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도모] 제임스 건의 <슈퍼맨>: 전쟁, 학살과 남성성 위기의 시대에 영웅의 존재의의를 다시 묻다
슈퍼히어로물의 쇠락과 퇴조 속,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제임스 건이 히어로물의 클래식인 <슈퍼맨>으로 돌아왔다. 전쟁과 학살, 식민주의와 왜곡된 남성성을 비판하는 제임스 건의 새로운 슈퍼맨은 어떤 모습일지 '씨네도모'와 함께 살펴보자.
※ 본 기사에는 영화 <슈퍼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이야!
난 사랑을 해. 두려워하기도 하고!
난 매일 아침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한 발을 내딛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난 항상 실수를 해. 하지만 그게 인간이야.
그리고 그게 내 가장 강력한 힘이지."
- 영화 <슈퍼맨> 中
슈퍼히어로 영화의 쇠락 속, 돌아온 제임스 건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밝힐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한다. 사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다. 태어나서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부터가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2>(2004)였다. 중학교 3년 내내 내 핸드폰 배경화면은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 포스터였다. 고등학교 소논문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던 논문 <포스트 9.11시대 미국 대중문화의 변화 양상에 대한 연구>는 <다크 나이트>(2008)를 포함한 21세기 슈퍼히어로 영화에 당시 막 읽기 시작했던 슬라보예 지젝식 문화비평이론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게 사실상 전부였다. 대학 새내기 때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을 개봉 당일에 보기 위해 대학교 첫 중간고사 전날임에도 불구하고 조조 영화표를 끊었다(해당 과목은 B+학점을 받았다).
이처럼 애정이 깊기에, 최근 슈퍼히어로 영화의 쇠락은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할리우드에서 눈에 띄는 부진을 경험하고 있다. 2010년대 내내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마블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한 단원을 마무리한 이후 예전만 못한 세월을 경험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 <토르: 러브 앤 썬더>(2022),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2023), <더 마블스>(2023) 등 근래 개봉한 많은 영화들이 흥행과 평가 모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영화를 넘어 디즈니+를 통한 드라마화를 통해 세계관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오히려 많은 관객들이 이로부터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마블과 함께 슈퍼이어로 시장을 양분했던 DC 역시 <블랙 아담>(2022), <플래시>(2023),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2023)이 연달아 흥행과 평가 모두에서 실패하며 아예 세계관 전체를 리부트하기에 이르렀다. 슈퍼히어로 팬들을 넘어 영화 관객 전반이 슈퍼히어로 장르에 더는 신선함이나 즐거움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 1이런 상황이다 보니, 새로이 DC 유니버스의 수장을 맡은 제임스 건이 처음으로 내놓을 영화가 <슈퍼맨>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그는 마블과 DC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건은 마블에서 코믹스 팬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군소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부작을 유니버스 최고의 인기작으로 대성공시킨 바 있다. DC로 넘어와서는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2021)와 <피스메이커>(2022) TV시리즈의 메가폰을 잡아 마블에 비해 부진하던 DC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막 나가는 폭력과 대중문화 레퍼런스를 버무린 B급 감성과 기성 질서에서 밀려난 루저들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은 반골 정신으로 유명한 그이기에, 자신의 성향을 가장 모범적인 슈퍼히어로로 평가받는 슈퍼맨의 정체성과 어떻게 버무릴지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과연 슈퍼히어로 장르의 베테랑 제임스 건은, 슈퍼맨을 통해 슈퍼히어로 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했을까?
