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배제의 역사를 넘어: 진보정치는 어떤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매카시즘과 종북몰이로 일관하며 투쟁과 운동의 역사를 지우고자 하는 우익의 역사관,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민주당 역시도 '운동에 대한 배제'는 여전하다. 역사를 기억하는 독자적 진보정치의 방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홍범도를 지운 한국 우익의 사상적 목적지, 이승만
"내가 돌아오지 말걸
공연히 돌아와서 이 꼴을 보네"
국문학자 이동순이 적은 <내가 돌아오지 말걸>이라는 시는 위와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돌아와서 이 꼴까지 봤다는 시가 말하고 있는 것은, 2023년 재작년 여름 사학계를 관통했던 주제 중 하나인 육군사관학교 및 국방부 청사의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와 백선엽 흉상 건립 사건이다. 시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당시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논란의 중심이었던 인물인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이다.
분명히 시간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선 정국에 이 일을 굳이 꺼내는 이유는 최근의 이른바 '역사 논쟁' 중 가장 상징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성향 논란으로 정권 내내 역사관 문제를 의심받던 윤석열 정부는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사건으로 역사관 갈등의 방점을 찍었다. 당시 광복회 등이 완전히 돌아선 것은 물론 우익 성향 독립운동가였던 지청천과 이범석의 흉상까지 뽑히며 보수진영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며, 정의당 역시 이를 "반역사, 반국군 폭거이자 역사쿠데타"로 규정하며 강하게 규탄한 바 있다. 전국 60개 대학과 450여 시민들이 동참한 흉상 이전 반대 서명도 화제가 되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반대와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던 홍범도 유해 송환과 복권은 결국 다음 정권의 역사수정주의적 행보로 최악의 결말을 맺게 되었다. 1
'좌익',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통한 매카시즘으로 전임 문재인 정권의 흔적을 지우려 함이 자명해 보이는 이 행보는,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물론 매카시즘이 해당 사건의 단초인 것은 분명하지만, 단순히 매카시즘이 전부였다면 소련 공산당 당원이던 홍범도와 말년의 반공 노선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로 자주 언급되는 김좌진 정도만 없애면 될 일이었다. 심지어 박정희 정부에서는 홍범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고 노태우 정부는 유해 봉환을 시도했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는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SS-079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등 기존 보수진영이 홍범도의 행적을 인정해 온 것을 감안한다면 윤석열 정부의 갑작스러운 행보는 더욱 묘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없애기 위한 제물로서 사용된 것이라고 하기에도, 구태여 충무관에 존재했던 이범석, 이회영, 지청천, 김좌진, 안중근, 홍범도, 박승환의 이름을 딴 독립전쟁 영웅실의 이름까지 결벽증에 가깝게 없앤 것은 우익적 입장에서조차 노골적으로 이상한 행보였다. 오히려 이범석, 지청천은 우익의 입장에서 더욱 강조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레드 콤플렉스를 되살려 반민주당 정치를 하겠다 하여도 굳이 범국민적 존경을 받는 안중근의 이름까지 바꾸며 논란을 키울 이유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창군 이후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데다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이범석의 흉상을 제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이다.
결국 광적인 매카시즘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역사수정주의의 진짜 동기는 최근 극우, 뉴라이트들에게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승만의 부각과 함께 모든 '운동'의 역사적 배제에 있다. 윤석열은 105주년 3·1절 기념사에서 "무장독립운동만이 강조되어 왔다"며 "모든 독립운동을 언급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이의 일환으로 윤석열은 대통령 명의로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후원하는 등 지속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강조를 시도해 왔다. 특히 국가보훈부가 2024년에 발표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목록에 버젓이 이승만을 올린 것은 그 시도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2
올해인 2025년, 국가보훈부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이달의 독립운동'으로 변경하고 사람 대신 사건을 선정하기로 했다. 인물이 아닌 사건 자체를 선정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는 행동이 아니나, 문제는 선정된 사건들에 있었다. 12건 중 해외 독립운동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1940년 광복군 창설 단 2건에 불과하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김상옥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의거'나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등은 빠져 있었다. 즉 사회주의 진영의 배제를 넘어 무장독립운동 대부분이 배제된 것이다.
