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정치 일반

이준석의, 그리고 혐오정치의 정치적 파산을 위해

by Domoleft 2025. 5. 30.

[정치] 이준석의, 그리고 혐오정치의 정치적 파산을 위해

대선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내뱉은 여성혐오 발언이 사회적 논란을 빚고 있다. 이번이 결코 처음이 아닌 이준석의 '혐오정치'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가? 이준석 사퇴를 요구하는 연대서명을 앞장서 발표했고, 이준석의 정치를 통렬히 비판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돌곶이포럼 활동가 나민의 글을 게재한다.


제21대 대선 3차 토론회에서 권영국 후보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여성혐오 발언을 내뱉는 이준석. 출처: JTBC

 

2025년 5월 27일, 제21대 대통령 선거 3차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는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를 전면화하는 문장을 내뱉었다. 그 자신도 엽기적이라고 인정하는 표현을 공론장에 등장시킨 이유에 대해, 이준석 후보는 "해당 표현이 여성혐오인지를 질의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다른 누군가가 발화한 문장을 자신은 단지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표현에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아니라 해당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요컨대 이준석은 자신과 자신이 발화한 표현 사이에 분리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인용자와 인용 문장 사이의 분리 가능성, 인용한 자신과 그 문장의 등치 불가능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내가 그 문장을 처음, 직접 말한 게 아닌데 왜 나를 공격하는가?' 이것이 그가 견지하는 논리의 구조다. 이러한 논리가 성립되는 것은 발화가 오직 직접 인용의 법칙만을 따른다는 믿음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준석은 말했다. " " 이 따옴표가 비어 있는 것은 오타가 아니다. 이준석의 정치에서 상정하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직접 인용의 법칙으로만 기능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주어와 따옴표 안의 문장이 서로 명확하게 분리된 사회. 따옴표 안의 문장이 무엇이든 간에, 말하고 있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사회.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나 아닌 것'이 결코 나에게 침투할 리 없다는 무균실적인 믿음이자 나와 나 아닌 것 간의 분리를 만든 선행적 구조를 향한 절대적인 복종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새로운 관계맺음이 필연적으로 저지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정당화하는 이준석. 그러나 그의 정치가 파산할 것이고 또 파산해야만 함은 이미 명료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도, 사유도 없는 정치인의 정치적 효능이란 대체 무엇인가.


전장연과 동덕여대 투쟁을 '비문명'으로 비하하는 이준석. 출처: 이준석 페이스북 캡쳐

 

앞선 2차 토론회,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이준석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와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을 부득부득 '비문명'이자 '폭력 사태'라고 규정하며 이들의 투쟁을 '사회 질서 훼손'으로 일축해 왔다. 이렇게 당당하게 누군가를 규정하는 그의 정치는, 그러나 장애인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 제도의 미비함과 구조적 차별의 문제, 학생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기업의 사유재산으로만 대학을 간주하는 교육 제도의 위기 앞에서는 침묵한다. 그 대신 모순과 갈등을 심화하는 기존의 질서에 기생한 채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배타주의의 강화만이 '공공을 위한 일'이라고 설파한다.

 

위험한 것은 이미 이러한 정치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2차 토론회 이후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장애인권영화제에서는, '그리니치'라는 이름의 한 밴드가 영화제를 방해하고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야외 상영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공연을 진행하며 장애인을 향한 혐오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상황이 벌어졌다. 해당 밴드는 SNS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비판한 사람들에게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는 당신들이 대중이라고 생각하냐"는 답변을 달았다. 자신의 팬 또는 대중으로 상정되는 집단과 장애인권을 지지하는 집단을 확고하게 구분하는 이들의 태도에서는 이준석의 정치가 여실히 기능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가 표방하는 정치에서 이쪽과 저쪽의 영구한 대립 외에 다른 관계에 대한 만남 또는 대화란 일체 불가능하다.

좌측부터: 서울장애인권영화제에 난입해 경찰의 제지를 받는 밴드 '그리니치' / 인스타그램에서 시민의 비판에 대응하는 해당 밴드. 출처: 서울장애인권영화제 / 밴드 '그리니치' 인스타그램 캡쳐

 

이번 대선 토론회에서 이준석이 경악스러우리만치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대화 불능의 태도 역시도 이에 기반한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방안이란 대화를 차단하는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것이다. 상대로부터 나를 완벽하게 구분짓고 교통을 위한 일체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그가 정의하는 토론에서의 '승리'이므로, 이준석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상대 후보의 말을 숙고하거나 생각의 차이를 살피는 대신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을 훼손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이준석의 발화는 질문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신의 의도 아래 규정짓는 폭력적 해석만을 산출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3차 대선 토론에서 이준석이 읊은 문장들 역시 결코 대화를 위한 질문으로써 작동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던지고 그것을 '분별해 보라'는 이준석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모욕이다. 답변을 요구받은 권영국 후보와 민주노동당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 공론장의 구성원인 여성과 청소년들을 비롯한 소수자들에 대한, 수많은 여성혐오범죄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국 사회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자 성폭력을 무분별하게 재현한 언어 성폭력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여성혐오적인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이준석은 계속해서 변명한다. 그러나 토론회 이후의 시간을 통해 이준석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가 이 세계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준석의 생각과 달리 그가 인용한 문장은 따옴표 속에서 그와 분리되지 않고 긴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말이 지시하는 것은 결국 그 말을 공론장에 불러낸 이준석이다. 혐오표현을 공론장에 전시해도 된다는 신호를 주는 이준석이다. 상대 후보를 비판하겠다는 명목으로 가짜뉴스를 유통하고 여성혐오를 강화하는 프레임을 제공하여 여론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믿는 이준석이다. 여성혐오적 표현을 무분별하게 재현하면서도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이준석이다.

