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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 편집국/편집장의 말

편집장의 말: 그 모든 두려움을 뚫고, 사표(史票)를 던지자

by Domoleft 2025. 5. 16.

편집장의 말 (2025년 5월호)

그 모든 두려움을 뚫고, 사표(史票)를 던지자

 

웹진 <도모>의 5월호는 본래 지난 5월 9일(금)에 여러분께 보내드리고자 했으나, 필진들의 사정으로 인해 발간일자가 16일(금)으로 일주일 가량 미뤄졌습니다. 매월 도모를 기다려 주시는 독자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도모에 기고하고 또한 도모를 편집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에 종사하고 있는 현업 활동가들이라는 점과, 대선 정국을 맞아 모두가 바빠진 지금의 상황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5월호 '편집장의 말'은 제21대 대선을 바라보는 유권자이자 진보정당 활동가로서 칼럼을 한 편 써 보았습니다.


어느새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번 선거는 투표함을 까기도 전에 이미 승부의 결과가 명확해 보이는 오랜만의 선거다. 물론 40여 년만에 선포된 '비상계엄'과 뒤이은 내란 사태의 직후에 치러지는 선거에서 구 여당과 제1야당이 접전을 펼친다면 그 사회는 도무지 상식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사회일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시대가 곧 올 것은 누구라도 예측 가능한 미래다. 아니, 미래가 아닌 현재다. '압도적 승리'와 '내란청산'은 투표소가 열리기도 전부터 이미 정치를 지배하는 슬로건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데자뷰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2017년 헌정 사상 첫 번째 대통령 탄핵이었던 박근혜 파면 이후 치러진 조기대선을 지배했던 것은 '적폐청산'이라는 슬로건이었다. 그 당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정의당은 다음 선거에서 찍으셔도 된다"며 "압도적 승리를 통한 강력한 적폐청산이 지금은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적폐청산이 '내란청산'으로 바뀌었고 민주노동당으로 바뀐 정의당의 세력이 극히 미약해졌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모든 전개와 모든 요지가 지금과 완전히 동일하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2위 홍준표 후보와 17% 이상의 격차를 벌이며 '압도적 승리'에 성공했다. 물론 일부 지지자들은 이 역시 충분히 압도적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19대 대선의 사실상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였던 심상정 후보는 선거 초반의 여론조사보다 한참 낮아진 6.17%의 득표율로 유승민 후보에 밀린 5위를 기록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민주당은 과연 무엇을 '청산'했는가? 당시 압도적으로 승리했던 민주당이 과연 무엇을 청산했는지 정말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민주당의 모든 정치행보를 다 기억하는 열혈 지지자 정도일 것이다. 반노동·신자유주의에 대한 청산도 - 문재인 정부는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기업'을 끝끝내 삭제했다 - 뿌리 깊은 차별에 대한 청산도 - 문재인과 그 지지자들은 차별금지법에 대해 "나중에"로 일관했고 물론 그것은 오늘의 이재명도 그러하다 - 비민주적 정치제도에 대한 청산도 -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통과 후 더불어민주당과 당시 미래통합당은 사상 최초의 비례위성정당을 만들어냈고, 위성정당 방지법은 끝끝내 통과되지 않았다. 결선투표제 도입을 전제한 개헌은 어느 순간 유아무야되었다 - 없었다. "모든 것을 청산하겠다"던 민주당의 태도는 어느 순간 "이미 우리가 역사적으로 승리했기에 적폐는 청산되었다"는 자아도취로 전유되었다.


승리에 대한 도취는 결국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 같았던 정세에서조차 패배를 불러온다. 그러나 그와 관계없이 민주당의 선거전략은 일관적이다. 승리가 가능해 보이는 정세에서는 '내란·극우·적폐청산을 위해서는 압도적 승리가 절박하다'며 자신의 것이 아닌 표를 가져오려 한다. 승리가 불확실한 정세에서는 '내란·극우·적폐세력 저지가 절박하다'며 모든 표를 끌어오려 한다. 그 어느 때에도 절박하지 않을 때가 없는 이들의 영속적 절박함에는 과연 탄복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이들의 당명이 '절박하당'이 아닌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어쩌면 이들이 아무것도 '청산'하지 않는 것은 그 절박함을 항상 스스로 유지하기 위한 자기검열이 아닐까?

