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 2025년 11월호 민주노총 30주년 특집>
[사회] 서른 살 민주노총, 그리고 서른 살 노조 활동가들의 이야기
1995년 창립한 민주노총이 어느덧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민주노총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은 어느덧 지역과 부문, 현장에서 각기 노동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노동조합 활동가가 되었다. 대학원생노조, 전교조, 공공운수노조의 1995년생 30살 조합원이자 활동가 세 명이 자신에게 있어 민주노조운동의 의미와 치열한 고민들을 풀어놓는다.
하이파이브를 하는 기분: 30살 대학원생노조 활동가의 이야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그게 저의 소속입니다. '초대 조직실장이 윤석열'이라는 농담처럼, 내란 정국의 광장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조직이기도 합니다. 저는 올해 1월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8월에 연대협력실장이 되었습니다. 민주노총은 30세가 되었고, 민주노총과 동갑인 저도 그만큼의 나이가 되었습니다만 민주노총 조합원으로서 저의 역사는 이렇게 애송이입니다. 저를 활동가라고 칭하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에, 내가 활동가야? 라고 되묻는, 간부로서는 더더욱 명함에 잉크도 안 마른 애송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포켓몬스터> 게임에 비유하면 태초마을에 있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제가 민주노총에 대해 글을 써야 하다니, 기본 포켓몬만 데리고 보스전 배틀에 던져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챗GPT에게 민주노총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같은 뻔한 말로 이 글의 서두를 열지 않는 것이 저의 마지막 양심입니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오른편에는 옷걸이가 있고, 거기에는 제 노동조합 조끼가 걸려 있습니다. 조끼 앞에 붙은 많은 뱃지들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 중 하나는 공공운수노조 간부 교육에서 만났던 동지가 주셨던 '블래키' 뱃지입니다. 서글서글 수줍게 웃으시던 그 동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포켓몬 중 하나가 블래키라고 하니 통 크게 자기 조끼에 있던 뱃지를 떼어 제게 주셨습니다. "바깥은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하니, 함께 갈 포켓몬을 데려가"라고 말하는 태초마을의 오 박사님처럼 말입니다.


블래키는 이브이에서 진화한 포켓몬인데, 이브이는 사실 블래키 말고도 여러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이브이가 진화해서 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도, 블래키가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이유는 이브이가 오랜 시간 포켓몬 트레이너와 친밀해져야만 블래키로 진화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께한 존재라고 생각해보면, 몹시도 가까이에 있는 존재, 내 옆자리에 앉아 있을 것 같은 존재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컨대, 민주노조의 조합원인 지금 말하자면 블래키 역시 나의 포켓몬 동지겠지요. 나의 포켓몬과 나는 일단 같이 투쟁 비슷한 걸 하니까요. 포켓몬 배틀도 투쟁이다, 그렇게 본다면 말입니다.
물론 정말로 '동지'와 함께하는 투쟁은 포켓몬 배틀과는 다릅니다. 비록 챗GPT에게 민주노총에 대해 물어보진 않았지만, 스스로에게는 민주노총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물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투쟁이라는 말, 단결이라는 말, 연대라는 말, 그리고 동지라는 말들이 손끝에서 굴렀습니다. 민주노총의 조합원에게 '투쟁'은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아멘' 같은 것이지요. 한편 <철의 노동자> 속 노동자들처럼 비장한 얼굴로 단결을 외칠 수 있는지, 단결이라는 말에 각자의 교차적 위치에 대한 주석을 어떻게 달아볼 것인지도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했습니다. 연대라는 말은 그나마 친숙한 단어이지만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하는 연대란 무엇인가, 그에 대면 나는 그 말을 너무 쉽게 남발해버 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에 맞닥뜨렸습니다.
그러고 나면 '동지'라는 말만이 유일하게 어떤 실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광장에서, 연대 현장에서, 이곳저곳에서 만난 여러 얼굴들과 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심상 속에서는 단결도 투쟁도 연대도 소박할 정도로 구체적인 무언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 악수를 하는 것, 나의 투쟁과 그 사람들의 투쟁이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꼭 옆자리에 있는 것처럼.

