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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핀란드 지방선거로 본 서구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구성을 향한 움직임

by Domoleft 2025. 5. 8.

[국제] 핀란드 지방선거로 본 서구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구성을 향한 움직임

최근 북유럽 핀란드에서 사회민주당과 좌파 진영이 압승을 거뒀다. 위기에 직면했던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는 어떻게 스스로를 혁신하고 재구성해 나가고 있는가? 한국의 복지국가 담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핀란드 지방선거, 좌파의 승리를 불러온 우파 정부의 의료개악

지방선거 승리 후 환호하는 핀란드 사회민주당(SDP) 지도부. 출처: YLE www.vaalit.yle.fi

 

4월 13일 금요일, 핀란드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지방자치단체 의회와 복지 서비스만을 전담하는 카운티 의회(복지구)의 의원을 뽑는 지방선거가 열렸다. 선거 결과 지난 총선에서 3위로 밀렸던 야당 사회민주당(SDP)이 득표율 1위를 탈환하였고, 범좌파 야당 진영(사민당, 녹색당, 좌파동맹, 중앙당)은 총합 60%에 가까운 득표율을 보여주며 우파 여당연합을 완전히 패배시켰다. 특히 우파 진영 내에서도 지난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극우정당 핀란드인당(finns, PS)은 8% 미만을 득표하며 완전히 무너졌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스칸디나비아형 복지국가의 모범적 사례 중 하나로 꼽혀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우파 정부의 정책은 복지국가의 기반을 흔들었다. 특히 2023년부터 우파 연정 정부가 추진한 의료개혁은 공공 의료 시스템의 효율성을 명분으로 민영화를 가속화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 '개혁'은 지역 병원의 통폐합, 의료 서비스 접근성 감소, 그리고 민간 의료 보험 의존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저소득층과 노인들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2023년 핀란드 지방선거에서 진보·좌파 진영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배경에는 의료개악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민주당과 좌파연합은 공공 의료의 복원과 보편적 복지국가의 가치를 다시금 강조하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는 단순한 선거 승리를 넘어, 복지국가의 핵심 원칙인 보편성과 공공성이 여전히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핀란드의 사례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단지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선택과 긴밀히 연결된 선택임을 암시한다.

좌측부터: 2025년 핀란드 카운티 의원 선거 결과 / 지방자치단체 의원 선거 결과. 출처: YLE www.vaalit.yle.fi


전통적 복지국가의 위기와 점진적 해체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시기였다. 북유럽을 비롯해,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케인지언적 세계경제 아래 성황을 누렸던 서구권의 전통적 복지국가 체제는 이 시기부터 점진적 해체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중심의 경제정책과 정부 역할 축소를 강조하며 복지국가의 보편적 서비스와 재분배 시스템을 '비효율적이고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했다. 특히 이러한 흐름은 소련이 해체된 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복지국가가 급진적으로 해체된 서유럽 일부 국가들과 달리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아직 큰 틀에서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지만, 이들 역시 이 시기부터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 공공 서비스 부분적 민영화 또는 민간 위탁,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정책을 도입했다. 스웨덴의 경우 1990년대 초반 경제위기를 계기로 공공부문 축소와 민영화가 가속화되었다. 특히 철도 영역에서는 인프라 관리와 운영을 분리하고 운영 부문을 민영화하였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도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소련 해체 이후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이른바 '제3의 길'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면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담론이 힘을 잃고, 급진적 좌파 운동도 함께 흔들리던 시기였다.

