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뿌리고, 퀴우고, 나누자 - 다섯 번째 춘천퀴어문화축제를 마무리하며
8월 30일 춘천시 공지천 천변에서는 다섯 번째를 맞이한 춘천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인구위기와 지방 소멸의 공포 속에, 지역사회의 가족주의적 퇴행을 막기 위한 춘천퀴어문화축제의 노력과 성과를 다룬 최상희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의 기고를 게재한다.
다섯 번째 춘천퀴어문화축제
이 글을 지면에 송고하기 하루 전인 2025년 8월 30일, 강원도 춘천시 공지천 천변에서는 제5회 춘천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퀴어 농악대 '바람소리로담근술'의 역동적인 길놀이가 울려퍼지고, 수많은 연대의 깃발들이 무지개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제1회 춘천퀴어문화축제부터 시작해서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축제를 준비해온 조직위원인 나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축제 마무리에 쉽게 감동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왔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 준 수많은 동지들과 지역의 연대단체, 농민단체와 함께 이번 축제가 마무리되는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 비록 상투적인 표현일지라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의 물결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제1회부터 제5회까지 매년 축제를 개최하겠다는 초심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춘천시의 차별적 행정과 준동하는 혐오 세력, 그리고 언제나 모자란 자원과 집행 역량이라는 삼중고를 뚫고 축제를 성사시켜 왔다. 조직위원회는 처음 4명의 작은 모임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10명이 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직장인, 전업 활동가라는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닌 이들이 또한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품고 모여 축제를 만들어 왔다.
매년 축제 준비철이 되면 조직위원들은 각자의 어려운 시간을 쪼개 한 자리에 모이고, 기꺼이 자신의 노동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많은 갈등과 고민을 나누지만 축제 당일이 되면 마법 같이 모든 것들이 맞춰져 돌아가게 된다. 춘천에서 축제를 가능케 하고자 언제나 힘써 주는 조직위원, 연대단체, 그리고 참가자들의 마음을 확인할 때마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축제가 가능할 수 있다는 어렴풋한 확신을 갖게 된다.
넓어져 온 우리의 연대
제1회 춘천퀴어문화축제는 '소양강 퀴어'라는 부제를 사용했는데, 이는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춘천퀴어문화축제 자체의 부제가 되었다. 김태희의 노래로 유명한 '소양강 처녀'는 춘천의 유명한 관광 랜드마크다. 하지만 우리는 이 랜드마크에 노래나 설화에서 묘사되는 성별이분법적이고 수동적인 '처녀'에서 벗어나, 춘천퀴어문화축제가 추구하는 주체성과 다양성의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소양강 퀴어'다. 춘천에 사는 성소수자인 우리가 '소양강 퀴어'처럼 당당하게 춘천에서 함께 삶을 쟁취하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제2회부터는 '흐름'을 모티브로 한 연속적인 슬로건들을 선보였다. 수많은 물줄기가 뒤엉켜 역동적인 소양강이 되듯,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넘치는 열정으로 차별과 혐오를 뛰어넘어보자는 의미를 담아 제2회 축제의 슬로건을 '퀴어가 넘쳐흐르네'로 정했다. 가정의 달 5월에 열린 제3회 축제에서는 '소양강 퀴어 운동회'라는 형식으로 퀴어 가족 운동회를 개최했고, 4회부터는 '퀴어가 뿌리내렸네'라는 슬로건으로 지역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림을 선언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을 초청하여 팔레스타인 땅의 참상을 널리 알리고, 춘천의 퀴어들이 소양강에서 요르단강까지 이어지는 연대의 물줄기를 만들어갈 것임을 힘차게 외쳤다.
이번 제5회 춘천퀴어문화축제는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슬로건으로 '뿌리고, 퀴우고, 나누자'를 내걸었다. 특히 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는 수많은 '윤석열들'에 맞서며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를 쟁취해내고자 했고, 작년 겨울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격동 속에서 남태령 투쟁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깊이 각인하게 된 농민과 퀴어의 뜨거운 연대를 지역에서도 이어가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조직위는 전농과 전여농을 위시한 지역의 농민단체를 특별 연대단체로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트랙터들이 윤석열 퇴진을 위해 서울로 향했을 때, 경찰은 남태령에서 그 길을 막았다. 곧이어 SNS를 통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남태령으로 달려왔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온기를 나누며, 노래를 부르며 28시간을 버텨냈고 마침내 길은 열렸다. 남태령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농민에 대해 잘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이 받는 소외와 차별, 혐오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를, 나의 친구를, 내가 살아갈 곳을 지키는 마음으로 남태령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당연하게도 많은 여성들과 퀴어들이 있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다른 상처, 다른 투쟁이 남태령에서 만났다. 농민의 "딸들아 수고했다"는 말에 논바이너리들이 "우리는 딸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농민은 "알아두겠다"고 답했다.
