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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씨네도모

건담, 멀티버스를 만나다: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 리뷰

by Domoleft 2025. 3. 30.

[씨네도모] 건담, 멀티버스를 만나다: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 리뷰

일본 애니메이션 최대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신작,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이 4월 2일 한국에 개봉한다. '우주세기 멀티버스'라는 사상 초유의 설정을 들고 온 화제의 신작, 그런데 우주세기? 비우주세기? 그게 뭐지? 건담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오타쿠 편집장의 건담 신작 리뷰, 지금 시작한다.


* 본 기사에는 영화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과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세기'? '비우주세기'?

건덕후들의 '건담 예송논쟁'. 이 이후 추가된 작품들로 인해 지금은 더 논쟁이 넓어졌다. 출처: 루리웹

 

건덕후(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와 그에서 파생된 프라모델 등의 컨텐츠를 좋아하는 오타쿠들의 통칭) 집단 내부에서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단 하나의 본질적 갈등은 '우주세기 VS 비우주세기'의 갈등이다. "그게 뭔데 씹덕아"가 이미 입 안에서 맴돌고 있을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에게 있어 이것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깊은 세계관적 충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놈의 우주세기란 무엇일까?

 

'우주세기'는 건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감독의 <기동전사 건담>('퍼스트 건담', 1979)으로부터 파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건담 시리즈의 소위 '근본' 세계관이다. <기동전사 Z 건담>(1985),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1989)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고 인공건조물인 '스페이스 콜로니'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대인 우주세기(Universal Century; U.C.), 지구보다 경제력과 생활상이 떨어지고 착취에 시달리는 스페이스 콜로니 세력의 테러와 독립전쟁에 지구 세력이 맞서는 이야기다. 가장 오래되고 서사적으로도 긴 시리즈이다 보니, 오랜 건담 팬들 중에서는 이른바 '우주세기 근본주의자'들이 많다. 물론 역으로 너무 긴 스토리와 떨어지는 접근성으로 인해 최근 유입된 신규 팬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좌측부터: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의 대표작인 <기동전사 건담>과 비우주세기 건담 시리즈 중 최고의 매상을 기록한 <기동전사 건담 SEED>.

 

그렇다면 '비우주세기'는? 말 그대로 우주세기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세계관을 뜻한다. 각각의 작품마다 세계관이 다른 비우주세기 건담 시리즈들은 때로 우리가 사는 서력기원(A.D.) 세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기도 하고(<기동전사 건담 00>), 건담의 탈을 쓴 무협물을 찍기도 하며(<기동무투전 G건담>), 퍼스트 건담을 통째로 오마주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기도 한다(<기동전사 건담 SEED>). 모든 건담 시리즈의 신작은 등장할 때마다 이 '우주세기냐 비우주세기냐'의 이분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스타워즈 시리즈>의 '캐넌 논쟁',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구작과 신극장판 간 논쟁 등 모든 오래된 세계관에서 이런 논쟁은 벌어지지만, 건담 시리즈에 있어 이 논쟁은 가상 세계관의 그것이라기에는 유난히 큰 갈등을 유발해 왔다.

 

우주세기 근본주의자들과 비우주세기로 유입되는 신규 팬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선라이즈(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건담 시리즈의 제작사)는 이 갈등으로 인해 모든 신작 건담을 발표할 때마다 존재론적 딜레마에 시달려 왔다. 2025년 지금, 선라이즈는 이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잠깐의 휴전을 제시하려 한다. 건담 시리즈의 TV판 최신작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그리고 오는 4월 2일 한국에 개봉하는 동 시리즈의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 이야기다. 필자는 3월 29일 진행된 선행 시사회를 통해 본작을 미리 감상할 수 있었다.


