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 ③ 그리고 앞으로
그 어떤 시대에도 체제와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사회적 수단으로서의 예술은 항상 존재해 왔다. 세계사와 한국사의 맥락 속 교차하는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의 발전사를 함께 되짚어 보자.
* 본 글은 2부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 ② 발전기>에서 이어집니다.
1932년, 미국의 부호 록펠러 가문의 존 D. 록펠러와 애비 앨드리치 록펠러는 록펠러 빌딩을 세운 이후 벽화를 그릴 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고른 화가는 바로 이제는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였다. 록펠러 부부는 MoMA(뉴욕현대미술관)의 창립자로, 프리다 칼로와 마찬가지로 저항미술가이자 공산주의 성향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해온 리베라의 오랜 팬이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서 있던 록펠러 가문이 공산주의 예술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그들의 부탁을 받아 벽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1930년대 미술계의 논란을 불러온 <교차로에 선 인간>이다.
해당 프레스코는 록펠러 빌딩에 그려졌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벽화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의 대조를 그려넣은 것이 주제로, 그림의 오른편에는 메이데이 퍼레이드를 하는 노동자들과 다인종의 노동자들의 손을 잡은 블라디미르 레닌, 왼편에는 부유한 이들이 카드놀이를 하며 흡연을 하고 경찰이 곤봉을 들고 있는 등의 이미지를 그려넣었다. 또한 분노한 제우스, 토양, 과학적 진화 등을 통해 윤리와 과학, 멕시코의 자연 등 다양한 주제를 그림 안에 담아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구원자처럼 그려진 이 그림을 두고 당시 뉴욕시의 지역 신문인 뉴욕월드텔레그램(New York World-Telegram)은 'anti-capitalist propaganda(반자본주의 선전)'이라며 비난했으며, 당대 뉴욕에서 큰 논란으로 번지자 넬슨 록펠러 역시 리베라에게 레닌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리베라는 해당 요청을 거부하며 오히려 에어브러햄 링컨, 해리엇 비처 스토(<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 노예해방론자), 냇 터너(1800년대 미국의 흑인 반란을 이끈 노예 출신 혁명가), 존 브라운(무장 노예해방론자로 피의 캔자스 당시 블랙잭 전투를 지휘) 등을 추가로 그려넣는 것은 찬성하지만 레닌을 지울 수는 없다고 거부하며 자신의 입장을 완강히 드러냈다. 록펠러 측은 이에 벽화 작업 중단을 요구했으며 급기야 벽화를 철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사건에 대해 존 슬론, 랄프 스택폴 등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이나 좌파 성향 단체, 노동조합 등이 반발하며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해당 그림은 철거되었으나 이후 리베라는 멕시코시티의 팔라시꾸 예술궁전에 이를 다시 그려넣었다. 해당 그림에는 적기를 잡은 레프 트로츠키,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가 추가되고, 머리 위에 매독 바이러스가 올려진 존 D. 록펠러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표현했다.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정치적으로 모이는 계기가 되었던 이 사건은 미국 내 풍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왔다. 그러나 아무리 권력가와 재력가들이 막으려고 하더라도 이 흐름은 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피티
80년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저항미술을 논하면서 그래피티(Graffiti)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피티는 제대로 미술을 배우지 못했던 이들의 가장 강력한 문화적 표현이자 저항의 상징이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이와 같은 흐름, 즉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적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다. 그래피티 팀 SAMO(SAMe Old ish)로 활동하던 그는 앤디 워홀을 만나 유명세를 타면서 당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티스트로서 몇 안 되는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바스키아의 달라진 위상에도 그를 향한 인종차별은 계속되었는데, 바스키아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주류 문화에 있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와 공연자들이 철저히 배제된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확인하게 된다.
1983년 작 <할리우드 아프리칸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배제, 차별을 풍자한 그래피티 작품으로, 바스키아가 Toxic(그래피티 아티스트), 람엘지(RAMM:ΣLL:ZΣΣ, 힙합 아티스트)와 함께 1982년부터 활동한 크루의 이름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아프리칸스'들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주류 문화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편견, 스테레오타입, 차별에 저항하며 정치적 행동을 이어갔다. <훼손>은 1983년 25세 흑인 작가 마이클 스튜어트(Michael Stewart)가 그래피티 작업 도중 경찰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분노한 바스키아가 그린 그림으로, 마이클 스튜어트 사건을 가시화하고 경찰들의 인종차별과 과잉 대응, 폭행을 알리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그래피티의 역사에서는 소외와 배제 없는 세상을 꿈꾸며 모두가 춤추는 세상을 그리던 화가, 키스 해링(Keith Haring) 역시 중요하다. 뉴욕 지하철에 그래피티를 하며 공공기물 훼손으로 수 차례 경찰에 체포되곤 하던 그의 그림은 어느덧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며 유명세를 탔다. '미술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고 모두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그의 사상에 입각해 키스 해링의 전위적인 그래피티들은 AIDS, 약물,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차별받는 이들을 그려 나갔다. 그의 그림이 돈을 받고 팔리기 시작하자, 그는 소호에 스스로 가게를 열어 자신의 작품을 디자인화해 누구에게나 싼 가격에 판매하곤 했다.
