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진보정치의 얼굴 뒤, 숨겨진 이름들: 진보 3당 디자이너 인터뷰 (1부)

by Domoleft 2025. 8. 8.

[인터뷰] 진보정치의 얼굴 뒤, 숨겨진 이름들: 진보 3당 디자이너 인터뷰 (1부)

포스터, 현수막, 웹자보.. 진보정치를 대중적으로 대표하는 얼굴과 다름없는 수많은 홍보물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보정당 디자이너들의 땀과 노력은 곧잘 잊혀지곤 한다. 진보정당의 디자이너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이들에게 진보정치와 디자인이란 어떤 의미인가? <도모>가 진보 3당(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의 디자이너들을 함께 인터뷰했다.


'언젠가 한번 진보정당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꽤 예전부터, 아마 <도모>를 만들기 전부터 해 왔던 것 같다. 그건 아마 필자 스스로가 디자인 전공자(크게 전공을 살려서 일하고 있지는 않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진보정치의 본령(本領)이 노동자, 소수자들을 사회의 주체로 나서게끔 하는 것이라면 그 진보정치의 뒤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땀을 비추는 것 역시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에게 가장 많이 보여지는 진보정당의 얼굴인 홍보물 뒤에서 직업인이자 활동가로 묵묵히 일하는 진보정당의 디자이너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진보정당의 디자인이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난 7월, <도모>는 합정에 위치한 녹색당사 회의실을 잠시 빌려 진보 3당(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의 디자이너들을 함께 만났다. 인터뷰는 분량으로 인해 1부, 2부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부)


※ 본 기사에 출연한 인터뷰이들은 인터뷰 진행 당시(2025년 7월 초) 기준으로 진보 3당(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의 현직 디자이너들이었음을 밝힙니다.

합정 녹색당사에서 인텨뷰를 진행 중인 진보 3당(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디자이너들


-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사루(노동당): 안녕하세요. 노동당 선전홍보국장이자 성소수자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선전홍보국장이라는 직함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선전국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홍보국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서, 절충해서 선전홍보국장으로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기술적으로는(웃음) 아직 대학생이고요. 사루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 R(녹색당): 반갑습니다. 사실 이렇게 해도 알 사람들은 이미 누군지 다 알 것 같지만(웃음) 곧 병역을 앞두고 있는 관계로 익명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녹색당 전국사무처에서 홍보팀장을 하고 있습니다. 팀이라 해도 인원은 저밖에 없지만.. 여기 팀원 있는 사람 있나요? (일동: 없을걸요..)

 

- 김지현(정의당): 안녕하세요. 민주노동당(이 인터뷰를 진행할 당시 정의당의 당명은 아직까지 민주노동당이었다: 편집자 주) 홍보미디어팀 차장 김지현이라고 합니다. 4년차 정의당-녹색정의당-민주노동당 당원이고요, 민주노동당 마포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겸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 이 인터뷰를 하자고 한 건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선거가 끝나고서 이제야 하게 됐네요. 세 당의 디자이너분들은 그 전부터 서로 면식이 있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김지현(정의당): 님이 소개시켜 줬잖아요 (일동 웃음)

 

R(녹색당)저와 노동당 사루 동지는 원래 '체제전환을 위한 청년시국회의'라는 일종의 청년학생운동 연대체에서 처음 만났었고요. 그 때 아마 편집장님도 계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사루(노동당)제가 이제 노동당으로 당적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옮기기 전에(웃음) 원래 당원 수 세 자릿수인 작은 당(법외정당이었던 사회변혁노동자당을 의미, 현재는 노동당으로 합당한 상태다: 편집자 주)에 있었는데, 이제 그 당 당원 중에 R 동지와 친한 사람이 좀 많아서 어찌저찌하다가 친해지게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김지현 동지랑은 작년 총선 즈음해서 R 동지가 진보 3당 디자이너들이 모여서 술이나 한번 하자고 해서 처음 모였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편집장님도 같이 알게 되었었죠?