멀티버스, 건담 시리즈의 시작점을 뒤엎다

'지쿠ㅇㅇㅇ깍스' 같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출처: 네이버 영화

 

작년 말 처음 정보가 공개되었던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이하 지쿠악스), 그리고 그 전반부 3화를 편집한 선행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이하 지쿠악스 비기닝)은 방영 전 시놉시스 공개 당시부터 전 세계의 건담 팬, 건덕후 커뮤니티에 기름을 부었다. 그럴 만한 것은 이 지쿠악스가 건담 세계관 최초로 시도되는 '우주세기의 평행세계'를 다루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최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대중매체가 '멀티버스'를 적극 도입하고 있는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 이 신작은, 모든 건담의 기원인 1979년작 <기동전사 건담>의 도입부를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한 지 79년이 지난 우주세기 0079년, 스페이스 콜로니에 세워진 구 식민지 국가 '지온 공국'이 지구의 기득권 세력 '지구연방'을 침공하면서 '1년 전쟁'이 시작된다. 지온 공국은 친지구 성향 콜로니들에 독가스를 주입하여 학살을 저지르고, 신개념 병기인 '모빌슈트(MS; 건담 시리즈에 나오는 모든 로봇들의 통칭이다)' 자쿠를 개발하여 전황을 주도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수십 억의 인구를 보유한 지구연방과 작은 스페이스 콜로니를 기반으로 하는 지온 공국의 체급 차이 때문에 전황은 고착되고, 지구연방은 기술력을 총동원해 자체 모빌슈트인 '건담'을 제작하여 역전을 도모한다.

 

바로 이 지점이 원작 <기동전사 건담>의 세계관과 지쿠악스 세계관을 나누는 분기점이 된다. 원작 건담은 위와 같은 배경 서사를 도입부에서 소개하고, 이후 주인공인 '아무로 레이'가 자신이 살던 스페이스 콜로니를 침공한 지온군에 맞서 파일럿 없이 버려진 건담에 탑승해 적과 싸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동일한 배경 서사를 공유하는 지쿠악스의 세계선에서 아무로 레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지쿠악스의 프롤로그에서 건담에 탑승하게 된 것은 원작의 메인 라이벌이었던 지온군의 에이스 '샤아 아즈나블'이고, 샤아는 탈취한 건담을 붉게 도색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최후의 전투에서 행방불명된다. 지온군의 우세 속에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불안한 공존 속 15년이 지난 우주세기 0085년 본작의 메인 스토리가 시작된다.

샤아가 탈취한 붉은 건담. 출처: 선라이즈 유튜브 채널

 

본 작품이 영원히 싸울 것 같은 우주세기파와 비우주세기파 간의 '휴전'을 가능케 한 이유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통해 양쪽의 니즈를 모두 만족시키는 영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퍼스트 건담을 보았던 오랜 우주세기 팬들에게 본작은 우주세기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본인들에게 익숙한 세계관을 비틀어 만든 평행세계로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세계관이다. 과거 '근본주의자'라고 비판받기도 했던 이들이 이 정도의 비틀림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정통 우주세기 작품들이 예전만큼 인기를 끌거나 많이 제작되지 않고 있는 것도 한 몫 한다. 퍼스트 건담의 일부 에피소드를 원작 작화가가 직접 리메이크한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은 기대 이하의 흥행 실적을 기록했고, 현재 극장판 3부작으로 전개 중인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는 많은 기대를 받고 있지만 2021년에 1부가 나온 후 현재까지도 2부에 대한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반면 <수성의 마녀> 등의 최근작으로 건담에 입문했지만 오래되고 긴 우주세기 서사를 애써 따라갈 생각은 없는 신규 팬들에게 있어, 같은 설정을 공유하지만 처음부터 다른 서사로 전개되어 전후의 긴 이야기를 파악할 필요가 없는 본작의 접근성은 압도적으로 좋다. 필자 역시 최근 기존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를 들어는 봤으나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직접 감상하지는 않은 주위 지인들에게 본작을 '영업'하는 중이다. 본작의 흥행과 작품성의 성패에 달린 문제겠지만, 선라이즈와 반다이(건담 프라모델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역으로 본작을 통해 우주세기라는 세계관을 처음 접하고 흥미를 갖게 된 신규 팬들이 우주세기 정사 작품들을 찾아볼 거라는 기대 역시 충분히 가능한 셈이다.

