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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씨네도모

영화 <3670>: 종로에서 서로를 만난 우리, 생존을 말하다

by Domoleft 2025. 9. 16.

[씨네도모] 영화 <3670>: 종로에서 서로를 만난 우리, 생존을 말하다

평등과 연대라는 진보의 가치, 그리고 행복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마음. 이 세 가지가 소수자에게는 생존을 위해 얼마나 중요할까? 종로에 사는 남성 퀴어 김라이트닝이 한 탈북민 게이의 종로 데뷔 여정을 다룬 영화 <3670>을 통해 우리 사회의 책임을 묻는다.


* 본 기사에는 영화 <3670>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팩트체크그리고 처음은 언제나 우연처럼

​일단 '팩트체크'부터 하고 시작하자. 영화 제목인 '3670'은 '종로3가 6번 출구 7시'라는 뜻이라 한다. 하지만 이쪽 판 사람들, 이런 말 아무도 안 쓴다. 이건 그냥 이 영화를 위해 만든, 영화적 장치 같은 거다. 우리들은 사실 6번 출구보다 5번 출구에서 더 자주 모이는 것 같다.

 

영화는 주인공 철준(조유현)이 '번개(일회성 성관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번개남'에게 밥 먹고 가라는 철준의 모습은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장르가 다큐멘터리인가 잠시 의심했다. 하룻밤의 인연이라도 붙잡고 싶은 그 마음. 감독은 퀴어의 삶에 내재된 근원적인 고립과 연결에 대한 갈망을 이보다 더 날것으로 보여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번개남'은 "이쪽 친구 없냐", "술번개(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평일에는 20~30명 정도, 주말에는 90명까지도 모이는 게이들의 문화이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술을 마시며 서로를 탐색한다)라도 나가 보라"며 무심한 조언을 던지고 떠난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철준에게 용기를 준 것 같다.

 

​철준은 사이트를 통해 술번개에 나가는데, 철준이 처음으로 '술번개'에 나가 어색하게 러브샷을 하던 바로 그 술집. 어라라. 코로나가 끝나자마자 남자가 너무 급했던 내가, 대학교 퀴어 동아리 10개 니네들 다 모여 해서 남성애자 65명을 끌어모아 대형 파티를 열었던 바로 그 '게이 헌팅 포차'였다. 그날 밤, 65개의 서로 다른 욕망과 사연이 뒤엉켜 만들어내던 소음과 열기를, 이제 막 이쪽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영화 속 철준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모든 시작은 고독했고, 모든 데뷔는 위태로웠다. 그렇다. 이른바 철준은 '종로 데뷔'를 하였다. 나 역시 그랬다. 그의 어색한 첫걸음에서, 나는 나의 서툴렀던 데뷔를 본다.

영화 <3670> 중. 철준은 처음으로 나간 술번개에서 영준과 러브샷을 한다


 세계의 이방인우리의 데뷔

​철준은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두 세계의 이방인'이다. 그의 첫 번째 세계는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 커뮤니티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곳이지만, 그의 성적 정체성은 감춰야 할 비밀이다. 심지어 그는 생계를 위해 교회에서 탈북 간증을 하며 자신을 파는 위태로운 삶을 이어간다. 그의 두 번째 세계는 게이 커뮤니티다. 이곳은 해방구처럼 보이지만, 철준에게는 또 다른 경계가 존재한다. 그는 이곳에서 그저 '또 한 명의 게이'가 아니라, '그 탈북민 게이'로 호명된다. 탈북민 커뮤니티에서는 게이라는 이유로,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그는 온전한 '우리'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타자로 남는다.

 

​철준이 겪는 다층적 배제는 낯설지 않다. 나의 10대 시절, 신부가 될까 고민할 정도로 독실했던 천주교 공동체와 나의 성적 지향 사이에서 나는 늘 길을 잃었다. 사랑을 말하는 성당 안에서 내 사랑은 죄가 되는 모순. 그 세계에서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기만하거나 가장 중요한 일부를 잘라내야만 했다. 반면 퀴어 커뮤니티는 나를 긍정했지만, 내가 떠나온 세계에 대해 불신과 냉소를 동반했다. 한쪽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성적 지향을 숨겨야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적 지향을 인정받기 위해 믿음을 변명해야 했다. 이 교차적 존재의 가장 큰 비극은 내 안의 수많은 경계에서 끝없는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철준의 '데뷔'는 바로 이 전쟁 속에서 탈출구를 찾으려는 필사적인 시도다. 그가 술번개에서 쭈뼛대고, 마음에 드는 현택(조대희) 앞에서 말수가 적어지는 모습은, 단순히 숫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어느 커뮤니티에도 속하지 못한 자가 새로운 관계의 문법을 필사적으로 익히려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영화 <3670> 중. 다른 탈북민 학민과 술을 마시는 철준


관계의 소용돌이평등이라는 멀고도 험한 

다정한 영준(김현목)의 도움으로 철준은 '97모임'이라는 또래 집단에 속한다.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끼는 기쁨,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안도감.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모임 안에는 미묘한 질투와 경쟁, 사랑과 우정 사이의 아슬아슬한 감정 줄다리기가 존재한다. 철준을 향한 호감과 그가 탈북민이라는 사실이 주는 동정이 뒤섞인 시선 속에서 그는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공동체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또 다른 관계의 소용돌이였다.

