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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녹색 산업전환의 그림자와 내일: 2025년 노르웨이 총선 분석

by Domoleft 2025. 12. 7.

[국제] 녹색 산업전환의 그림자와 내일: 2025년 노르웨이 총선 분석

9월 치러진 노르웨이 총선,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적록 블록은 정권 연장에 성공했지만 주요 석유산업지대를 중심으로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거대한 반발에 직면했다. 다가오는 기후위기 속 필연적인 녹색 산업전환에 대한 노동계급의 반발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2025년 노르웨이 총선, 석유산업지대 블루칼라들의 우경화

현재 좌파 연정이 집권하고 있는 노르웨이는 얼마 전인 2025년 9월 8일 총선을 실시했다. 적록 블록(노동당, 중앙당, 사회주의좌파당, 적색당, 녹색당)이 총 88석을 얻어 81석을 얻은 우파 블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지난 2021년 총선 때도 승리했던 적록 블록은 이번 승리로 정권을 4년 더 연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2021년 이들의 총합 의석수가 100석이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는 12석이나 줄어든 결과로서 그저 승리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노동당의 의석은 늘어났지만 그 외 정당들의 의석은 줄어들었다. 선거결과를 지역별로 확인한다면 좌파의 전반적 세력 약화를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좌측부터: 2021년 노르웨이 총선 지역별 결과 / 2025년 노르웨이 총선 지역별 결과. 출처: 위키피디아

 

2021년 총선과 2025년 총선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젠더에 따른 정치성향 격차와 서남부 지역의 우경화다. 이 중 특히 지역적 투표 경향의 차이는 단순한 지역 정치성향의 이동이 아니라 산업전환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표 경향 변동을 시사한다. 이는 노르웨이 남서부 지역이 소위 '석유 벨트'로 불리는 석유 산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북부의 광업지대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블루칼라 노동자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남서부 지역에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정당은 진보당(FrP)이다.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진보당은 이민자 배척과 재정보수주의를 주장할 뿐 아니라 '일자리 수호'를 명분으로 녹색 전환과 친환경 정책, 석유 및 가스 탐사 중단 정책을 맹렬히 공격하고 반대해 왔다. 한편 젠더별 투표 경향은 세계적 경향과도 유사하게 청년 남성층이 우파를, 청년 여성층이 좌파를 더 지지한 것으로 추정된다(자세한 출구조사 세부내역은 12월 15일에 공개될 예정이다).

 

석유 벨트뿐 아니라 아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방산, 해운, 조선, 배터리, 니켈 제련을 핵심 산업으로 하는 지역에서도 우파 블록의 표가 더 많이 나왔다. 또한 2021년 총선 때 좌파의 손을 들어 준 아케르슈스와 부스케루 지역도 이번에는 우파 블록의 손을 들어 줬는데, 수도권 지역임에도 좌파가 패배한 이들 지역에서는 물가 상승에 대한 반발이 주요 투표 동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전통적 산업지대라고 해서 모두 우파 블록에 표를 던진 것은 아니다. 상술한 광업지대인 북부 지역은 옆 나라인 스웨덴 북부 지역처럼 좌파가 여전한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또한 여러 신소재 및 바이오, 공정(工程), 펄프·제지 산업 노동자들 역시 아직까지는 좌파정당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들 역시 이번 총선에서는 좌파의 득표율이 2021년보다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권역 카운티(선거구) 핵심 산업 블록 우세 적록 블록 vs 우파 블록(%)
동부
(수도권)
오슬로 (Oslo) 금융, ICT, 라이프사이언스 적록 블록 54.5 : 42.2
동부
(수도권)
아케르슈스 (Akershus) 공항·물류, 항공, 에너지 R&D 우파 블록 45.1 : 51.0
동부
(수도권)
부스케루 (Buskerud) 방산·우주, 정밀제조 우파 블록 46.9 : 48.8
동부
(수도권)
인난데 (Innlandet) * 산림·목재, 목질바이오, 경공업 적록 블록 Hedmark 60.7 : 34.2 / Oppland 60.9 : 35.0
동남부 외스트폴 (Østfold) 바이오리파이너리, 펄프·제지, 항만 동률(표) 47.6 : 47.6 (의석은 적·녹 5, 우파블록 4)
동남부 베스트폴 (Vestfold) 도료·코팅, 전자상거래, 해운 연계 우파 블록 44.1 : 51.7
동남부 텔레마르크 (Telemark) 공정산업, 그린케미컬, CCUS 적록 블록 50.8 : 44.2
남부 아그데르 (Agder) * 공정·소재, 니켈 제련, 배터리, 해양서비스 우파 블록 오스트-아그데르 43.8 : 51.5 / 베스트-아그데르 38.3 : 57.3
서부 로갈란 (Rogaland) 석유·가스, 서브시, 에너지전환 우파 블록 40.6 : 55.1
서부 베스트란 (Vestland) * 해양·수산, 정유, 에너지서비스 혼합 호르달란(Hordaland) 46.6 : 49.1 / 송노피오라네(sogn og Fjordane) 58.5 : 38.2
서부 뫼레 오 그 롬스달 (Møre og Romsdal) 조선·해양장비(Blue Maritime) 우파 블록 41.3 : 54.7
중부 트뢰늘라그 (Trøndelag) * 연구·교육, 온쇼어 풍력, 양식, 농축산 적록 블록 서 트뢰늘라그 57.3 : 38.4 / 북 트뢰늘라그 62.9 : 32.9
북부 노를란 (Nordland) 금속·합금·재활용, 광물, 우주, 물류 적록 블록 54.4 : 41.1
북부 트롬스 (Troms) 수산·양식, 극지과학, 관광 적록 블록 54.1 : 41.6
북부 핀마르크 (Finnmark) LNG, 광업(구리), 사미 목축 적록 블록 50.8 : 33.7

