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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 일반

윤석열, 그 다음에는?

by Domoleft 2025. 4. 8.

[정치] 윤석열, 그 다음에는?

내란수괴 윤석열이 장장 123일만에 드디어 파면되었다. 그러나 윤석열 다음의 세상을 맞이한 광장에는 이미 '승리한 우리'라는 구호만으로 묶일 수 없는 분명한 균열과, 그 균열을 애써 덮으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 균열과 다름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자 외치는 정재환 전환 집행위원장의 글을 게재한다.


윤석열 파면을 선고하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출처: MBC 뉴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한 순간 고요해졌던 거리는 문형배 재판관의 말과 동시에 곧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커다란 도로와 빌딩 산 속 밀집된 수많은 인파는 짤막한 한 문장을 기다리던 정적에도, 그것이 낳은 함성에도 비현실성을 더한다.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마다 춤을 추고, 눈물을 훔치며 서로를 얼싸안은 군중들 사이로는 안도감, 승리감, 그리고 무엇이라 설명하기 어려운 쾌감 같은 것이 지나고 있었다. 하루 전의 거리에 감돌던 절박함과 불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계엄으로부터 123일, 헌법재판소로 윤석열의 운명이 넘어간 지 112일째 되는 날 윤석열은 모든 공적 권력을 박탈당했다.

 

이 사회가 내란수괴에게 너무 큰 관용을 베풀어 온 것은 아닌가 싶다. 4개월의 시간 동안 윤석열은 자신에게 모여진 사회의 관심을 이용해 계엄의 정당성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파했다. 123일, 4개월이라는 시간은 자신의 계엄이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라는 희대의 드라마를 창작하고, 부정선거와 대남공작이라는 상상력에 실체를 입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열한 지지자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주먹을 흔들고 빙긋 웃어 보이는 그는 마치 이 쇼타임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탄핵 찬반으로 세상이 두 쪽 나더라도 자신이 손 흔들 지지자들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지도자는 파면당해 마땅하다. 그렇기에 더욱, 4월 4일의 거리를 뒤흔든 함성과 환희는 답답하기 그지없던 지난 시간으로부터의 해방감과 동의어가 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 위에 군림하려던 권력자를 배제했다. 광화문과 한남동에 모여들고 있는 그의 지지자들에게서 느낀, 합의된 상식이 이성과 질서 바깥의 힘과 권력에 의해 굴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한국 사회는 해방되었다.

 

불법적 계엄의 실패에 있어 '시민 저항'의 역할을 명시한 헌재의 판결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각주:1], 내란의 종식과 윤석열의 파면을 이끌어낸 것은 의회정치와 재판부의 역할만이 아니라 지난 4개월의 투쟁 간 광장에 모인 시민들과 사회운동의 단결된 힘이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수많은 지향적, 내용적 차이를 내포했던 광장에는 윤석열 파면이라는 1차 과제의 완수와 동시에 다시금 정치적 균열의 가시화가 다가오고 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외치지만 여전히 그 내용도 달성을 위한 방법론도 모호하기 그지없는 '사회대개혁'이라는 거대한 과제, 그리고 성큼 다가온 조기대선이라는 이벤트 앞에 드리운 균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광장 속 '우리'가 지우는 것들

탄핵 인용 직후 광화문을 행진하는 비상행동 집회 참여자들. 출처: 뉴스1

 

선고 직후 시작된 행진, 수많은 깃발들이 형형색색 휘날리던 와중 유독 성소수자 단체들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당시 서 있던 공간에서 가장 가까운 대오가 성소수자 단체, 진보정당, 노동조합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비상행동 의장단이 성명을 발표하고 머지않아 차량 한 대가 집회 인파를 가르며 나타났다. 차량에 설치된 골리앗 크레인에 오른 사회자는 연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를 외치며 사람들을 향해 손 흔들었다. 차량을 따라 광화문으로 행진하던 인파들은 그 목소리에 환호하고 함께 외쳤다. 우리가 승리했다! 시민이 승리했다! 그런데, '우리'?