남태령에 모인 이들은 조건 없이 연대했고 서로를 구하며 자신을 구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남태령 이후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는 지난 이틀을 '남태령 대첩'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저 이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 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퀴어가 농민의 동지가 되었고, 농민은 퀴어를 동지로 호명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동지로 알아보았다. 농민 단체와의 연대를 주된 내용으로 결정한 이후, 농민 단체들에게 제안서를 보내고 만나러 갔던 순간들은 그래서 더욱 설렜다. 남태령 이후에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퀴어와 농민의 연대가 춘천에서 다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농민단체의 활동가들 역시 퀴어에 대해선 여전히 자신이 없거나 어렵다고 솔직한 감상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남태령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청에 선뜻 응해 주었다. 그리고 대망의 축제 날 우리는 기대를 뛰어넘은 농민들의 연대와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강원도연합의 용옥천 회장은 연대발언을 통해 "전여농은 농촌을 성평등하게 만들어 왔고, 만들고 있다. 성소수자가 농촌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그리고 모두는 뭘 해야 할까?" 물으며, "젊은이들에게 광장에서 요구한 '농촌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헛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 농민들이 "성소수자들에게 비빌 언덕, 디딤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작년 제4회 축제에서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했던 경험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았다.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에서 활동하는 노동당의 사루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 그 이상으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팔레스타인 성소수자들의 실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며, 전 세계로 퍼지는 이스라엘과 그 동조국들의 핑크워싱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성소수자도 살아있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호소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호소를 듣는 우리의 해방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라고 팔호 광장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외쳤다. 퀴어문화축제가 아니었다면 춘천에서는 듣기 어려웠던 팔레스타인 연대발언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누군가는 '작은 도시에서 퀴어 의제에만 집중해도 힘들 텐데 왜 자꾸 연대를 추구하는지', '퀴어 의제가 축소되거나 희석되진 않을지'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작은 도시에서 퀴어축제를 하고 있기에 더 넓은 연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농업 없이는 누구도 살 수 없지만 농민의 생존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삶은 한국 정부의 방조와 한국 기업의 동조로 실시간으로 파괴되고 있다. 이성애는 당연한 사랑으로 여겨지지만 퀴어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삶의 필수 조건이, 존재의 양식이 외면당하고 부정당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축제를 연다. 생명의 가치와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존재들이 다시 만나 서로의 동지가 되어 자꾸만 부정당하는 존재를 드러내고, 서로를 지키며 우리의 정치를 만들어 간다.
'지방 소멸'과 연결된 가족주의로의 퇴행
춘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미션 중에는 '모두가 안전한 춘천을 만드는 것'이라는 소박하지만 아주 담대한 목표가 있다. 춘천은 어떤 도시인가? 29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농복합시, 강원도, 특히 영서 지역의 정치와 행정중심지, 그러면서도 특유의 보수성과 경직성을 같이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들, 즉 메가시티에서의 관계망은 단순히 거리뿐만 아니라 관심사나 직업, 취미, 종교, 이념적 지향 등 다양한 범주로 구성된다. 작은 도시는 그렇지 않다. 춘천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관계가 기본적인 생활의 문법이다. 처음 보는 가게가 있어도 들어가서 사장님에게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를 물어보는 게 당연한 도시다. 이곳에서 퀴어의 존재는 단순히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 전체의 민주주의와 포용성의 문제가 된다. 지역 퀴어축제에서 사진촬영 등에 더욱 민감한 이유, 지역 성소수자 당사자의 참여가 유독 어려운 이유 역시 아웃팅의 위험이 훨씬 더 크고, 그 피해가 너무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안전한 춘천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춘천의 기독교 기반 혐오세력이 매년 여는 축제의 이름은 '생명, 가족, 효 페스티벌'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생태적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인구정치, 생명정치 단위로서의 생명이다. 그리고 '가족'과 '효'는 지역 소멸 위기 속에서, 그리고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급격한 고령화 속에서 힘을 얻는 가장 반동적이고 실제적인 이데올로기다. 즉 춘천의 기독교 혐오세력은 봉건적이고 전통적 효를 행하는 가족 단위의 단단한 구성과 결합이 춘천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별이분법과 구시대적 여성 역할의 유지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효 세계관의 가족'을 근본적으로 해체시키는 퀴어 축제에 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우리는 근대, 혹은 그 이전 봉건적 가족으로의 회귀가 답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탄핵 반대를 외치며 등장한 '아스팔트 극우'는 전광훈이나 손현보처럼 '반동성애', '반젠더', '반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세력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심지어 이것은 전 세계적 경향이다. 미국에서도 트럼피즘의 도래 이후 기독교적 가족주의로의 퇴행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강조하고, 미성년자에 대한 성 확인(gender confirmation) 치료에 반대하며, 낙태를 제한하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념에 부합하는 종교 자유 정책을 장려한다'는 정책 방향을 명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스타일의 성 역할 기반 가족주의로의 회귀를 명시적으로 정책화하는 것이다.