민영화 이후 철도파업으로 운행이 중단된 스톡홀름의 통근열차. 출처: 스웨덴 라디오 www.sverigesradio.se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 경제 지표를 개선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평등 심화와 복지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교육 민영화는 학교 간 격차를 확대했고, 핀란드의 의료 개악 정책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역 주민들의 의료 접근성을 저하시켰다. 이 과정에서 복지국가의 핵심 원칙인 보편주의는 극도로 약화되었다. 보편주의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은 '선택의 자유'라는 명분 하에 이를 차등적 복지로 대체하며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에게 복지 서비스 및 현금 수급을 위한 의무를 늘리고 제한적으로 복지를 제공하는 경향을 강화했다. 이는 복지국가의 사회적 통합 기능을 약화시키며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전통적 복지국가의 해체는 단순히 사회복지 영역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산업과 경제 영역에서의 복지국가의 해체는 더욱 두드러진다. 은행과 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거의 소멸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물론 1990년대 말과 2008년 경제위기 당시 보수정권 하에서 은행을 일시적으로 재국유화한 적은 있으나 일회성 공적개입에 그쳤을 뿐,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스웨덴의 경우 이러한 흐름은 70~80년대 올로프 팔메 정권의 '임노동자 기금' 실험이 실패하고 난 후 스웨덴 좌파진영에서 국유화·공영화 담론 자체가 힘을 잃어버린 것과 맞물렸다. 최근 스웨덴의 전통적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무노조 경영을 유지하고 있는 테슬라(즉 스웨덴의 입장에서는 외투기업)의 행보에 스웨덴 정치권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이다.

스웨덴 금속노조 IF Metall의 테슬라 단체교섭 투쟁. 출처: 진보주의 인터내셔널(PI) https://progressive.international/

 

특히 이민자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사회적 통합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는데, 이민자 가정은 내국인 출신 가정보다 더 빈곤하고 실업률이 높았고, 이로 인하여 이민자가 다수인 학교와 내국인 출신인 학교의 교육 수준이 달라지고, 이민자가 사는 동네와 내국인이 사는 동네의 복지 서비스의 질과 양이 달라지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민자들이 빈곤층을 형성하여 사회복지 대상자로 많이 편입되면서, 보편적 납세에 대한 동질성과 믿음(국가 재정에 기여하고 그만큼 받는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세금도 제대로 안내면서 이득만 보는 이민자/난민”이라는 혐오 프레임이 씌워지기 수월해졌고 이로 인해 극우정당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아래 스웨덴 본토 출생 시민과 외국 출생 시민의 사회적 격차를 보여주는 표[각주:1] [각주:2] [각주:3]를 통해 그 격차를 확인할 수 있다.

지표 본토인(스웨덴 출신) 이주민(외국 출신)
고용률 86.1(2023) 76.1(2023)
실업률 3.4 14.2
상대적 빈곤율 ~11% 15%~40%
절대 빈곤율 별도 데이터 없음 별도 데이터 없음
지니계수 낮을 것으로 추정 높을 것으로 추정
사회복지 지출 이용률 낮음(수혜자 비율 적음) 높음(특히 자녀 있는 가구)

스웨덴 본토 출신자와 이주자의 고용률, 실업률, 빈곤율 및 지니계수 격차.

 

물론 지금 북유럽은 남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했던 급진좌파적 흐름의 영향을 받아 제3의 길이 아닌 전통 사민주의 노선으로의 복귀와 급진좌파 운동 부활의 신호탄을 올리고 있다. 북유럽 지역에서 전통적 복지국가의 보편주의 틀과 강력한 노동조합의 단결력, 교섭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과거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비하면 전통적 복지국가 모델이 이미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혹은 이미 해체된 상태라는 점 역시 지울 수 없다. 현재의 북유럽 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일부 사민주의 정책이 혼합된 복지국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2009년 스웨덴 약국 민영화 전후의 통계를 보여 주는 아래 표는 이 명제를 뒷받침한다.

항목 민영화 이전(2009년 이전) 민영화 이후(2022년 기준)
약국 수 929개 1350개
운영 주체 Apoteket AB (국가 소유) 42개 운영자, 대형 체인 주도
시장 점유율 Apoteket AB 100% Apoteket AB 27.8%, Apotek Hjärtat 27.8%

2009년 스웨덴 약국 민영화 전후의 통계.


'복지를 챙기는 극우'의 신화

지금 모든 언론에서 다루고 있는 서구 극우정당의 부상은 복지국가의 위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프랑스의 국민전선(현 국민연합(RN)),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네덜란드의 자유당 등은 반이민과 민족주의를 주요 의제로 내세우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이 기존의 우파와 다른 점은 복지국가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자국민 우선주의'를 내세워 복지국가의 혜택을 이민자나 외국인에게서 자국민으로 돌리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극우가 좌파보다 훨씬 더 복지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복지를 챙기는 극우'의 신화를 낳았다.

