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대학을 실천의 공간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있는 곳을 대학으로
'서울대학교 내 마르크스 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서마학)'의 투쟁을 지지하며
서울대학교의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이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폐강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내 마르크스 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서마학)'을 결성하여 '0학점' 계절학기 강의를 자체적으로 준비 중이다. 한 물 간 낡은 사상 취급받기 일쑤인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왜 지켜내야 할까?
내가 경험했던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정치경제학 입문>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는 나름 인기 있는 수업이었다. 줄여서 '정경입' 수업이 열리는 대형 강의실의 절반쯤은 경제학부 학생들이 채웠고, 나머지 절반은 선배의 추천이나 강의계획서에서 느낀 호기심으로 모인 타 전공 학생들이 채우곤 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정치경제학 입문> 수업이 완벽한 수업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는 점은 고백해야겠다. 이전에 읽은 책 몇 권을 바탕으로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설익은 규정을 가졌고, 대학에 입학해 '운동권'이 되겠단 조금은 부끄러운 얼치기 자의식을 갖고 있을 때였다. 고 김수행 교수의 퇴임과 후속 전임교수 채용 불발 이후 비정규교수의 강의를 통해 오늘날까지 16년 동안 이어져 온 '정경입' 수업은 그런 나에게 이견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해석과 입장에 대해 더 토론해보고 싶은 열망을 자주 불러일으켰다. 아쉽게도 학부 입문 강의가 지닌 시공간적 제약은 이를 충분히 허용하지 않았다. 그때의 이견과 토론을 지금 스스로 돌이켜보자면 어떤 것은 여전히 유효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지만, 종종 아쉬움을 느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의 존재 자체가 더 많은 비판적 토론을 가능케 하는 토양을 반영하고 있었음은, 그리고 그러한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당시 학내의 주요 학생운동 거점이었던 '관악 맑스주의 연구회 맑음(이하 맑음)'에는 '정경입'을 수강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맑음의 활동가들은 기초 커리큘럼을 마친 회원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과 관련된 강의들을 더 수강해볼 것 혹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에 기반한 다양한 실천적 활동에 참여해 볼 것을 권하곤 했다.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중립성'에 매몰되지 않고 모든 입장의 '당파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모색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토론의 필요성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다양한 학문과 사조 속에 깊이 각인했던 흔적이 아니었던가? 마르크스가 이른바 '유토피아주의'를 거부했던 것은 완벽한 대안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란 점을 인정하고 현실 속의 지속적인 투쟁과 끊임없는 탐구에 스스로를 개방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내가 느낀 '불완전함'은 오히려 질문에 대한 의지를 키우는 바탕이었지, 결코 흠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단일하지 않으며 현실의 투쟁과 결부된 끊임없는 논쟁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그런 한에서만 교조성을 넘어 살아있는 운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의실 안팎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둘러싼 교육과 토론을 거쳐 간 학생들은 학술 운동에, 노학연대 활동에, 대학 기업화 반대 운동에, 학내외의 젠더 정치에, 사회적 투쟁 현장에의 연대에, 법외 혹은 제도 내의 진보정당 운동에 발을 담갔고 때로는 흠뻑 뛰어들기도 했다. 이들 모두가 마르크스주의자는,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스스로 정체화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마르크스 이론의 안팎을 둘러싼 논의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관련된 논쟁에 참여한 경험을 쌓아온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다양한 저항의 장소와 이론적 마주침 속에서 마르크스를 새롭게 인용하고 또 전유할 수 있었다.
