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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핵 없는 세계를 위해 ② - 일본에서 떠올린 평화운동과 정치운동의 역할

by Domoleft 2026. 9. 3.

[국제] 핵 없는 세계를 위해 ② - 일본에서 떠올린 평화운동과 정치운동의 역할

전쟁범죄와 제국주의 가해자이자 최초의 원폭피해국인 일본, 식민지 당사자이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주체였던 한국,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의 이중적 정체성. 우리 사회는 이를 얼마나 직시하고 그 책임성을 인정하고 있는가? 전쟁의 시대 속 평화운동과 정치운동의 역할을 다시 떠올리는 정재환 전환 집행위원장의 기고를 게재한다.


※ 8월 2일부터 10일까지, 웹진 《도모》의 발행주체인 전환의 집행위원장 정재환과 국제연대팀장 김원은 사회진보연대, 평등의길 등 다양한 한국 사회운동단위 활동가들과 함께 '2026 원수폭금지 세계대회' 한국 참가단의 일원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본 대회 참석이 한국 진보정치와 사회운동 전반의 국제연대와 평화운동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원하며, 전환 참가단의 일원으로 함께한 2인의 대회 후기와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생각들을 총 5부작으로 나누어 싣는다. (편집부)

 

※ '핵 없는 세계를 위해' 시리즈

- 핵 없는 세계를 위해 ① - 2026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에 가다


"조금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맥주잔이 입술에 닿자마자 들린 그 말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자 함께 동석한 일본 활동가는 긴 듯, 안 긴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말을 열심히 경청하던 통역을 담당한 이는 아직 학생이라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연신 단어의 의미를 물어보고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뒤 내게 다시 돌려준 그의 말은, 이제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참극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잘 없었습니다. 전쟁가해자로서 일본에 대한 역사의 대부분은 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이후에 활동을 하며 일본이 저지른 일들을 알았을 때 많은 충격이었습니다. 전쟁피해국으로서 한국의 청년들은 일본의 악행에 대해 배우고, 또 분노하고 있습니까?"

 

7일 간의 2026 원수폭금지 세계대회 일정 사이에는 틈틈이 잡힌 활동가 교류회들이 있었다. 일본공산당 현의원 같은 굵직한 정치운동가들을 만나는 자리도 있었지만 대개는 전노련(전국노동조합총연합, 일본공산당 계열의 노동조합총연맹: 편집자 주) 조합원들이나 평화활동가들과 만나는 자리다보니 한 번쯤은 마주할 이야기라곤 생각했다.

 

반대로 나 또한 궁금했다. 이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일본은 전쟁을 기획한 국가다. 두 번째 세계대전의 기획자이자, 동아시아 패권국을 꿈꾼 국가.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전쟁범죄를 행한 국가. 그런 국가의 시민이자 평화활동가로서 가진 사명감 같은 것이 있을지, 특히 대륙으로 향하는 첫 번째 발판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을 매개로 오랜 악연이 된 한국의 활동가를 만날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했다.

히로시마 평화활동가들과 함께한 한국 참가단


전쟁,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는 것

간단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발전한 기술이 상당 부분 해결해 주었지만, 사회·정치적인 이야기들은 아직 빅데이터가 부족한지 번역기가 다소 헤멨다. 함께 동석한 이태현 금속노조 부위원장과 나는 손짓발짓을 섞어 가며 최근 겪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전쟁에 대한 감각 차이, 교육과정에서 만나는 전쟁가해국으로서 일본에 대한 평가와 피해국으로서 한국, 그러나 비판적 시각의 역사에서조차 다소 헐겁게 존재하는 평화질서에 대한 시각에 대해 이야기를 전했다.

 

흥미롭게 듣던 그 활동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교류회가 진행되던 식당의 에어컨이 고장나는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이보다 더 심도 있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40도가 넘어갔던 식당의 온도를 견디지 못한 우리는 심도 깊은 대화에 필요한 집중력을 많이 놓아 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하기 바쁜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일본 활동가의 눈빛만이 기억난다.