노동당 선전홍보국장을 맡고 있는 사루

 

김지현(정의당): 원래 우리 민주노동당(정의당) 같은 경우에는 여러 명이 홍보당직을 맡고 있다가 당이 어려워지면서 한 명만을 뽑게 됐는데 그게 제가 된 거죠. 다른 두 당의 당직자는 1인 홍보담당으로서 경험해 온 것들이 더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또 이 기회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친해져두면 어떨까라는 편집장님의 제안에 응해서 소개를 받은 거죠. 그런데 그 직후에 계엄이 터지고 세 당이 공조를 본격화하기 시작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네요.

 

R(녹색당): 저는 처음 두 당 디자이너분들을 소개받을 때 저희끼리 사진 '풀단(사진공동취재단을 이르는 말: 편집자 주)'을 만들어서 공유를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3당의 홍보담당자가 각각 사진을 찍고 하는데 어차피 3당이 공조를 할 때는 누가 찍든 거의 똑같은 사진이 나올 테니까, 예를 들어 각자 휴가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기자회견 같은 데 못 가게 되면 서로한테 사진을 좀 부탁하면 좋으니까요. 그래서 원래 저랑 김지현 동지와 모두 친분이 있던 편집장님한테 제가 부탁을 드려서 같이 있는 텔레그램 소통방을 하나 만들자 했던 거죠. 그런데 본격적으로 진짜 풀단이 된 건 계엄 이후 광장에 들어가면서였어요. 광장이 매 주, 매일매일 열릴 때는 모든 당직자들이 비상 근무 체제였잖아요. 그래서 이때부터는 당번을 정해서 서로 못 갈 때 사진을 찍고 공유해 주자 한 거죠.

광장에 함께한 진보정당 디자이너들

 

- 확실히 서로 공조할 일이 많아져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지난 광장에서의 세바넷(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 활동부터 해서 파면 이후 조기대선 국면에서는 사회대전환 대선 연대회의로 3당이 선거를 함께 치르기까지 했는데요. 세 분도 이번 대선에서 직간접적으로 기호 5번 권영국 후보의 홍보 일을 함께 했을 것 같습니다. 각자 선거 소회를 짧게 이야기하자면 어떠셨는지요?

 

김지현(정의당): 저희 당 후보였으니까 제가 먼저 할까요? 일단 정말 힘들었고(웃음) 반농반진이고요. 즐거웠지만 한계가 많이 느껴지는 선거였다는 느낌? 저 같은 경우에는 대선은 고사하고 선거 자체를 중앙당직자로서 치러 보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뭘 어디서부터 준비해야 되고 나에게 떨어지는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제 위치가 좀 애매했던 게 상근으로 실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직함이 없었어요. 소속상으로는 홍보미디어본부의 본부원 정도였지만 공식적으로 부여된 직함은 없었죠. 그래서 홍보 관련 일을 할 때 권한을 주장하기가 어려웠어요. 업무 소통을 할 때 제가 의견을 제시하거나 해도 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고 관철해내기가 쉽지 않았죠. 그 부분이 심리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선거라는 건 항상 일하는 이에게 도파민을 주는 이벤트이기 때문에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 제가 만든 현수막이나 홍보물들이 전국적으로 다 보인다는 게 참 즐거운 일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물론 진보정당이 워낙 어려운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전국정당의 선거에서 상근 홍보인력이 혼자라는 건 제게는 벅찬 일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지만 조금 더 홍보인력을 증원하고 자원을 투여했으면 더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던 선거였어요. 기분좋은 일도 많았고 분명 즐거웠지만 확실하게 힘든 것도 명확했던 선거였다, 그렇게 얘기드리고 싶습니다.

정의당(민주노동당) 홍보차장으로 일한 김지현

 

사루(노동당): 저는 사실 김지현 동지한테 죄송하기는 하지만 대선 때는 생각보다는 덜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이번에 공동 선본에 제가 선전 담당으로 파견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일하기 싫어서 안 간 건 아니고, 당 자체적으로도 업무가 있는 상황에서 도저히 차출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어서 선본에 실무자로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어차피 파견도 안 간다면 겸사겸사해서 졸업 준비를 좀 해보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성소수자 선대위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파견을 나가는 바람에 졸업은 이번에도 물건너간 것 같고요(웃음).