 

헌재 앞을 밤새워 지키던 전날 밤, 출출함을 달래고자 들린 편의점에서 만난 한 무리의 사람들도 '우리'를 말했다. 아마도 더불어민주당의 열혈 지지자들인 것으로 보였다. 한 명이 고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게 우리 잘못이야? 우리 멱살을 왜 잡아. 차별금지법 통과 못 된 게 우리 탓이야? 왜 민주당에게 책임을 물어. 새벽이라는 시간이 모두에게 그렇듯 그는 스스로의 말에 더욱 격앙되는 듯 했다. 참 눈치 없다고, 심지어는 "트위터의 다수는 그렇지 않다"며 불만을 토로하던 그는 다음 날 윤석열 파면을 노래하고 춤을 추며 '우리'의 승리를 자축했다.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민주당이 지금까지 윤석열 퇴진광장의 중요한 일각을 담당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 12.3 당일 비상계엄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것에 빠르게 의원들을 집결시킨 민주당 지도부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광장 국면에서도 민주당 지도부는 전 의원 및 당직자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비상행동 집회에 참석하게끔 했고, 당직이 없는 평당원들은 당원 조직인 '더민주전국혁신회의(혁신회의)', 이재명 개인의 팬클럽인 '재명이네 마을' 등으로 재조직되어 광장에 모여들었다. 상임대표의 2차가해 성폭력 전과로 인해 사회운동진영 내에서는 터부시되어 온 '촛불행동' 집회가 여전히 일정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들의 동원력 덕분이었다.

2심 무죄 판결을 받고 웃음짓는 이재명 대표. 출처: 세계일보

 

그러나 이들의 정세인식과 광장에 대한 태도가 '사회대개혁'을 외치는 광장 내 급진적 목소리들과 결코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곳곳에서 명확해지고 있다. 지난 3월 26일 이재명 대표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가 무혐의로 판정되자, 많은 민주당 당원들은 광화문 농성장의 천막을 돌아다니며 "이제 더 이상 농성할 필요 없다, 이재명 대표가 승리했다"를 외치고 다닌 바 있다. 이들에게 있어 '순교자 이재명'이 사법적 승리를 거두고 탄탄한 대선 가도를 보장받는 것은 당면과제인 내란수괴 윤석열의 파면 혹은 여전히 무엇인지 모호한 사회대개혁보다 훨씬 직관적이며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사한 논리로, 민주당 계열의 유명 정치 유튜버이자 인플루언서인 김용민은 최근 들어 "페미니즘은 파시즘" "여성의당에 가라"[각주:2] 등 페미니즘과 여성정치에 대한 혐오를 기존보다 더욱 강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이는 상술한 혁신회의 등의 민주당 당원들에게 적잖은 호응을 얻고 있다. 김용민을 포함한 민주당계 유력 인플루언서들은 촛불행동과 함께 행동하며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옹호하기도 한다. 이는 일견 윤석열 파면으로 인해 하나된 것으로 보였던 광장에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거대한 균열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오프라인 광장에서는 쉽게 내뱉을 수 없어진 혐오와 배제의 표현들을, 민주당의 인플루언서들은 여전히 온라인에서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사용하며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하고 있는 것이다.

 

광장이 외쳤던 '사회대개혁' 요구의 실현 형태를 단지 대통령의 교체로 축소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새 정부의 '개혁 걸림돌'로 몰아붙이는 민주당의 행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후보 시절이었던 2017년 당시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에 대해 "나중에"를 연호하며 퇴장을 종용했고, 당시 연단에 있던 문재인 스스로도 이를 방관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당시 문재인과 그 지지자들이 외쳤던 "나중"은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결국 오지 않았다.

'촛불시민'과 '페미나치'를 대립시키는 유튜버 김용민의 글. 출처: 김용민 페이스북

 

이재명 대표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 2021년 대통령 후보 시절 이재명은 서울대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성소수자 활동가들에게 "다 했죠?"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빈축을 산 바 있다.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사회운동을 대하는 이재명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재명은 계엄 이후 지난 12월 4일 국회 앞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의 장애인권리입법 요구를 비난하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방관했고, 이후에는 "이런 행사하는데 와가지고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만 받지"라는 말로 박경석 대표의 행동을 조소한 바 있다.[각주:3]

 

짧은 장면이었지만, 이 사건은 비단 이재명의 극렬 지지 그룹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광장의 요구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이재명 자신 역시 이미 (차별금지법이나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를 망라한) 퇴진광장의 진보적 사회대개혁 요구를 새로운 정부의 걸림돌로 인식하고 있을 뿐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이들은 '내란 세력을 완전히 척결하기 전까지는 힘을 모아야 한다'는 논리로 광장의 모든 세력들에게 이른바 '최대연합'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사회운동이나 진보정치의 본질적 구조개혁 요구를 묵살하곤 한다.