그랬던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이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2023년부터 강의 개설이 경제학부 교과위원회에 의해 '수요/공급 상황'을 주요 이유로 불허된 데 이어, 수요조사를 통해 표현된 '수요'조차 결국 묵살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학부 내의 사정이 빡빡하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의 수강료를 재원으로 운영되는 계절학기 강의조차 불허되었다는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 김수행 교수 이후 끝내 후속 전임교원 채용을 가로막았던, '비주류'와 '소수'로 규정되는 존재를 추방하려는 그 폐쇄성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더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길 수 없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정경입'을 비롯한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의 수강자가 서울대에서 줄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변하지 않는 추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문의 존폐에 대해 수요만을 따져 결정하겠다는 경제학부 교과위원회의 태도가 문제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판적 학문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국면의 변화 속에서 때로는 낮아지기도 높아지기도 한다. 지난겨울 비상계엄 이후의 광장에서 처음으로 투쟁을 경험한 많은 이들이 새롭게 정치적 급진화를 경험했던 것처럼, 학문적 논의의 장에도 분명히 정세의 오르내림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광장이 열리기 이전에 투쟁을 이어나간 수많은 이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사회적 관심이 저조할 때에도 지적 노동을 이어간 다양한 조류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가 묘사한 노련한 두더지의 노동처럼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이들의 노력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일각에서 쉽게 선언하곤 했던 "마르크스는 낡았다"는 말은, 이제 노동자운동은 시대착오적이라거나 학생운동이 존재할 시대는 갔다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하다. 모순이 있는 곳에 저항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향한 비판은 자연스레 과거를 참조하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유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음을 주지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 폐강 사태를 보며 졸업 전에 꼭 한번은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며 모인 이들의 존재는 수요의 부재로 강의 개설을 불허한다는 경제학부 교과위원회의 주장을 궁색하게 만들었다. 강의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은 '서울대 내 마르크스 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서마학)'을 구성하여 연서명과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지지와 연대의 글을 모았다. 서울대 학생과 졸업생만이 아니라 다양한 대학과 대학 밖의 연구자 그리고 시민의 글이 모여들었다.
경제학부의 강사 채용 공고에서 끝내 마르크스 경제학 강사 임용이 원천배제되자, 서마학은 제도의 불허에 굴하지 않고 '0학점' 계절학기를 열기로 했다. 그리고 학교의 담장 안팎에서 1,000명이 넘는 이들이 강의를 수강하겠다고 신청했다. 관심의 저조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강의의 방식에 대해 학생들이 행복한 고민을 이어가게 된 지금, 더는 누구도 이 꿈틀거림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억지로 우길 순 없게 됐다.
수도권 대학 중에서도 과도한 상징권력을 지닌 서울대의 마르크스 경제학 폐강이기에 사회적으로 더 많은 관심이 모이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구대학교에서는 '사회학과 장례식'이 치러지고, 비수도권 지역에서 유일한 계명대 여성학과가 폐지 위기에 놓인 지금, 당장은 서울대를 구심점으로 모인 항의가 교육의 기업화와 학문의 위계화에 대항하는 목소리로 퍼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 본다. 커다란 무대 앞의 너른 광장에 모였던 이들 속에서, 그동안 비가시화된 현장으로 나서는 깃발들이 자라났던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관심이 모인 저항의 장소가 대학의 위기와 비판적 학문의 소멸에 맞서는 물결을 길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에서 다양한 영감을 발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가 필요한 이유
졸업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폐강 앞에 이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함이나 패배주의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연서명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연대발언을 요청받은 후, 어려워 보이는 싸움에 나선 이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서울대학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폐강을 막아야 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원하는 학문을 공부할 수 있어야 할 학생들의 교육권을 위해, 수업 개설에 교육노동자로서의 발언권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규교수의 고용안정과 노동권을 위해, 학술생태계의 다양성이 침식될수록 더욱 불안정에 놓이는 학문후속세대의 전망을 위해,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 개설은 반드시 필요하다. 비판적 학문을 바탕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비롯한 현안을 고민해야 할 대학의 실천적 책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학연대 운동을 해 온, 그리고 역사학을 공부해 온 나 개인에게도 마르크스 경제학은 너무나 소중했다. 왜 나에게 마르크스가 필요했는지, 그동안 활동해 온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의 연대 발언에 담아보았다. 아래는 지난 5월 9일(금) 진행된 연서명 결과 발표 기자회견 연대 발언문의 일부이다.
