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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민주노총 30주년, 양경규가 말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어제와 오늘 (1부)

by Domoleft 2025. 11. 13.

<도모 2025년 11월호 민주노총 30주년 특집>

[인터뷰] 민주노총 30주년, 양경규가 말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어제와 오늘 (1부)

민주노총 30주년, 늘 민주노조운동의 숙원이자 지상과제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어디에서 시작했고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초대 부대표를 맡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헌신해 온 양경규 전 정의당 국회의원이 바라보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어제와 오늘을 <도모> 인터뷰에 싣는다.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에서부터 독자적 진보정당의 (현재로써는) 마지막 국회의원까지. 현대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산 증인을 찾자면 양경규 전 의원은 양쪽 모두에서 첫 손가락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된 노동정치와 진보정당운동은 지난 사반세기의 세월 동안 수없는 좌초와 표류를 거쳐 왔다. 민주노총 30주년을 맞은 지금, 양경규가 회고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앞으로의 전망은 무엇일까?

<도모>와 인터뷰하는 양경규 전 의원

 

- 먼저 <도모> 독자들을 위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간단하게 안 할 건데요. (웃음) 1987년에 대한상공회의소 노동조합을 시작하고 그 위원장을 거쳐서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전문노련) 위원장,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공연맹, 현 공공운수노조의 전신: 편집자 주) 위원장, 민주노총 부위원장, 또 민주노총 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왔고 21대 정의당 국회의원을 잠시 했었던 양경규입니다.

 

소개를 하면서 조금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저는 1987년 이후에 노동운동을 한 사람치고는 좀 다양한 경험을 거친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노동운동을 하면 그 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예를 들면 민주노총의 대표로 대통령 자문위원회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을 하면서 권력, 자본과의 대화 테이블에 앉아 본 적이 있었고 그건 큰 경험이었어요. 정치에 있어서도 국회의원도 했지만 노동정치연대 대표, 전환 대표를 거치면서 사회운동단체로서의 역할도 경험해 봤죠. 홍콩 WTO 반대 투쟁을 하면서 홍콩에서 수감되고 하며 국제연대나 국제사회 전반에 대한 고민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교육센터의 센터장으로서 교육사업을 하면서 노동교육 전반에 대한 고민도 해 왔고.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2005년 홍콩 WTO 반대 원정 투쟁에 함께한 양경규 당시 공공연맹 위원장

 

-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 모두에서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해 오셨습니다. <포레스트 검프> 같기도 합니다. 제5공화국 시절인 198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해 오셨습니다. 그 당시 노동운동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원래 혁명이라는 게 "나는 오늘부터 혁명해야겠다"고 해서 하는 사람은 잘 없죠. 친구 따라갔다가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듯이 특별한 계기라고 하는 것이 꼭 존재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자생적인 노동자로서의 자각이 컸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83년에 상공회의소에 입사하고 직장에서 노동자로서 생활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소외를 많이 느끼게 되죠. 그런 와중에 1987년 6월 항쟁이 나오고, 789 노동자대투쟁이 전면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노동자로서의 자각이 외화되기 시작하고 그런 걸 통해서 삶을 바꿔 봐야 되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작게는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다 하는, 크게 보면 직장 안에서의 민주주의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면서 직장을 바꾸는 문제로부터 세상을 바꾸는 문제로 점차 확장되어 나갔다고 봅니다. 특히 누구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거나 이런 것보다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저보다 먼저 했던 사람들의 노력과 고민, 열정들이 또 그렇게 후배들을 만들어냈고 그 사람들이 또 세상을 바꾸는 일들을 해 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군요.

30대 시절의 양경규

 

- 이후 공공연맹 위원장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이어가다가, 준비위원회 단계부터 민주노총의 창설을 함께하셨습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부위원장을 맡기도 하셨으니 민주노총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남다르실 듯 합니다. 올해로 30년을 맞은 민주노총, 당시 민주노총을 창립할 때의 심정과 지금 30년을 돌아보는 소회는?

 

지난 주, 그리고 이번 주에 민주노총 30주년 전국노동자대회와 민주노총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다녀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가장 큰 느낌은 노동자대회를 예시로 들자면 '30년 전 청년이었을 때 나와 함께 팔뚝질을 하던 사람들은 지금 여기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민주노총 창립 당시 저는 산별연맹 위원장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30년 전의 산별위원장으로서 아직도 노동운동에 남아 있는 사람은 정말 손가락으로 한두 명 꼽을 정도이고 집회에 나가서 그 동지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조건이기도 하죠. 그런 측면에서 30주년을 바라보면 세월이 이렇게 흘렀음을 새삼 느끼고, 떠난 사람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게 됩니다.