 

그러나 이는 진실을 은폐한다. 극우정당의 복지 정책은 겉으로는 자국민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지에 들어가는 전체 파이를 줄이고자 하는 재정보수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자유당은 이민자 복지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전체 복지 예산 축소와 세금 감면을 지지한다. 이는 복지국가의 보편성을 훼손하며 결국 자국민을 포함한 모든 시민의 복지 수준을 낮춘다. 독일의 AfD 역시 복지 확대보다는 시장 중심 정책과 규제 완화를 강조한다. 극우의 이민자 혐오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사회적 갈등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이다. 경제적 불평등과 복지 축소의 책임을 이민자에게 돌림으로써 재정보수주의 정책의 부정적 결과를 은폐한다. 이는 복지국가의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키고, 장기적으로 복지 시스템 자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2023년부터 현재까지 집권 중인 페테리 오르포(Petteri Orpo) 핀란드 우파연합 내각. 출처: 위키피디아

 

대표적인 예시가 글 초반에 언급된 핀란드의 의료개악인데, 이 정책의 제정과 집행에는 연립내각의 일부인 극우정당 핀란드인당(PS)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 있다. 핀란드 우파연합 정부가 추진한 의료 '개혁'은 2023년 1월부터 시행된 대규모 행정 개혁으로, 의료, 사회복지, 구조구조 서비스의 책임을 기존의 293개 지방자치단체(또는 195개 조직)에서 21개의 웰빙 서비스 카운티(Well-being Service Counties, WSC)와 헬싱키 시로 이전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당장 듣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WSC 자체는 2021년 사민당의 산나 마린 정부가 만든 복지 전담 기구다. 별개의 카운티(복지구) 의회를 구성하여 복지 전담기구의 의사결정을 맡긴 것 역시 마린 내각의 정책이다. 다만 WSC의 첫 발족 당시에는 민간기관의 복지제도 참여 확대를 상정하지 않았으나, 2023년 총선에서 우파연합으로 집권당이 바뀐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우파연합의 정책이 사민당 정부와 핵심적으로 다른 점은 본래 지자체 예산을 사용하는 복지정책의 집행기구였던 WSC에게 이른바 '선택지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거나, 민간 제공자와 계약하거나, 서비스 바우처를 통해 서비스를 조직하는 등의 방식 중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상술한 대로 WSC가 조세 징세 권한이 없는 집행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WSC는 중앙정부에 재정을 의존해야 하고, 중앙정부는 재정을 아끼려 하기 때문에 결국 복지 사업은 민영화의 늪에 빠지게 된다. 조세와 재정의 한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이러한 '자율성 확대'는 사실상 민간 위탁과 민영화를 자연스레 촉진하는 설계다. 실제로 재정난에 빠진 많은 WSC가 인력 감축과 민간 위탁을 추진하였고, 이는 서비스 질의 하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 정책을 집행한 사회복지건강부 장관 카이사 유소(Kaisa Juuso)는 극우 핀란드인당 소속이다.

좌측부터: 핀란드의 WSC 지도 / 극우 핀란드인당 소속 복지부 장관 카이사 유소. 출처: 위키피디아


시민 저항에서 복지국가의 재구성을 향한 움직임으로

다행인 점은,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사례처럼 진보·좌파 정당의 선거 승리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복지국가의 가치를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는 점을 보여 준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보자. 스웨덴에서는 민영화된 교육과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이 공론화되며 공공 부문 복원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가 협력하여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맞서 복지와 노동권을 동시에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복지국가의 재구성을 위한 최근의 움직임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대적 도전에 맞춘 새로운 모델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최근 서구 좌파진영에서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녹색 복지국가(Green welfare state)'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재생 가능 에너지, 지속 가능한 교통, 친환경 일자리 창출과 같은 정책을 복지국가의 틀 안에서 통합하려는 시도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몇몇 정책을 실험 중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복지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 대한 공적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행보로 볼 수 있다.