단어들은 한 사람에게 사전적 의미로 닿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자주 주관적이고, 때로는 그 주관적인 기억들 사이에서 불규칙하게 법칙도 없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2025년에 이르러 민주노총 조합원이 된 제게 '동지'라는 단어의 색인을 찾는다면 떠오르는 것은 한 장면입니다. 몇 년 전 광화문을 지나다가 공공운수노조 전국민주우체국본부 동지들의 시위에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2022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당시에는 제가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당시 저의 세계관 속에선 '동지'가 아니었습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 민중가요를 커다랗게 틀고, 차선을 따라 그 분들은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쌀쌀한 날씨만큼 비장한 얼굴들이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조합원이 아닌 소위 '일반 시민'이었던 저에게 민중가요의 미감은 별로 와닿지 않았고, 그저 스피커의 잡음이 귀가 많이 아프군,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천천히 그 분들이 든 현수막을 읽었습니다. 집배원들의 근로조건 악화를 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하고 불만조로 토로했습니다. 행진하는 조합원 분들의 모습은 그런 반응들 속에서 점점 더 비장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그 표정은.
그때 왜 갑자기 "연대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지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사실 그때 했던 말은 "연대합니다!"가 아니라 "응원합니다!"일 수도 있는데, 저는 사실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이고 안 하던 짓을 애써 하는 중이었으며, 안 하던 짓을 할 때에 필요한 용기만큼 머리가 뜨겁게 멍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그 충동을 생각해 보면 그 분들께 행렬 바깥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의견에 무관심하거나 냉정한 '차가운 도시의 X새끼들'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좀 쓸쓸하잖아요, 할 만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그런 반응을 받는 건. 그러니까 아마도 그때의 충동이란 고작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 아니었나 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비장하고 굳어 있던 것처럼 보이던 얼굴들이 돌연 아주 크게, 다발들처럼, 펑, 펑, 펑, 목련꽃이 터지는 것처럼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제 쪽으로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건 뭐랄까,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느새 그렇게 됐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닳고 낡은 마음으로 걷는데, 누군가 갑자기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해 주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 그 때 이 장면은 무어라고 의미화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제 다른 기억들 사이에 들어가 잊혔다가, 내란의 광장을 따라,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 '그만하라고 했다 민주노총 부른다'의 밈을 따라 천천히 흔들리면서 뒤늦게 자리를 찾았습니다. '동지'라는 색인 아래에요. 그러니까 제게 '동지'라고 하면 그 때 그 장면,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떠오릅니다.

자본주의에 맞서, 제국주의에 맞서 우리는 투쟁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노동자들에게 서로의 존재와 위치란 알기 힘든 일입니다. 블래키가 피카츄의 생태를 알 수는 없고, 심지어 어떤 블래키들은 이브이 시절을 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로서 모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서로의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를 만들어냅니다. 결국에 우리는 같이 자본주의와 싸우는 마지막 배틀을 치르게 될 것이며, 그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자본에 복무하는 수많은 차별들 속에 함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도요.
그러나 이러저러해도 그것이 도착하는 방식은 결국 동지의 얼굴로부터, 옆에 앉아 있다는 실감으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파이브를 해 주고 또 하이파이브를 받는 마음으로부터요. 적어도 민주노총에 가입한 이래 저는 살면서 가장 많은 하이파이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 자본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이뤄지는 우리의 삶은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하니, 함께 갈 동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이파이브, 민주노총.

김도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연대협력실장.
오만 가지에 관심이 많은 국문학 연구자.
위대한 지식에는 커다란 슬픔이 있다. 우리가 던져진 세계에 주석을 덕지덕지 덧붙이며, 숨쉴 구멍을 벌리려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서른 민주노총과 서른여섯 전교조의 고민: 30살 전교조 활동가의 이야기
나는 지방의 3년차 교사다. 2023년 3월 1일자로 지방에 발령받아 첫 학기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했다.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들이 활동가였고, 그 영향을 받아 나는 사회인이 되면 노조 가입률을 높이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교대에 다니며 나에게는 '모두에게 안전한 교실'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추가되었다. 노동자의 권리가 없는 노동자로서 노조 조합원이 되리라. 사회의 연대와 투쟁을 보여주는 교사가 되리라. 가르치기보다 학생과 함께 살아가는 참교사가 되어 보리라. 그래서 나는 나를 이해해줄 수 있고, 나와 함께 교직을 걸어갈 사람들이 모인 곳, 전교조에 가입했다.
