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가자와 연대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총파업
10월 3일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2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가자지구 민중과 연대하는 전국적 총파업을 벌였다. 신자유주의로 노동운동이 약화된 오늘날, 국제연대를 위한 거대한 총파업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었는가? 오랜 대중운동의 역사에 기반한 이탈리아 기층 노동조합들이 보여 주는 연대의 힘은 우리의 민주노조운동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지금은 일단 포성이 멈췄다지만, 10월 초만 해도 이스라엘군(IDF)의 민간인 학살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고 있었다. 많은 세계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심정이 되어 이 상황을 비통해하고 답답해했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나 현지시간으로 지난 10월 3일(금)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은 이 '상식'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이 날 하루 동안만 2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일손을 놓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단순히 작업을 중단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로 물자가 수송되는 모든 길목, 즉 항구, 공항, 철도, 고속도로 등을 봉쇄했다. 가자 민중과 연대하는 24시간 총파업이 벌어진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시기 내내 노동운동이 위축된 탓에, 자본주의 중심부 여러 나라에서 '총파업'은 먼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곤 했다.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된 내용을 내걸더라도 총파업은 성사되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이런 어림짐작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치적 의제, 그것도 국경을 넘어선 지구정치적 의제를 내걸고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실질적 총파업을 벌였다. 2025년 10월 3일에 깨진 낡은 '상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단순한 정치 의제를 넘어, '지구정치'적 의제를 내건 총파업
물론 이 정도 집단행동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날 수는 없다.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우는 고된 노동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남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21세기 들어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온 이민자 및 난민 인구가 급증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슬림-아랍계들의 이민 증가를 못마땅해하는 정서를 파고들며 극우 정당들(현 극우연립정부에서 조지아 멜로니 총리가 속한 '이탈리아 형제들(전신은 네오파시스트 세력인 '국민연합')'과,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가 속한 '동맹(전신은 북이탈리아 분리주의 세력인 '북부동맹')')이 급성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이민 2세대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사회운동이 발전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 꾸준히 계속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운동은 대개 이탈리아 특유의 운동 조직인 '사회 센터'들(민중의 집의 현대적 형태로서, 대체로 자율주의 좌파가 중심이 된 지역 사회운동 세력이 빈 집을 점거하고 각종 정치, 사회, 문화 활동을 펼친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지만, 노동조합운동과도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가령 이주노동자나 이민 2세대 노동자가 많이 일하는 물류산업(쿠팡을 떠올려 보자)의 노동조합들은 사회 센터들만큼이나 왕성하게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에 결합해 왔다. 지난 몇 년 간 지역과 현장에서 이런 활동들이 지속되어 오지 않았다면 10월 3일의 총파업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거대한 대중 투쟁이 폭발하려면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직접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 이번 총파업에서는 우선 '글로벌 자유 함대(Global Sumud Flotilla, Sumud는 아랍어로 '칠전팔기七顚八起' 정도의 의미다)' 운동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군의 해상 포위망을 뚫고 가자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고자 하는 이 국제연대 활동은, 우리에게도 그레타 툰베리가 탑승했다가 이스라엘군에 체포됐다거나 한국인 평화운동가 해초(김아현)가 억류되었던 소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는 이런 국제연대 직접행동 선박이 가장 많이 출항하는 곳이고, 총파업 직전에는 이탈리아 좌파를 대표하는 세 정당(민주당, 오성운동, 녹색-좌파연합)의 하원의원이 각각 한 명씩 탑승한 선박이 이스라엘군에게 나포되어 이탈리아 정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기층 노동조합들이 시작하고 CGIL이 결합하다
