. 그것은 <레제편>의 흥행이 단지 개별 작품의 흥행이 아니라 최근 극장가를 점령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러시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비단 극장만이 아니다. 서울 홍대입구역 근방은 근 몇 년간 '홍키하바라(일본의 오타쿠 집결지 아키하바라와 홍대입구의 합성어)'로 불릴 만큼 만화·애니메이션 굿즈 샵과 서브컬처 관련 전시로 붐비는 '성지'가 되었다. 소위 '오타쿠'로 불리는 고관여 팬층만이 아니라 20·30대 청년층의 적지 않은 수가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혹은 전혀 다른 세대의 작품임에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았거나 최소한 어떤 작품인지를 인지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다.

홍대입구역 근처의 오타쿠 상점을 모아 놓은 '홍대입구 오타쿠 지도'. 출처: 루리웹

 

사실 한국 사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보편화는 그리 최근의 일이 아니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복귀작이었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흥행 중인 <무한성편>의 전작 <무한열차편> 역시 개봉 당시 가볍게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200만 이상의 흥행에 성공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최종 558만 명으로 당시 동분기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OTT의 발달 이후 영화관에 가는 인구 자체가 크게 줄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극장가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이레귤러'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최소한 5년 전부터 입증되어 온 셈이다.

 

급격한 주류화의 핵심 이유로는 '접근성 향상'이 꼽힌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접근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에도 루리웹, 트위터(현 X) 등의 커뮤니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및 만화 관련 정보가 공유되며 2차창작이 이뤄지곤 했지만, 의식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찾아 즐기는 고관여층을 제외한다면 당시 일반적으로 폭넓게 알려진 서브컬처 콘텐츠들은 소위 '소년만화 3대장'이라 불렸던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를 비롯해 주요 TV채널에서 방영한 작품들로 한정되었으며 여타 작품을 시청하기 위해서는 불법 다운로드 등의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에 더해 투니버스 등 애니메이션 채널의 주요 시청자층이 아동·청소년층이었으므로, 여전히 성인의 애니메이션 시청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 등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보편적이지 않은 경우에 해당했다.

2000~2010년대 '소년만화 3대장'으로 불린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좌측부터)

 

애니메이션 시장의 급격한 성장은 2020년대 초 코로나 팬데믹과 넷플릭스 등 OTT의 등장이 맞물려 빚어진 결과로 평가된다. 소위 '원나블'이나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을 보며 성장했고, 일본 대중문화에 과거와 같은 거부감이 없는 2000년대 출생 세대는 청년층에 진입하며 코로나 팬데믹의 직격을 맞이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모두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OTT 플랫폼의 가입자는 대규모로 증가했고, 2017년 3분기 1억 명이던 넷플릭스의 회원수는 팬데믹의 한가운데였던 2020년 4분기 2억 370만 명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각주:2]

 

넷플릭스와 디즈니+ 등의 대형 OTT들은 애니메이션 콘텐츠의 제작을 지원하며 신작 애니를 메인 화면에 배치하여 시청자를 모았고, OTT 독점 판권 및 전세계 동시공개 등의 전개 방식은 시청자들의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와 함께 기존에는 일부 오타쿠층만을 수요처로 삼던 애니메이션 전문 OTT들 역시 크게 성장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전문 OTT인 라프텔의 매출액은 2021년 16억 원에서 2023년 297억 원으로 기하급수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전문 OTT인 크런치롤(Crunchyroll)의 경우 2017년 100만 명에서 2025년 1분기 1,700만 명으로 8년 간 17배의 성장을 이룬 바 있다.

좌측부터: 2021~2023년 라프텔의 매출액 상승 표 / 2017~2025년 크런치롤의 구독자 수 상승 표. 출처: 한국경제 / Anime by The Numbers animebythenumbers.substack.com

 

코로나 팬데믹이 마무리되고 OTT를 통해 쉽게 시청해 온 애니메이션들의 극장판, 혹은 유명 감독이나 프랜차이즈의 신작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개봉하자 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전 한국에 개봉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최대 흥행작은 2017년 개봉한 <너의 이름은>(400만)이었고, 이는 2004년 개봉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300만)의 기록을 13년만에 갱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2020년 이후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 <무한성편> 등은 차례로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이 흥행기록을 연쇄적으로 갱신했다. 애니메이션 흥행 기록의 갱신 추이가 급격히 빨라지는 추세는 과거 '서브컬처'로 분류되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서브'를 붙이기 어려운 보편성을 획득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왕도를 벗어난 소년만화, 왕도를 벗어난 현대사회의 거울쌍

이렇듯 일본 애니메이션의 보편화는 관객 수 및 OTT 구독자수 등의 명백한 지표로 확인되는 사회적 현상이기에, <레제편>의 흥행에 불만을 표출하는 일부의 사람들 역시 이를 공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이러한 행간은 앞서 언급한 오동진 평론가의 칼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동진은 <레제편>을 비판하기 위해 그에 앞서 흥행한 <무한성편>을 (여전히 불만스러운 논조이지만) 언급하며 "그래도 (무한성편에는) 서사라는 것이 있고 행동 동기와 개연성이 있다"고 평한다.