마침 나는 첫 발령을 복도에서 휴대폰을 들고 다니면 '관리자를 신고하는 교사'로 의심하는 시골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폭행하겠다며 협박하는 양육자를 학부모로 만났다. 그런 극악한 상황 속에서 내가 쓰러졌을 때 동료 선생님이 연락한 곳은 다름 아닌 전교조였다. 함께 교장실에 쳐들어가 주고, 공무상 병가와 긴급 전보를 내는데 힘을 보태준 곳도 전교조였다. 처음에는 '전교조의 조직률에 도움이 되는 조합원 1'을 목표로 가입하였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전교조는 내 삶에 스며들었다.
자취방에서 혼자 잠을 자지 못해 낮에 지부 사무실에 가서 잠을 잤더니 무슨 국장이 되어 있었다. 교육청도 이 척박한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함부로 했다가 노조 가입 2년차에 노사교섭에도 참여당(?)했다. 지금은 지부에서 청년할당, 여성할당, 1인 분회가 모인 작은 학교 선거구의 대의원 등등 온갖 할당직을 맡으며 지부의 소수자성을 책임지고 있고, 지부 청년 사업 전체와 병가 관련 궁금증 해결 등을 맡고 있다. 민주노총의 30주년 생일을 맞아, 민주노총의 30살 조합원이자 전교조 활동가로서의 고민을 풀어 보고자 한다.

전교조는 어르신이 되어 가는 중
민주노총이 서른 살을 맞았다. 전교조는 89년에 창립했으니 여섯 살쯤 나이가 더 많다.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오랜 기간 버텨오며 역사를 만들어오며 우리 사회의 진보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고, 조합원으로서 자부심도 느낀다. 오랜 세월 투쟁한 덕에 학교 현장에서 전교조는 만만치 않은 이미지다. 전교조는 중앙의 본부, 광역자치단체 수준의 지부, 시군구 기반의 지회, 학교 단위의 분회로 조직되어 있다. 조합원 선생님이 어려움을 겪으면 분회장이 함께 관리자를 찾아가고, 때로는 지부장이 날아온다. 장학사에게 항의하고 공문을 보내기도 한다. 학교에 지부 상임집행위 출장 요청 공문이 왔을 때 학교의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했다. "쌤, 만만한 사람이 아니네." 지부 사무실에는 하루에 한 번은 갑질 관련 문의가 들어온다. 갑질 대응 전문가로서의 이미지가 확실하다. 내가 힘들면 전교조가 와서 도와줄 것이란 믿음. 이게 다 선배 조합원 선생님들이 오랜 세월 투쟁하신 덕이다.
그럼에도 조직이 나이를 먹으며 생겨나는 과제도 있다. 전교조의 평균 연령대는 전교조의 나이만큼 올라가고 있다. 1989년 창립의 주축이 되었던 선배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 분들은 어느덧 퇴임했거나 퇴임하는 나이가 되었다. 더욱이 저출생으로 교원 선발 숫자가 줄면서 신규교사 유입은 극도로 줄었다. 1년에 교사를 열 명쯤 뽑는 일부 지역은 새로 가입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다. 악성민원으로 전국의 교사를 집결시켰던 서이초 사건 이후 신규 가입이 크게 늘었지만, 신규 가입 속도보다 정년퇴직 속도가 빠르다. 전교조는 지속 가능할까? 무엇보다도 활동가가 없다. 나는 지부 상집의 막내다. 2030 세대의 상집 구성원은 나 하나다. 내 바로 위의 선배와는 10년 넘는 경력 차이가 난다. 당연히 청년 임금, 신규 교사 발령과 같은 사안들에 당사자성을 가진 활동가도 나 혼자다. 우리 지부는 전국적으로 봤을 때 아직은 신규 임용 인원이 있는 편임에도 그렇다. 솔직해지자. 전교조는 그간 후임 활동가 양성에 실패했다.
그간 전교조 가입의 유력한 루트는 '학교의 조합원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다가' 혹은 '분회장을 필두로 함께 연대하다가'였다. 그런데 이 루트도 위태롭다. 단지 신규 교사의 수가 줄어서가 아니다. 전교조의 주축 활동가가 학교에서 어르신이 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 전교조는 교장, 교감과 대립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교장, 교감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때로는 활동가 선생님이 교장, 교감의 선배다. 관리자들은 당연히 선배 교사 앞에서는 큰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 선배가 알 수 없는 내선전화를 통해서, 한 명만 불러서 갑질한다.