또 다른 계기는 좌파적 항운노동조합의 적극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이었다. 이스라엘로 향하는 화물선이 주로 이용하는 제노바 항구의 상당수 노동자는 '자율항만노동자조합(Collettivo Autonomo Lavoratori Portuali, CALP)'이라는 상당히 전투적인 '기층' 노동조합 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 제노바 항구 노동자들은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의 베트남 전쟁 군수물자나 피노체트 정부 하의 칠레로 향하는 화물의 선적을 거부했던 유구한 전통이 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선 연대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CALP는 이 전통을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으로 되살려 이미 이스라엘 선박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여 왔는데, 지난 9월 초 CALP 지도자 리카르도 루디노(Riccardo Rudino)는 4천여 명이 운집한 항구 노동자 집회에서 " '글로벌 자유 함대'가 단 몇 분이라도 억류된다면, 우리는 총파업에 나서서 온 유럽을 봉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총파업의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여기에 이탈리아 특유의 '기층' 노동조합들이 호응했다. 이름도 낯선 '기층노동조합연합(Unione Sindacale di Base, USB)', '기층통합총연맹(Confederazione Unitaria di Base, CUB)', '기층일반노동조합(Sindacato Generale di Base, SGB)',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Italian Syndicalist Union, USI)' 등이 함께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들은 10월 3일 24시간 총파업 이전인 9월 22일(월)에 이미 "팔레스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봉쇄하라"라는 구호 아래 1차로 24시간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 때 파업 참여 인원은 벌써 10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 특히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철도를 위시하여 공공부문 및 운수·물류산업을 주된 조직기반으로 포함한 USB였다. 운수나 물류산업의 길목에서 USB 조합원들은 실제로 봉쇄를 실현할 역량을 갖고 있었다.
'기층' 노동조합들만의 총파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자, 더 큰 노동조합총연맹들도 곧바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탈리아 최대 노총인 '이탈리아 노동총연맹(CGIL)'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탈리아 3대 노총(CGIL 외에 '이탈리아 노동조합총연맹(CISL)', '이탈리아 노동연합(UIL)') 가운데 가장 좌파 성향인 CGIL 내에서는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에 뒤늦게라도 함께하자는 목소리가 아래로부터 빗발쳤다. 그러자 CGIL의 마우리치오 란디니(Maurizio Landini) 사무총장(금속노조 위원장 출신이며 CGIL 내에서 급진좌파 성향)은 '사회적 봉기'라는 이름 아래 USB와 함께 더 큰 규모의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조직하기로 결단했다. 그 결실이 바로 10월 3일의 24시간 총파업이었다. 이 날의 파업에는 CGIL의 500여만 조합원 가운데 특히 공공, 물류, 교육, 금속 부문이 대거 참여했다. CGIL의 자체 평가에 따르면 이 부문들의 파업 참가율은 60%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층 노동조합들의 뿌리 - '뜨거운 가을' 이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전성기
이쯤에서 짚어 봐야 할 것은 제1노총을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한 '기층' 노동조합(base unions)이라는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노동조합 형태다. 본래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산업별 노동조합 중심 체제였고(물론 지금도 그렇다), 노동조합들은 특정 이념-정당 지지 성향이 강한 세 개의 정파적 노총에 모여 있었다. CGIL은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내걸었고 공산당과 사회당 좌파를 지지했다. 반면에 CISL은 기독교민주당과 연결돼 있었고, UIL은 반 공산당 성향의 중도좌파정당들(사회당 우파, 사회민주당, 공화당)의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중파업인 '뜨거운 가을(Autunno caldo)'이 1969년 이탈리아 사회를 덮치면서 기존 노동운동을 재편하는 두 흐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서로 연관성이 있었던 이 두 흐름 중 하나는 노동 현장의 공장평의회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3대 노총을 단일 노총으로 통합하려는 운동이었다.

