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기사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 반공주의에서 평등으로

by Domoleft 2025. 4. 17.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 특집>

[기획기사]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 반공주의에서 평등으로

 

한반도의 첫 사회주의 정당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5년, 지금의 진보정치는 조선공산당이라는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계승해야 하는가? 반공주의에 맞서는 '기억 투쟁'의 관점에서 한국의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조선공산당을 비판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이유를 함께 고민해 보자.


좌측부터: 조선공산당 로고 /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중식당 아서원의 당시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 오마이뉴

 

이 글이 지면에 송고되는 2025년 4월 17일 오늘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25년 4월 17일, 서울의 중식당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이 땅에서 노동자·민중이 주인 되는 해방사회를 꿈꾸었던 자들의 첫 정당으로서 진보정당 100년 역사의 첫 머리에 위치해 있는 정당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그러한 인식은 진보정당의 활동가들에게조차 흔하다 보기 어렵다.

 

조선공산당은 진보정당들에게도 먼 존재였다. 지금껏 많은 진보정당들은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피해 왔다. 민주노동당은 강령에서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해 온 민중의 역사와 3.1 민족해방운동 등 민중투쟁사의 계승자'라고 스스로 자부했으나 조선공산당이나 공산주의 계열 운동의 역사는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있다.[각주:1] 진보신당의 2009년 강령(이른바 '만남강령')은 '해방공간에서 통일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들의 투쟁'을 계승한다고 하여[각주:2]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해방공간의 좌파운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역시 그리 명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후 2013년의 노동당 강령 역시 '제국주의 치하와 해방정국의 민족해방운동을 계승'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에 그치고 있을 뿐이며, 정의당과 녹색당의 강령에는 아예 역사관에 대한 서술이 없다. 이는 활동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지난 2023년 노동당에서 서울 중구에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설치를 주도하고 그 건립행사를 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던 것 이외에 모든 진보정당의 활동을 통틀어 봐도 조선공산당에 대한 뚜렷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노동당이 약 2년 간 꾸준히 중구청에 제안하여 설치되었던 표석 역시도 설치 1달만에 극우 유튜버에 의해 훼손·제거되었고, 이후 재설치에 대한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 상태다.[각주:3]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을 훼손하는 극우 유튜버. 출처: 파이낸셜뉴스

 

흔히 진보정당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도 가까우면 87년 노동자대투쟁이나 70년의 전태일 열사에서부터 시작하고, 조금 더 멀리 가더라도 조봉암의 진보당으로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또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도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논하며 정치적 논의보다는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독립운동사 연구의 일부분으로만 애써 한정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런 방어적인 태도들은 조선공산당의 이름이 우리 정치에서 여전한 금기로 작동하고 있으며 진보정치 역시 이 금기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진보정당운동의 투쟁을 첫 단추부터 잘못 꿰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조선공산당 100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에 여전한 반공주의라는 금기에 대해 고민하며, 그 금기를 깨고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토론의 장에 올려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반공주의 서사의 금기를 깨자

분단체제 하 남한은 북한과 대조되도록 반공주의를 핵심정체성으로 하여 수립된 정부이다. 그렇기에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북한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남한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좌파가 한국전쟁 시기 폭력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쓴 것까지 더해 공산주의의 정치적 시민권은 남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는 반대로 남한 좌파에게도 마찬가지의 딜레마를 가져다 주었는데,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남한의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 역시 반공주의를 이 사회의 '합의'로 추인하도록 강요받았고, 자연스레 조선공산당은 금기가 되었다.

 

이 '반공주의 대한민국'은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여전히 실재하는 문제에 해당한다. 박근혜 당선 이후 새로운 자기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보수정당은 지속적으로 반공주의를 소환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 내고자 발악하고 있다. 보수정당에 대응하는 양당제의 다른 축 민주당 역시 반공주의를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며, 자신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기에 정치적 시민권이 존재함을 강변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2025년 현재까지도 보수양당이 합의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컨센서스는 반공주의라고 볼 수 있다.