윤석열과 국민의힘 계열 보수의 목적성은 단순한 매카시즘을 넘어서 무장독립운동의 배제로 확립되는 역사의 '재조립'에 존재했다. 그렇기에 이들의 목적에 따른다면 '좌익'에다 '무장독립운동가'인 사회주의자 홍범도는 당연하거니와 그 날 봉오동과 청산리에 있었던 이범석, 지청천, 김좌진과 무장 투쟁을 후원했던 이회영 일가까지도 당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최근 우익들의 평가절하를 '친일 행보'로만 해석하는 이들도 많으나, 이는 단순히 '친일 대 반일'이라는 간편한 도식화를 넘어 이들이 가진 사상적 기반의 문제이다. 결국 이들은 무장 독립운동과 같이 소위 '바닥에서 구른' 행보를 평가절하하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문명적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한 엘리트 우익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를 독립운동사의 중심에 두려고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홍범도 흉상을 축출하고 엘리트 군인이었던 백선엽의 흉상을 세우려고 했던 국방부의 행보 역시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모든 행보의 근간에는 배우지 못하고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 온 모든 이들에 대한 노골적 배제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 하에 극우 폭력단체들이 승승장구해 온 역사나 우익 진영이 일으켰던 백색테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자신들의 사상적 당위성을 설명해 줄 '이승만 박사' 등 소위 '세련되며 배운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목적이 중심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우익이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전반에 대해 배제와 혐오로 접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관 하에서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국 우익의 근간이 되는 이와 같은 운동 배제적 사상은 오늘날 극우 성향 커뮤니티의 여론에도 여실히 묻어 있다. 국가적 사고나 산업재해의 유가족들, 노동조합, 여성, 소수자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혐오는 결국 모든 '운동'에 대한 혐오에 기반한다.
바로 어제의 역사조차 잊은 대선
이승만을 앞세운 이후부터 한국의 우익은 '배제'를 가장 적절히 이용했다. 같은 우익이었음에도 '성골'은 아니었던 이범석과 지청천까지도 뒷전으로 치워 버린 배제의 정치는 결국 모든 이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12.3 내란으로 이어진 그들의 행보는 앞선 배제의 정치에서 기원했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모든 이들을 종북이자 반국가세력으로 취급하며 배제한 것은, 이미 역사에 대한 배제를 성공시켰던 이들에게는 더 쉬운 행보였다. 그러나 운동을 배제하려던 모든 이들은 결국 운동에 의해 탄핵되었다. 광장과 '말벌'들로 대표되는 연대로 뭉친 시민들은 가장 배제적인 이들을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몰아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안도는 잠시, 역사를 잊은 배제와 망각의 정치는 이어지고 있다.
4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대선후보로서의 첫 일정으로 대전의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참배했다. 논란이 된 것은 이 후보가 현충원에 안장된 이승만과 박정희의 묘역을 굳이 찾아가 참배한 것이다. '내란청산·사회대개혁 광주비상행동(광주비상행동)'은 29일 성명을 내 "내란세력의 뿌리인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참배는 죽어가는 내란세력의 숨구멍을 열어주는 일이다"라 지적한 바 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의 이승만, 박정희 재평가를 비판하던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가 "공과는 공과대로 평가하되 지금 가장 급한 건 국민통합이다"라며 이승만과 박정희를 참배한 것이다. 불과 며칠 뒤인 5월 4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 역시 이승만과 박정희의 묘역에 헌화를 했다. 사실상 양당이 모두 이승만, 박정희의 역사적 '공로'를 인정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자연히 '국민통합'이라는 명목 하에 이들의 결코 덮을 수 없는 과오는 자연스럽게 묵인된다.