흔들리면서 강해지는 '맨 오브 스틸'
영화는 300년 전부터 슈퍼히어로(영화에서는 '메타휴먼'이라 부른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30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아이가 3년 전부터 자신을 슈퍼맨이라 부르며 히어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클라크 켄트, 즉 슈퍼맨은 3주 전 미국의 동맹국인 가상국가 보라비아의 이웃나라 자한푸르 침공을 막아 논란의 중심에 선 상황이다. 언론은 메타휴먼의 국제정세 개입이 정당한지를 놓고 논쟁하고, 미 정부는 슈퍼맨의 활동이 국익에 부합하는지 검토한다. 온라인에서도 슈퍼맨의 지지자와 반대자 간 살벌한 설전이 오간다. 여기에 이제는 '보라비아의 망치'를 자처하는 악당이 슈퍼맨이 거주하는 도시 메트로폴리스를 침공하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구를 정복하고 지구인들을 노예화하라는 슈퍼맨의 친아버지 조-엘의 메시지가 언론을 통해 폭로되며 슈퍼맨은 사면초가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모든 일의 뒤에 있는 건 슈퍼맨의 숙적 렉스 루터다. 빅테크 기업 렉스코프의 CEO인 그는, 자수성가한 자신과는 다르게 선천적으로 뛰어난 능력만으로 영웅이 된 슈퍼맨에게 강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그는 보라비아 정부에 자한푸르 침공을 사주하고 슈퍼맨의 남극 기지에 침투해 조-엘의 메시지를 탈취한다. 언론 인터뷰에 나가 슈퍼맨의 위험성을 설파하고, 미국 정부에게 슈퍼맨을 체포할 것을 강력 권장한다. 슈퍼맨의 DNA를 바탕으로 한 클론 울트라맨(앞선 '보라비아의 망치'의 정체)을 만들어 그를 공격하면서 뇌파조정 원숭이들을 동원해 인터넷에 반 슈퍼맨 악플을 조직적으로 달기도 한다. 이에 슈퍼맨은 연인이자 <데일리 플래닛>의 동료기자 로이스 레인, 역시 동료 기자인 지미 올슨, 그린 랜턴, 미스터 테라픽, 호크걸로 이루어진 슈퍼히어로 그룹 저스티스 갱과 함께 그의 음모를 파헤쳐 나간다.
영화는 슈퍼맨 세계관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과 최신 해석을 적절히 결합한 모습을 보여 준다. 예컨대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로서 활동할 때 시골 출신답게 다소 순박하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는 부분은 리처드 도너 감독의 오리지널 <슈퍼맨>(1978) 영화에서도 묘사된 부분이다. 동시에 클라크 켄트로 활동할 시 착용하는 안경에 특수 장치가 되어 있어 안경을 벗으면 얼굴이 달라 보인다는 새로운 설정은 슈퍼맨의 캐릭터성에 설득력을 더하기도 한다. 기자정신이 투철한 선배 기자라는 로이스 레인의 설정 역시 기존과 동일하지만, 동시에 최근 미디어믹스에서 보여진 톰보이적 캐릭터성을 추가했다. 3년 전 개봉했던 <더 배트맨>이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슈퍼맨의 탄생 스토리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원작의 전통을 전반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변주를 추가한 제임스 건의 영리한 각색과 연출은, 영화가 코믹스 팬들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건 감독 특유의 팝음악을 활요한 경쾌한 액션 씬, 존 시나가 연기한 피스메이커와 슈퍼걸을 포함한 여러 조연 캐릭터들의 재치 있는 카메오 2 역시 많은 이들이 꼽은 영화의 대표적인 볼거리다. 3
전쟁과 학살,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슈퍼맨
그러나 <슈퍼맨>의 장점이 이러한 장르 내적 요소에만 그쳤다면, 영화는 그저 소수 코믹스 팬들에게만 회자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더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모은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속 사건들이 실제 우리 세계의 사건들과 상당수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영화의 핵심 플롯인 보라비아의 자한푸르 침략부터가 그렇다. '슈퍼히어로라면 전쟁과 같은 현실세계의 재난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생각을 현실화한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해당 분쟁이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집단학살을 강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실제 국명이 아닌 가상국가 설정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직접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라비아가 미국의 외교적·군사적 비호를 받는 국가로 묘사된다는 점, 보라비아가 자한푸르 침공의 명분으로 독재에 신음하는 자한푸르 국민들의 '해방'을 든다는 점,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자한푸르 주민들을 학살하고 영토를 강제병합해 그곳에서 렉스 루터가 주도하는 대규모 부동산 개발을 목표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이를 가자 학살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즐라트코 부리치가 연기한 바실 구르코스 보라비아 대통령은 외모와 억양 모두에서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보라비아가 동유럽에 위치해 있고 보라비아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은유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현 이스라엘의 주도계층인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대부분 동유럽 출신이라는 걸 고려하면 그리 성공적인 꼼수(?)는 못 된다. 쿠바나 베네수엘라를 연상시키는 남미 국가 코르토 말테제가 배경인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이란을 연상시키는 핵개발국에 대한 폭격작전이 배경인 <탑건: 매버릭> 등 통상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사례를 비추어 보았을 때, 반미 국가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을 비판하기 위해 가상국가 설정을 들고 온 <슈퍼맨>의 사례는 꽤나 흥미롭다.