 

오동진의 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귀멸의 칼날> 서사의 기본 구조는 왕도적인 소년만화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며 선악구도 역시 명확하게 드러난다. 주인공 탄지로는 오니(도깨비)의 습격으로 가족을 잃고 마지막 남은 가족이지만 오니가 되어 버린 여동생 네즈코를 지키기 위해 '귀살대'에 입대하여 오니와 싸운다. 이 과정에서 본래 인간이었던 이들이 오니가 된 각자의 이유, 그리고 다른 귀살대 등장인물들의 개별 서사들이 묘사되며, 마지막에는 주인공과 동료들이 '절대 악'에 가까운 최종 보스 키부츠지 무잔을 제거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으로 만화는 마무리된다.

 

'가족을 지킨다'는 목표를 위해 주인공이 싸우고 성장하며 마지막에는 결코 패퇴시킬 수 없을 것 같던 보스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 없이 철저한 왕도적 서사다. '주변인을 지킨다(블리치의 이치고)', '동생의 몸을 되찾는다(강철의 연금술사의 에드워드)' 등 기존 주요 소년만화 주인공들이 가졌던 목적의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여기에 더해 남매의 연을 강조하며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세상에 메마른 가족애를 자극하기도 한다. 흥행의 문법을 철저히 따른 만화의 서사에, 절륜하게 뽑힌 작화를 자랑하는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귀멸의 칼날>이 흥행한 것은 오히려 특이한 일이라 보기 어렵다.

<귀멸의 칼날>의 주인공 남매 탄지로와 네즈코

 

이에 반해 <체인소 맨>의 주인공 덴지는 그 어떤 비현실적이거나 공상적인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철저히 현실적인 인간상이다. 부모 없는 고아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다 죽기 직전 악마인 포치타와 계약을 맺어 '체인소 맨'이 된 덴지는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대부분의 것들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한 침대에서 자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예쁜 여성과 '자거나' '가슴을 만지는 것'이 덴지의 목표다. 현대적·진보적 인권감수성으로 물론 용납하기 어려운 설정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처절하고 현실적이다. 덴지는 공안에 들어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는 법을 배우지만, 그가 관계를 맺은 모든 주역 등장인물(레제, 파워, 아키, 마키마, 요시다, 나유타 등)은 자신을 배신하거나 사망하고 주인공의 인생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레제편>의 흥행에 대해 일각에서 표출하는 불만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왕도적이고 교훈적이며 도덕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귀멸의 칼날), 혹은 평론가 자신이 '작가주의적'이라 인정할 수 있는 작품(아마도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이 해당될 것이다)이 흥행하는 것은 비록 일본 작품이기에 불만족스러울지언정 어느 정도 납득할 수는 있지만, <체인소 맨>과 같이 도덕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교훈이 있어 보이지도 않으며 주인공의 목적의식마저 그리 명확하지 않은 작품이 극장가를 휩쓰는 것은 '제어해야 할 신호'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모든 사회의 흥행작들은 해당 사회의 일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귀멸의 칼날>은 그렇다 쳐도 왕도를 벗어난 소년만화조차 300만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하는 것은, 결국 현대 사회가 왕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덴지의 서사는 한참 선배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와 쉽게 비교된다. 에반게리온의 신지는 현대인들, 특히 자신의 세계에 갇혀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한다. 평범한 중학생이고 로봇 따위 타고 싶지 않았던 신지는 반강제로 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이 된다. 주변인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레이, 아스카, 미사토)이 곧 죽거나 혹은 이들과의 관계가 파탄나며 좌절과 절망을 경험한다. 신지와 덴지의 성격과 이들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다르지만, 이들이 다양한 관계를 통해 희망을 갖다가도 좌절하고 절망하며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수많은 '멘헤라(멘탈 헬스, 즉 정신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는 일본 은어)'들이 겪는 삶의 문제에 대한 냉소적 은유다.