 

한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의 멀티버스 설정은 생각보다 그 역사가 짧지 않다. <드래곤볼 인조인간 편 / 미래 트랭크스 편>에서는 평행우주의 등장인물들이 본 세계선에 등장해 주역 인물로 활약하고, 극 막바지 판타지 세계에서 19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무대를 변경하며 평행세계를 열었던 2003년판 <강철의 연금술사>는 멀티버스를 통해 현대 극우주의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가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행세계가 단순히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에 상호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이번에 개봉한 <지쿠악스 비기닝>은 TVA 전 12화의 초반 3화만을 편집 후 선행공개한 극장판이기에 정사 우주세기 세계관과 어떤 식으로 연동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각본가가 본작의 테마를 '진짜와 가짜'라 밝힌 것은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 즉 본래의 우주세기 세계와 지쿠악스 세계의 접점을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이미 나오고 있다.


이질적인, 그러나 또한 익숙한

사진 좌: <기동전사 건담>의 건담과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의 건담. 출처: 루리웹 / 사진 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에반게리온과 <지쿠악스>의 모빌슈트 디자인 비교. 유사한 점이 눈에 띈다. 출처: www.facebook.com/GundamNews

 

건담 최초의 멀티버스 작품이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작품 외적으로 보면 본작은 기존의 건담 시리즈와 이질적인 측면이 더욱 많다. 첫 정보 공개 당시에는 우선 주역 건담인 '지쿠악스(GQuuuuuuX)'를 비롯한 등장 메카들의 디자인이 도마에 올랐다. 최근 비우주세기 시리즈(<철혈의 오펀스>, <수성의 마녀> 등)의 메카 디자인들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도 '건담같지 않다'는 비판이 일어 왔지만, 이번에는 특히 '이건 건담인지 에반게리온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많았다. 메카의 비율이나 생체병기적 디테일들은 실제로 본래의 건담보다 에반게리온에 더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본작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원작자이자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가 제작에 전면적으로 참여한 첫 번째 건담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1995년 등장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암울한 세기말적 분위기, 사이코 드라마적 요소, 미소녀들을 중심으로 한 소위 '모에' 코드 등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애니메이션이며, 건담 시리즈와 함께 일본 거대로봇(메카물)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손꼽힌다. 에반게리온의 원작자인 안노 히데아키는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과거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의 제작에 스태프로 참여한 적도 있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 전부터 '건덕후'였던 그가 '1년전쟁에서 지온이 승리한 평행우주'라는 상상을 확장하여 그려낸 것이 본작의 프롤로그 세계관인 것이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작의 메카 디자이너는 에반게리온을 디자인한 야마시타 이쿠토(山下いくと)다. 에반게리온을 닮았다는 평가는 단순한 인상비평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물 작화 역시 이질적이다. 원작의 캐릭터 디자이너였던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의 작화 톤을 계승하여 진중한 극화체로 그려지곤 했던 기존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의 인물 작화와 다르게, <지쿠악스>의 캐릭터 디자인은 <포켓몬스터 썬·문> 이후 포켓몬 시리즈의 캐릭터 디자인을 전담해 온 디자이너 타케(竹)가 맡았다. 신규 팬들에게 딱딱하고 무기질적으로 보일 우주세기의 극화체를 탈피하고 최근의 디자인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우주세기 팬들의 '곤조(?)'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캐릭터 디자인을 통일할 수는 없었는지, 덕분에 본작의 인물 작화는 1년전쟁 시기를 다루는 프롤로그에서는 본래의 극화체 작화, 본편에서는 포켓몬 스타일 작화의 조합이라는 약간의 어색함을 보여 준다.

<지쿠악스> 프롤로그의 샤아 아즈나블과 본편의 주인공 아마테 유즈리하(마츄), 출처: 건담인포

 