영화 내에서 보라비아의 자한푸르 침공이 어떤 맥락을 지니는지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영화에서 보라비아 문제는 슈퍼맨이 신봉하는 선(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시험대로 작용한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 현실적인 고려 사항 때문에 눈앞에 명백히 보이는 악을 막는 것을 주저하거나 심지어 비난할 때, 과연 평정심을 잃지 않고 여전히 이를 행할 수 있겠냐는 것이 골자다. 로이스 레인과의 가상 인터뷰에서 슈퍼맨은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함부로 건드린 것 아니냐" "어찌 됐건 자한푸르가 독재국가인 건 사실 아니냐" "해당 행동이 미국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로이스 레인의 압박성 질문에 "구르코스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망설일수록 사람들은 계속 죽어 나간다"고 항변한다. 4
이는 '이스라엘이 심하기는 했어도, 하마스가 나쁜 놈들인 건 맞잖아' '이-팔 갈등은 섣불리 언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야' 식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실상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비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변명거리에 대한 반론으로 이해된다. 전쟁은 전쟁이고 학살은 학살일 뿐이다. 분명히 반대의사를 밝히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정치적 사안에 결합하기를 꺼려하던 저스티스 갱이 결말부에서 보라비아의 자한푸르 재침공을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은, 영화가 슈퍼맨의 이러한 단호한 반(反)전쟁 및 반학살론에 힘을 실어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위와 같은 이스라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영화 내에서 슈퍼맨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핵심 사건인 조-엘의 메시지 역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해당 연설은 서구 백인들에게 비서구세계를 정복하고 해당 지역의 자원을 취하며 주민들을 '계몽'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제국주의 시대 식민주의 이념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초기 시오니스트들의 논리 역시 이러한 식민주의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시오니즘의 첫 주창자 중 한 명으로 이스라엘의 국부로 여겨지는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 국가의 건설이 "아시아에서 유럽을 위한 방어벽의 일부이자 야만에 맞서는 문명의 전초 기지를 형성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는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건국 논리에 뿌리박혀 있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논리가 이스라엘 국가의 공식 선전은 물론 이를 되풀이하는 서구의 공식 언어를 통해 재생산된다고 꼬집는다. 6
영화의 결말에서 슈퍼맨은 친부모의 영상 대신 양부모인 조나단 켄트, 마사 켄트와 함께 찍은 영상을 보며 휴식을 취한다. 그들은 조-엘의 메시지 공개로 슈퍼맨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부모에게 자식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 "중요한 건 네 선택과 네 행동"이라 말하며 그를 다잡아 주는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건은 이 장면에 대해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님에도 슈퍼맨을 사랑으로 훌륭하게 기른 켄트 부부처럼, 슈퍼맨이 누가 시켜서나 자신의 운명에 일방적으로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선택에 기반해 선을 행함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슈퍼맨>은 지정학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인식론의 차원에서도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 볼 수 있다. 7
반 매노스피어 남성성으로서의 슈퍼맨
이외에도 <슈퍼맨>은 '대안적 남성성의 제시'라는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영화다. 주지하다시피 슈퍼맨은 많은 경우 표준적인 미국 마초 남성성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예컨대 페미니스트 영화 비평가 수잔 제퍼드는 오리지널 <슈퍼맨> 시리즈의 주제를 '개인주의, 자유, 군국주의, 그리고 신화적 영웅주의'로 대표되는 레이건 시대 미국 정체성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한다. 8 하지만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은 다소 오인된 편견에 가깝다. 앞서 설명했듯 슈퍼맨/클라크 켄트 정체성의 핵심은 오히려 농촌 청년의 정체성에 기반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진솔함과 선량함에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이를 정치인이나 자본가가 그러하듯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돌보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슈퍼맨이 상징하는 핵심적 가치이다.