우선 공장평의회부터 살펴보자. 이탈리아와 같은 산업별 노동조합 중심 체제에서는 산업 수준에서 단체협상이 이루어지며, 그래서 기업별로 단체협상을 할 때보다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 노동조건 등을 둘러싼 보다 광범위한 연대가 이뤄진다. 한국 노동운동은 오랫동안 산별교섭 쟁취를 강령으로 삼아 이런 체제를 지향했지만 여전히 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이 늘 그렇듯이, 산업별 노동조합 체제에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별 체제에서는 기업별 노동조합에 비해 노동 현장과 단체협상을 주도하는 지도부 사이의 거리가 더 멀기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 현장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가 무시된다고 느끼기 쉽다. 이른바 노동조합의 '관료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공장평의회는 '뜨거운 가을' 이후 자신감을 얻은 현장 노동자들이 이런 산별 중심 체제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굳이 말하면 이는 한국 기업별 노동조합의 대의원대회와 비슷하다. 공장의 각 부서마다 노동자 총투표로 대표(대의원)를 뽑아 평의회를 구성했는데, 각기 다른 노총 산하의 현장 내 복수노동조합 중 어디 소속인지와 상관없이 노동자면 누구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공장평의회는 산업별로 체결된 협약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각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더 많은 권리를 협약에 추가하려는 투쟁을 벌였다. CGIL을 비롯한 이탈리아 노총들은 이런 공장평의회를 경쟁자나 위협 세력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산별노조 중심 체제를 보완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요소로 끌어안고자 했다. 덕분에 산업별 노동조합과 공장평의회라는 두 무기를 가진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대자본 투쟁력·협상력을 자랑했다.
기층에서 서로 다른 노총 소속인 노동자들이 공장평의회를 통해 협력을 강화하자, 자연스럽게 노총 상층부 간의 관계도 바뀌었다. 정파별로 나뉜 노총들을 독일처럼 하나의 노총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70년 CGIL의 주도로 노총 통합운동이 시작됐고, 1972년에 일단 각 노총의 기존 조직을 유지하면서 통합 지도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90명의 공동운영위원회와 15명의 공동사무국으로 이뤄진 'CGIL-CISL-UIL 연맹'이라는 초유의 조직이 출범하여 이후 10년 넘게 이탈리아 노동 진영을 대표하게 된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며 모든 것이 뒤집혔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화 물결에 동참한 이탈리아 자본 진영은 무엇보다도 눈엣가시 같은 공장평의회를 분쇄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중앙정치에서 공산당이 고립되기 시작한 것은 신호탄이 되었다. 단순한 자동차공장이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급진적인 좌파 노동운동가들의 근거지였으며 공장평의회 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피아트(FIAT) 토리노 공장에서 대규모 정리해고 계획이 발표됐고, 격렬한 파업 투쟁에도 불구하고 대량 감원이 관철됐다. 공장평의회를 이끌던 급진적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의 주요 대상이었다. 피아트의 패배 이후 다른 공장들에서도 공장평의회가 와해되기 시작했고, 아래로부터의 동력이 약해지자 1984년 CISL과 UIL이 노총 통합운동에서 이탈했다. '뜨거운 가을'로 시작됐던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예외적 시기는 이렇게 끝나 버렸다.
기층 노동조합이라는 독특한 노동운동 흐름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이를 대변하는 흐름이 바로 기층 노동조합들이다. 공장평의회의 경험을 잊지 못한 노동자들이나 공장평의회 전통을 새롭게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운동가들은 기존 노총과 상관없이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해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 시도했다. 이런 시도들은 기존 노총이 아직 조직화에 착수하지 못한 공공부문의 새로운 직군들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의 예봉이 꺾였다고 생각되던 1980년대 공공부문에서는 '기층위원회(comitati di base, COBAS)'라는 이름의 현장 투쟁조직들이 등장했다. 이 조직들은 1987년에 여러 학교를 휩쓴 교직원 파업 물결을 계기로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갔고, 1999년에는 '기층위원회 총연맹(Confederazione Cobas)'을 출범시켰다. 당시 기층 노동조합들은 이미 여러 갈래로 분화,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층위원회 총연맹은 기층 노동조합운동의 일부만을 대변할 뿐이었다. 하지만 COBAS라는 이름은 3대 노총 바깥에서 기층(현장) 노동자를 조직하는 운동 노선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COBAS가 불 붙인 기층 노동조합운동 흐름을 3대 노총과 경쟁할 만한 또 다른 노총들로 발전시킨 것은 앞서 소개했던 9월 22일 총파업의 양대 조직인 기층통합총연맹(CUB)과 기층노동조합연합(USB)이다. 1992년 결성된 CUB는 기층 노동조합운동의 최대 조직으로서 조합원이 50만 명에 이른다. 다른 기층 노동조합들과 마찬가지로 주된 기반은 공공부문이며, 그 밖에도 건설, 운수, 언론, 문화 등의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다. CUB는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 이전에도 이라크 전쟁 등에 반대하며 파업을 벌인 적이 있다. 