그러나 <지쿠악스>의 곳곳에는 또한 여전히 기존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를 봐 온 사람들로 하여금 '피식'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다. 원작에서 아무로의 건담과 처음 조우한 샤아의 대사 "어디 한번 보여주실까. 연방의 모빌슈트의 성능을"은 샤아 본인이 직접 건담에 탑승하여 연방군과 싸울 때 뱉는 동일 대사로 오마주된다. 이어지는 모빌슈트 간 전투씬에서 샤아는 원작에서 본인이 자쿠로 건담을 걷어차던 '샤아 킥'을 이번에는 본인이 건담에 탄 채로 재현한다. 이외에도 본작에는 원작을 기억하는 올드팬들이라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오마주와 패러디 요소가 존재한다. 이는 물론 본작을 기획한 안노 히데아키와 감독 츠루마키 카즈야(鶴巻和哉) 스스로가 건담 세대의 열광적 오타쿠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건담, '리얼로봇물'의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본작의 원작 <기동전사 건담>은 그저 '악을 무찌르는 무적의 전사'였던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 즉 '슈퍼로봇물'에 비해 로봇 및 작중 기술의 현실적 설정을 중시하고 동시에 단순한 선악구도를 넘어 전쟁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 소위 '리얼로봇물'의 효시로 꼽힌다. 물론 청소년 시청자층을 대상으로 한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한계로 인해 완전한 현실성을 부여받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작품들의 절대다수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사람을 죽이는 병기'인 거대로봇을 그 주역으로 삼으면서도 핵심 주제의식으로서 반전평화, 그리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놓지 않아 왔다.

 

전쟁의 비참함과 그 전쟁을 유발하는 이념과 정치의 변질을 직접적으로 그린 <기동전사 건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주 식민지의 독립투쟁과 운동 내부의 암투를 그린 타카하시 료스케(高橋良輔) 감독의 1981년작 <태양의 엄니 다그람>은 마치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연상케 하는 서사의 비극적 시대극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던 이유는 이 시대의 일본 애니메이터들 대다수가 전후 좌익 학생운동에 가담했거나 지지했고 이후로도 진보적 세계관을 자신들의 작품에 녹여내고자 노력했던 '전공투 세대'였기 때문이다. 현재 4~50대가 되어 사회의 주축을 차지하고 있는 전후 일본 청소년 세대 대다수가 여전히 평화헌법 9조의 개헌과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화'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들의 영향을 언급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식민지 '데로이아'의 독립투쟁을 다룬 대하 시대극 <태양의 엄니 다그람>. 출처: 나무위키

 

그러나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의 서사적·질적 하락과 함께, 최근의 건담 시리즈를 포함한 거대로봇물 애니메이션 역시 주제의식과 그를 드러내는 방식이 열화되고 있다는 혹평을 받아 왔다. 전쟁에 동원된 소년병 건담 파일럿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는 극 초반 반전평화주의라는 건담 시리즈의 주제의식을 계승하는 듯 보였으나 후반부 들어 서사의 붕괴와 함께 '야쿠자 미화물', '전쟁 미화물'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으며 마무리되었고, 건담 시리즈 최초의 여성 주인공 설정과 '백합물' 코드의 차용으로 주목을 받은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는 하층계급 지구 거주자와 상류층 우주 거주자들의 갈등이라는 설정을 넣었지만 역시 그저 배경서사로만 다루었을 뿐 기존 우주세기 시리즈가 주력했던 식민주의나 계급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은 없었다.

 

'근본' 우주세기 세계관의 리부트 멀티버스답게, <지쿠악스 비기닝>에서는 다시금 리얼로봇물 본연의 주제의식을 작품에 녹여내려는 감독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츠루마키 카즈야 감독은 12세 관람가(일본의 경우 PG12 등급)라는 심의 기준 속에서 본작에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녹여내었다. 극 초반부 건담을 탈취한 샤아가 연방군 전함 화이트 베이스의 승무원들을 몰살하는 장면, 후반부 스페이스 콜로니 내부 시가전에서 난민들의 집이 처참히 파괴되고 모빌슈트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연출은 무기질적이고 무미건조했던 원작 <기동전사 건담>의 전쟁 묘사 혹은 민간인 시점에서의 전투씬을 그려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했던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를 연상케 한다.