 

이들과 성소수자 단체, 노동조합, 진보정당의 깃발 아래의 나는 같은 '우리'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소수자 활동가에게 "나중에"를 연호한 이들과 이번 광장에서 성소수자들과 함께 "우리가 이겼다"를 외치며 윤석열 파면에 환호한 이들은 같은 사람들이었고, 마찬가지로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는다"며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했던 한 논객의 글을 공유하며 박수치던 이들과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박근혜 퇴진을 말하며 거리로 나왔을 때 그들을 시대의 지성이자 양심이라 칭송하던 이들은 역시 같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들에게 우리는 이들의 정치질서에 거역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좌측부터: 2021년 서울대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에 "다 했죠"로 응수하는 이재명 대표 / 2025년 박경석 전장연 대표를 조소하는 이재명 대표. 출처: 채널A / 비마이너 유튜브


연대에 포함된 다름, 다름을 포괄한 연대

오늘의 광장이 과거와 다른가? 복잡한 심경 속에도 분명히 달라진 지점은 있다. 연일 이어졌던 집회들의 서두마다 이른바 '평등 수칙'을 설명하는 안내는 인상적이었다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광장을 만들겠다는 선언에 그치지 않는 주최 단위의 노력 또한 그랬다연단에 올라 저마다의 소수자성을 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말하는 이들의 연대 발언에 많은 활동가들 역시 고무되곤 했다. 대의 앞에 "가만히 있으라"고 이야기했던 8년 전의 박근혜 퇴진광장으로부터, 우리는 분명 한 발자국 더 전진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을 돌아본다면 박근혜 퇴진광장이 내포했던 최대의 한계는 그것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단지 '퇴진광장'에만 머물렀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광장에서는 박근혜가 여성 대통령이었음에 기인한 여성혐오적 발언("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박근혜 OO년")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고 이에 대한 공개적 배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혐오와 배제가 규제되지 않는 광장에서 성소수자·페미니스트·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수자·약자의 정체성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면으로 외화하지 못했다. 혹여 누군가가 자신이 일상에서 겪는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박근혜 퇴진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할지라도, 그러한 발언은 곧장 "박근혜가 아직 대통령인데 무슨 한가한 소리를 하는 거냐"는 많은 대중들의 반응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좌측부터: 박근혜 퇴진광장에서 드러난 여성혐오와 그를 규탄하는 당시 여성운동단체들의 피켓. 출처: 여성신문 / 오마이뉴스

 

그러나 10년의 시간은 광장 정치의 작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작년 12월 3일 이후 열린 윤석열 퇴진광장에는 혐오와 배제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규범이 뚜렷이 드러났다. 계엄 직후인 12월 7일 토요일 국회 앞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집회에서 페미당당의 심미섭 활동가가 투쟁 현장에서 혐오에 맞서는 것이 '나중에'가 될 수 없음을 역설했을 때만 해도[각주:4] 광장 일부에서는 해당 발언에 대한 야유와 비하가 실제로 행해졌지만, 광장이 거듭되며 최소한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현장에서의 공개적 혐오는 점차 사라져 갔다. 집회를 주도한 비상행동 역시 집회 발언과 현장 구호에 있어 혐오 발언이나 욕설을 강력히 배제했다. 이는 실제 이번 광장을 주도한 세대-젠더가 여성혐오에 민감하고 페미니즘에 친화적인 2030세대 여성이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작부터 과거의 광장과 질적으로 달랐던 이번의 퇴진광장은 두 번의 핵심 국면을 거치며 다시 한 번 진화했다. 이른바 '남태령 대첩'이라 묘사되곤 하는 전봉준투쟁단의 남태령 트랙터 투쟁과 윤석열 체포를 위한 한강진에서의 밤샘 투쟁이 그것이다. 남태령과 한강진의 사례가 분명히 보여 준 것은 광장의 시민들이 더 이상 '연대'라는 말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타인에 연대하고 또한 연대를 구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태령과 한강진 이후 비상행동 집회의 발언대에 올라간 많은 시민들은 스스로가 가진 '젠더퀴어 페미니스트' '장애인' '오타쿠' 등의 정체성을 발언에 앞서 드러냈고, 이는 이른바 '광장식 인사'로 자리잡아 발언대에 올라가는 정치인들이나 기성 활동가들 역시 이런 인사를 따라하기도 했다.