한편 이번 총파업에 가장 앞장섰던 USB는 CUB에서 이탈한 일부가 다른 기층 노동조합들과 함께 2010년 설립한 조직으로서, 조합원은 25만 명을 헤아린다. 앞서 소개한 대로 주된 기반은 공공부문과 운수·물류산업인데, 주거권 운동이나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과 같은 폭넓은 사회운동 역시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기층 노동조합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있는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 측면에서 기존 3대 노총 소속의 산별노조들과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도 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단편적 정보 속에서도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이러한 기층 노동조합들이 3대 노총보다, 심지어는 그 중에서 가장 좌파적이라는 CGIL보다도 더 강하게 진보·좌파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CUB, USB 등은 세부적 노선 차이는 있지만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 아나코-생디칼리슴, 자율주의(Autonomia) 같은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이를 중심으로 조합원을 조직하고 교육한다. 특히 이들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듯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하며, 덕분에 이주노동자나 이민 2세대 노동자들이 이들 조합을 기꺼이 자신의 조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과는 다른 이탈리아, 열쇠는 대중운동의 저력
이탈리아는 한동안 일본과 정치적으로 많이 비교되곤 했다. 두 나라의 정치에서 모두 좌파가 통째로 실종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냉전이 해체되자마자 두 나라에서 각각 좌파를 대표해 온 공산당과 사회당은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일본의 경우는 사회당의 대다수가 민주당이라는 중도정당에 흡수됐고, 이탈리아의 경우는 공산당이 좌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표방하다가 결국은 중도우파(구 기독교민주당 좌파)와 통합해 역시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색깔을 알기 힘든 정당이 되고 말았다. 이런 관계로 이탈리아는 서유럽 주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현실정치에서 좌파가 사라진 나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일본의 상황은 수십 년째 그대로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좌파는 부활하고 있다. 민주당의 당명은 여전히 민주당이지만, 마테오 렌치 전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가 대거 탈당한 뒤 적어도 과거의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한때 스스로 '좌우 어느 쪽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포퓰리즘 의제로 성장했던 오성운동은 이제 경제학자 주세페 콘테 전 총리의 주도로 좌파 정당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과거 공산당과 이탈리아 신좌파 운동의 전통을 가장 직접적으로 계승한 녹색-좌파연합은 오랜 침체기를 끝내고 5-10% 사이의 지지를 받는 단단한 정당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다.

일본과 이탈리아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운동의 차이다. 현재 일본의 최대 노총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는 과거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좌파적 운동 노선과 완전히 단절하여 실리주의, 조합주의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제도정치 무대에서 좌파가 사라진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좌파 성향의 제1노총 CGIL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더구나 1970년대 공장평의회 운동의 경험을 잇는 기층 노동조합들이 CGIL 왼쪽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파수꾼 역할을 해 왔다. 지난 10월 3일의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은 그저 벌어진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기층에서부터, 대중운동에서부터 쌓아 온 이러한 저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은 수많은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 기존의 계급운동,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막다른 길목에 봉착한 듯 보이는 상황에서 '국제연대 총파업'은 언감생심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사례처럼, 운동의 모든 성과는 결국 기층에서의 탄탄한 기반 위에 쌓아올려지는 것이다. 대중운동이 살아 있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죽으면, 나머지도 전멸이다. 이탈리아 좌파정치와 노동운동의 굴곡 많은 역사와 오늘날의 부활을 보며 한국의 우리가 반드시 건져내야 할 교훈이다.

장석준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현재는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이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한겨레에도 '그래도 진보정치'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세계 진보정당운동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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