" '노동'이라는 의제가 사회에서 지니는 역할에 대한 고민 속에서, 마르크스와 그 후학들의 이론과 실천이 비가시화되는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을 바라보는 유일하거나 특권적인 관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과 재생산 속에서 '노동'이 어떻게 주변화되어 왔는지, 그리고 일하는 존재의 권리를 보장하고 또 새롭게 만들어가기 위해 어떠한 사회적 투쟁이 이어져 왔는지 고찰할 때, 마르크스와 그 후학의 관점을 우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터와 삶터에서의 노동과 민주주의에 대해, 노동자의 조직화와 그 정치적 역할에 대해, 산업사회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 일의 변형에 대해, 그리고 노동을 둘러싼 불평등이 젠더·장애·인종에 따른 차별과 위계화 및 생태적 위기와 어떻게 결부되는지에 대해, 마르크스와 전혀 다른 이론적 정향에서 학술과 실천을 모색한 많은 이들도 마르크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참조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가 정치 및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그 속에서 노동권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중요한 관점을 침묵시킬 순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학을 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마르크스 경제학이 필요한지 묻는다면,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의 폐강은 결코 한 전공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경제'를 둘러싼 사회와 정치와 역사가 하나의 분과학문만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나 자명합니다. 한국 사회는 식민주의로 인해 오랫동안 지구적으로 '주변부'의 위치를 강요당한 가운데 그 위치를 규정하는 권력에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서구와 비서구의, 그리고 한국의 역사를 살펴왔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근대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그리고 근대성 속의 '발전'과 '성장'이 새롭게 부과한 억압과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지 고민하는 데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중요한 참조의 지점이 되어 왔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주변부'의 소외만이 아니라 '중심부'의 가해를 스스로 고민할 때가 되었지만, 그 참조의 지점으로서 마르크스가 지닌 가치는 빛바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존재는 사회운동 전반을 위해, 펜만이 아니라 망치와 빗자루를 들고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필요하다. 노동과 관련된 고민을 이어온 사회운동의 역사를 살펴볼수록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마주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놓인 '사회성격'과 '사회구성체'를 판독하고 그 속에서 변화의 주체를 길러내기 위해 마르크스 경제학의 언어와 개념을 도구로 씨름해 왔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수치로 표현된 경제를 팍팍한 현실의 삶과 이었듯이,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작디작은 우리와 무관한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흐름을 일상의 바탕으로, 그러나 숙명이 아니라 나날이 일하는 우리가 바꾸어나갈 수 있는 것으로 그려냈다. 어쩌면 낡아 보이기도 하는 그 과거의 논쟁들 속에서 추상적인 도식을 벗어나는 고민이 피어났고, 대학과 공장이 만나는 가운데 식민성과 권위주의와 무한경쟁을 새로운 전망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일하는 이들의 운동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기후재난을 비롯한 종 전체의 위기 앞에서 그 유산을 딛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혹자는 마르크스 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학교의 담장을 넘나드는 일에 우려를 표하기도 하고, 학내외 학외를 가르는 이분법을 바탕으로 냉소와 비난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마르크스 경제학의 존폐는 어느 한 대학, 심지어 어느 한 학부의 일로만 남겨두기엔 너무나 중요하다. 교육권과 연구의 권리를 위해 대학공동체에의 성원권을 요구하는 구성원의 목소리를 존중함과 함께, 공동의 토양을 가꾸어나가기 위한 사회운동의 너른 연대 또한 필요한 이유다. 반대로 대학이라는 '특권적' 공간에서 강의를 복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냐고 묻는다면, 서마학이 시작한 연대가 이미 '대학'이라는 언어가 강요하는 권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답하고 싶다.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연대하자. 제도의 바깥에서 대학의 위기에 응답하는 '0학점' 강의에 주목하고, '진리'를 특권의 언어에서 공공성의 언어로 전환하자. 이번 여름에 제도권 바깥의 여름학기를 수강하게 될 학생과 시민들은 평소 마르크스와 그 유효성에 대해 가졌던 궁금증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혹은 더 많은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정해진 단일한 정답을 부과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확장하려는 것이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를 요구하는 이유이자, 그동안 우리가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마르크스를 읽으며 현실의 운동과 결부시켜 왔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학 강의실을 살아 있는 실천의 공간으로 만들자. 더 나아가 서로를 연결하며 공부하는 우리가 디딘 곳 어디든지를 대학으로 만들자.
이재현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에서 노학연대 활동을 해 왔다.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를 통해 상이한 위치와 입장의 주체들이
공통의 권리를 구성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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