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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씨네도모

미래의 혁명 혹은 혁명의 미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의 멜랑콜리 정치학

by Domoleft 2025. 11. 9.

[씨네도모] 미래의 혁명 혹은 혁명의 미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의 멜랑콜리 정치학

폴 토마스 앤더슨(PTA)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패배한 과거의 혁명가와 그의 딸을 주인공으로 삼아 분명히 달라졌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우리 시대 혁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투 다음에 또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는 세상에서, 현재는 과거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 본 기사에는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에게만 오로지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재능이 주어져 있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각주:1]


폴 토마스 앤더슨(PTA). 출처: 배니티 페어(게티이미지)

 

폴 토머스 앤더슨(이하 PTA)만큼 우리 시대 시네필들을 설레게 하는 이름도 드물 것이다. 1996년 <리노의 도박사>로 데뷔한 그는 이후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 <데어 윌 비 블러드> 등의 걸작을 연달아 내놓으며, 불과 30대의 나이에 '거장'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관객을 시각적으로 사로잡는 탁월한 카메라워크,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히 담아내는 정교한 화면 구성,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의 분위기에 흠뻑 젖도록 만드는 센스 있는 음악 활용, 배우에게서 최상급의 연기를 이끌어 내는 연출력에 팬과 평론가들은 모두 열광했다. 덕분에 그는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의 쿠엔틴 타란티노, <세븐>과 <파이트 클럽>의 데이비드 핀처와 함께 동시대 가장 중요한 미국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그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는 크게 네 가지 부분에서 화제를 불러모았다. 첫째, 인디영화에 가까운 규모였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1억 3,000만 달러의 블록버스터급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둘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네치오 델 토로 등 배우 활용을 잘 하기로 유명한 PTA 영화의 기준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다. 셋째, 대공황 시대나 히피 시대 등 20세기가 배경이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 23년 만에 처음으로 동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했다. 마지막으로 옛 혁명가들이 다시 모여 경찰 출신들이 만든 극우 백인우월주의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영화의 설정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민자 추방 반대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을 강하게 연상시켰다. 수많은 관객들이 PTA가 또 어떤 걸작을 가지고 나왔을지 숨 죽여 기다렸던 이유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감독과 주역들. 출처: MENAFN menafn.com

 

반응은 역시나 폭발적이었다. 관객과 평단 모두가 이번 영화에 대해 'PTA의 최고작'이라며 입을 모아 극찬했다. 영화는 평론가들의 평점을 합산하는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와 메타크리틱에서 모두 95점을 기록했는데[각주:2] [각주:3], 이는 올해 북미에 개봉한 모든 영화 중 최고점에 해당하는 수치다. 흥행의 경우 전 세계에서 1억 9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각주:4] 손익분기점 돌파에는 실패했지만, 과거 PTA 영화들의 흥행에 비추어 보면(이전까지 최고 흥행작은 2,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7,000만 달러 가까이를 벌어들인 <데어 윌 비 블러드>였다) 기적에 가까운 숫자다.

 

국내에서도 SNS를 중심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모으며 총 관객수 51만 명으로 국내에 개봉한 PTA 영화 중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건 물론, <트론: 아레스> 등 블록버스터 영화의 상영을 위해 본작을 내렸던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관객들의 요구에 의해 재상영이 이루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연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케 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매력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이는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함께 영화를 자세히 살펴보며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혁명은 TV에 보도되지 않는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인공 팻 캘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은 폭탄 전문가로 극좌 성향 무장단체 '프렌치 75'의 핵심 멤버다. KKK단의 창립자인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이름을 딴 훈장을 공공연히 수여할 정도로 극우화되어 있는 작중 미국 정부. 프렌치 75는 미등록 이민자 구금시설에 침입해 이민자들을 풀어 주고, 정부시설에 폭탄을 설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을 이어간다. 팻은 조직의 행동대장 퍼파디아(테야나 테일러 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지만, 혁명과 가정생활의 비중에 대한 의견 차이로 곧 다투고 헤어지게 된다. 이후 프렌치 75는 스티븐 록조(숀 펜 분) 경감이 이끄는 경찰에 의해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게 되며, 팻은 딸 샬린과 함께 밥 퍼거슨과 윌라 퍼거슨이라는 새 신분을 부여받고 공권력을 피해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6년이 지난 현재 밥(팻)과 윌라(샬린)는 미등록 이민자들이 밀집한 소도시 박탄 크로스에 은거해 생활하고 있다. 윌라는 가라테를 즐가며 학업과 교우관계 모두 원만한 청소년으로 성장했지만, 술과 마약에 찌든 데다 정부에게 추적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스마트폰조차 사 주지 않을 정도로 편집증적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불만이다. 한편 총경으로 승진한 록조는 16년 간의 미등록 이민자 체포 실적을 인정받아 극우 백인우월주의 사조직 '크리스마스 클럽' 입단 제의를 받게 되나, 클럽의 가입 조건 중 '유색인종과 일체의 성적 관계 금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이게 된다. 과거 자신이 퍼파디아와의 내연관계를 통해 얻어낸 정보로 프렌치 75를 소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샬린이 그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겹치자 록조는 후환을 막기 위해 이를 은폐하기로 한다. 밥과 윌라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오는 록조에 맞서, 윌라는 아버지의 혁명 동지들과 새로운 인연들의 도움으로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중

