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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역사

착취당한 자의 착취: 하위제국주의로서 한국의 역사 돌아보기

by Domoleft 2025. 8. 29.

[역사] 착취당한 자의 착취: 하위제국주의로서 한국의 역사 돌아보기

8.15 해방으로부터 80년, 이재명 대통령은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부강한 나라"를 칭송하고 김민석 총리는 "제국적 사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에게 착취당한 또 다른 국가들의 서사란 없다. 피식민 국가에서 착취를 가하는 하위제국주의 국가로 빠르게 변화해 온 지난 80년의 대한민국 역사를 돌아보며 진보의 새로운 역사인식을 함께 고민한다.


80주년 광복절, 해방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기

2025년 8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대통령. 출처: 대통령실

 

"지난 80년 동안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취를 이뤘습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고, 군사력 5위, 경제력 10위권 선진 민주국가로 우뚝 섰습니다. (...)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독립투사들과 애국선열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25년 8월 15일, 이재명 대통령은 8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이러한 언사는 한국이 전후 탈식민 국가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중 과업을 완수하였다는 것, 곧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성공의 신화'를 집약적으로 재현한다. 달리 말해,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초래된 경제-정치 영역에서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여 강국으로 거듭났다는 서사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정말 1945년 해방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재명 대통령의 연설을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 한 줄 없이 매카시즘적 언사로 일관하였던 2023년 윤석열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의 연설 또한 해방과 탈식민을 '성장과 발전'의 패러다임으로 협소화시킨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려스러운 지점은 남아 있다. 이 경우 식민 통치의 경험과 해방의 역사적 경험은 '제국주의에 다시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담론으로 쉬이 전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복 80주년을 맞은 오늘날, 진보를 추구하는 우리가 해방의 의미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8.15 해방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다시 말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경제적, 군사적 강국으로 거듭나는 것이 탈제국과 탈식민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은 진정으로 제국과 착취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웠는가?


하위제국주의, 탈식민과 냉전 사이 한국의 이중적 국가정체성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그러했듯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루이 마우로 마리니(Ruy Mauro Marini)가 제시한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 개념은 매우 유용한 분석 틀을 제공한다.

루이 마우로 마리니(1932~1997)

 

하위제국주의란 1960년대 브라질처럼 특정 지역 - 브라질의 경우에는 라틴아메리카 - 내에서는 헤게모니를 행사하지만, 동시에 미국과 같은 중심부 제국주의 국가에는 종속되어 있는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즉, 세계 체제의 중심부에는 종속되면서 주변부 국가는 착취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칭한다. 이는 반(半)주변부 국가로 기능하였던 한국의 상황과도 닮아 있는데, 한국은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냉전 질서의 자장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위제국주의는 피식민의 역사적 경험과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가해자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한국의 모순적인 국가정체성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는 종속되면서 제3세계 국가는 착취 대상으로 삼는 한국의 하위제국주의적 정체성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그 뿌리는 정부 수립 직후 한국이 점유하였던 독특한 위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직후 한국은 남북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탈식민 국가이자, 신생 독립국이자 분단국가이면서, 동시에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중층 조건 하에 있었다.[각주:1] 요컨대 한국은 냉전적 자본주의 국가로서는 제1세계에, 탈식민 국가로서는 제3세계에 동시에 속했던 셈이다.

 

그런데 한국은 대체로 제1세계의 첨병이 되는 길을 택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시아 탈식민 국가들이 반제국·반식민·비동맹주의를 기치로 한 반둥 회의를 가졌을 때, 한국은 초청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흐름을 '용공적인 것'으로 보아 적대시했다. 195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혁신세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적 집단이 이러한 흐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반면, 한국의 지배세력은 이들을 불온집단으로 몰아 체제 바깥으로 축출시켰다. 냉전의 제1세계와 탈식민의 제3세계 사이에서 표류하던 한국은 점차 전자를 향해 나아갔다.


한일협정과 동아시아 냉전체제로의 편입

1965년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한편, 미국은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시기부터 한국을 일본 중심의 동북아시아 집단안보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 간의 외교 정상화가 필수적이었으나, 제1공화국기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 정부가 구 식민국이었던 일본을 불신했을 뿐 아니라, 합법정당이었던 일본공산당이 (현재는 그렇지 않지만) 정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일본이 (자신들과 달리) 충분히 반공적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각주:2] 때문에 이승만 정부 시기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 노력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도는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며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권의 정통성이 미약하였던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의 동력을 제공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승인 및 지원을 얻음으로써 정권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각주:3] 마침내 전국적인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됨에 따라 한일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한일협정에 대해 보수 진영은 경제성장의 동력 및 '자유 진영' 국가 간 연대의 역사로, 진보 진영에서는 굴욕적·종속적 협상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떤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한일협정을 계기로 한국이 미국 주도 하의 동아시아 지배질서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 놓여 있으면서도, 아시아 지역에서는 (하위)제국주의 국가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잉태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바로 베트남 전쟁, 즉 월남전 파병이다.