 

민주노총은 1995년에 창립되었지만, 사실은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로 보아야 합니다. 그 때로부터 창립에 8년이 걸렸고, 그 시간 동안 숱한 투쟁과 숱한 열사들, 구속과 해고의 과정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총이 창립된 것이죠. 당연히  쉽지는 않았습니다. 민주노총이 출범되던 날 많이들 울었습니다. 저도 울었는데요, 단순히 조직이 건설된다고 하는 것의 벅참이 아니라 먼저 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거죠. 워낙 엄혹한 시절을 거쳐 왔고, 어제 나랑 손잡고 거리를 걷던 사람이 오늘 죽음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겪어 왔다면 그들에 대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5년 11월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민주노총 창립 대의원대회

 

당시 가장 중요한 논쟁은 한국노총 민주화론과 독자적인 민주노총 건설 논쟁이었습니다. 복수노조 금지를 규정한 당시의 노동법 때문에 민주노총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법외노총, 법외노조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그간 민주노조운동을 해 온 사람들도 지금 현실적으로 독자 노총을 꾸리는 것이 쉽지 않은 조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구조적 탄압을 생각했을 때 한국노총의 안에 일정한 블록을 형성하는 민주노조그룹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냐는 고민이 있었지만, 그동안 한국노총의 행태를 본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독자적인 민주노총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죠.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것은 소위 '87체제'라고 하는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87체제라고 하면 정치적으로 군부독재가 끝나고 대통령 직선제가 수립되어서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것,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헌법에 의해서 87년에 대통령이 선출되고 그 체제가 지금까지 오고 있다는 의미로 보통 사용되죠. 다만 제가 생각할 때 87체제의 더 큰 의미는 단순히 정치적 민주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대투쟁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가 수정되었다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던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병영 체제, 그리고 자본의 전면적 우위 속에 있던 사회의 토대가 노동운동을 통해 바뀌었다는 점이 87체제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어쨌든 당시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의 주요한 변화 동력이었고, 더 나아가 오늘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아주 최소한의 극복이라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2025년, 30살 민주노총의 다양한 조직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현장이  소위 20%의 상층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체가 되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고민입니다. 물론 이 자체가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물로 탄생한 민주노총의 오늘날 모습이 과연 불평등과 차별, 기후위기라는 복합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 위에 있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의 변혁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정말 느끼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매우 안타까운 지점이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은 30살이 된 지금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그리고 차별과 혐오라고 하는 이 조건을 바꿔내기 위한 과제를 좀 더 책임 있게 수행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저는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에 (외부로부터의) 국제연대가 크게 기여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되돌려주기 위한 국제적 투쟁에 대한 고민도 좀 더 깊어졌으면 좋겠고, 이제 성장하는 청년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한국 사회를 위한 책임 있는 역할을 만들어주고 그 운동의 공간을 열어주는 역할도 민주노총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다양한 고민을 해 보게 됩니다. 그동안 투쟁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민주노조운동이 이제는 이 운동 자체의 인프라를 조금 더 확장하고 기본적인 토대와 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예를 들면 교육 사업의 강화라던가 혹은 전반적인 한국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기반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게 오늘 30주년을 맞은 민주노총에 대한 저의 바람입니다.

민주노총 30주년 기념 2025 전국노동자대회. 출처: 노동과세계

 

민주노총이 창립 초창기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목표 중 하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입니다. 당시 민주노총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과제를 제시하게 되었는지, 그 당시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주노총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고민을 실체화시켰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운동의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정치화 필요성을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경험하고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까지도 줄기차게 투쟁을 해 왔고, 투쟁으로 정면돌파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한국 사회의 제도나 법을 통해 구조적으로 억제되는 부분이 너무나 컸고, 그 과정에서 일정한 한계를 발견한 거죠. 이 한계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은 1996~97년의 노동법 개정 투쟁이었습니다.

 

당시 노동법 개정 투쟁은 국회가 통과시킨 날치기 노동악법에 대해 전면적인 거부를 선언한 정치적 총파업이었습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최종 명령으로 총파업이 실시되고 실제로 전국의 모든 가맹조직들이 일시에 파업에 돌입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파업이 승리를 거두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직접 사과하고 국회에서 법안을 재논의하겠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국회로 돌아간 그 법은 두 줄인가 세 줄만을 고치고 똑같이 통과가 되는 거죠. 현장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정치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씁쓸함, 그리고 그 정치적 패배를 딛고 또다시 파업을 하고자 해도 더 이상은 조건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현장 투쟁과 함께하는 노동자 정치운동의 구체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겁니다.

1996~97년 노동법 개정 투쟁 당시 자료사진. 출처: 매일노동뉴스

 

그게 가장 결정적인 계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정치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민주당과 손을 잡고 정책연합을 통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그래서 어쨌든 정권을 바꾸고 우리와 친한 '민주정권'을 세우면서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도 정치세력화가 아니냐는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었죠. 또 다른 견해는 결국 그와 같은 구체적인 정치행위로서 정당이나 선거라고 하는 것에 노동운동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노동운동의 개량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현장의 투쟁을 통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의 정치다라고 하는 것이었고요.