이와 같은 슈퍼맨에 대한 전통적 캐릭터 해석은 이번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보라비아 문제에서 보듯, 그는 스스로에 대한 도취가 아닌 타인에 대한 고려와 연민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로이스 레인과 양부모 켄트 부부를 포함한 주변인에게 선뜻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의 진정한 힘은 몇 분 내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초인적 능력이 아닌, 타인을 환대하며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는 다분히 인간적인 요소에서 나온다. 관계적 책임감과 공동체적 연대야말로 슈퍼맨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것이다.
슈퍼맨의 이러한 성격은 그의 숙적 렉스 루터와 분명히 대비된다. 그는 슈퍼맨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이 "신이 인류에게 내린 선물"이라 말할 정도로 뒤틀린 내면의 소유자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알베르토 아인슈타인 등의 "멍청이들"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한다는 게 "구역질난다"고 말할 정도로 오만하며 자기도취적이다.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슈퍼맨과는 다르게, 렉스 루터는 부하 직원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폭언을 일삼으며 그들을 철저히 도구적으로 대한다. 한편으로는 메트로폴리스의 노점상 주인 말리를 단지 슈퍼맨이 그의 단골손님이라는 이유로 슈퍼맨 앞에서 쏴 죽일 정도로 잔인하기도 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목표 외에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 렉스 루터의 이러한 모습이 최근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유행을 타고 있는 남성성 개념인 '매노스피어(Manosphere)'를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매노스피어는 전통적인(것으로 주창자들이 여기는) 남성성을 강조하고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및 웹사이트 집합체, 더 나아가 해당 이용자들 전반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이들은 친 페미니스트 좌파 세력에 의해 서구 사회가 점령당했으며, 남성들은 이들에 맞서 '진정한 남성성'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벌써부터 어디에선가 들어 본 듯한 이야기다. 9
이들에 따르면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남성들은 자신들의 강인한 힘을 앞세워 이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사회 속 '정당한 몫'을 되찾아 와야 한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공감이나 연대와 같은 개념은 그저 위선이자 방해물에 불과하며,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을 옥죄는 나약한 남성성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돈과 사회적 지위, 기술에 기반한 세속적 성공과 우월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구에서 탄생한 개념이지만, 소위 '이대남'의 극우화에 의한 진통이 심각한 한국 사회에도 남 일 같지 않게 다가오는 문제이다.
매노스피어의 이러한 보수적이다 못해 반동적인 남성성 이해는 영화 속 렉스 루터의 모습과 전반적으로 일치한다. 공감과 연민과 같은 정서를 위선으로 여기는 점, 본인의 열등감을 권력과 부, 기술로 감추려는 모습 모두 그렇다. 루터의 이러한 캐릭터성은 매노스피어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인 일론 머스크와 같은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글의 도입부에서 인용한, 슈퍼맨이 루터 앞에서 자신 역시 그 누구 못지않게 '인간적'인 사람임을 역설하는 장면은, 둘의 캐릭터 차이를 넘어 건이 슈퍼맨의 입을 빌려 매노스피어 커뮤니티에 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신들이 '나약함'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요소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들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남성성이라고 말이다. 10
'불행한 세상' 속, 영웅은 어디에 있는가
"영웅이 필요한 세상은 불행하다"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남긴 말이다. 하지만 불행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방향만 다를 뿐 모두 어느 정도는 영웅적인 존재를 갈망한다. 슈퍼히어로 장르는 바로 이 욕망을 파고든다. 만화와 텔레비전, 스크린 속 영웅들은 화려한 코스튬을 차려 입고 우리를 대신해 선을 행한다. 그들은 초인이기 이전에 동시대인이다. 그들은 딱 자신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만큼 정의롭고 모범적이다. 어쩌면 오늘날 슈퍼히어로 장르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도, 혐오와 분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더는 공유할 공동의 이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11
리뷰를 위해 <슈퍼맨>을 재관람하며, 나는 내가 슈퍼히어로 영화를 사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았다. 화려한 액션이나 근사한 히어로들의 코스튬과 무기 같은 볼거리들도 매력 포인트였지만,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히어로는 언제나 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얻은 결론을 실천으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대변하고자 했다. 그들은 완벽해서라기보다는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이기에 진정으로 위대했다. 만약 <슈퍼맨>이 성공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라면 바로 이 지점에서일 것이다. 영화는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권력과 학살에 맞서는 슈퍼맨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자세라고 우리에게 살짝 귀띔해 준다.