 

2차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어 온 전쟁의 역사 속에서 한국도 마냥 피해국이지는 않았다. 전날 열렸던 국제회의의 질의응답 과정에서는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가 갑작스럽게 언급된 사건(?)이 있었다. 국제회의에는 아세안(ASEAN) 회원국의 활동가들도 일부 참석했었는데 그 중 한 활동가가 다소 조심스럽게 꺼낸 문제였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회의장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흘렀다. 평화의 질서를 위한 국제연대 속에서도,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각국의 역사적 맥락이 상존하고 있음을 직면하게 하는 매우 솔직한 질문이었다.

2025년 6월 이재명 대통령의 응답을 촉구하는 베트남전 한국인 학살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 씨. 출처: 참여연대

 

세계대전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침략과 식민화의 피해국이었지만 현대에 다가올수록 한국의 위치는 가해자, 공모자적 위치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가해국·공모국으로서의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반문해 본다면 자신 있게 답변하기 어렵다. 베트남 전쟁 참전 과정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전쟁범죄의 양상에 대해 우리의 교육과정은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통해 배상이 이루어지고 정부의 공식적인 유감 표명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다수 대중에게 베트남전은 파병과 고엽제, 반공의 역사로만 기억되고 있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양면성이 공존하는 역사적 실체 속에 하나의 단면만이 정사로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단편으로 남겨진 역사는 단편적인 시민윤리로 귀결된다. 팔레스타인의 민간인들을 향해 미사일을 쏟아붓는 이스라엘과 수백억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는 한국의 방산업, 'K-방산'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새로운 먹거리를 찾은 것마냥 이를 홍보하는 정부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평가는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최근 가자지구를 비롯해 중동 전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수많은 무기·물자를 보낸 한국이지만,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보다는 구호물자를 싣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던 해초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 도드라진다. 피해국으로서의 적개심은 늘 준비되어 있지만 가해국으로서 책임감은 낯설게 느끼는 보편 감각. 이것이 바로 전쟁을 추상적 개념으로 남겨두는 결정적 장치다.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평화의 정치와 만나는 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평화의 주체의식은 전쟁의 주체라는 인식과 직접 맞닿아 있다. '전쟁을 다시 벌일 수 있다'는, '우리의 국가가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 없이 평화란 우리 외부의 조건들에 의해 주어지거나 침탈되는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한국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들에 이미 연결되어 있다. 약간의 비약을 보태 보자면,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의사결정이 지구적 분쟁의 규모를 키울 수도, 줄일 수도 있지만 정작 우리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전쟁과 평화의 분기점에서 평화로 향할 연료는 '책임의식'이다.

 

일본에서 만난 히바쿠샤(원폭생존자)들의 증언은 이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일종의 경종이었다.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의 공식 행사 동안 다양한 히바쿠샤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원자폭탄과 함께 침탈된 경험은 가해국으로서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주권자 사이 모순을 날것의 언어로 드러냈다. 동의한 적 없는 전쟁의 책임은 전쟁의 기획자들 대신 히바쿠샤들에게 귀속됐다. 모든 증언의 말미에 히바쿠샤들은 하나 같이 이 말을 덧붙였다. 다시는 이 세계에 히바쿠샤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노 모어 히로시마, 노 모어 나가사키, 노 모어 히바쿠샤(No more Hiroshima, No more Nagasaki, No more Hibakusha).

좌측부터: 나가사키 피폭자인 다나카 시게미츠 피단협 공동대표위원 / 오오무라 요시노리 피단협 2세위원회 위원장 겸 아이치현원수폭재해자회 사무국장. 출처: 사회진보연대

 

세계대회 일정 후반기로 접어들었을 때 나가사키로 이동한 한국 참가단은 나가사키 히바쿠샤 활동가들의 집에서 머물며 일정을 소화했다. 집 앞에는 '전쟁 반대'가 큰 글씨로 적힌 일본공산당 포스터가 버젓이 걸려 있었다.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해주신 미조우라 씨는 50년차 가까이 된, 오랜 일본공산당 당원이었다. 다카이치 총리의 핵심 국정과제인 평화헌법 개악에 가장 선명하게 반대하고 있는 일본공산당의 당원인 것이 놀랍지는 않지만 50년이라니,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스고이"만 연발하는 내게 미조우라 씨는 "그 시절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원이 되었다"고 말했다.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 원폭 투하 당시 조선소에서 일하던 미조우라 씨는 폭심지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국인 활동가들을 만나 정말 반갑다는 그는 폭심지 한가운데에 강제징용되어 끌려왔던 많은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의 기억을 꺼냈다.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환대의 자리에도 불구하고 미조우라 씨 부부는 새벽같이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오전 있었던 조선인 피폭희생자 추모비 행사에 참석했다.