월남전 파병,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신화

미국은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고자 했고, 마침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었다. 한국 또한 미국을 따라 수많은 군인들을 파병하여 이 제국주의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오늘날 한국이 월남전을 기억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월남전 참전이 곧 경제성장의 마중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이 '자유'의 편에서 베트남 양민을 보호하였다는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 중 베트남전에 참전한 주인공 덕수와 동료들

 

천만 관객을 달성한 2014년작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행보는 이러한 신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덕수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역군'으로서 서독에 광부로 파견된 직후 곧바로 월남전에 참전한다. 국제시장에서 월남전의 한국군은 한국전쟁의 미군과 사실상 동일시된다. 어린 시절의 덕수가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해 구조되었다면(흥남 철수), 베트남 전쟁에서는 베트남 어린이를 구조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이러한 대비는 한국이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으며, 침략자가 아닌 '자유의 수호자'로 베트남 민중을 돕기 위해 참전하였다는 서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재현은 오늘날 월남전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주류적 기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한국의 월남전 파병은 결국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에 공모하였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정권과 군이 월남전 파병을 강행하며 대민관계를 중시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주월한국군은 베트남 사회와 종종 충돌하였으며 베트남 민중들 또한 대체로 한국군에 호의적이지 않았다.[각주:4] 일부 한국군은 베트콩을 제거한다는 미명 하에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기도 했다. 한국군 해병대가 당시 저지른 퐁니-퐁넛 마을 학살의 경우 한국 사법부에서도 그 배상 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한일협정을 계기로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에 편입된 한국은 베트남 전쟁 개입을 감행함으로써 마침내 하위제국주의의 경로로 들어서게 되었다.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한 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하위제국주의적 면모가 중심부 제국주의 국가의 압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한계 내에서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고자 한 능동적 선택이었음을 보여 준다.[각주:5] 즉, 한국의 베트남 개입은 하위제국주의적 행위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콩 게릴라로 지목된 베트남인들을 생포한 주월한국군


한국 기업의 개발도상국 진출과 노동착취

한편 한국의 하위제국주의적 흐름에는 국가뿐 아니라 자본, 곧 기업 역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형 산업화 모델은 국내 노동력의 착취, 즉 저임금 구조의 유지를 통한 해외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력 확보를 골자로 했다. 이는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 제조업의 양적 성장을 이루어내었고 현재까지도 보수층에게 '한강의 기적'이라는 명목으로 칭송되곤 한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촉발된 노동운동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질적으로 성장하고 민주노조운동이 분출하자 기존과 같은 착취적 자본-노동 관계는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 199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내의 계급 갈등을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한국 정부가 1994년의 우루과이 라운드 및 1995년의 WTO 설립에 핵심 회원국으로 참여함에 따라 자본의 국경 이동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개발도상국으로 대거 진출했으며, 이는 해외직접투자(FDI)의 급증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자본이 국내의 저항을 피해 새로운 착취의 공간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개발도상국으로 착취의 공간을 옮긴 한국 기업은 국내에서 억제되었던 전근대적 착취 구조를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재현했다. 대표적인 사례만 몇 가지 열거해 보자. 한국계 다국적 기업인 일경의 필리핀 현지법인인 필스전은 2008년 농성에 나선 노동자 2명을 납치하거나, 200여명의 파업 노동자를 폭행한 바 있다.[각주:6]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더욱 폭력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2014년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공장에서 국외 삼성 사업장의 첫 번째 합법 민주노조가 설립되자, 사측은 노조원 협박, 폭행, 용역깡패 동원 등을 통해 불과 40여일 만에 이를 와해시켰다.[각주:7] 국제노총(ITUC) 사무총장 샤란 버로가 지적하였듯, 한국 기업은 "아시아 전역에서 반노조·노동억압·착취 등을 일삼고 있다".[각주:8]

삼성전자 인도네시아 공장의 노동탄압과 착취에 맞서는 인도네시아 금속노동조합연맹(FSPMI)의 시위. 출처: 한겨레

 

또 다른 예시로, 한국 기업 대우로지스틱스가 아프리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시도했던 경제 식민화의 사례는 이미 한국 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08년 대우로지스틱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화하던 마다가스카르의 라발로마나나 정권과 유착하여 전라남도 전체 면적과 맞먹는 13,000㎢의 농토를 99년 간 임차하는 계약을 맺었다. 농토 임차의 목적은 과거 미국이 하와이나 남미 국가에서 진행했던 것과 유사한 대규모의 옥수수 플랜테이션 농업이었고, 이는 결국 경제주권 양도와 환경파괴에 분노한 마다가스카르 민중의 봉기로 정권이 퇴진하는 단초가 되기까지 했다.[각주:9]