이재명 후보가 과거 용산참사를 '자살폭탄테러'에 비유하며 희생자들을 비하한 이인기와 같은 인물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한 것 역시 역사에 대한 의도적 망각에서 비롯되는 배제의 정치이다. 그러나 '국민통합'이라면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폭력의 희생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그 자리를 주어야 할진대, 민주당은 이번 대선에서 여성과 퀴어에 대한 철저한 무시와 배제를 선거 기조로 삼고 있다. 광장에 나섰던 우리 모두는 광장을 채운 수많은 여성들과 광장에 나부낀 무지개 깃발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재명 후보는 4월 26일, 차별금지법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또 한 번의 후퇴를 감행했다. 5월 13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정책본부 관계자는 10대 공약 발표 이후 기자들과 만나 "여성에 대한 보장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또래의 남성들이 상처를 많이 받고 있다"며 "남성들에 대한 존중도 챙겨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빛의 혁명'을 수 차례 언급하며 광장을 호명하는 민주당이 정작 광장을 이끌었던 여성과 퀴어들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젠더 지우기'에 들어간 것이다. 3
이는 앞선 윤석열과 뉴라이트 진영의 '운동 배제'와 결코 다른 궤가 아니다. 소위 '시끄럽게 될' 문제들을 회피하고자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웠던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와해 위기가 있었다지만 이재명 후보의 싱크탱크로 기능할 것으로 알려진 '성장과 통합'에 구현모 전 KT 사장, 유종일 전 한국개발연구원장, 장병탁 AI연구원장 등이 이름을 올린 것, 과거 홍준표 캠프 출신으로 "친일이 정상, 반일이 비정상"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이병태 카이스트 명예교수를 선대위에 영입하고자 했던 것 등을 본다면 운동에 대한 배제와 엘리트들에 대한 호명,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용인은 이미 민주당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는 독자적 진보정치의 방식
1942년 4월, 홍범도는 그리던 전쟁의 종식과 고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카자흐스탄에서 눈을 감았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유해 송환이 여러 차례 추진되었으나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꾸준한 거부가 있었다. 홍범도는 단순히 한반도에 거주하는 이들만의 영웅이 아니라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유해 반환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여러 차례의 시도 하에 78년 만에 한반도로 들어온 홍범도는 바로 다음 정권에서 모든 행적을 부정당하며 '빨갱이'라는 미명 하에 흉상 철거 찬반 여론조사에나 이름을 올리는 존재로 격하되고 말았다.
전쟁 종식과 조선 독립을 꿈꾸며 제국주의에 맞섰던 조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는 배제의 정치 아래에서 또 한 번 역사의 뒤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불행하게도 그 배제의 역사는 윤석열이 물러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2025년 대선에서 노동조합, 성소수자, 페미니즘은 '또 하나의 홍범도'가 되어 가고 있다. 윤석열의 퇴진과 내란 종식, 사회대전환을 꿈꾸던 사회적 약자들과 노동자들은 광장 국면이 끝나자 논란과 배제의 중심이 되었다. 국민의힘이 그들을 비난할 때 그들을 대변한다 외쳤던 민주당은 이제 그들의 존재를 숨기기에 급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다수가 결국 자신들에게 투표할 것을 알고 있기에 자행하는 민주당의 고의적 배제는 너무나도 투명하다.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고 사회를 규정하는 집권세력으로의 도약을 목표하는 모든 세력에게는 그 자신만의 역사관이 필요하다. 진보정치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지난 5월 12일,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선거운동 일정이 시작되자마자 김형수 전국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의 고공농성장을 방문했다. 김문수, 이재명, 이준석 등 주요 대권주자들이 결코 찾지 않던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장은 권영국 후보의 첫 일정이었다. 독자적 진보정당의 역사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삶을 걸고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들, 차별 속 불평등의 피해자들, 존재함에도 지워진 삶들의 역사를 다시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배제의 정치에 맞서기 위한 진보정치의 역사관이다.
지난 4월 17일 <도모>는 조선공산당 100주년을 기념하며 특집호를 발행한 바 있다. 100년 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길들을 거슬러 오르며 평등과 해방의 정치의 시작점을 되짚고자 했다. 진보정치로부터조차 부정당했거나 잊혀졌던 그들의 역사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 독자적 진보정당의 역사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 역사는 '빨갱이'라며 매도당하며 지워진 수많은 홍범도들의, 필요에 의해 치워져 버린 투쟁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옵티칼 공장 위 박정혜, 소현숙의 역사, 한화그룹 철탑 위 김형수의 역사, 명동대로 위 고진수의 역사, 서울시교육청 앞 지혜복의 역사이다. 또한 그 역사는 '사회적 합의'에 존재를 종속당하며 무지개 깃발을 부정당한 수많은 광장의 퀴어들, 그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퇴진과 사회대개혁을 외쳤음에도 또 다시 외면당하고 있는 광장의 여성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이미래
고고·미술사학도. 미술, 문화, 역사 속에 흘러간 삶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낙관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고 믿는다.
각주
- [브리핑]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결정. 육사의 역사쿠테타, 치욕의 날로 기록될 것 https://www.justice21.org/newhome/board/board_view.html?num=159820 [본문으로]
- 윤 대통령,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500만원 기부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114463.html [본문으로]
- 민주당 10대 공약, 성평등·여성 정책 사라졌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election/1197114.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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