이런 퇴행은 사실 신자유주의 이후 도래한 전사회적 위기와 함께 '지방 소멸'이라는 이중적 이데올로기가 지방을 집어삼킨 결과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인해 한국과 세계의 청년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극단적인 능력주의와 자유주의 맹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려 있으며, 세대 전체에 대한 깊은 불안감과 공포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역사회에는 물리적인 소멸의 공포가 다가오고 있다. 당연한 수순으로 수많은 지역의 청년들은 일자리, 그리고 개인의 미래를 담보해 줄 수 있다고 믿는 유일한 자산인 부동산이나 각종 투자 기회들이 집중된 대도시로 '탈출'하고 있다. 청년 세대의 유출과 재생산 거부로 인해 지역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대부분의 지역 정치권이 이러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 현상을 새로운 커뮤니티 형성이나 혁신적 사회관계망 실험의 기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지방 소멸'이라는 용어를 앞세워 공포심만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중적 공포 상황 속에서 지역이 퇴행적이고 성별고정적인 가족주의로의 회귀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일례로 이번 제5회 춘천퀴어문화축제 개최 장소 근처에 걸린 반대 현수막 중 많은 수의 단체 명의가 'OO아파트 경로당'이었던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지역/정치/공동체'로 퇴행에 함께 맞서기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서는 세력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직위원으로서 나는 춘천퀴어문화축제가 '지역/정치/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는다.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의 가능성을 획득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단순히 제도권 정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지역의 현실이 된 가족주의와 역사적 퇴행을 이겨낼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담대하게 제시하고 실현시킨다는 포괄적 의미의 정치이기도 하다.
춘천퀴어문화축제는 '지역 소멸'이라는 이슈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이미 춘천퀴어문화축제는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지속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 왔다. 또한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중, 그리고 농민들과 함께했던 것처럼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지치고 겁먹은 사람들에게 연대와 돌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외쳐 왔다.
다소 추상적이고 비약적인 부분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춘천퀴어문화축제뿐 아니라 강원도 곳곳에서는 이미 '지역/정치/공동체'를 실현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가 있다. 원주시의 '아카데미의친구들'은 단관 극장인 아카데미 극장을 보존하기 위해 모였던 문화 예술 활동가들이 그 이후에도 모여 지역 정치 공동체를 꾸린 훌륭한 사례다. 올해 초 삼척시에 정착한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지역 안에서 생활기반과 관계망을 만드는 조직적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인제시의 '자치와 자급'은 작은 책모임에서 시작되어 서로를 돌보고 이웃과 사회와 연대하는 거점 공간이자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가장 소외된 지역인 강원도의 곳곳에서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는 단체들이 생겨나고, 또 이들이 비슷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역 소멸의 공포 속에서 '생명, 가족, 효'를 내세우는 극우에 맞서는 대안적 공동체 상상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단일한 의제를 넘어선 연대의 정치학을 실천해야 한다. 전 지구적인 극우적 퇴행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사회 속에서 춘천퀴어문화축제를 비롯해 연대를 생활화하는 새로운 공동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극우의 도래에 맞서는 최전선이 되고 있다. 작은 도시에서, 작은 도시여서 가능한 급진적 환대의 정치학 모델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극우의 도래와 역사적 퇴행을 막기 위해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꿔내야 한다. 평등한 사회를 상상하고 조금씩 만들어나가는 평등정치가 필요하다. 작은 도시 춘천에서 평등정치는 이미 소양강퀴어들의 당당한 자세로 시작되고 있다. 뿌리고, 퀴우고, 나누는 연대의 정치학으로 말이다.
최상희
현 정의당 강원도당 사무처장,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
최근까지 전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지역운동, 지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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