2025년 노르웨이 총선 지역별 주요 산업 요약 및 선거결과 비교


왜 그들은 오른쪽을 택했는가

불과 4년 만에 오른쪽으로 옮겨 간 노르웨이의 주요 산업지대들은 어떤 이유로 우클릭한 것인가? 우선 석유 산업에 대한 첨예한 갈등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노르웨이는 총 GDP의 50%를 석유 산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금도 석유 시추 재개와 확대에 대해 적록 블록 내에서도 각 정당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이다. 남부 로갈란(Rogaland) 지역 같은 경우 현재 실업률이 1%대로 완전고용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이 대표적 석유 벨트 지역이기 때문이다. 석유 산업의 해체를 공약한 좌파정당들의 메시지는 이들 지역에게 실존적인 '생존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친(親)석유 공약을 앞세운 우파는 "지금의 번영을 지키자"는 메시지를 선거운동 전반에 내세웠고, 극우정당 진보당은 로갈란에서 대약진했다.

 

두 번째 핵심 이유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계속되는 인플레이션과 전기요금의 상승이다. 이는 비(非) 석유산업 종사자들의 불만마저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산유국에서 전기요금 폭등이라니, 이 모순을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우익 정당들은 대중적 불만을 이용해 급격한 산업전환을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타격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를 100% 거짓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녹색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산업전환 과정에서 유럽 전역의 에너지 비용이 우상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끊기자마자 혼란에 빠졌던 근 3년 간 유럽의 상황은 기후위기 담론을 거부하는 극우 세력에게 민심이 쏠리는 핵심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노르웨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2024년 말부터 일부 안정화되기는 했으나 2022~2025년 간 노르웨이 남서부와 서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전기비용(망 요금 포함)과 제도 변경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었다. 2025년 들어서도 가계 총 전기요금은 2022년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복귀하지 못했고, 망 요금 부담이 커졌다는 인식은 지금도 강하다. 노르웨이 우파는 이 지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녹색 산업전환의 주요 토대인 탈석유 정책을 흔들었다.