 

3차 토론회에서 이준석이 해당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드러낸 것은 결코 '진보의 위선'이나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자신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구조적 성폭력과 성착취 산업이 공고한 한국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능력이 전무하다는 사실이자, 불평등한 사회에 대항하는 새로운 상상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자백한 것과 다름없다.


TV토론 발언 논란에 대한 이준석 후보의 반응. 출처: KBS

 

여전히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이라는 식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안하무인의 유세를 이어가는 이준석의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그가 채택한 정치적 방법론의 붕괴를 전망함과 동시에 고대한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위기는 비단 하나의 원인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기에, '살 만한 삶'의 조건을 다시 숙고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속한 다층적인 구조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다양한 대화의 방식을 가능케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준석은 개인의 삶이 다른 형태의 삶들과 맺는 복잡성을 뭉개고 삶을 하나의 도식으로 치환한다. 이쪽에는 내가, 저쪽에는 '쟤'가 있다. 쟤의 몫을 뺏어야지만 나의 몫을 지킬 수 있다. 역으로 나의 몫이 부족하다면 쟤가 나의 몫을 뺏은 것이다. 살 만한 삶을 위한 조건은 단 하나, 쟤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이다.

 

결국 이준석의 정치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한 반사 작용을 훈련하는 일에 불과하다. 타자로 하여금 나(라고 믿는 것)이 위협받아서는 안 되므로 나와 쟤를 얼마나 빨리 구분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의 잠재적 이득을 위해 쟤에게 할당된 이득을 얼마나 조정해야 하는지를 얼마나 신속하게 식별할 수 있는지가 이 정치의 핵심 관건인 셈이다.

 

이 직관 훈련을 위해 이준석이 사용하는 것은 혐오와 차별이다. 주요 후보별 쇼츠 영상 조회수를 집계한 통계에서, 혐오발언을 대놓고 내뱉는 이준석 후보의 영상이 전체 대선후보 관련 쇼츠 9천만 뷰 가운데 82%라는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지향하는 정치란 일견 아주 명확하고 '시원해' 보이는 혐오발언들을 통해 혐오로 오염된 직관을 육성하는 것, 그를 통해 구조적 불평등과 각종 사회문제들을 대화하고 논의하려는 의지를 정치의 장으로부터 배제하고 대신 그 자리에 특정한 자리로 구획된 존재들 - 즉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향한 분노와 혐오를 채워 넣는 일인 것이다.

대선후보별 유튜브 쇼츠 조회수 비교. 출처: 비디오머그

 

상호 침투나 얽힘이 존재하지 않는 무균실적 지향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회 속에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침투적인 관계로 살아간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지구적 감염병의 시대를 거치고 또한 지난 4개월 동안의 탄핵 과정을 거치며 온 몸으로 생생하게 겪어 왔다. 나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긴밀하게, 또 얼마나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었던가. 여성과 농민, 성소수자와 장애인, 노동자와 학생. 무수히 이어나갈 수 있는 숱한 관계들 속에서 '나'는 결코 하나의 자리에 위치하지 않으며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나 자신과 타인은 언제나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다는 앎 속에서,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는 이준석이 믿어 의심치 않는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상호 관계적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갈라치기만을 정치의 전략으로 구사하는 이준석은 틀렸다. '상대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사용했을 뿐, 자신과 그 말은 무관하기 때문'에 스스로 여성혐오적 표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이준석은 틀렸다. 여전히 '나'라는 단일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준석은 틀렸다.

 

대통령 후보로서 이준석이 대변하는 것이 고작 사회구조적인 위계와 격차에 수긍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 서로의 삶에 우리가 깃들어 있고 책임이 있음을 망각하는 사회, 관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절단에 대한 강박으로 가득한 사회, 궁극적으로 평등에 대한 불가능성을 단언하는 사회일 때, 우리는 결코 그가 탄핵 이후 우리의 삶을 티끌만큼도 대변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부서지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탄핵 광장에서 도대체 뭘 느낀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이준석의 세계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알고 있다.

한예종 돌곶이포럼의 입장문 <이준석 후보를 용납할 수 없다>. 출처: 돌곶이포럼


나민

아시아 영화 운동사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자본에 구획되지 않는 삶을 믿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돌곶이포럼에서 비정기간행물 <얼룩진>을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