 

다소 예술영화에 가까웠던 PTA의 전작들에 비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블랙 코미디가 가미된 액션 스릴러 영화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이에 따라 영화의 구성 역시 전작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PTA만의 확고한 영화적 시그니처는 본작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예컨대 카메라워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영화에는 초반부 프렌치 75의 이민자 구금시설 습격부터 밥과 윌라의 도주에 이르기까지 롱테이크로 담겨진 추격씬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는 <부기 나이츠>나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수직과 수평을 횡단하며 영화의 정서를 고조시키는 PTA 특유 미장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점증적인 리듬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분위기에 차근차근 빠져들게 만들었던 전작들에 비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경우 빠른 리듬감으로 서사적 긴장을 배가시키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음악의 활용 역시 서사에 대한 정서적 뒷받침을 넘어 리듬과 박진감을 영화에 직접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한다.[각주:5] 영화 후반부의 추격씬은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파도마냥 굽이치며 오르내리는 고속도로를 바탕으로 프리 재즈를 연상시키는 실험적인 음악[각주:6]이 배경에 깔린 채 5분 가까이 진행되는 이 추격씬은, 서사적 긴장감과 시각적 장엄함을 모두 갖춘 영화의 최고 백미 중 하나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중

 

주제적 측면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PTA의 전작들과 구분하는 것은 바로 영화의 정치적 메시지다. 물론 성산업과 미디어 산업을 렌즈 삼아 현대자본주의의 속물성을 풍자한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 20세기 초 석유자본가의 삶의 궤적을 통해 '피로 쓴 미국 건국사'를 해부한 <데어 윌 비 블러드>, 사이언톨로지를 모델로 한 사이비 종교의 흥망성쇠를 통해 권력의 민낯을 파헤친 <마스터>와 같이, PTA가 미국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 무심한 감독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전작들이 다소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정치성을 드러냈다면, 이번 영화는 대단히 직설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정치적 현실을 호명한다는 점에서 그 층위가 다르다. 그렇다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과거와 현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짓고 있을까?


과거의 혁명과 만난 현재의 반동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토머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난 혁명가들의 이야기'라는 대주제와 몇몇 캐릭터들의 설정만 가져왔을 뿐, 원작 소설과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펼친다. 예컨대 핀천의 소설은 1960년대 혁명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1980년대 레이건 집권기 미국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주 서사로 삼고 있지만,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톰 크루즈 영화를 인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우리가 사는 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주에도 불구하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여전히 1960년대 미국의 정치적 현실의 그늘 안에 놓여 있다. 주인공이 소속된 혁명 그룹인 프렌치 75부터가 그렇다. 해당 그룹은 1969년에 결성되어 1977년에 해산한 미국의 극좌 무장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밥 딜런의 노래 <Subterranean Homesick Blues>[각주:7]의 가사("웨더맨이 되어야만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아는 건 아니라네")에서 이름을 따 온 이들은 반전주의와 인종해방을 핵심 이념으로 삼고 미 정부 전복을 목표로 활동했다.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정부기관과 은행을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저지르면서도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해당 기관에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명시한 경고 메시지를 사전 발송했는데, 이는 영화 속 프렌치 75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1970년대 FBI의 웨더 언더그라운드 조직원 수배 사진과 명단

 

영화 내에서 그 가사가 혁명가들의 암구호로 사용되는 길 스콧-헤론의 노래 <The Revolution Would Not Be Televised>[각주:8] 역시 당대 미국의 정치적 공기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본래 시인이었던 스콧-헤론은 흑인민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60~70년대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시적 가사의 형태로 음악에 적극적으로 담아냈는데, 이 중 <The Revolution Would Not Be Televised>는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정치적 현실을 왜곡하고 전유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의 음악은 후대 흑인 문화, 특히 힙합에 많은 영향을 끼쳐 닥터 드레, 모스 데프, 커먼, MF 둠, 카니예 웨스트 등 많은 래퍼들의 곡에 샘플링되기도 했다.