좌측부터: <체인소 맨> 중 레제와 싸우는 덴지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중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신지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방영 당시 가해진 비판과 비난은 지금 <레제편>에 대해 한국 일각에서 가해지는 비판과 유사했다. 그 어떤 교훈도 없고 정신병만 가득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런 것이 흥행하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당시에도 난무한 바 있다. 놀랍게도 그러한 비판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체인소 맨> 혹은 <에반게리온>과 같은 콘텐츠가 흥행하는 사회는 (정상성의 다양한 기준을 차치하더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사회', 즉 '다수의 현대인들이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고 갈 수 없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정말 그렇다면 그 사회를 만들어낸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오동진 평론가는 경기일보에 해당 칼럼을 기고하기 몇 개월 전인 지난 8월 13일, 정의당 장혜영 전 의원의 조국 사면 비판에 대해 페이스북 댓글로 "앞으로 영화 만든다고 깝죽대기만 해 봐라, 잘근잘근 씹어 주겠다"는 댓글을 달아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사모펀드 투자로 수익을 올리고 지위와 위치를 활용해 자식을 부정입학시키며 현대 사회의 보편적 청년층에 '진보는 위선적이다'라는 관념을 심어 놓아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거세시킨 것은 장혜영이 아니라 오동진 평론가가 옹호하고자 한 대상인 조국이었다.

 

마찬가지다. <체인소 맨>, 혹은 <에반게리온>과 같은 현대의 콘텐츠를 만들고 향유하는 주체들은 오동진 평론가, 혹은 그와 같이 '평론가' 내지 '위원장'의 타이틀을 달고 '비도덕적' 문화콘텐츠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대체로 이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관계맺음에 어려움을 느끼고, 사회적 기반을 만들기 어려워하며, 특별한 목적의식과 꿈 없이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돌연변이 흥행물'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면, 그 돌연변이 흥행물이 나오게 한 '돌연변이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의 특권층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선택적 문화 종족주의의 한계

영화 <퇴마록> 포스터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극장가 돌풍이 불어오기 직전 극장에 걸렸던 또 다른 애니메이션이 하나 있다. 이우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국산 애니메이션 <퇴마록>이다. 누적 1,000만부 이상이 판매된 한국 최고의 오컬트 판타지 소설로 꼽히는 원작이 2001년 완결 후 24년 만에 애니화된 것이다. <퇴마록>은 애니메이션 제작 인프라가 일본에 비해 떨어지며 투자를 받기도 힘든 한국에서 오랜만에 등장한 성인향 장편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10주 만에 모든 상영관에서 내려가며 50만 명의 소소한 관객으로 상영을 마무리했다.

 

약 60억 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지만 평단과 관객의 고평가를 받은 국산 애니메이션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예산 영화 및 독립영화만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들꽃영화상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동진 평론가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극장에 채워지는 콘텐츠는 한국 영화여야 한다'라는 그의 '영화'를 판별하는 기준에 '한국 애니메이션'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어쩔수가없다>가 <레제편>에 관객 수로 지는 것은 분하기 그지없지만 <퇴마록>이 <무한성편>의 1/10도 되지 않는 스코어로 조용히 상영종료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은 한국 문화평론에 만연한 '선택적 문화 종족주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준다. "채워지는 콘텐츠는 영화여야 한다"고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영화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산 영화의 스크린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항상 논쟁이 되는 스크린쿼터제를 돌이켜보자. 자국 영화의 상영비율과 일수를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있는 국가는 현재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최근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의 대표적 비관세장벽으로 스크린쿼터제를 꼽기도 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고육지책에도 불구하고 지난 2023년 한국 영화 매출액은 5,984억 원으로 전년 대비 5.2%(326억 원) 감소했고, 한국 영화 관객 수는 6,075만 명으로 전년 대비 3.3%(204만 명) 감소했다.[각주:3] 이듬해인 2024년의 경우 관객수와 매출액은 소폭 반등했으나 점유율은 감소했다.