 

당적으로 놓고 봤을 때는 대선을 같이 치르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해프닝 내지 잡음들이 좀 있었잖아요. 사실 그래서 저희 당원들 입장에서도 이 대선에 공동대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함께하는 방식까지 그렇게 큰 동의를 얻고 출발하지는 못했는데, 막상 본선이 시작하니까 노동당 당원 동지들이 유세를 정말 열심히 해 주시더라고요. 당원들이 나갔는데 당직자가 안 나갈 수는 없으니(웃음) 저도 선거운동에 많이 결합하기도 했고요. 이번 선거가 공동대응으로 규모 있게 치러 본 첫 선거이기도 했고, 제가 상근자로서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치르는 첫 선거이기도 했어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선거들 때보다는 안정감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정의당, 녹색당, 많은 단체들과 소통하는 과정들이 제 개인적으로든 당적으로든 좋은 경험으로 남은 것 같고요. 다만 이 경험을 살려서 앞으로 더 끈끈하게 연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상호 간에 함께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녹색당): 아무래도 녹색당은 사회대전환 대선 연대회의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하되 독자적 진보 후보를 지원하고 지지하기로 결정을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 파견을 가거나 하는 건 없었는데요, 다만 이것이 우리 모두의 선거라는 생각은 당원들이든 당직자들에게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선본에 파견을 안 나가 있는 상황에서 이 자리에서 녹색당 홍보팀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을 했을 때, 특히 마지막 일주일은 일상적 당 업무들이 아니라 권영국 후보를 지지하는 홍보물 제작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특히 차별금지법 제정을 유일하게 약속한 후보 권영국을 지지한다는 홍보물이라던지, 후보별 비동의강간죄 수용 여부나 여성 정책의 차이들을 정리해서 홍보물을 만들고 했었죠.

 

저는 이전에 당직을 하면서 선거를 두 번 치러 봤었는데, 경험상 지금 이런 게 좀 나가면 좋겠다 싶은 게 있잖아요. 근데 아무래도 민주노동당(정의당) 안에서도 사람들이 워낙 바쁘고 다들 정신이 없는 상황을 아니까, 녹색당 홍보팀장으로서 사전투표 안내 홍보물이나 정책 비교 같이 이런 때 나가면 좋겠다 싶은 것들을 제 자리에서 최대한 만들면서 권영국 후보를 알려 보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제21대 대선 당시 녹색당의 권영국 후보 지지 홍보물. 출처: 녹색당

 

- 모두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해 주신 여러분의 노동 덕택에 독자적 진보정당들이 선거를 함께 치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인터뷰니까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볼까 싶은데요. 사실 저는 디자인과 출신임에도 디자인은 거의 안 하고 있는데(웃음) 여기 계신 세 분은 반대로 원래 디자인과 출신이 아닌 걸로 알고 있거든요. 본인은 원래 어떤 전공이셨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진보정당의 디자인 일을 하게 되셨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루(노동당)제가 알기로는 여기 교육 쪽 전공이 과반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원래 초등교육 전공이고 세부적으로는 음악교육 전공이었어요. 뭐 굳이 따지면 음악이나 디자인이나 다 예체능으로 분류되긴 하지만(웃음) 제가 그림, 디자인 이런 거랑은 정말 담을 쌓은 인생을 살아왔거든요. 제가 그림을 못 그려요. 잘 못 그린다가 아니라 진짜 하나도 못 그리는데 그건 디자인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렇고요. (편집장: 사실 디자인 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림을 잘 못 그리기는 해요)

 

아무튼 그렇게 살아 왔는데, 예전에 당 학생위원회에서 청년학생 당원들을 대상으로 2시간짜리 일러스트레이터 입문 교육을 간단하게 좀 진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학내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에 재생산의 위기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많이 들어올까 하다가 포스터가 예쁘면 좀 많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어떻게든 좀 예쁘게 만들어 보겠다고 디자인을 하다가, 제가 그때 충남도당 소속이었는데 당시 충남도당 위원장이 지금 당대표인 이백윤 동지였거든요. 도당 모임에서 동아리 포스터를 만들고 있다가 제가 일러스트레이터를 쓸 줄 안다는 걸 이백윤 위원장에게 걸렸고(웃음) 그래서 충남도당 선전물도 만들다가 중앙당의 정책위의장님한테 또 걸렸고(웃음).