영화 결말부에서 본업인 기자로 돌아간 클라크 켄트는 렉스 루터에게 살해당한 말리를 '메트로폴리스의 진정한 영웅'으로 부르는 기사를 <데일리 플래닛>의 1면에 싣는다. 그는 영화 초반부 슈퍼맨과 울트라맨의 전투에서 "당신이 지금껏 우리를 지켜 주었으니 이젠 우리가 지켜줄 차례"라며 슈퍼맨을 돕고, 루터에게 납치당한 이후에도 슈퍼맨에게 자신은 괜찮으니 루터의 협박에 굴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선량하고 강직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언론 지면을 자신에 대한 오해를 푸는 대신 자신을 도운 동료 시민을 조명하는 데 쓰는 모습은 참으로 슈퍼맨답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건이 <슈퍼맨>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고 건물을 들어올릴 수는 없더라도, 일상에서 올바름을 고민하고 연대와 환대를 실천하는 이들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슈퍼맨
제임스 건 감독
데이비드 코런스웻, 레이철 브로즈너핸, 니콜라스 홀트 / 129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씨네도모'에 글을 기고하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도영 편집장(ldy0510@naver.com)에게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전 회장, 전환 국제연대팀장.
동국대학교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
각주
- Slate, Superhero Movies Are Dying. Does Hollywood Have Any Idea What to Replace Them With? https://slate.com/culture/2023/12/aquaman-and-the-lost-kingdom-box-office-marvel-mcu-dc-comic-book-superhero-movies.html [본문으로]
- Superman | Mr. Terrific & Lois Lane Beach Fight https://www.youtube.com/watch?v=iTwfdbJFwdw&t=103s [본문으로]
- Drunk Supergirl Picking Up krypto ~ Superman 2025 https://www.youtube.com/shorts/KrahL2fPYM4 [본문으로]
- 뉴욕 타임스, How Superman Handles a Lois Lane Interview | Anatomy of a Scene https://www.youtube.com/watch?v=uZLKemL_rmY [본문으로]
- Superman - The Justice Gang arrives in Jarhanpur https://www.youtube.com/watch?v=T4r1XSWJpqg [본문으로]
- 라시드 할리디, 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열린책들, 2021, p 27 [본문으로]
- Josh Horowitz, James Gunn sets the record straight on Jor-El's message to SUPERMAN https://www.youtube.com/watch?v=ej87I9dPmig [본문으로]
- 수잔 제퍼드, 이형식 옮김, 『하드바디』, 동문선, 2002, p 30 [본문으로]
- 슬로우뉴스, 매노스피어, 개방∙참여∙공유에서 고립∙단절∙증오로 https://slownews.kr/142105 [본문으로]
- Superman (2025) | "I'm as human as anyone" speech - Krypto attacks Lex Luthor 4K https://www.youtube.com/watch?v=QP4pkpXjJz0 [본문으로]
- 알 자지라, The superhero film genre is on a decline, and so is American empire https://www.aljazeera.com/opinions/2025/7/14/the-superhero-film-genre-is-on-a-decline-and-so-is-american-empir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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