 

또한 디지털 경제와 플랫폼 자본주의의 부상은 복지국가의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긱 경제(Gig economy; 단기, 임시직 노동자들로 돌아가는 경제)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 데이터 프라이버시, 그리고 디지털 인프라의 공공화는 현대 복지국가의 재구성을 위한 핵심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에서는 플랫폼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문을 닫은 스웨덴의 배터리 제조사 노스볼트 공장. 출처: 블룸버그

 

이에 발맞춰 기존 복지국가의 고전적 테제였던 산업에 대한 공적 개입 촉구 역시 다시 강해지고 있다. 이는 올해 3월 12일 파산한 스웨덴의 배터리 제조회사 노스볼트에 대한 스웨덴 정치권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좌파당에서는 지역 경제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의 공적 개입을 요구하며 필요할 경우 국가가 공동소유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각주:4] 사민당 또한 노스볼트에 취업허가제로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허가증 기한 연장을 요구하며, 국가가 파트너십을 통해 노스볼트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 촉구하고 있다.[각주:5] [각주:6] 기간산업에 대한 통제 자체를 사실상 포기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소극적 재취업 지원만 해 왔던 과거 제3의 길 시절 복지국가의 쇠퇴기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시민 저항과 좌파정당의 정책적 급진화가 맞물려진 이러한 움직임은 복지국가가 여전히 진화 및 유지 가능한 모델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새로운 복지국가 담론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치적 연대와 시민 참여가 필수적이다. 복지국가의 재구성은 단순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공공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복원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와 재정보수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위기를 겪고 있다. 핀란드의 사례는 이러한 위기가 정치적 선택의 결과임을 보여주며, 시민의 저항이 정치를 바꾸어 복지국가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한다. 8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점진적 해체는 불평등과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켰고, "자국민 복지를 지키자"는 극우의 주장은 재정보수주의를 은폐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러나 여전히, 진보적 시민 운동과 새로운 복지 모델의 모색은 복지국가의 재구성을 가능케 한다.


한국 복지국가 담론, '복지국가의 재인식'으로 나아가자

현재 한국에서의 복지국가 담론은 문재인 정부 이후 최소한 정치적 논의의 장에서는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0년 무상급식 돌풍 이후 사회적 논쟁의 초점에 있던 복지국가 담론은 박근혜-문재인 시기를 거치면서 제도적 강화를 통한 일정 수준의 불만 해소를 맞이했고, 무엇보다 모든 정책적 이슈를 파묻는 복잡한 정치구도 속에서 담론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아직도 복지국가라고 말하기에 매우 민망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재 가장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1) 핵심 지지층인 수도권 중산층에 대한 감세 정책, 2) 성장 주도 경제정책 등 친자본 정책을 중점에 두면서도 3) 일부 노동권 확대와 복지 확대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이재명은 한국노총과의 정책협약을 통해 노란봉투법과 초기업 교섭제도, 주4일제를 공약했다. 이러한 '투트랙' 전략은 북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이 90년대 내내 밀었던 제3의 길 정책과 매우 유사하다. 통화주의적 경제정책과 일부 사민주의 정책이 혼합된 쇠퇴된 복지국가 모델을 한국에 이식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는 지난 제20대 대선 당시 이른바 기본 시리즈(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대출)로 대표되었던, '페론주의'를 연상케 하는 이재명의 급진적 재정정책으로부터 매우 후퇴한 안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과 악수하는 이재명 후보. 출처: 연합뉴스

 

혹자는 "최소한 이재명은 이 정도라도 하지 않느냐"를 역설하며, 사실상 복지국가의 토대가 없는 한국에서는 이것조차 엄청난 진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재명이 건설할 국가는 복지국가다. 그러나 일부의 노동권 강화와 일부의 복지 확대 정도로 과연 감세 정책기조가 불러올 폭넓은 경제적 양극화를 덮을 수 있을까? 뒤에서는 복지국가의 전제 자체를 뒤흔들며 앞에서는 정책적 당근을 던지는 것이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것은 현 이재명의 정책과 유사한 유럽 제3의 길 정책의 몰락에서도, "자국민 우선 복지"를 외치면서 사실은 감세와 예산 삭감의 칼날을 숨기고 있는 유럽 극우정당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후보는 "AI 기업에 정부가 투자하여 지분 30%를 얻고 그에 대한 배당금을 받아 국민들에게 나눠준다면, 그 기업의 법인세를 안 받아도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아주 진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재명이 어떠한 사회경제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는 발언이다. 서해안 지역에 신재생에너지발전소와 '에너지 고속도로'를 완비해 그에 대한 수익을 지역주민에게 돌리겠다는 '햇빛 연금', 즉 '에너지 소득' 공약은 또 어떤가.[각주:7] 2025년 이재명의 사회경제적 세계관은 국가를 주식회사로, 국민을 주주로 여기는 세계관이다. '신자유주의'라고 말하기까진 어렵지만, 분명히 공공성에 대한 근원적 고민은 없다.