 

한국 기업의 하위제국주의적 행태는 노동착취와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수탈을 넘어 이제 전쟁과 학살에 공모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UN 팔레스타인 특별보고관이 서안지구 불법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위한 가옥파괴에 동원되는 중장비를 이스라엘에 수출 중인 HD현대와 두산을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관여 기업 명단에 포함하였음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각주:10] 오늘날 제3세계 주변부 국가에게 있어 한국은 탈식민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가 아니라, 과거 자신들을 억압했던 제국주의 국가를 닮아가는 신(新) 하위제국주의 국가일 뿐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가옥을 파괴하는 HD현대의 중장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제국을 향한 욕망

그렇다면 왜 한국은 식민 지배 및 제국주의적 착취의 경험을 지녔음에도 이러한 문제에 둔감한가? 임지현 교수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 개념은 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란 '후속 세대들이 앞 세대가 겪은 희생자의 경험과 지위를 세습하고, 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들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서사'를 뜻한다.[각주:11]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경험은 한국인에게 '희생자 민족'이라는 강력한 집단정체성을 부여했다. 이는 다른 피착취 집단과 연대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이 언제나 제국주의의 희생자라는 인식을 공고히 했다. "결코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한민족이라는 서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각주:12]

 

"(...) 또 하나는 제국적 사고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제국적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제국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늘 식민주의만 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이 언제나 희생자 내지 피해자였다는 인식은 도리어 우리가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25년 7월 16일, 대한상공회의소 하계포럼에서 김민석 국무총리는 기조연설을 통해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이 항상 '희생자 민족'이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당했으나, 이제는 '제국적 사고'를 갖고 당당히 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로는 결코 '우리 안의 제국주의'를 사유할 수 없다. 가해자-희생자의 이분법적 구도는 그대로 둔 채 양자의 위치만 전위시키는 것은 제국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대한상공회의소 하계포럼에서 기조연설을 진행하는 김민석 총리. 출처: 경향신문


피착취와 착취의 역사를 동시에 사유하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에게 있어 8.15 해방은 어떻게 사유되어야 하는가? 식민 통치와 해방의 경험을 '강한 나라를 만들어 다시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당하지 않겠다'는 민족주의적 다짐으로만 사유해서는 안 된다. 8.15 해방은 과거 피착취의 고통을 기억함으로써 오늘날의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 스스로의 가해자성을 성찰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8.15 해방의 정신을 정말 계승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자본과 군사력에 의해 고통받는 다른 주변부 국가의 민중들과 연대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과거의 제국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제주의적 연대를 통해 모든 형태의 지배와 착취에 반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탈식민을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노재훈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혁신세력과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탐구하고자 한다.
맥주와 한국 대중음악을 좋아한다.


각주

  1. 김도민, 「1948~1968년 남북한의 중립국외교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21. [본문으로]
  2. 최희식, 「이승만 정부 시기의 한일관계: 한미일 냉전전략의 불협화음과 한일관계의 정체」, <세계지역연구논총> 27-3, 2009, 138-139쪽. [본문으로]
  3. 「한일협정과 미국의 압력」, <한국동북아논총> 15-1, 2010, 128-129쪽. [본문으로]
  4. 류기현, 「주월한국군의 대민관계: 참전 군인들의 구술 증언을 중심으로」, <구술사연구> 11-1, 2020, 77-78쪽. [본문으로]
  5. 민주화운동사전https://dict.kdemo.or.kr/entry/137/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우선적으로 제안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1964년 미국이 동맹국에 참전을 요청하자 한국이 개입하였다.  [본문으로]
  6. 한겨레, 필리핀 최악의 노동탄압 지역서 한국기업 ‘필스전’ 대표사례 꼽혀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274931.html [본문으로]
  7. 한겨레, 국외 첫 민주노조 파괴까지 단 40일… “삼성은 무서운 기업”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9116.html [본문으로]
  8. 경향신문, [커버스토리]인도네시아 농장·멕시코 공장에서…한국 기업도 노동 착취 눈감았다 https://www.khan.co.kr/article/201804210600035 [본문으로]
  9. 미디어오늘, 대우의 마다가스카르 '땅뺏기' 계약을 아시나요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396 [본문으로]
  10. 프레시안, '팔레스타인 집단 학살' 가담해 한국기업 이익 창출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70618002331848 [본문으로]
  11. 임지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휴머니스트> 2021, 24-25쪽. [본문으로]
  12. 신형식, <한국사 입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16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