 

증인 보호를 거부하고 행방불명된 퍼파디아의 추정 행선지가 쿠바와 알제리라는 사실 역시 흥미롭다. 두 나라는 냉전기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이었으며, 미국을 포함한 구 식민모국의 급진적 사회운동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영화에는 주인공 밥이 알제리 독립전쟁을 다룬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1966년작 <알제리 전투>를 보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실제 당시 미국 정부의 탄압에 쫓기는 신좌파 혁명가들은 민족해방운동이 벌어지는 국가로 망명을 가기도 했는데, 쿠바, 알제리로 망명을 떠났다 돌아온 마르크스주의 성향 급진 흑인민권단체였던 흑표당의 당원 앨드리지 클리버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영화 곳곳에서 격동의 1960년대 미국 정치현실에 대한 오마주를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영화는 과거 혁명의 시대 이야기는 물론,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현대 미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묘사 역시 놓치지 않는다. 영화의 메인 빌런 록조가 주도하는 대규모 미등록 이민자 색출과 추방은 현재 미국에서 이민세관단속국(이하 ICE)가 벌이고 있는 대규모 단속작전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영화의 기획과 촬영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전에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ICE의 폭력적인 월권 활동에 대한 지적이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물론 조 바이든 행정부 때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보기는 힘들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중

 

영화 속 극우 단체인 크리스마스 클럽 역시 트럼프 행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클럽의 대장 격인 로이 무어가 트럼프를 포함한 대안우파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상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미성년자 성추문 사실이 드러나 낙선한 앨라배마 전 대법원장 로이 무어(Roy Moore)와 동명이인(철자는 다르다)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록조의 대규모 이민자 단속이 가져온 인력 공백 때문에 클럽 멤버가 운영하는 식료품 공장이 가동 중단되었다며 불평하는 이들의 모습 또한, 인종주의적인 이유로 이민자들을 혐오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노동에 의존해 이윤을 챙기는 위선적인 자본의 모습에 대한 신랄한 조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혁명가여 춤을 추어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혁명가들에 대한 묘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영화 속 혁명가들은 그 임무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다소 우스꽝스럽고 나사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밥이 록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혁명가들의 접선 장소를 알아내려 하지만 옛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해 신참 조직원과 욕설을 섞어 가며 실랑이하는 장면은 영화의 대표적 코미디 장면 중 하나이다. 조직 내 행동대장이지만 충동적·맹동적인 성격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그르치다 결국 조직의 파멸을 불러온 퍼파디아 역시 훌륭한 혁명가로 불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영화는 이들의 대의를 조롱하거나 냉소하지는 않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명백한 결점들을 애써 숨기려 들지도 않는다.

 

밥과 퍼파디아의 이러한 미숙함은 그들의 자녀인 윌라의 원숙함과 역설적으로 대비된다. 윌라는 퇴물이 된 밥의 모습을 다소 한심하게 여기고 그의 편집증에 질색하지만, 윌라의 위치를 묻는 경찰의 추궁에도 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이 끝까지 입을 다문 것으로 확인할 수 있듯 자신의 공동체에서 인망과 관계망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 퍼파디아가 배신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도 적어도 겉으로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록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는 데 집중한다. 록조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의 과잉된 남성성을 비판하는 등 기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암살하러 온 크리스마스 클럽의 자객을 재기를 발휘하여 역으로 살해하는 등 대단히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중

 

주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가라테 사범 '센세' 세르지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 분)의 활약 역시 인상적이다. 빅탄 크로스 시내에서 라틴계 미등록 이민자들을 지원하는 풀뿌리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고 있는 그는, 록조와 부하들이 밥을 찾아 이민자 공동체로 포위망을 좁혀오자 수백여 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을 신속하고 능숙하게 일거에 대피시키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해당 이민자들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카를로스의 말만 듣고도 군말 없이 일어나 이동을 준비하는데, 이는 공동체와 카를로스 사이 오랜 세월 쌓인 끈끈한 유대감이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외에도 그는 도주 과정에서 붙잡혀 유치장에 수감된 밥을 몰래 빼내고, 경찰차가 그들을 쫓자 음주운전으로 위장해 시선을 돌리고 밥을 탈출시키는 등 영화 내내 대활약을 이어간다.