2025년 로갈란드 지역의 노르웨이 진보당(FrP) 당선인들. 출처: 진보당 www.frp.no

 

노르웨이 서남부 '석유 벨트'(로갈란·베스트란·아그데르·뫼레 오 그 롬스달)에서 좌파정당들이 제시한 녹색 산업전환은 구상 자체로는 탄탄했다. 해상풍력(특히 로갈란 앞바다의 Utsira Nord 부유식), 북해 유전의 플랫폼 전기화, 이산화탄소(CO₂) 포집 및 저장, 남부권 배터리·신소재 벨류체인 등이 그것이다. 요지는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는 구조를 장기적으로 바꾸되, 해양서비스·조선·정밀기계·공정산업 등 기존 역량을 '녹색 일감'으로 최대한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대안들이 선거라는 짧은 시간 속 유권자에게 당장 가져다주는 효능감이 약했고, 설계와 집행이 내보내는 신호가 완전히 일치하지 못하면서 비용·속도·예측가능성 면에서 혼선을 키웠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전통적 석유 산업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결합한 우파 블록(특히 진보당)의 단순하고 분명한 메시지('석유·일자리를 지킨다, 비용을 통제한다')가 더 설득력 있게 들렸고, 표심은 빠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더해 연안경제의 분배·공존 갈등은 전환 담론의 정당성을 갉아먹었다. 해상풍력 구역은 어장·항로와 충돌했고, 보상과 의사결정 참여를 둘러싼 불만이 쌓였다. 여기에 연어 양식 자원임대세 25%와 규범가격 산정 논란이 더해지며, 베스트란 주를 비롯한 해안 커뮤니티에서는 세금 부담의 예측가능성 문제에 대한 반감이 자라났다. 좌파는 지방 재원 환원과 공공성 강화를 내세웠지만, 당장의 투자 보류와 고용조정 소식이 계속되자 '녹색 = 규제와 세금 증가'라는 프레임에 갇혔다.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인 녹색전환을 이행하고 있는 노르딕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우경화는 단순히 좌파에 대한 일시적 실망이 아니다. 좌파정당의 핵심 지지층인 노동계급, 특히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녹색 산업전환의 가치를 인식하기보다 이를 생존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경고다.


산업전환이 겪는 걸림돌 - '정의로운 전환'이 만든 갈등

더 큰 문제는 산업전환에 대한 공격이 비단 오른쪽에서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에 거주하는 원주민 소수민족인 사미(Sámi)족과의 갈등 역시 크게 작용했다. 2023년 8월 노르웨이 최북단 해머페스트 앞 섬 멜퀘이아에 있는 Hammerfest LNG(스노르비트 가스 처리·액화 시설)를 가스터빈에서 국가 전력망(전기)으로 전환하는 계획이 정부 승인으로 확정됐다. 이른바 'Snøhvit Future' 프로젝트로, 2028년 온쇼어 압축기 업그레이드 후 2030년에 본격 전기화로 넘어가는 일정이 골자다. 운영사 에퀴노르는 전기화로 연 85만 톤의 CO₂가 줄어 노르웨이 전체 배출의 약 2%p 감축 효과가 난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전력·송전 인프라와 지역 수용성이다. 이 사업은 곧 사미족의 순록 방목권과 자연보전 이슈로 옮겨붙었다. 신규 송전선(약 54km) 일부 구간이 순록 이동·방목지를 지난다는 이유로 사미 측의 반발과 소송이 이어졌다. 2025년 7월 오슬로 지방법원은 국가 승소 판결을 냈지만, 사미족 자치의회(Sametinget)는 8월 항소를 결정했다. 이 사안은 사미 의회 내부 정치에도 파급되어 2025년 가을 연정 구성 협상의 쟁점이 될 정도로 민감했다.

노르웨이 사미(Sámi) 의회(Sametinget)의 구성원들. 출처: 사미 의회 sametinget.no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방향성 자체는 반드시 필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 방향이 현실의 조건과 대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 조응하지 못하면 쉽게 공허한 구호로 전락할 수 있다. 특히 노동자 대중에게 정의로운 전환이 자기 삶과 일자리, 임금과 권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 가능한 언어와 계획으로 제시되지 못한다면, 그 정책은 낯설고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노르웨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구호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고 이를 조율해내지 못한다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일련의 조치들과 그 방향성 자체에 대해 강한 반발이 발생한다.