TPNW 비준 운동으로 평화의 정치를 만들어가자

길었던 세계대회 일정의 마지막은 미조우라 부부와 함께 나가사키 도심에서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TPNW) 비준을 요구하는 시민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마무리되었다. 일본공산당 당원, 피폭자 단체, 평화운동단체와 해외 참여자들이 함께 진행한 이 캠페인은 이미 수많은 일본인의 서명을 조직했다. 새로운 전쟁의 위험 속에서 재무장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국가에 저항하는 정치. 그 구심에는 피폭 피해와 가해국이라는 자각을 힘으로 삼는 평화운동이 있었다.

좌측부터: 미조우라 씨의 집에 걸린 일본공산당의 'NO WAR' 포스터 / 나가사키 도심에서 TPNW 비준 서명운동을 진행 중인 한국 참가단

 

핵무기 보유국들을 중심으로 '핵무기 보유국 확산'만을 막겠다는 목표로 제정된 핵확산금지조약(NPT)은 불안정한 오늘날의 세계 질서 속에서 최소한의 합의마저 이루지 못한 채 실효하고 있다. 국제 사회는 NPT보다 더욱 확장된, 핵무기와 실험 등을 원천 금지하는 국제규범인 핵무기금지조약(TPNW)를 122국의 찬성으로 지난 2021년 제정하여 역사의 진전을 이뤄냈지만, 정작 핵무기 보유국과 그 동맹국들은 비준을 거부하며 적극적으로 조약을 무력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핵 패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이 국제사회는 나날이 높아지는 군사적 긴장을 목격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은 단거리 전술핵의 적극 활용 가능성을 열어둔 핵무기기본정책 수정 방침을 발표했다.[각주:1] 이 긴장 속에서 한국에서도 '자체 핵무장'론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얻고 있다. 얼마 전 시행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5%가 한국의 자체 핵보유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기까지 했다.[각주:2] 더욱 파괴적이고, 더욱 빈번하며, 더욱 일상적인 핵전쟁의 위험이 우리 앞에 예고되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역시 TPNW의 비준을 거부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미국의 핵우산을 통한 핵억지력을 신봉하면서 그 영향권에 어떻게든 남아있기 위해 '모든 핵무기에 반대한다'는 당연한 입장조차 하나 내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부의 현실이다. 그러나 지난 2006년 북한(조선)의 핵무기 보유 선언 이후, 한국 정부가 취해 온 핵무기에 대한 모호한 입장은 오히려 한반도를 국제 핵패권 경쟁의 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핵무기를 위시한 국제 패권 경쟁과 가장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당사국으로서, 한국 시민사회는 바로 지금 한국 정부의 전향적인 입장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우리 스스로의 국가를 변형하는 정치를 도전하지 않을 때, 전쟁을 막지 못한 지금의 책임은 우리 다음 세대의 삶을 제물로 삼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TPNW 비준을 촉구하는 요구로부터 평화의 정치를 시작하자. 평화질서를 만들기 위한 국제 시민사회의 노력에 이제 우리도 동행해야 할 때다.

핵무기금지조약(TPNW) 서명국 및 비준국 현황(2021년 기준). 출처: 오마이뉴스


정재환

전환 집행위원장.

세상 모든 일에 넓고 얕은 관심을 가지며 살고 있다.


각주

  1. 경향신문, 미국, 단거리 전술핵 비중 늘린 새 ‘핵우산 전략’ 추진…한반도 안보 지형 흔드나 https://www.khan.co.kr/article/202608071202001 [본문으로]
  2. 국민 3명 중 2명 "한국도 핵무기 보유해야"…찬성 65% https://news.jtbc.co.kr/article/NB1231557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