 

프렌치 75와 라틴계 공동체의 차이가 단순히 전위조직과 풀뿌리 공동체 간 조직문화의 차이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과거 직선적인 혁명 정치에 온전히 담기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문법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카를로스와 이민자 공동체의 행보는 그들의 정치가 단순히 모순의 전복 추구를 넘어, 해당 모순의 빈틈 속에서 살아가는 타자들 간의 돌봄과 연대의 윤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PTA의 카메라는 이러한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다. 앞서 말한 이민자 피난 장면을 비롯해, 영화 중반부의 카메라는 더 이상 앞서와 같은 긴장과 파괴의 리듬이 아니라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길고 우아한 호흡으로 인물들의 행보를 따라간다. 과거보다 덜 과격하지만 동시에 더 끈질기게 이어지는 이들의 새로운 저항은, '전투 다음에 또 전투'를 의미하는 영화의 제목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미국의 미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엔조 트라베르소(Enzo Traverso)는 소련과 공산권의 해체 이후 좌파의 새로운 윤리로 '좌파적 우울(left-wing melancholia)'을 제시한다. 이는 애도의 형식을 빌려 과거 혁명사와의 새로운 만남을 추진하고자 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은폐되고 망각되었으며 구원될 필요가 있는 시대에 그것을 재사유하는 것"[각주:9]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좌파적 우울은 단순 좌파의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혁명의 시대에 혁명적 궤적을 재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재의 논리로 과거의 혁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투쟁간 새로운 대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좌측부터: 엔조 트라베르소와 그의 저서 <좌파의 우울>. 출처: Marginalia marginalia.gr / 교보문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PTA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쓰며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몰두했다면, PTA는 반대로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 것이다. 영화 결말부에 파퍼디아가 샬린에게 보내는 "우리는 실패했지만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는 단순 특정 등장인물 개개인간의 서사 연결을 넘어, 후대의 새로운 혁명이 선대의 실패한 혁명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영화의 주제를 핵심적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본작의 원작 소설 <바인랜드>에서 록조의 모델이 된 마약수사반 형사는 밥의 모델이 된 주인공을 비웃으며, 과거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추종한 경험을 통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각주:10] 되돌아보라며 조롱한다. 영화에는 이 질문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과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인공들이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혁명적 구원은 특정 정치적 목표의 성취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거라고. 그렇게 '전투 다음에 또 전투'를 직시하고 긍정하는 것이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 덧붙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최대 매력 중 하나인 음악은 영국의 얼터너티브 록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Johnny Greenwood)의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과 음악의 더할 나위 없는 조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떨떠름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라디오헤드가 이스라엘 공연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국제적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현재 서구 음악계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음악인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현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제의식을 생각하면 이는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라디오헤드의 리더 톰 요크(Thom Yorke)는 네타냐후 정부를 강력 비판하며 '지금의 이스라엘'에서 공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나, 앞으로 이들의 입장이 어떻게 변할지는 비판적 주시가 필요할 것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체이스 인피니티, 숀 펜 / 162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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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전 회장, 전환 국제연대팀장.

동국대학교와 고양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


각주

  1.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도서출판 길, 2008, p 334-335 [본문으로]
  2. 로튼 토마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https://www.rottentomatoes.com/m/one_battle_after_another [본문으로]
  3. 메타크리틱,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https://www.metacritic.com/movie/one-battle-after-another/critic-reviews/ [본문으로]
  4. 박스오피스 모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https://www.boxofficemojo.com/title/tt30144839/ [본문으로]
  5. Jonny Greenwood, The French 75 (Official Audio) https://www.youtube.com/watch?v=esdORjcq5zw [본문으로]
  6. Jonny Greenwood, Ocean Waves (Official Audio) https://www.youtube.com/watch?v=KdKButagL1s [본문으로]
  7. Bob Dylan,  Subterranean Homesick Blues https://www.youtube.com/watch?v=MGxjIBEZvx0 [본문으로]
  8. Gill Scott-Heron,  The Revolution Would Not Be Televised https://www.youtube.com/watch?v=XUi580gA5BQ&t=68s [본문으로]
  9. 엔조 트라베르소, 김주은·석민지·조형준 옮김, 『‘좌파’의 ‘우울’』, 새물결, 2024, p 75 [본문으로]
  10. 토머스 핀천, 박인찬 옮김, 『바인랜드』, 창비, 2016, p 5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