키스 해링의 그림에는 당대 성소수자들의 삶이 아주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무제(춤)>에서의 1980년대 미국의 게이클럽의 모습들, 성적 묘사는 물론 콘돔 착용 등 안전한 섹스에 대한 그림으로의 조언까지 담은 <안전한 섹스> 시리즈 등이 그렇다. 마국 성소수자 운동의 상징적 사건이었던 1969년의 스톤월 항쟁 이후로도 차별이 가득했던 미국에서, 그는 동성애가 추악한 것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이고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예술적 메시지로 전파하며 뉴욕의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 금전적, 예술적 지원을 이어나갔다. 키스 해링은 이외에도 <Michael Steward-USA for Africa>라는 그림을 남기며 앞서 바스키아를 다루며 언급했던 마이클 스튜어트 사건을 고발하는가 하면, 반핵운동을 주도하고 예술노동자들을 지원하며 사회운동가로서 폭넓게 활동했다. 이와 같은 그래피티 문화의 저항 정신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며 거리 예술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뱅크시(Banksy)에게로 이어지기도 했다. 1
자매들과 동지들에게
이제는 제3세계로 눈을 돌려 볼 때다. 이 무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세계사 최악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손꼽히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당시 키스 해링은 백인에게 목줄이 차인 흑인이 하나가 되어 백인을 짓밟는 <남아프리카에 자유를> 등의 그림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국제연대를 행했다. 동시대 남아프리카 현지에서도 저항의 미술은 물론 이어지고 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인상주의, 아방가르드 등 다양한 화풍의 화가들이 예술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와 싸우며 저항 조직인 아프리카국민회의(ANC, 현재 남아공의 집권당)를 돕거나, 자체적인 사회운동을 열어 나갔다.
조지 펨바(George Pemba)는 인상주의적 화풍 속에 아프리카의 전통과 가치를 담았으며, 남아공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나르 세코토(Gerard Sekoto)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차용해 당시 남아공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탐산가 므넬레(Thamsanga Mnyele)는 흑인 대중의 의식화를 촉발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걸개그림과 포스터를 그렸다.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로 망명한 므넬레는 그웬 안셀 등과 함께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지원을 받아 저항예술가들의 단체인 Medu Art Ensemble(Medu)을 조직하기도 했다. Medu는 남아프리카의 흑인 음악가, 연구자, 작가, 시인, 화가, 시각예술가들로 구성되어,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는 전시회를 열며 민중미술적 행보를 이어 갔다. Medu는 1985년 남아프리카 방위군의 가보로네 공습으로 탐산가 므넬레를 비롯한 주요 구성원들이 사망하며 해체되는 비극을 맞았으나, 이들의 정신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현재까지도 경제적 불평등, 여전히 잔존한 인종 문제 등을 비판하는 남아프리카의 저항적 예술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동 시대인 1980~90년대 아시아에서는 페미니즘 미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멜다 카지페-엔다야(Imelda Cajipe-Endaya)는 필리핀 페미니즘 미술의 거장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카지페-엔다야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여성 예술가 모임인 카시불란(Kasibulan, 여성과 미술의 새로운 의식)을 조직하며 페미니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이었다. 1983년 작 <국가의 열정(Pasyong Bayan)>은 이와 같은 카지페-엔다야의 경험에 힘입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마르코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맞선 사람들의 투쟁을 담고 있다.