2023년 상반기 영화 매출액 및 한국영화 매출액. 출처: 연합뉴스

 

한국 영화평론 내지 영화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뻔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한국영화가 내재하고 있는 진짜 문제를 짚으려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익숙하지 않은 장르, 혹은 심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해외 영화에 대한 규제책을 되뇌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주 가벼운 예시를 들어 보자. 지난 2024년 박스오피스 10위권에 든 한국영화 7편(파묘, 범죄도시4, 베테랑2, 하얼빈, 파일럿, 소방관, 탈주) 중 주연급 인물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는 <파묘>와 <파일럿>의 2편에 불과하다.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여 박스오피스 50위권까지 시야를 넓혀 본다면, 국산 애니메이션 영화는 25위에 안착한 <사랑의 하츄핑> 단 한 작품에 불과하다.[각주:4]

 

물론 현재 한국영화의 점유율 유지와 흥행에 주로 남성향 액션물인 <범죄도시>, <베테랑>, <극한직업>과 같은 통쾌한 범죄 액션영화들의 역할이 큰 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오직 그러한 작품들만이 남아 한국영화의 명맥을 잇게 된다면 한국영화의 스테레오타입은 지금보다 더 고착화되고, 더 많은 관객들이 자기복제적 영화들에 질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평론과 비평의 역할이 작품에 대한 사회적이며 실천적인 해석이라면, 영화평론은 최소한 한국의 영화산업에 지금보다 더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장르적 특색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라, 는 주문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의식적 역할부여가 사라진 평론이 한없이 게을러지고 그것은 또한 영화산업의 다양성 거세라는 악순환을 불러올 따름이라는 걸 우리는 한국 영화산업의 자기복제적 딜레마와 평론계 일각의 '선택적 문화 종족주의'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이상한 흥행'은 없지만 '이상한 비평'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모든 작품의 흥행 여부에는 작품 내적인 이유와 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이유가 함께 수반된다. 극장 상영 당시 박스오피스를 장악했던 작품들 중 수도 없이 많은 작품들이 1년도 지나지 않아 대중에게 잊혀진다. 마찬가지로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외면받았던 작품들 중 적지 않은 작품이 세태의 변화든, 보편 취향의 변화든 다양한 이유로 사후에 '명작' 취급을 받는다. <레제편>과 <무한성편>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처럼 오래 남는 작품이 될지, 혹은 "아 그 시기에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들이 흥행했었지" 정도로 종종 회자되는 사례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이상한 흥행'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은 '이상한 비평'이다.

 

긴 비판을 늘어놓았음에도 오동진 평론가에게, 조금 더 나아가 영화와 콘텐츠에 대한 말을 얹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 정말 최소한으로 주문하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다. '대상에 대한 비평은 그 대상을 알아야 가능하다'는 비평의 기본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오동진 평론가는 칼럼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 '체인소 맨'은 아마도 할리우드의 안티히어로물인 '베놈'시리즈를 일본식으로 모방한 작품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전기톱 악마견 '포치타'와의 계약으로 신체가 합치된 것은 '베놈'에서 주인공 기자 에디(톰 하디)가 외계 생물체 '심비오트'와 몸이 섞이는 것과 유사하다." 미안하지만 두 작품을 모두 본 입장에서 <체인소 맨>과 <베놈>이 유사한 점은 두 개의 생명체가 융합하여 공생하는 덕에 인간이 변신 및 전투능력을 획득한다는 것밖에 없다. 이런 식의 인상비평이라면 오 평론가가 지목한 <베놈>은 <강식장갑 가이버>의 미국식 모방이며, <강식장갑 가이버>는 다시 <데빌맨>의 표절이 될 수밖에 없다.

미지의 생명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테마의 주요 작품들: <베놈>, <강식장갑 가이버>, <데빌맨>

 

일본 애니메이션의 압도적 흥행이 어째서 이상하지 않은 것인지, 혹은 정말 이상하다면 왜 이상한 것인지에 대한 냉정한 분석은 결국 콘텐츠를 직접 확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지금 한국 극장가를 뒤덮은 '이상하지 않은 흥행'은 더욱 오래 지속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중문화의 발전을 위해 분명히 제어되어야 하는 '이상한 비평'을 막기 위해서는 일단 양을 늘려야 하고, 한 번은 승부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각주:5]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영화도 좋아한다.


각주

  1. 경기일보,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 1위라니?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870323 [본문으로]
  2. 이투데이, 넷플릭스, 코로나19 시대 최고 승자…가입자 사상 첫 2억 명 돌파 https://www.etoday.co.kr/news/view/1986562 [본문으로]
  3. 한국저작권위원회, 2024년 2-4호 이슈 브리프 https://m.blog.naver.com/kcc_press/223375341174 [본문으로]
  4. KOFIC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연도별 박스오피스  https://www.kobis.or.kr/kobis/business/stat/boxs/findYearlyBoxOfficeList.do [본문으로]
  5. 오동진 평론가의 칼럼에서 해당 구절을 차용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