 

그래서 2022년 대선쯤부터는 충남에 박혀 있으면서 중앙 선전물도 만들고 하다가 이백윤 동지가 대표로 영전(웃음)을 하시면서 중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기 전에 사실 노동당에는 홍보담당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페이스북은 당원들이 뭘 하고 있다 정도를 올리는 용도였는데, 올라와서 보니까 우리도 이제 홍보를 해야 되겠다 싶은 거죠. 선전 담당자를 좀 써야겠는데, 누구를 쓸까 하다가 일러스트레이터 사용이 적발된(웃음) 인연으로 제가 채용이 되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처음 중앙에서 홍보담당자로 일을 했던 것은 작년 총선이었고요.

제22대 총선 당시 노동당의 홍보물. 출처: 노동당

 

R(녹색당): 저는 지구과학교육과였어요. 3명 중에 교육 계열이 과반인 게 맞네요. 제가 사실 대학을 5년 다니면서 10학점(!)을 땄어요. 그래서 이건 구조적 문제다(웃음). 농담이고요.. 아무튼 전공과는 좀 담을 쌓았고, 디자인 툴 같은 건 전문적으로 다룬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다뤄 온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 <명탐정 코난>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퍼스트 코난'이라는 네이버 코난 팬카페에서 활동을 했거든요. 그 카페가 매달 배너 공모를 해서 선정된 걸 카페 대문에 올리곤 했는데, 너무 거기에 뽑혀서 걸리고 싶었던 거죠.

 

아무튼 그런 것 때문에 꽤 어릴 적부터 디자인 툴들을 조금씩 만져 보다가, 대학에 입학하고 학생운동을 할 때도 자연스럽게 선전물을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 거죠. 이후에도 학내외에서 여러 선전물을 제작하는 역할을 하다가 어쩌다가 보니 이게 직업이 된 느낌인 것 같아요. 제가 전업활동가를 한 지가 이제 4년차인데, 지나왔던 곳들에서 거의 전부 디자인 일을 했거든요. 학생운동도 그렇지만 모 노조에서도 잠시 교육선전차장을 했었고, 계속 그런 느낌으로 왔던 것 같아요. 녹색당도 당원이 된 지 지금 8년차인데,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하니까 자연스럽게 홍보담당자를 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반상근으로 홍보팀장을 했다가 지금 정규직으로 채용된 지 2년 3개월 정도가 되었습니다.

 

김지현(정의당): 저는 대학교 때부터라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다들 이렇게 이야기해 버리면(웃음) 사실 초등학교 때 오타쿠였거든요. 저도 비슷하게 초등학생 때 네이버에서 가장 큰 <개구리 중사 케로로> 카페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데 관심이 많았어요. 미술학원을 다니기도 했지만 타블렛 하나 사서 이것저것 끼적거리는 걸 되게 좋아했고 노트에다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그랬거든요. 뭔가 그리고 만드는 것에 대한 재미를 그때 한번 맛본 거죠.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에 들어갔는데, 학교 생활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저는 영어 통번역학을 전공했는데 놀랍게도 전공만 빼고 다 재미있는 거죠. 보컬 트레이닝 같은 것도 받고, 놀러도 열심히 다녔어요. 그러면서 동아리도 했는데 이상하게 포스터나 홍보물을 만드는 일이 자꾸 저한테 오는 거예요. 뭔가 대단히 내가 이걸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그냥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처음에는 포토샵도 다룰 줄 몰라서 다 PPT로 만들다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웃음)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가르치는 학원을 다녔었거든요. 원래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디지털 드로잉도 같이 공부했는데, 어느 순간 디지털 드로잉은 다 어디론가 가 버리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만 머릿속에 남은 거죠. 학교 입학 때부터 졸업하는 순간까지 계속 학생회를 했었는데 그때마다 왠지 모르게 홍보팀장직을 맡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 일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저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전공과 담을 쌓은 상태였는데 그러면 이제 뭘 먹고 살아야 되나 하다가 차라리 이걸 직업으로 가져가 보자는 생각에 졸업을 하고 나서 웹 에이전시에 취직을 했습니다.