이 시기 필리핀에는 동아시아나 중동 국가로 돈을 벌러 나가는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상황이었다(필리핀은 현재도 손꼽히는 가사노동자 수출 국가이다 - 편집부 주). 그러던 중 1995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필리핀인 가사노동자 사라 발바라간이 고용주에게 성폭행당할 뻔 하여 방어 도중 고용주를 살해한 것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건과, 싱가포르에서 필리핀인 가사노동자 플로르 콘템플라시온이 정신병력으로 인해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당한 것 등으로 인해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우, 처우 등의 문제가 필리핀의 국가적 문제로 퍼지게 된다. <The Wife Is a DH>에서 카지페-엔다야는 책이 든 가방에 팔다리를 붙이고 청소도구와 행주로 연결된 오브제를 만들어 필리핀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다양해지는 한국의 저항미술
과도기적 성향을 띤 1990년대가 지나가고 'X세대'의 주류화 이후, 국내 미술계에서도 다원주의적 화풍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 현대미술은 설치미술과 행위예술이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는데, 민중미술로서 함께해 오던 저항적 예술은 90년대 후반부터 엘리트화가 더욱 진행된 미술보다는 연극이나 인디음악계에서 더욱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미술, 퀴어 미술 등과 계급 문제를 다루는 저항의 미술은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설치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인 이불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자신의 색을 강하게 드러냈다. <사이보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나올 듯한 사이보그 여성의 성상품화된 몸매를 조각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주체성 없는 여성상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사회와 성상품화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더욱이 해당 작품은 이를 '비너스'나 '올랭피아'에 비유하며 서양미술사 중심적, 서구 중심적 가치관 역시 풍자한다. 이불의 남성 중심적 여성상에 대한 풍자는 풍선으로 만들어진 작품 <히드라>에서도 잘 표현된다. 이불은 <히드라>에 왕비, 게이샤, 무속인, 레슬러 등 복합적 이미지를 넣어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단순한 시선과 콤플렉스 등을 비판하는 동시에 동양 여성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역시 저격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혐오 혹은 가장 큰 무관심을 받아 온 이들은 바로 성소수자들일 것이다. 퀴어 미술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저항적으로 피어났다. 그 스스로도 퀴어 정체성을 가진 미술가 탁영준은 종교적 상징에 성소수자 혐오 기사나 자료들을 콜라주한 <구원>과 <속박(Chained)>으로 베를린 등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는 2014년 이후의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반동성애 진영의 개신교 신자들이 나눠준 선전물 등을 콜라주하여 붙인 것으로, 탁영준은 이를 통해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도덕성에 지배받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우려하고 있다.
남성성 및 전체주의에 대한 풍자도 존재한다. 커밍아웃한 오픈리 게이 작가인 오인환은 <진짜 사나이>, <태극기 그리고 나> 등의 작품 등에서 비디오 아트를 통해 진짜 사나이를 해체하거나, 태극기를 든 인물이 힘겨워 신음을 내다 결국 태극기도 무너지는 것을 표현하는 등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우려를 은유하고 있다. 동시에 오인환은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억압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작품에 강하게 담고 있다. 태극기를 든 인물의 신음소리는 국가를 지탱하는 한 개인의 힘겨운 소리임과 동시에 성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오인환은 <이름 프로젝트: 이반파티>를 통해서도 성소수자로서의 도시 속 익명성을 설파하기도 했는데, 해당 포스터에서는 오픈리 게이인 본인만의 이름을 드러내고 참여한 다른 커플들의 이름을 모두 가리며 성소수자는 여전히 들킬 수 없는 '벽장 속에 갇힌' 존재임을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의 정글에 놓여진 노동자들, 소수자와 약자들의 삶에 대한 고발 역시 2010~2020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치명타는 광장 속에 있고자 하는 화가로, 〈79.5%‧1,560,000원‧7일‧10시간‧6배〉 등의 개인전을 통해 노동자, 소수자의 삶을 작품으로 조명했다. 해고노동자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아내거나, 최저시급 6470원으로 구매 가능한 '최저시급 풀메이크업'을 강의하는 <메이크업 대쉬>라는 작품을 만들어 꾸밈노동과 꾸밈비용 등을 저격하기도 했다.
저항의 미술, 다시 우리의 미술
"예술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키스 해링의 말처럼, 미술은 모두의 것이어야만 한다. 과거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G20 홍보 패널 위에 정부의 정책을 풍자하는 '쥐' 그래피티가 그려진 바가 있었다. 언뜻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 같은 이 풍자화는 그러나 그래피티를 그린 이들이 공용물건손상 혐의로 기소당하며 큰 사회적 논쟁을 불러왔다. 결국 그래피티를 그린 예술가들은 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이 그림은 당시 시위에서 등장하며 정부의 '입막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았다.
다시 첫 번째 글로 돌아와 보자.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의 내란 시도 이후 많은 시민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헌법재판소 앞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그리고 서울 어딘가가 아니더라도 모두의 삶의 터전과 광장 속에 모여 목소리를 이어 왔다. 광장에 선 모든 깃발들, 트위터에서 만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온 깃발들 역시 그 자체로 저항의 미술인 것이다. 깃발, 포스터, 걸개그림의 용도로 만들어져 시위와 투쟁에 사용된 수많은 그림들은 지금 어엿한 '예술'로 그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광장에서 수많은 저항의 미술, 우리의 미술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 속에서 미술은 바로 옆에 선 이들을 그려내고 담아내며 부조리를 고발하고 기득권과 싸우려 노력했다. 우리가 웃거나 울거나 혹은 화내며 만들어 가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미술로, 저항의 미술로 남아 온 것이다. 저항의 미술은 앞으로도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그리며 싸우는 모든 순간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미래
고고·미술사학도. 미술, 문화, 역사 속에 흘러간 삶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낙관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고 믿는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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