취임식에서 발언하는 마은혁 헌법재판관. 출처: 동아일보

 

마은혁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과 관련한 최근의 논란은 이 구도를 잘 보여 준다. 마은혁 재판관은 과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노동운동단체였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서 활동한 바 있고, 국민의힘은 이를 두고 공산주의자를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지명했다며 반발하였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아예 언급을 피하거나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라고 소극적으로 비호했다. 심지어 진보정당조차도 이와 비슷한 논지를 암묵적으로 수용했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 전 77주년을 맞은 제주 4.3 항쟁에 대한 관점 역시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가 갖는 여전한 위력과 그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잘 보여 준다. 4.3 항쟁은 1948년 4월 3일 경찰의 만행과 남한 단독선거 방침에 반발해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총봉기와 그에 대응해 미군정과 남한 정부, 우익 폭력집단이 벌인 학살으로 요약할 수 있고, '섬'에 대한 '뭍'의 오랜 편견과 차별 역시 크게 작용하였던 사건이었다. 해당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맥락 전체를 조망하여야 하지만 보수 세력은 공산당의 봉기만을 강조하며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어도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고, 반공주의를 수용한 민주당 등의 자유주의·중도우파 세력은 희생자가 모두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민간인 학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선택적인 시각 탓에 4.3 항쟁은 진보진영에서 '항쟁'으로 칭해지지만 사회 전반에서는 여전히 '사건'으로만 호명되거나 그저 '4.3'으로만 불려질 뿐, 그 명명에 대한 제대로 된 합의는 아직 없다. 국가 공식 추념식 역시 민간인 피해만을 강조하는 '희생자 추념식'이다. 그 와중 일부 수구적 보수 세력이 4.3을 '4.3 폭동'으로 호명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이들은 4.3에 있어서 남로당 제주도당의 역할과 그들이 내건 단독정부 수립 반대로 인하여 '반공주의 대한민국'의 건국은 정당하며 그에 저항하는 자들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일삼는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대한 호오를 떠나 이런 단선적 관점에서 4.3에 대한 온전한 해석과 기억은 결코 불가능하다. 4.3을 둘러싼 이러한 딜레마는 반공주의 대한민국 서사를 깨고 조선공산당을 기억하는 것의 정치적 의미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제7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 출처: 연합뉴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진보정당들이 공산주의를 직접 지향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만큼, 우리 또한 반공주의 서사에 순응하여 언급하기조차 어려운 조선공산당의 역사와 단절을 선택하고, 많은 제1세계 사민주의자들이 택해 왔던 '반공주의 좌파'의 길을 선택하거나 적어도 침묵하기를 선택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러한 단절은 진보정치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최근 마은혁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관련된 논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진보정당이 공산주의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에 대한 지속적 추궁은 이어질 것이며, 진보정치가 정치적·정책적으로 조금이라도 급진화될 경우 그러한 추궁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좌파의 많은 정치적 아이디어에 있어 공산주의와 공산당의 지분을 부정할 수 없는 이상, 반공주의에 순응하는 것은 진보정치의 지속적인 자기검열을 불러올 뿐이다. 이는 진보정치의 정치적 상상력을 심각하게 제한하곤 한다. 즉, 반공주의 아래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정당에게 큰 족쇄로 작용한다.

 

애초 1세계 사민주의자들이 반공주의를 내세워 공산당과의 '선 긋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20세기 초반 실제로 공산당과 치열하게 경쟁하였던 그들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정치에 그런 역사는 없고, 오히려 한국 진보정치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다 보면 공산주의에 닿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반공주의를 용인해 온 제1세계 사민주의자들 역시 그 급진성에 있어 명확한 한계를 보여 왔다. 사회민주주의가 세웠던 복지국가 비전은 반공주의에 상상력을 저당잡히며 자본의 힘을 제압하는 데 미흡했고, 결국 불황 속에서 복지국가의 타협이 무너지는 데 무력했다.

 

공산주의자가 '죽어도 되는 존재'로 남아 있다면 진보정치의 성장에는 한계가 분명하고, 그렇기에 반공주의라는 금기에 도전하는 것은 진보정치의 장기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금기의 중심에는 조선공산당이라는 역사가 있다.


조선공산당과 대한민국,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공산당과 대한민국을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 분명 반공국가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한국은 스스로 공산국가를 자칭한 북한에 맞서 한반도의 반공국가로서 스스로를 정의했고, 그것이 과거 대한민국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하지만 민중의 정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진보정치 세력은 '국가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민중이 새롭게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독재 세력과 외세가 반공을 국시로 삼아 나라를 시작했다는 것보다, 민중이 투쟁을 통해 독재자들을 몰아내고 국가 정당성과 정체성을 새롭게 써내려갔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은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해 온 국가이고, 오늘날에도 평등세상을 향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유일의 국가이다. 같은 역사의 연장에서, 진보정당 역시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구습을 타파하고 평등을 쟁취하며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운동에 가장 앞장서 온 정치세력이다.