 

물론 당연히, 정치를 하는 주체로서 진정성을 가진 절박함을 나쁜 태도라 볼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들의 '압도적 승리'에 대한 절박함이 다른 모든 이들의 절박함을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압도적 승리와 내란청산의 절박함이 너무 크기에, 나의 압도적 승리에서 단 한 개의 표라도 갉아먹을 것 같은 다른 모든 절박함은 열혈 지지자들에 의해 먼지 쌓인 골방 어딘가로 다시 치워진다. 그래서 여성은 지워지고, 성소수자도 지워지고, 노동자도 또 한 번 지워지고 만다. 지워진 그들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한때 '적폐세력'으로 칭해졌으나 지금은 이재명을 만나 허리를 조아리며 악수를 청하는 재벌 총수요, '페미를 배제해야 선거에 이긴다'고 주장하는 인플루언서이며, 용산참사를 '테러'로 칭하며 철거민들을 벌레 취급하던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업(業)으로서의 정치를 지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투표용지에서 투표할 정당과 후보를 고르는 유권자의 입장에서도 진보정당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보정치의 정량적 미약함에서 오는 정치적 효능감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만에 하나라도 내 소신을 지킨 선택으로 인해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세력이 다시 집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우리 정치를 지배한다. 물론 그 선택이 더욱 어려워진 것에 있어 큰 부분이 진보정당 자신의 탓임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효능감을 주지 못하는 정치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을 뚫고서까지 여전히 진보정치를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결코 '민주당이 싫어서 국민의힘에 투표하는' 혹은 '국민의힘이 싫어서 민주당에 투표하는' 정도의 나이브한 이유가 아니다. 정치를 일종의 게임처럼 바라보며 그렇게 투표하는 사람들과 달리,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정치를 내가 뽑아 놓은 1번 캐릭터와 남이 뽑아 놓은 2번 캐릭터가 벌이는 오토배틀러(자동전투) 게임 정도로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십 미터 철탑에 올라가 농성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삶을 돌아봐 주는 유일한 정치가 진보정치이기 때문에 진보정당에 투표한다. '일반'이 아닌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정치가 진보정치이기 때문에 진보정당에 투표한다. 심지어 일견 '차악론'의 변주처럼 보이는 '양당이 모두 싫어서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표 역시,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양당의 적대적 공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명한 자기 나름의 정치적 대안을 고른다는 점에서 양당에 대한 투표나 허경영류에게 투표하는 정치혐오와는 분명히 질적으로 다른 투표다. 그렇기에 민주당이 아무리 절박함을 호소하더라도 진보정당에 던져지는 표들은 양적으로 동일한 가치의 다른 모든 표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큰 절박함을 담고 있다. '압도적 승리의 절박함'과 '나의 존재론적 절박함'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성큼 다가온 이재명 대통령의 시대를 그 누구도 거부할 수는 없다. 분명한 개신교 극우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 김문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혐오의 정체성 정치를 동시 구사하는 서구 극우의 전략을 그대로 가져온 이준석보다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이재명이 상대적으로 - 혹은 절대적으로도 - 낫다는 것은 부정 불가능한 사실이다. 설령 이재명이 약자와 소수자들이 치워진 자리에 친자본 우익 인사들을 채워넣고 있고 3년 전 자신의 (상대적으로) 개혁적이었던 공약들을 전부 철회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재명의 '압도적 승리'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것처럼 이야기하면 곤란하다. 몇 달 전 이재명의 '중도보수' 선언에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 등 일부 민주당 인사는 반발했지만, 이재명의 그 말은 분명한 사실을 담고 있다. 그 스스로가 선거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축 위에서 굴러가는 지금의 세상을 유지할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세상은 윤석열이 작년 12월 3일 만들고자 했던 세상보다야 민주적이겠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더군다나 '압도적 승리'에 도취한 민주당 덕에 또 하나의 윤석열이 등장할 위험성은 이미 역사가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내란세력을 찍고 싶지 않지만 세상을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이재명에게 더해지는 하나의 표보다 권영국을 선택해 사회대전환을 외치는 독자적 진보정치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표가 오히려 훨씬 유효한 한 표가 아닐까?

 

사표론(死票論)의 망령이 어디에선가 다시 올라온다. 너의 표로 대통령을 만들 수 없다면 그 표는 '죽는 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죽는 것'인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가 이미 투표용지에 있음에도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사회란, 그것이야말로 결국 민주주의가 죽어 버린 사회이지 않는가? 민주주의에 '죽는 표'란 없다. 각 정치세력들의 사이에는 역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의 치열한 싸움이 있을 뿐이고, 민주주의 속의 시민들에게는 분명히 역사를 바꿀 수 있는 1인분의 표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진보정치에 던져지는 그 모든 표 하나하나는 결코 사표(死)가 아닌 사표(史)다.

 

우리 안의 그 모든 두려움을 뚫고, 이제는 당당히 사표(史票)를 던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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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모> 6월호는 제21대 대선 관련 일정으로 인해 본래 발간일자로부터 약 1주일 미뤄진 6월 9일(월)에 발간 예정입니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