 

실제로 노르웨이 노동조합들 역시 중앙 지도부 수준에서는 전환·기후목표에 대한 긍정적인 언어를 쓰지만, 현장 대표·지부 레벨에서는 '기후는 우리 임무가 아니다', '회원들이 나에게 부여한 친환경·탄소감축에 대한 명확한 위임이 없다'는 인식이 강하기에 전환 의제와 현장 경험이 서로 접속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진단하고 있다. 국제학술지인 <에너지 연구 및 사회과학> 저널의 아래 연구결과는 노조 상층부와 현장 간 만연한 인식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주요 행위자들의 야망은 교섭이나 지역 차원에서 노조를 대표하는 이들의 경험된 현실과 여전히 동떨어져 있음을 시사합니다. 공정한 전환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이들 조직 내 수준과 부문 간에 내부 기반이 부족하며, 회원과 선출된 대표들은 환경 문제나 배출 감축과 관련된 명확한 권한을 찾기 어렵습니다. 중앙 차원에서 정책과 협약의 재구성이 유망하지만, 노르웨이 노동조합이 노르웨이의 기후 목표 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징후는 여전히 거의 없습니다."[각주:1]

 

결국 정의로운 전환은 단순히 올바른 방향성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노동자 대중의 설득과 참여, 그리고 운동과의 실제적 결합 속에서 구체화될 때에만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노르웨이와는 다른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존재함을 간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정의로운 전환이 지역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어느 정도 조응하고 지지를 얻어 온 사례로는 스페인 북부의 석탄 광산, 독일 루르·라인-란데, 캐나다 알버타 석탄발전, 영국 스코틀랜드 그레인지머스 정유공장 전환 등이 자주 언급된다.

2018년 루르 지역 광산노조 지도자들과 함께 석탄 채굴 종결 기념식에 참석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연방대통령. 출처: www.deutschland.de

 

스페인에서는 석탄 폐쇄를 추진하면서 광산노조·정부·기업·지방정부가 함께 합의해 조기퇴직, 임금 보전 전직·재교육, 광산복구·재생에너지·관광·중소기업 지원 등을 하나의 패키지로 설계했다. 독일 루르는 수십 년에 걸친 구조전환 속에서 공동결정제와 작업평의회를 통해 노동자 대표가 폐쇄 및 감산 논의에 참여했고, 고임금 퇴직·재교육·도시재생·연구·환경기술 클러스터 육성이 함께 진행됐다.[각주:2] 캐나다 알버타는 석탄발전 중단을 앞두고 정의로운 전환 TF를 꾸려 공청회를 열고, 재취업훈련·이주비·소득·연금과 석탄 의존 지역 인프라 및 신산업 투자 패키지를 마련했다.[각주:3] 스코틀랜드 그레인지머스는 아직 진행 중인 사례이지만, 정유 부문의 폐쇄와 동시에 노동자·노조·지자체·기업·지역주민이 포함되는 사회적 대화 구조와 정의로운 전환 기금을 함께 마련한 점이 특징이다.[각주:4]

 

이러한 사례들이 보여 주는 공통적 조건은 대략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광산·정유·발전·철강처럼 이미 강하게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주체가 있고, 정책 설계의 파트너로 인정받는다. 둘째, 폐쇄 발표 뒤 사후적으로 보상만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환 초기 단계부터 노동자·지역 대표가 결정 과정에 직접 들어가 참여한다. 셋째, 단순한 추상적 기후 담론만이 아닌 조기퇴직, 임금·연금 브리지, 재교육·이주비, 지역투자 같은 물질적 보장이 패키지로 붙어 있다. 넷째, 국가나 중앙정부 차원의 슬로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와 지역 기업 및 단체들, 기금, 위원회가 실제 전환의 무대이자 주체가 된다.


전환기 한국 사회의 괴리,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 것인가

한미정상회담 이후 트럼프와 악수하는 이재명 대통령. 출처: 대통령실

 