 

국민 모두가 주주로서 배당을 받는 세계관이 복지국가의 세계관인가? 그렇지 않다. 복지국가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공공성과 연대라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과제다. 결국 한국에서의 복지국가 담론이 재구성되고 다시 사회적 논의의 초점에 오르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세력 스스로가 통화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경제관을 완전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단순히 '신자유주의 극복'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정 수준의 확장재정을 펴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동력을 만들 근본적 변화의 방식이 복지국가 건설임을, 즉 '복지국가를 재인식'하는 것에서부터 한국 복지국가 담론의 재구성은 시작된다.

 

오늘날 북유럽의 시민 저항운동과 좌파정당이 위치성과 당파를 초월해 복지국가의 재구성이라는 하나의 테마 속에 맞물려지듯, 한국에서도 복지국가의 재인식과 담론 혁신을 위해서는 공공성과 연대의 이념을 중심으로 뭉쳐진 강력한 진보정당 - 혹은 단일한 좌파 연합체 - 의 재건과 공공성의 가치를 설파할 사회운동의 역할이 '투트랙'으로 펼쳐져야만 한다.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그리고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의 제21대 대선 출마는 그 가능성의 영역을 조금씩이지만 열어 가고 있다. 차이를 넘어 공공성과 연대의 가치로 뭉친 강력한 진지의 건설, 그것이 한국형 복지국가 재구성의 시작이 될 것이다.


동백림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국제정세 오타쿠.

현재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도모의 국제면에 정기적으로 글을 연재하는 중이다.


각주

  1.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274108/at-risk-poverty-rate-sweden-country-birth/ [본문으로]
  2.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530970/sweden-social-welfare-recipients-by-origin-and-household-type/ [본문으로]
  3. https://ec.europa.eu/eurostat/databrowser/view/lfsa_erganedm__custom_16501997/default/table?lang=en&page=time:2021 [본문으로]
  4. (스웨덴어) 누시 다드고스타(V): 국가는 셸레프테오 배터리 공장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https://www.svt.se/nyheter/lokalt/vasterbotten/nooshi-dadgostar-v-staten-borde-ga-in-som-delagare-i-batterifabriken-i-skelleftea?fbclid=IwY2xjawKEZqdleHRuA2FlbQIxMQBicmlkETFROEFrTUJHV0l3QjJQbXRwAR6NI-kClLDlmaSNVXtOR1jPINK6500q1hfnBDJumYHK0VvLliuNstrWZ4wEEA_aem_b1Qer-Rq7Iw5R6qWBGgrDg [본문으로]
  5. Social Democrats: Double Sweden's three-month deadline for laid-off Northvolt workers https://www.thelocal.se/20250408/social-democrats-double-swedens-three-month-deadline-for-laid-off-northvolt-workers?utm_source=facebook&utm_medium=facebook&tpcc=facebook&fbclid=IwY2xjawKIaVxleHRuA2FlbQIxMQBicmlkETEyYTZQWE9tYjNJd09ncG5CAR7ptcybC2ldsDZCXS0fhNvvoXewrHQZHhAaiIHgp8ieVwXUzpV5b8f9dmIl1g_aem_nLdiWL1kInj2qVZBmh3wAw [본문으로]
  6. (스웨덴어) 사회민주당: 국가가 노스볼트를 구해야 한다 https://samnytt.se/socialdemokraterna-staten-ska-radda-northvolt?fbclid=IwY2xjawKEZjdleHRuA2FlbQIxMQBicmlkETFROEFrTUJHV0l3QjJQbXRwAR4cad7xdt-JZmBZY1jcFdchDdoai5GrSUrX7HE7VDY7Fsahg7fcauQFhdobCg_aem_CxymAgoOE3wx1LOK50EQZg [본문으로]
  7. 이재명 "햇빛연금으로 지역주민 소득 확보…국가정책 대대적 시행해야" https://dailian.co.kr/news/view/149390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