 

이 두 가지 견해를 양쪽에 놓고 둘을 결합하면서 한편으로 현장 투쟁, 한편으로는 제도권 정당의 건설을 동시에 진행시켜 가는 것이 당시에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결과적으로는 조직 내부를 통일하면서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어쨌든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게 되고 이후 이 정당을 토대로 한 의미 있는 활동들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노동자 정당 운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96~97년 노동법 개정 투쟁 당시 전국노동자대회의 모습. 출처: 오마이뉴스

 

- 말씀대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됩니다.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에도 부대표로 함께해 주셨는데요. 사실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노동자 정당, 진보정당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민주노동당에 와서 비로소 한국 사회에 진보정당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민주노총은 1997년 국민승리21이라는 선거용 정당을 만들고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출마시키면서 정치세력화 전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말씀처럼 사람들은 늘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하지만,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진보정당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 정당,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지만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이 있었던 거죠. 이전 진보정당들의 실패는 이것이 상층 활동가 중심의 정당운동이었고, 여기에 선거법이라고 하는 구조까지 얽히면서 일정한 지지율을 확보하지 못하면 선거가 지나면 바로 당이 해산되고 (이를 재건할) 기반이 없기 때문에 다시 또 상층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당을 만들지만 또 해산되고, 이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과 달리 국민승리21에서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그만큼 노동운동의 성숙 속에서 노동대중의 기반이 확장되었기 때문이 컸습니다. 대중적 토대가 없는 정당은 선거법과 정당법이라는 큰 벽을 넘어서서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으로 자리를 잡기 어려우므로, 제가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 되면서 97년 권영길 후보를 출마시킬 때 갖고 있었던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몇 %를 얻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 선거를 통해 다시는 흩어지지 않는 대중적 기반을 명확하게 형성하고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이후로도 계속해서 역할을 해 나갈 수 있는 토대로 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민승리21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민주노총 전 조직을 대상으로 대중적 정치기반 확대 사업에 들어가게 됐죠. 그렇게 민주노총이 정치사업을 해 가면서 국민승리21 당시에는 '민주연합(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편집자 주)'을 주장하던 소위 '자민통', NL 블록도 결국 민주노동당에 결합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결국 민주노총의 정치사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 민주노총의 흡인력, 사회적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진보정당들이 있었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이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런 지점들이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출처: 오마이뉴스

 

- 민주노동당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미국 뉴욕시장 조란 맘다니의 당선을 이야기하면서 (맘다니처럼 되었어야 할) 민주노동당이 정파들의 패권놀음에 의한 분당으로 실패했다, 는 식의 코멘트를 남긴 바 있습니다. 이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민주노동당 분당은 당시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에게 여러모로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관점에서, 당시 민주노동당의 급격한 성장, 그리고 이어진 실패와 분당의 원인은 무엇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민주노동당 성장의 가장 큰 기반은 역시 노동 대중의 기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조건에서 선거 때가 되면, 또는 일상적인 정치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당원으로 참여하고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면서 민주노동당의 성장에 기여한 측면이 가장 컸던 거죠. 세계의 어떤 진보정당도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일정하게 그 틀과 기반을 제공하지 않는 한 성장이 쉽지 않다는 면에서, 민주노동당의 성장에 조직적 기반으로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어요.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나서 있던 여러 논쟁 중 하나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정치조직으로서 단일한 방침을 갖는 것은 온당치 않다. 각자의 조합원들은 정치적 판단과 고민이 있을 수 있는데 민주노총이 오로지 민주노동당을 위한 대중조직으로서 가는 것은 노동운동의 원칙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최근 특정 진보정당이 노동조직과의 정치방침을 일체화시켜내는 과정에서 보여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통해 보더라도, 이것은 일정하게 매우 설득력 있고 타당성 있는 이유죠. 당시 제가 정치위원장이었고 '민주노총의 정치활동은 민주노동당을 통해서 한다'는 안건이 대의원대회에 올라가서 이 안건을 방어해야 되는 입장이었는데, 저는 그 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맞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영구한 방침이 되는 것은 나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지금 한국 진보정치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 정당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결단이 없다면 이 정당의 미래를 기약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당이 일정한 기반에 서기 전까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질문하신 부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현재 시점에서는 배타적 지지에 대한 동지들의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다." 결국 대의원대회에서 이 안건은 통과되고, 그 후 민주노총은 모든 정치 활동을 민주노동당으로 집중시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시기 전 조직이 선거운동에 나서게끔 하는 중앙의 일괄적 방침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거죠. 그것이 성장의 가장 중요한 기반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2005년 민주노동당 무상의료·무상교육·부유세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출처: 오마이뉴스

 

두 번째로는 어쨌든 의제의 급진화와 대중화라는 측면이죠. 흔히 '급진적인 건 대중적이 아니'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조건에서 부유세, 무상급식, 무상교육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급진적인 것들이 오히려 대중에게는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이고, 이런 의제의 상상력이 진보정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모아내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는 측면에서 의제의 급진화와 대중화가 당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됐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때 정말 잘 나갔죠. 당시 (특정 시점까지는) 확실하게 비약적 성장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2006년도 지방선거 당시에는 801명을 출마시켜서 81명을 당선시켰거든요. 그런 것들이 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2부에서 계속)


김원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전 회장, 전환 국제연대팀장.

동국대학교와 고양시, 대학원생노조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이론과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을 겸비한 운동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