좌측부터: 녹색당 홍보팀장 R / 정의당(민주노동당) 전 홍보차장 김지현

 

그렇게 취업을 처음 했는데, 회사가 너무 별로였어요. 연봉이나 처우가 이래도 되나 하고 있던 차에 그 전부터 당원으로 있던 정의당에서 홍보담당자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때만 하더라도 그냥 충원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가 보니까 그냥 저뿐이더라고요(웃음). 이런저런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자리이기는 했지만 몸으로 부딪혀 가면서 하나하나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인쇄도 하고 웹 디자인이나 코딩도 하고, 촬영도 하고 라이브도 하고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제 역량을 반강제적으로 올려 준 시간이 아니었나 싶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R(녹색당): 말씀하신 대로 이 자리(진보정당 홍보담당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실력은 정말 많이 느는 것 같아요. 영상 중계도 해야 하고, 자료집 등을 만들려면 인디자인도 해야 하고.. 어도비 프로그램 중에 대표적인 것들은 거의 다 다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좋습니다. 그런데 그냥 디자이너보다도 '진보정당의 디자이너', 그리고 그 진보정당 중에서도 각자 자신이 몸담은 정당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건 또 약간 느낌이 다른 것 같은데요. 어쩌다가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셨는지, 그리고 왜 지금 있는 당을 선택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사루(노동당): 일단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이 평택이고,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쌍용자동차 파업이 있었어요. 평택 공단지대가 연결되어 있다 보니까 같은 반 친구들 부모님 중에서 꼭 쌍용차에 다니는 건 아니더라도 아마 같은 공단지대에서 공장을 다니시는 분들이 있었을 거고, 저희 동네 옆에 있는 공장에 헬리콥터가 뜨고 경찰특공대가 들어가고 하니까 동네 분위기가 워낙 흉흉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 때가 쌍용차가 외국 자본에 팔리고, 평택 제조업이 크게 타격을 맞았던 시대였어서 그 때의 동네 분위기가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일이기는 하지만요.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전교조 선생님이셨던 것 같은데(웃음) 역사 선생님이 독서감상문 수행평가로 <전태일 평전>을 내신 거예요. 그래서 밤에 읽으면서 막 펑펑 울고. 그 때부터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혁명이니 사회주의니 이런 거창한 것들을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고 평범한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고. 저 스스로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요. 이제 그러려면 운동을 해야겠다 싶어서 운동을 하게 된 거였고, 또 어쨌든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정당 활동까지 하게 된 거죠.

 

정당을 선택할 때는, 예를 들면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당시 녹색당은 제가 생각하는 '진보정당'이랑은 약간 분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보당(당시 민중당) 같은 경우에는 제가 민족이라는 이야기나 담론에 좀 동의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고요. 민족주의적 정서보다는 나와 또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연결될 수 있는 운동들에 좀 더 마음이 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의당에 대해서는 그 때 실망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쯤 저에게 보여진 정의당의 모습은 민주당의 연립여당처럼 느껴졌어서 그에 대한 실망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 당시 가장 진보정당답고 좌파적인 정당이라고 느껴졌던 사회변혁노동자당이라는 정당에 입당했고, 이후 노동당으로의 합당을 거쳐 노동당 당원이 되었습니다.