12월 22일 오전 전농의 트랙터 투쟁에 연대하려 남태령에 모인 시민들. 출처: 한국농정신문

 

'퇴진을 넘어선 사회대개혁의 부각'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이번 광장이 낳은 큰 성과로 볼 수 있다. 남태령 트랙터 투쟁에 연대한 많은 시민들은 기존에 잘 알지 못했던 농업 의제에 대해 실제로 알고자 했고, 식량주권과 농민 생존권이라는 전농의 주장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윤석열 파면은 끝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단지 사회운동 및 진보정치진영 일부만의 주장을 넘어 광장의 보편적 합의점으로 자리잡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강진에서 진행된 밤샘 농성 당시 한 발언자의 "단지 윤석열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희망뿐 아니라, 윤석열이 표상하는 불평등과 차별, 혐오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는 발언은 당시 광장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3월 초순 윤석열이 석방되고 헌재의 선고가 미뤄지며 비상행동 집회에서 특정 의제나 퇴진 이후의 사회대개혁을 중심에 둔 발언의 비중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정세적으로 긴박한 국면 속에서도 연대와 사회대개혁의 중요성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퇴진광장에 모인 일부 참여자들은 스스로를 '말벌 동지'로 부르며[각주:5] 한국옵티칼 투쟁, 거통고지회 투쟁, 세종호텔 투쟁 등의 노동운동 현안에까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광장의 진화와 다양성의 증진이 다시금 확인해 주는 것은 광장의 '우리'가 전혀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에 선 자리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이 다양성의 광장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계엄이라는 초현실적 사건 덕에 민주공화정을 함께 걱정해야만 했던 이들 사이에는 이 공화정이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비시민들이 있다. 한 평생을 일한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철탑에 제 발로 오르고, 스스로의 몸을 1평도 안되는 상자 속에 구긴 이들이 거리에 나왔다. 사랑해 마지 않는 이가 단지 동성이라고 친구, 동거인으로 둔갑하여 살아야 하는 이들도 이 거리에 있었다. 대중교통을 한번 타기 위해 휠체어를 굴리며 오늘은 굴러떨어져 죽지 않을지 걱정하던 이들도 거리를 지켰다.

서울 중구 한화오션 본사 앞 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형수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 출처: 프레시안

 

우리 모두는 민주공화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123일 간 거리를 함께 지켰지만, 거대한 대오 속에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내란세력 척결'이라는 말 앞에 쉬이 드러나지 못해 온 '동상이몽'이 늘 있어 왔다. 이재명 대표의 무죄 선고에 이제 농성하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하던 이들이 꿈꾸는 세상과 공화국의 냉대 속에 불화하던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승리했다고 소리치던 오늘의 함성이, 머지않아 윤석열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무엇으로 그려나갈지 다툴 때 광장의 '우리'들이 드러냈던 다름과 독창성의 기억조차 지워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건 과한 걱정일까?

 

그렇다고 사회운동과 진보정치가 민주주의 하나 지켰을 뿐이고 그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체제전환'을 외치던 우리가 고작 오래된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고 냉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은 필연적으로 민주공화정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국회에 군인들을 투입하고 도시에 장갑차가 굴러다니며 대통령이 한밤중에 국민들을 상대로 '사회 혼란 세력'과 '반국가세력'을 운운하는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공화정은 이제 우리 시대의 필수요건이자 최소 전제이다. 87체제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87체제를 출발선으로 삼는 것이지, 반환점으로 여기는 일이 아니다. 윤석열을 퇴진시킨 광장은 역진(逆進) 불가능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87년에 만들어진 제6공화국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거치며 정당성과 안정성을 모두 얻었다. 그 어떤 이가 대통령이 되어 다시 한번 계엄을 휘둘러도 민주주의의 역진이 실현되기란 이제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기에 더더욱, 열광이나 냉소처럼 한 때로 흘러가 버릴 감상 이상의 생각들이 필요하다. 민주정을 지켜낸 광장의 최대 연대를 긍정하면서도 최대 연대가 묶어낸 다름 또한 긍정하는 길, 일견 대립적인 양 보이는 그 두 가지가 양립하는 결말이 필요하다.