 

조선공산당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비록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해 공식적인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끊어졌지만, 그 역사는 이후 지속적인 재건운동과 적색노조, 적색농민운동, 여성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은 성공적으로 재건될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의미는 이 전체의 과정을 포괄할 때 찾을 수 있다. 조선공산당은 계급의식에 기반한 이념정당이었고, 창당과 해산이라는 단발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민중에 기반한 연속성 있는 운동을 해방정국까지 연결시키며 해방세상을 염원하는 수십만 규모의 대중조직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공산당의 재건 소식을 알리는 <해방일보> 기사. 출처: 통일뉴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공산당과 공산주의 계열 지식인들의 고민 및 그 기록은 현대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70~80년대 운동권들에게 간접적으로 폭넓은 영향을 주었으며, 직접적으로도 대구의 이일재 선생이나 부산의 이수갑 선생과 같이 민중으로 숨어든 조선공산당이나 전평의 활동가들은 다음 세대 활동의 밀알이 되었다. 최근 발간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도 형식적 전향을 하고 농민으로 살아갔던 전직 빨치산이 가톨릭 농민운동 등 이후 세대 운동과 지속적인 교류를 했던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공산당은 이후의 진보운동, 그리고 현재의 진보정치와 직간접적으로 닿아 있다.

 

물론 조선공산당은 뚜렷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정당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계속된 계파 갈등 속에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고, 지식인 출신 중심의 정당으로서 민중과 유리되는 정당이 되고 있지 않은지 지속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했다. 해방 이후에도 박헌영 중심의 경직된 의사결정구조 속에 정세파악에 실패하고 맹동주의에 빠져 결과적 실패를 겪었다. 조선공산당의 활동에서 볼 수 있는 오류들은 단지 특정한 정당의 오류가 아니라 당시 공산주의자 일반이 가지고 있던 오류로서 이후 지속되는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고민들은 현재의 진보정치 역시 똑같이 안고 있는 질문과 고민들이고, 계속 연구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렇기에 조선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계승은 100년 전 이들이 해 왔던 고민과 실패를 현재의 입장에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정리해 보자면 조선공산당은 현재 진보정당 계보의 시조이자 선구자로서, 많은 성과를 올렸음에도 외부적 조건과 내재적 한계로 실패한 한반도의 첫 번째 진보정당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진보정당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정치세력으로서 한국과 한반도의 정치적 정체성을 반공주의에서 평등으로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진보정치의 급진적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근원으로 작용할 것이다.


진보정치, 기억의 해방을 시작하자

좌측부터: 이관술(1902~1950), 이순금(1912~?)

 

조선공산당의 기억을 해방시킴으로써 반공주의와 맞서는 기억 투쟁의 시작은 먼저 해방운동에서 이어지는 정치적 시민권을 복원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는 즉 단순한 레토릭이 아닌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조선공산당의 당원들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알려나가는 데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적극적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울산에 있는 필자의 집 근처에는 이관술과 이순금의 생가가 있다. 이관술은 1930년대 반제국주의 운동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이고, 조선공산당 해산 이후 이재유와 함께 아래에서부터 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공산주의자였다. 경성 콤그룹의 일원이었으며 재건된 조선공산당에서 총무부장과 재정부장을 맡았다. 남한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의 본격적 시작인 정판사 위폐 조작사건의 핵심 타겟이 된 사람이었고, 그 결과 남한 정부에 의해 형무소에서 불법적으로 총살당했다. 이관술의 동생인 이순금 역시 반제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며 경성고무공장의 여공들을 모아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운동가였다. 박헌영의 수행비서로서 경성 콤그룹에서 은신해 있는 박헌영과 다른 활동가들의 연락을 맡았고, 해방 이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에서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핵심적인 여성 활동가 중 하나였다.

 

지난 1990년대 초, 이관술과 이순금의 유족들은 마을 앞 선바위휴게소에 비극적으로 죽은 이들을 기리는 유적비를 세웠다. 하지만 이들은 보수단체들의 협박에 못 이겨 비석을 몰래 뽑아 생가 앞에 묻을 수밖에 없었고, 묻혀진 비석은 지난 2019년에야 발굴되어 울주군 범서읍의 이관술 사촌동생 집 앞으로 옮겨졌다.[각주:4] 비석은 발굴되었음에도 여전히 원래 있던 자리에 재설치되지 못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이 불법적으로 제거된 후 여전히 재설치 논의가 없는 사례를 상기시킨다. 제국주의의 탄압과 자본주의의 착취에 맞서 평생을 바친 사회주의 활동가가 정당한 절차도 없이 감옥에서 총살되었지만 어떠한 흔적도 남지 못한 채 잊혀져 가는 상황이라면, '빨갱이 가족'이라며 평생 손가락질받아 온 그의 가족이 그를 기리고자 할 때 여전히 탄압받는 상황이라면 사회주의 역시 여전히 마음 편히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서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22년만에 발굴된 이관술·이순금 유적비. 출처: 울산저널i