좌측부터: 2009년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 / 2024년 춘천퀴어문화축제에서 발언하는 사루

 

- R(녹색당): 저는 사실 제가 갈 만하다고 느낀 정당이 녹색당밖에 없었어요. 여러 진보정당 중에서 우리가 꿈꾸는 대안적 관계맺음을 이미 당원들끼리 실천하고 있는, 그런 문화가 있는 당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 개인적으로도 게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퀴어 정당'이라는 말에 엄청 가슴이 설렜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성소수자와 연대한다" 같은 말들을 쓸 때 "우리는 퀴어 정당인데 왜? 우리 퀴어 정당인데 뭐?"라고 하는. 게이로서 여기에 가슴이 설레었었죠.

 

그리고 또 하나 중요했던 건 기후위기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말해 온 정당이라는 것. 사실 2019년까지만 해도 기후 집회를 하면 구호가 "기후위기 직시하라"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러니까 불과 5~6년 전만 해도 기후위기에 대한 '진실 공방'을 해야 했던 시기였고 기후위기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들이 있었잖아요. 물론 녹색당에서만 기후위기 이야기를 해 온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여기 있는 사람들은 2012년 창당 당시부터 그 이야기를 해 온 사람들이잖아요. 누구보다 탈핵이나 기후 의제에 열성적이었던 것,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저는 처음부터 녹색당이 제일 강하게 끌렸던 것 같네요.

 

김지현(정의당):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제가 제일 우익인데요(웃음). 저는 사실 정당활동을 민주당 당원으로 시작했거든요. 저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소위 말하는 '정덕(정치덕후)'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진짜 엄청난 노무현 지지자셨어요. 저희 아버지가 진해 사람인데, 영남 사람으로서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건 그 세대와 환경을 생각해 보면 그 나름의 문법으로는 진보적 성향의 분이신 거거든요. 정치에 관심이 있는 분이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서도 뉴스로 정치 이슈를 쉽게 접했고, 사고관도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정립을 하기 시작했어요. 또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당연히 민주당이라는 정당에 심리적인 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민주당 당원으로 가입을 한 거죠.

그 때는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퀴어 이슈에 대해서도 관심도가 높아지고, 또 그런 의제에 대해 공부하거나 하는 분위기가 대학 내에 조금씩 자리잡던 때였어요. 저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런 상황에서 입당을 하자마자 대선을 치렀는데 당시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을 했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굉장히 황당한 경험이었어요. 한편으로는 민주당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정의당 청년 활동가들과 교류를 할 기회들이 있었는데, (성소수자 의제에 적극적인) 진보정당과 교류가 잦다 보니까 입당하자마자 민주당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던 거죠(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당에서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 때는 있었고, 그래서 당에서 저런 소리가 못 나오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뜻이 맞는 당원들과 민주당 성소수자위원회 준비모임을 만들었어요.

2021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더불어민주당 퀴어퍼레이드 참여단

 

공식 조직으로 성소수자위원회를 출범시키는 걸 최종 목표로 하면서 퀴어퍼레이드 참여단을 만들고 깃발을 올리는 등 이것저것 기획은 했었는데, 대단히 부족한 점들이 많았기에 당 안팎으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조직이 됐습니다. 성소수자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기만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던 거고, 당 내에서는 압박이 엄청 들어왔죠. 우리가 '사고'를 계속 치니까(웃음) 관련한 기사도 몇 번 나오니, 당 고위직을 통해서 활동을 자제해달라는 요청도 받고는 했어요.

 

그런 실망을 거듭하던 차에 이제 안희정·오거돈·박원순 사태가 연이어서 터졌고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하게 된 거죠. 당시 민주당이 당규를 뒤집고, 특히 당원총투표로 당원들에게 책임을 돌리면서까지 공천하는 것에 너무 실망해서 더 이상 내가 이 당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민주당을 나왔는데 그 와중에 또 익숙한 정당이 정의당이었던 거죠. 청년 활동가들과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입당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고요. 마음을 다잡고 진보정당에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어 보자는 생각으로 2021년 7월 23일 노회찬 전 대표 3주기에 정의당에 입당했습니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아마추어 디자이너 일도 가끔 한다.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만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