12월 3일 밤, 군용차를 막아서는 시민의 모습. 출처: 워싱턴포스트


지켜낸 공화국을 단단히 하려면, 논쟁과 반목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제 광장은 원치 않더라도 분화될 것이다. 윤석열이 사라진 공화국에서 우리가 마주할 첫 번째 과제는 우리가 지킨 공화국이 무엇일지를 규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윤석열이 만든 공화국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문재인이 만든 공화국, 박근혜가 만든 공화국으로도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 그럼 이전과 결별한 공화국의 모습이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새로운 공화국이 전과 같은 '우리'라는 틀로 묶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단지 그 분화를 긍정할 것인지, 부정하고 적대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갈등을 마주하는 일이다. 윤석열을 내쫓은 공화국에서는 고공농성 중인 이들이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을까? 귀금속 거리 한 켠으로 밀려난 세공노동자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을까? 성소수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서도 삶을 위협받지 않을 수 있을까? 여성들은 안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청년 세대는 자신의 행복한 미래와 노후를 꿈꾸며 살 수 있을까? 장애인들은 인간적 존엄을 꺾이지 않으며 나를 긍정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은 가장 구체적인 갈등과 대상을 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화다. 윤석열의 공화국에서 유예되었던 이 질문들은 우리를 어제와 다른 내일로 이끌 나침반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첫 번째 과제가 내란 세력의 청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또한 사실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내란을 지지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세력이 현존하는 한 공화정은 늘 위태롭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내란 세력의 처벌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청산은 정치보복과 권력투쟁으로 비화될 뿐이다. 문재인 정권이 박근혜 정권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에 실패하고 그 청산에 대한 반발로 윤석열이라는 새로운 파시즘을 낳은 것은, 세상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냉소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지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존립하고 있는 윤석열을 진정으로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가 아닌 새로운 사회의 상식과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윤석열 퇴진광장에는 '새로운 사회의 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첨예하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이 이미 모여 있다. 광장의 우리로 담아냈던 그 다름들을 드러내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얻을 만큼, 광장 세력은 이미 유능함을 갖추고 있다. 하나의 연대와 그 속에 속한 다름을 긍정하는 일은 성조기와 태극기, 이스라엘기 아래 모인 윤석열과 내란 세력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앞에 나부끼는 성소수자 단체들과 진보정당 등 다양한 깃발들. 출처: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윤석열을 파면시켜 '승리했던 우리'를 앞으로의 논쟁을 쌓아올릴 신뢰와 호혜의 상징으로 둔 채, 이제는 '우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란 세력의 준동에 유예되어 있던, 우리가 말하는 사회대개혁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시작할 때다. 퇴진 광장이 말하는 사회대개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치열한 토론이 꼭 완벽한 답을 만들진 않지만 적어도 모호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민주공화국을 지키고자 모였던 최대 연대의 광장을 긍정하고, 광장 세력 간의 논쟁과 토론으로 새로운 공화국을 만든다면 그런 상상조차 가지지 못한 세력들의 힘은 자연스럽게 사멸할 것이다.

 

여전히 다른 세상에 대한 토론이 시기상조라 하는 이들도 보인다. 우원식 국회의장의 개헌 논의 제안에 "내란 세력 척결이 우선이니 전선을 흐리지 말라"는 일부의 반응은 이를 대표한다. 그러나 '우리'라는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는 절대 연대를 유지할 수 없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논쟁을 피하는 것은, 승리했던 '우리'가 누군지에 대한 해석의 부딪힘을 낳을 뿐 연대를 굳건하게 하지 않는다. 어쩌면 논쟁에 대한 두려움이 낳는 최악의 결과는 제2의 윤석열을 맞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은 곳에는 늘 위기가 자리하기 떄문이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다름에 집중할 때다. 더 치열한 논쟁과 경쟁의 장을 시작하자.


 

정재환

전환 집행위원장.

세상 모든 일에 넓고 얕은 관심을 가지며 살고 있다.


각주

  1.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90764.html [본문으로]
  2. 김용민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hare/p/1DEqQY94Uq/  [본문으로]
  3. ['비상계엄' 선포 그 후, 국회로 향한 전장연]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발언 무편집본 https://www.youtube.com/watch?v=fWqtOHElxzo  [본문으로]
  4.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665  [본문으로]
  5. 고진수 도운 말벌 동지? “‘꿀벌’ 노동자 지키려 분투하는 사람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910.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