활동가의 연령이 올라가다 보니 같은 학교 조합원 때문에 탈퇴하겠다는 사람들도 생긴다. 나의 동기는 전교조 가입 두달 만에 탈퇴했다. 관리자와 선후배 사이인 분회장 선생님이 관리자 입장에만 공감했기 때문이다. 전교조 활동가라 해도 이제 신규 교사의 입장은 찾아야 들을 수 있지만 관리자의 입장은 자연스레 이해하는 입장이 되었다. 종종 상집에서도 이런 말을 듣는다. "아, 그 교장이 나한테는 안 그랬는데 우리 젊은 쌤한테는 그랬나 보더라고." 소위 'MZ노조'로 불리는 한국노총 소속의 교사노동조합연맹(교사노조)이 젊은 교사에게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교사노조 조합원은 같은 학교여도 서로 누가 가입했는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의 무심함 속에, 가장 확실했던 전교조의 가입 동기 중 하나가 무너지고 있다.


청년 활동가의 부재와 소진
민주노총 내에서 청년 활동가를 찾기는 참 어렵다. 내가 있는 위원회도 1인 위원회이고, 주변을 봐도 대부분은 '장'을 달고 있을 뿐 '평조합원'인 활동가는 찾기 어렵다. 대타가 없어서 사업 하나를 진행해도 사업 구상, 조직, 현장 진행, 사람 챙기기 등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를 그리자면 다 퇴임하고 나 혼자 남은 지부가 절로 그려진다. 사실 미래를 논하기 전에 '현재' 우리는 소진되고 있다.
나는 전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 근무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나 활동을 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지부 상임집행위 회의가 있다. 지부 전임자 선생님들과 청년사업 회의도 한다. 민주노총 지역본부 청년위원회 회의도 있고, 비슷한 산별과 함께 하는 사업도 있다.회의들만 해도 일주일에 하루는 사라진다.작년 이맘때쯤엔 열흘에 한 번쯤 교섭에 갔다. 내가 기획하는 행사들도 있다. 장소와 강사를 섭외하고, 예산과 프로그램을 짜고, 홍보하고 조직하는 것도 다 시간이 드는 일이다. 여기에 투쟁 사안들이 생기면 결의대회도 가야 하고 연대도 해야 한다. 체력이 없어서 하나 둘 쳐내기도 하지만, 사방에서 틈틈이 나에게 같이 가자고 하면 외면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안 가면 그 현장에는 청년이 없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청년의 목소리는 들어가지 않는다.
둘째, 혼자서는 후속 사업을 만들 수 없다. 신규 교사를 환영하는 행사를 연다고 치자. 장소도 알아보고, 규정에 맞게 예산을 사용할 수 있게 조율하고, 장소를 꾸밀 계획도 세우고, 홍보 웹자보를 만들고, 진행 프로그램도 만든다. 지부 사무실에 앉아서 분회장 명단을 보고 모든 분회에 전화해서 신규 선생님이 오실 수 있도록 홍보해달라고 부탁도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전임자 선생님들이 도와주실 수 있다.
문제는 내가 마이크를 잡으면 일대일 대응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파악하는 건 맨투맨으로 붙어서 얘기해도 될까 말까다. 지부의 다른 선생님들이 참여해서 함께 얘기를 나눠 주기도 하시지만, '처음 보는 또래'와 '처음 보는 20~30년 선배'는 정의적 여과막(학습에서 낮은 자존감, 불안감, 동기 부족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상태가 학습을 방해하게끔 하는 심리적 장벽을 일컫는 말: 편집자 주)의 두께가 다르다. 개인적인 이야기 시간이 없으니 밥 약속을 잡기도 어렵고, 후속 행사 조직은 더더욱 안 된다. 실제로 올해 신규교사 축하 후속 행사의 신청 인원은 0명이었다. 나뿐이니 내가 진행하지만 조직은 못 하는, 영원한 굴레에 빠지고 말았다. 한 명, 딱 한 명만. 내가 마이크를 잡을 때 선생님들과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


가장 답답한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지부에 10년 만에 나타난 청년 활동가다. 교직 2년차, 최소인원으로 돌아가는 소규모 학교에 신규 발령이 몰리면서 어떤 일이 생기고 있는지 알리기 위해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다른 지역에는 어떤 조항이 있는지 등은 전혀 알지 못했다. 교직 3년차, 청년사업 담당자가 되었다. 이제 노사협의회에 청년 관련 조항을 내가 제시해야 한다. 작은 학교에 있으니 주변 선생님의 어려움을 보는 것도 한계가 있고, 머리로 짜내려니 떠오르는 게 없다. 날짜의 압박은 매번 다가온다. "쌤, 청년은 낼 거 없어요?" 전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시간이 있어야 찾아보고 공부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새로운 걸 만들 텐데 활동가에게는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다.