스페이스 콜로니 내부의 모빌슈트 전투로 피해를 입는 본작의 민간인들. 출처: 반다이남코 유튜브 공식 트레일러

 

1년전쟁이 원작과 달리 우주 식민지 세력인 지온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여전히 빈곤한 우주 이민자들이 불법 난민을 형성하고 콜로니 자치정부가 이들을 탄압하는 모습은 현실의 난민 문제나 소수민족 문제, 독립 후에도 계속되는 피식민 국가들의 권위주의화와 정치적 억압 등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지온 공국은 여전히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본작의 배경인 사이드 6 콜로니 자치정부 역시 권위주의적 군경을 운영하면서 난민과 빈곤층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우한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인 "난민 놈들의 집은 밀어 버려도 된다"나 "지온이 이겨도, 스페이스노이드(우주 거주자)는 자유롭지 못해."를 통해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본작의 배경이 원작 <기동전사 건담>이 제작되었던 냉전 시기보다도, 어째서인지 지금의 시대에 훨씬 더 와닿는 배경으로 느껴짐은 우연일까.

 

물론 <지쿠악스 비기닝>은 TV 시리즈의 초반부만을 편집한 것에 불과하기에, <지쿠악스>가 마지막까지 리얼로봇물의 고전적 주제의식인 반전평화와 전체주의 비판을 완성도 높게 작품에 녹여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특히 앞선 건담 시리즈 작품들인 <철혈의 오펀스>나 <수성의 마녀>가 용두사미의 결말로 비판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초반부의 완성도로 시리즈의 방향성을 속단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건담 시리즈의 오랜 팬인 감독과 제작자의 애정, 그리고 우주세기라는 오래된 세계관이 팬층에게 갖는 무게감을 고려한다면 본작이 받고 있는 높은 기대는 납득할 만 하다.

 

살상무기인 로봇 병기를 멋진 작화로 그려내고 그 완구와 프라모델을 판매하지만 동시에 전쟁의 비참함을 직격하는 것은 항상 일본 리얼로봇물 애니메이션의 매력적인 자기모순이었다. 전쟁의 확대와 전체주의적 경향성의 심화에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는 이 시대에, <지쿠악스>는 건담 시리즈의 사회비판적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 진보·좌파를 자임하면서 건담 프라모델을 모으는 거대로봇물의 오랜 팬으로서 본작의 향후 전개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올드팬과 신세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세계관의 재시작

<지쿠악스>의 오프닝 테마로 사용된 요네즈 켄시(米津玄師)의

 

본작은 최근 일본 제1의 싱어송라이터로 꼽히는 요네즈 켄시(米津玄師)의 <Plazma>를 오프닝 타이틀로 채용하고, 버추얼 유튜버 '호시마치 스이세이'의 곡을 엔딩곡으로 삼았다. 선행 극장판인 <지쿠악스 비기닝>의 경우 상영시간에 맞춘 빠른 스토리 전개와 삽입곡에 최적화한 연출로 마치 1시간 30분짜리 뮤직비디오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래된 세계관도 트렌드에 발맞추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제작진이 들인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우주세기를 모르는 MZ세대에게 건담을 어필할 수 있을까?'라는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해, 제작사 선라이즈는 최근 발표한 모든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해답을 내놓아 왔다. <수성의 마녀>는 여성 주인공과 '백합' 서사를 통해 페미니즘이 사회적 화두가 된 2020년대 건담의 한 방향성을 제시했고, <섬광의 하사웨이>나 <쿠쿠르스 도안의 섬>은 정반대로 고전 우주세기의 묵직한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최신의 작화와 연출로 리메이크했다. 그러나 <지쿠악스>는 우주세기 세계관의 틀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멀티버스 설정을 통해 오래된 세계관을 참신하게 비틀었다. 이는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의 방대한 스토리를 모르는 신세대들도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향성이다.

 

<지쿠악스>는 건담 팬덤의 오랜 반목에 휴전선을 긋고, 새로운 세대의 팬들을 불러오는 시리즈의 전기(轉機)가 될 수 있을까? 아직 그 해답은 알 수 없지만, 선라이즈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런칭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

 

츠루마키 카즈야(鶴巻和哉) 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각본

쿠로사와 토모요, 이시카와 유이, 신 유우키 / 81분 / 2025

 

 

'씨네도모'는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상매체를 진보·좌파적 시각에서 비평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웹진 <도모>의 영화 리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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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

전환 기관지 편집위원장이자 <도모> 편집장.

거대로봇과 프라모델을 사랑하는 오타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