 

이관술과 이순금의 복권을 위한 움직임은 얼마 전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2019년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2020년 이선호 울주군수는 이관술·이순금을 염두에 두고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가리지 말고 독립운동사를 찾아내야 한다.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되지만, 제대로 된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는 극단적 반공주의로 이들의 존재 자체가 지워졌던 과거와 달리 최소한 역사적 의미가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2024년 7월에는 추모비가 현재 설치되어 있는 울주군 범서읍에서 이관술 74주기 추념식이 처음 공개적으로 개최되기도 했다.[각주:5]

 

물론 한계도 많다. 기념사업회 측은 지금도 공식적으로 '이관술이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어긴 적이 없음을 강조'하며 이관술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공산주의 독립운동가의 복권이 단순히 '이들이 공산주의자에 앞서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에' 혹은 '그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에'라는 측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단지 독립만이 아니라 한반도 노동자·민중이 직면한 착취라는 중층적 모순에 직접 맞섰던 이들의 뜻은 절반만 복권될 뿐이다.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이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이야기하고 실천했던 이들의 행동은 정당했으며 지금도 정당하다'는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이들의 복권에 있어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다.

 

이관술과 이순금의 복권이 성공한 뒤를 상상해 본다. 이관술과 이순금이 이 사회에 한 공헌이 인정받고 이들의 생가가 기념되며, 이 지역 입구에 잘 보이게 이들을 기리는 비가 설치된다면, 동네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편하게 마주치는 이들의 생가와 비석에서 이들의 사회주의 활동 경력과 공헌을 있는 그대로 쉽게 접할 수 있다면, 이 지역에 살고 지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라는 말로부터 받는 느낌은 분명히 달라지지 않을까?

이관술 74주기 추념식에서 발언하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출처: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한국의 진보정치가 정치적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사회주의를 당당히 말하기 위해서, 반공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누적된 불안감을 불식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각 지역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며 기념하는 시도들이 정치적으로 유효한 이유다. 이미 시작된 이관술, 이재유 등에 대한 기념 운동은 그 가능성의 신호탄일지 모른다.

 

최근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주장하는 뉴라이트 인사의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김구 테러리스트 논쟁'이 소소한 화제가 된 바 있다. 김구의 증손자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용만은 이에 분노하며 "제가 테러리스트의 후손이면 국회의원을 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라 응대했다.[각주:6] 물론 독립운동가들의 헌신 자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에 맞서는 것은 중요하지만, 김구가 실제로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던 김립을 살해하는 백색테러를 저지르고 그의 독립운동 자금을 탈취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김구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탄압에 대해 한국의 진보·좌파는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독자적 정치세력에게는 역시 역사를 정의하는 독자적 역사관이 필요하다. 100년 전 조선공산당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잊혀진 기억을 수면 위로 다시 끌어올리는 것, 그것은 곧 진보정치의 독자적 역사관을 새롭게 정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는 민주당의 역사관, "김구는 테러리스트고 독립운동은 테러리즘이었다"는 뉴라이트의 역사관, "공산주의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고전적 반공주의의 역사관에 맞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존재의의를 긍정하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것. 그것이 10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 진보정치가 조선공산당을 다시 호명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김현근 (목성돼지)

전환 회원, 도모 편집위원.
어쩌면? 전 청소년활동가이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급진적 정치를 고민하는 말 많은 성소수자입니다.
사회주의를 목적하고, 귀여움을 희망함.[각주:7]


각주

  1. 노동당 홈페이지 '민주노동당 강령' http://www.laborparty.kr/wp-content/uploads/2021/05/platform_kdlp.html [본문으로]
  2. 노동당 홈페이지 '진보신당연대회의 강령' http://www.laborparty.kr/wp-content/uploads/2021/05/platform_npp.html [본문으로]
  3. 소공동 '조선공산당' 표석 절도범은 극우 유튜버 https://www.yna.co.kr/view/AKR20230523153600004 [본문으로]
  4. 이관술 유적비 22년 만에 생가터에서 발굴 https://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609897517559 [본문으로]
  5. 항일운동가 학암 이관술 선생 74주기 추념식 https://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2427 [본문으로]
  6. "김구가 테러리스트?" 백범 증손자의 분노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54559 [본문으로]
  7.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던 풍산 김재봉이 극동민족대표회의 참석 사유로 적은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으로부터 본 소개문구를 차용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