사실 나는 비교적 나은 상황이다. 일단 지부 전임자 선생님들이 우리 막내가 한다는 건 다 도와 주신다. 예산 확보도 그렇다. 다른 지부의 청년사업 담당자 선생님들도 서로 성공담과 실패담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다. 지역본부에서도 (때론 내 기대를 빗나가기도 하지만) 1인 청년사업 담당자끼리 모여서 이야기하고 공동으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 도움이라도 있으니 앞에 닥친 문제라도 쳐낼 수 있다.그러나 여전히 나는 소진되고 있다. 매일 피부로 느낀다. 나는 이번 주말 집회에도 가지 않았다.지난주 영화 상영에도 빠졌다. 강의나 연수에 못 간 지도 좀 되었다.
전교조와 교사를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나는 교사를 오래 하고 싶어서 전교조를 하고 있는 건데, 전교조와 교사 사이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곤 한다. 나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오래 더 나은 교육을 해보고 싶어서 활동가의 생활을 시작했는데, 교사로서 더 나은 교육을 고민할 시간도, 우리의 더 나은 노동 환경을 고민할 시간도, 사회 활동가로서 나의 미래를 고민할 시간도 없다. 나의 고민을 나누어 줄 사람도, 들어 줄 또래 활동가도 없다. 상집에 앉아서는 가끔 고민한다. '아무래도 나 10년 뒤에는 지부장일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나면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그럼 누구랑 일하지?' '나 뒤에는 누가 하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10년 뒤 정년을 맞이할 선배 활동가에게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선생님 퇴임 전에 지부장을 해서 선생님한테 일을 맡겨야겠어요."하고 농담이나 건넬 뿐이다. 아, 이러다 종신 지부장을 하게 되면 어떡하지?
어느새 글이 너무 우울해진 것 같다. 서른 살 민주노총, 서른여섯 살 전교조. 나름 생일인데 좋은 이야기를 거의 못 했다. 이 공간이 있어 우리의 노동 환경은 분명 나아졌고, 시련이 닥쳐와도 의지할 곳이 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투쟁해 온 세월만큼, 앞으로도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발걸음이 지속가능해야 한다는 바람 역시 절박하다.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 최근 유명해진 민주노총의 구호이다. 내가 최근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민주노총이 열어야 할 길에는 민주노총 자신의 길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고민이 민주노총 내에서 나만 하고 있는 고민은 아닐 테니까.
김얼레
교사. 얼레벌레 살아가지만 안전한 교실을 만들고 싶다는 큰 꿈을 안고 있어서 이름하여 김얼레.
민주노총 30주년에 대한 청년활동가의 소회: 30살 공공운수노조 활동가의 이야기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지로부터 55년이 지났다. 그의 외침이 소위 '운동권'에 경종을 울리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민주노총의 깃발이 올랐다. 그 과거에도, 지금도 노동자들은 곡기를 끊고 거리에서 처절한 투쟁을 이어간다. 11월 8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은 30년을 돌아보고 이후의 '새 시대'를 주도하겠다고 한다(사실 한국노총도 그런 류의 슬로건을 준비해 왔다). 민주노총이 30년의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를 톺아본다고 한다면, 나는 그 안의 한 산별노조의 상근자로 보내 온 4년을 돌아볼 기회를 받아 글을 적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 30년 동안 적어도 강산은 3번 변했다. 전태일 열사를 기리던 30년 전의 청년들과 달리, 지금의 대학생들은 이제 입시-취직-결혼이라는 굴레 속에서 더 이상 전태일 열사를 쉽게 찾지 못한다. 그렇게 운동진영의 산실 역할을 하던 '대학'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청년들이 존재하고, 그들 중에서는 늘 젊은 활동가들이 나타난다. 다만 이들에게 더 이상 민주노총이 유일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환경·기후위기, 성평등, 장애인운동 등 운동 진영의 스펙트럼은 훨씬 다양해졌고, 활동가가 되려는 청년들에게 민주노총은 그 중 하나의 선택지일 순 있어도 유일한 답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활동을 일부 포기하고 '노동자'와 '활동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싶은 청년들이 주로 노동운동의 문을 두드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노동운동에 들어온 청년들은 얼마나 살아남을까. 혹자는 자신이 바라온 노동운동과 다른 점에 실망하며 떠나고, 혹자는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거나 순응하며 그렇게 노동운동을 배운다. 무엇이 더 옳다는 것은 없다. 아직 젊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니 그런 줄 알고 이것저것 해볼 뿐이지 않을까.