한국에서의 정의로운 전환 담론은 노르딕 국가들보다 여전히 훨씬 미약하지만, 석유를 핵과 방위산업으로 치환한다면 이 글에서 논하고 있는 내용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지난 10월 31일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되었고, 이는 11월 14일 공동 팩트시트 발표와 양해각서 서명으로 마무리되었다. 관세협상의 결과에 대해 누군가는 선방이라고 평가하고, 누군가는 강탈과 굴종이라고 평가한다. 또 누군가는 역으로 한국의 제국주의적 산업 성장을 지적하며 한국 재벌들과 정부가 산업·수출의 재배치 및 재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 강탈이라 부를 수 없고, 오히려 대미 투자로 인한 재정 압박 속에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번 한미정상회담 결과의 핵심은 관세협상이 아니다. 바로 핵잠수함 도입과 핵연료 재처리의 승인으로 시작된 핵 산업의 부활과 '마스가(MASGA)'를 통한 방위산업의 확장이다. 현재 대다수의 대중들이 APEC과 한미협상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핵심적 이유는 핵잠수함 도입의 대대적 선전 속에 우리 역시 핵과 원자력을 통해 강국이 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핵에너지 확대의 위험성은 뒤로 밀려나고, 심지어는 '독자 핵무장'의 가능성까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논해지는 지금의 상황은 그간 진보주의자들이 외쳐 온 탈핵과 탈원전, 평화주의에 대한 거대한 백래시나 다를 바 없다.

 

점점 커져 가는 군비확장 경쟁의 경제적 부담 속에서 '우리만 핵이 없다'는 대중적 피해의식은 증폭될 수밖에 없고, 노르웨이 석유 벨트 노동자들이 다시금 석유 산업에 삶을 의탁했듯이 핵과 원자력이라는 달콤한 선물에 기대를 걸게 된다. 현 정권은 이러한 민심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핵융합 연구로인 KSTAR를 방문해 핵융합 에너지에 대한 찬사를 보냈고, 소형 모듈 원자로(SMR) 사업 육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고리 2호기의 수명연장을 승인하면서 핵 산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한편으로는 '마스가'를 통해 'K-방산'의 호황을 유도하고, 방산 호황 국면은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달콤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다.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팔레스타인의 현실보다는 지금 당장 내 밥과 자식들의 미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핵융합에너지 연구현장(KSTAR)을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 출처: 대통령실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권영숙 소장은 칼럼 <반제냐 반독점이냐>에서 이러한 한국 산업구조의 모순을 명확히 짚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또는 국민들은 이 강탈로 손해를 보는가? 아니면, 올해만해도 벌써 증시 상승으로 국민연금이 투자 잘해서 200조원을 벌었다고 칭송받듯이, 한미간의 자금 돌리기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석이조인가? 이 강탈에는 분명히 수혜자들이 있다. 강탈의 공범이라고 말하면 도둑이 되니 그것은 아니지만, 강탈의 수혜자들이 있다. 그 속에서는 앞서 언급한 반도체, 조선업, 자동차, 방위산업등 초국적 대기업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 즉 한국 노동계급의 상층부도 포함된다."[각주:5]

 

핵과 방산은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직관적인 예시로 다가오지만, 역시 당장 코앞의 미래로 다가온 녹색 산업전환에 대한 한국 노동자들의 반응 역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정의로운 전환'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핵 산업과 방산이 가져다 주는 거대한 이익에 대공장 산업노동자들이 열광하는 만큼 석유와 가스를 토대로 하는 지금의 산업구조를 본격적으로 재편하고자 할 때 다가올 거대한 백래시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더욱 큰 타격을 입힐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막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며 녹색 의제와 산업정책, 지역의 문제들을 유기적으로 조응시키고자 하는 더 많은 노력이 지금부터 필요하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거센 반발을 마주한 노르웨이의 사례가 우리에게 단순히 먼 타국의 일만이 아닌 이유다.


동백림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국제정세 오타쿠.

현재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도모의 국제면에 정기적으로 글을 연재하는 중이다.


각주

  1. Energy Research & Social Science, Anchoring a just transition: The ambivalent roles of Norwegian trade unions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221462962400210X?via%3Dihub [본문으로]
  2. Just Transition, Just Transition is Possible! The Case of Ruhr (Germany) https://www.just-transition.info/just-transition-is-possible-the-case-of-ruhr-germany/ [본문으로]
  3. 국제노총(ITUC), Getting it Right - 12 Lessons from Alberta fight for a Just Transition https://www.ituc-csi.org/Just-Transition-12-lessons-from-Alberta [본문으로]
  4.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Securing Grangemouth’s just transition https://www.gov.scot/news/securing-grangemouths-just-transition/ [본문으로]
  5.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반제냐 반독점이냐 - 한국자본의 대약진, 글로벌 자본가동맹의 구축, 그리고 ‘10.29 한미 관세합의' https://dem-labor.org/?p=2164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