 

나 역시 종로3가라는 거대한 정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종로3가에만 100개가 넘는 게이 술집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체형별, 나이대별, 심지어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기준으로 술집이 나뉜다. 모두가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이곳은 거대한 놀이터이자,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였다. 세상의 차별을 피해 도망쳐 온 이곳에 또 다른 형태의 차별과 배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씁쓸한 깨달음이었다.

영화 <3670> 중. 이태원에서 '97모임'과 함께하게 된 철준. 안도감은 잠시, 새로운 관계의 소용돌이를 마주한다

 

​데뷔 1, 2년 차 시절, 본인은 감정적으로 몹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 바닥이 좁고 게이들이 감정적이라고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이 우리 개개인의 감정적 미성숙함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 구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걸. 사회라는 거대한 안전망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이 커뮤니티는 유일한 곳이기에, 관계의 작은 균열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외부의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울 힘이 없을 때 그 불안은 종종 가장 가까운 내부를 향한다.

 

'평등'은 거저 주어지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정당의 강령에나 써 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개인들이 서로의 모순과 상처를 견뎌내고 부딪히며, 하루하루 힘겹게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 그 자체였다. 철준이 '97모임' 안에서 겪는 갈등은 바로 이 멀고 험한 길의 축소판이다.


연대의 발견, "행복하면 됐다"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받고 성장한 철준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다. 자신처럼 이제 막 남한 사회에 발을 디딘 또 다른 탈북민 게이, 누가 봐도 전형적인 '베어(체격이 있고 수염도 기르는 스타일)'인 그의 '데뷔'를 돕기로 한 것이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어색함과 불안함을 그가 똑같이 겪지 않도록, 철준은 그의 곁을 지켜주며 종로의 한 술집으로 이끈다(역시나 내가 자주 가는 곳이다. 냉우동돈까스가 맛있다). 술집 사장님이 자연스럽게 그를 '베어 테이블'에 앉히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이 공동체의 작동 방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철준은 이제 그 복잡한 지형도를 읽어내고 새로운 동료의 손을 잡아 주는 안내자가 되었다. 자신이 영준에게 받았던 도움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연대의 시작이다.

영화 <3670> 중. 철준은 '베어' 탈북자 게이의 '데뷔'를 돕게 된다

 

특히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철준이 탈북민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시도할 때 나온다. 철준이 어렵게 입을 떼려 하자, 학민(전두식)은 이미 다 안다는 듯 그를 막아선다. 그리고 툭 던지는 한 마디. "행복하면 됐다. 우리 다 행복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겠니."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과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의 생존이 서로에게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가장 급진적인 연대의 선언이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연대'가 정당 간의 이합집산이나 선거 공학을 의미할 때, 우리가 실천했던 연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10대 시절 경기도 외곽 도시에서 게이 만남 어플을 켜면 가장 가까운 게이가 5km에 있던, 게이가 나밖에 없고 30대 이상 게이는 다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처음 종로에 나가 50~70대의 게이들을 보고 충격적인 해방감을 느꼈다. 그분들의 존재만으로도 '너도 이렇게 나이 들 수 있다'는, '나의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세대를 잇는 연대다.

 

​이후 나는 대학 퀴어 동아리에서 후배들의 멘토 역할을 자청했다. 같이 종로의 이 쪽 술집을 가 주고 이태원 클럽을 가며 생각보다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체화시켜 주었다. 철준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먼저 겪은 길 위에서 다음 사람의 등을 지켜봐 주고, 앞으로 갈 수 있다고 응원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연대의 방식이었다.

영화 <3670> 중. 학민은 커밍아웃하려는 철준에게 "(이미 다 알지만) 행복하면 됐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홀로  개인에서 광장의 우리로

​영화의 마지막, 철준은 다른 모임으로 종로 가라오케를 와 혼자 노래 '회전목마'를 부른다. "정신없이 돌아서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어"라던 노래 가사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어지러웠던 그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간다. 노래를 부를 줄 모르고 듣지도 못한다던 그에겐 더 이상 초조함이나 외로움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조용한 의지가 엿보인다. 이 장면은 그가 다시 혼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관계를 통과하며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으로 바로 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홀로 부르는 그의 노래 속에는 그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겹쳐 들리는 듯하다. 

철준의 마지막 노래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성장이 어떻게 사회 구조의 변화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지를 명확히 보여 준다. 고립된 개인이 연결을 갈망하고, 불완전한 공동체 안에서 평등을 학습하며, 상호 돌봄으로서의 연대를 실천하는 그의 여정은 결국 '나의 행복'이 '우리의 권리'와 직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행복하면 됐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모두가 차별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평등을 요구하고 연대를 실천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쯤 이 글을 내 본명과 내 얼굴을 걸고 쓸 수 있을까. 언제쯤 가족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철준의 노래가 멈춘 그곳에서, 이제는 우리의 노래가 시작될 차례다.

영화 <3670> 캐릭터 포스터


3670

박준호 감독

조유현, 김현목, 조대희 / 124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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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라이트닝

종로에 사는 시스젠더 남성 퀴어.

스스로를 어떠한 정체성으로 정의내리는 게 이젠 귀찮은 상황이다.

종로 데뷔 만 7년차다. 요새는 힘이 없어 종로고 이태원이고 못 행차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