민주노총 역시 변했다. 제도 교육을 벗어나자마자 학생운동, 그리고 현장 투신을 해 오며 평생을 운동해 온 이들이 퇴장(혹은 퇴장을 준비)하면서 발생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청년들에게 손을 내민다. 부랴부랴 청년 임원과 담당자를 선임하고 사업을 기획한다. 다만 민주노총과 산별노조도 결국 한국 사회의 중소기업인지, 그렇게 선임된 청년들에게 '맨 땅에 헤딩'을 요구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청년사업의 성패는 임원·담당자가 생각하는 사업의 방향성에 따라 좌우된다. 그게 아니라면 조직이 원하는 구체적인 청년사업의 방향성이 없는 상태에서 표류하다가 조용히 사그라진다.
또 다른 문제는 청년사업은 영역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청년 세대의 관계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청년들이 노동운동 진영의 언어를 이해·지지하지 않거나, 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청년들을 만나서 조직하고, 대화하고, 교육하면서 청년과 운동진영 간의 접점을 만들어야 했던 것인데, 민주노총 차원에서의 이를 위한 고민은 충분하지 못했다. 인천국제공항, 건강보험고객센터 정규직 전환 등 소위 '공정성'을 기반으로 한 반운동적 도전에 대해서도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 때만큼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는 민주노총의 젊은 조합원들에게조차 '공정성'이라는 단어는 이미 내재화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든다.

그 방식과 상관 없이 청년사업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직이 사전에 '청년'에 대해 미리 판단하거나 결론을 내린 채로 사업을 진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이대남' 등의 표현으로 과대대표되는 청년들이 청년 세대의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배제하거나 혹은 집중하는 방식으로의 사업 기획은 지양되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걸어 온 30년의 시간 동안 한국 사회 다른 어딘가에서 경쟁과 성과를 강요받아 온 이들, 민주노총이 그간 가닿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보다 많은 청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30년 전은 나로서는 겪어 보지 못한 과거의 시절이지만, 그 시절의 민주노총과 지금의 민주노총은 많이 달라진 듯하다.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길을 열던' 윤석열 퇴진광장의 모습과는 달리 집행부는 21대 대선에 대한 정치방침을 정하지 못했으며, 그 전 해에는 진보당의 위성정당 합류에 대한 지지 철회 논쟁으로 내부 홍역을 앓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노동운동 진영의 가장 큰 원칙은 훼손되었고, 민주노총 내의 일부 세력은 이를 '정쟁'으로 포장하여 현장에 호도하기도 했다.
정파에 따른 의견 차이와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운동조직에 이러한 갈등이 없는 것은 더 건강하지 않다는 방증일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정파의 이익을 위해 공조직을 이용하는 행태는 나오지 않아야 한다. 자신들의 방향성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의견에 대해서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면 조직의 민주성은 사라진다. 갈등의 시간이 길어지면 그 사이 현장도 사라진다. 정파갈등이라는 요인만으로 민주노총의 현장 장악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겠지만, 작금의 민주노총 집행부가 보여 주는 공조직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방적 조직 행태와 그로 인한 내부 갈등은 (민주노총의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진 것과는 반대로) 민주노총-산별노조-현장의 괴리감을 키우고만 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로부터 55년이 지났다. <전태일 평전>을 두 번 읽고 나서야 '전태일 정신'이 무엇일지에 대한 감을 잡았던 기억이 있다. 각자에게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가 느꼈던 전태일 정신의 핵심은 '사랑'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과거의 자신과 가족들을 투영하고 이 세상의 노동자들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은 1970년의 전태일 정신으로 탄생해서 지금까지의 시간을 만들어 왔다. 30주년을 기념하며 '새 시대'의 주도를 외치고 있는 민주노총.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스스로의 시작이었던 전태일 정신을 놓치며 운동의 주도성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이것이 조직과 조직을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고민점으로 남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남욱진
공공운수노조 조합원.
노동자, 시민의 단결과 연대를 통한 평등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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