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소설: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을 저주했을까 (2화)
웹진 《도모》는 2026년 5월호부터 전환 회원이자 작가인 최정운의 소설을 독자투고란에서 월 1회 연재 중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부)

한참 동안 감았던 눈을 떴다. 반짝이는 햇살이 나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옆을 돌아보니 끝없는 라벤더밭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맡 허벅지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베고 누운 모양이었다. 다시 정자세로 누우니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현강 언니였다.
"깼어?"
언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의 얼굴은 마치 10대 같기도 하고, 30대 같기도, 60대 같기도 했다. 정수리에서 가느다란 손이 느껴졌다. 나는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언니의 손을 잡고 웃었다.
"언니는 후회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내가 물었다.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글쎄다."
언니가 내 입가에 손을 데고 머리카락을 골라내었다.
"누가 그러는데, 희망의 뒷면을 후회라고 부른대."
나는 언니의 표정을 파악하려 애썼다.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는 것도 같고 울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평생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몰라."
언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귀 안을 파고들었다. 나는 어째선가 마음이 다급해져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행복해?"
대답을 듣고 싶었다. 강한 바람이 라벤더 꽃잎을 몰고 왔다. 라벤더 꽃잎이 부딪히는 소리에 언니의 목소리가 묻혔다.
바람 소리뿐이었다.
바람 소리만.
바람.
알람이 우렁차게 울렸다. 눈을 뜨니 생경한 모습의 창문이 보였다. 아, 맞지. 잠시 내 몸 밖으로 떠나있던 기억이 서서히 돌아왔다. 붕 뜬 머리를 바로 잡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넓고 이름 모를 이름의 가구들과 미니바에 가득 찬 음료수까지. 하루 전까지 좁은 옥탑방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몇 해 전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국내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 묵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행을 다녀온 후 그는 큰돈 쓰고 간 여행이었음에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니 미친 듯이 불안했다고. 고개를 늘어트리며 말했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마 평생 닿지 못할 다른 세계의 편린을 말이다. 잠시 천장을 올려보았다. 역시 아침엔 생각이 많아진다니까. 머리를 긁적였다.
하얀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오믈렛과 빵, 볶음면, 과일… 적당히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담고 보니 혼자 다 먹을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 휴대폰을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였다. 음식을 대충 입에 욱여넣으며 조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조식당 안은 이미 한 번 정도 태풍이 지나가고 조금 한산해진 모양이었다.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입 안에 넣었다. 유럽 소시지는 한국 소시지보다 약간 더 짠맛이 강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족, 연인, 친구들… 모두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나마 혼자 온 사람들은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마 저 사람들은 직장이 있겠지. 속으로 되뇌며 커피로 쓰린 속을 달랬다. 그때 어디선가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나는 에그 베네딕트를 주문했다니까! 그런데 지금 스크램블드 에그가 나왔잖아!"
커다란 목소리가 조식당을 울렸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식탁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풍채가 큰 백인 남성이 직원으로 보이는 아랍계 남성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 대자 직원은 계속 프런트 쪽을 흘깃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직원의 난처한 표정이 계속 눈에 걸렸다. 누군가가 나서면 따라서 제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관광객이고, 혼자 싸움에 휘말려서 난처해지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누가 나서준다면, 따라나설 용기는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가 일어나서 고성이 오가는 자리로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러나 그가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이미 매니저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아랍계 직원을 타이르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남자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왜 늘 먼저 나서지 않을까. 항상 생각만 하고, 그래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사람보단 낮다며 합리화하는 걸까.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포크로 볶음면을 돌돌 말아 입 안으로 가져갔다. 갑자기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더니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이물감으로 변했다. 빠르게 냅킨을 입에 가져다 대고 그대로 볶음면을 뱉어냈다.
"괜찮아요?"
어딘가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영어 발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검은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백인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손으로 오케이를 표시하며 괜찮다는 의사를 보였다.
'네. 괜찮아요."
내가 말하며 웃어 보이자 남자는 잠시 나의 얼굴을 위 아래로 훑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바깥 창가를 바라보는데 내 옆자리, 창가에 앉은 그 남자가 자꾸 시선에 걸렸다. 남자 또한 혼자 온 모양인지 창가를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촉촉한 남자의 눈이 어딘가, 나보다 공허해 보였다. 나만 혼자 온 게 아니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만 길을 잃은 게 아닐지도 몰라. 동질감이라기엔 얕고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깊은, 평소라면 고민도 안 했을 상황에 도전정신이 샘솟기 시작했다.
"혼자 오셨어요?"
고민할 사이도 없이 말이 먼저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뭐… 혼자 오게 되었네요."
남자가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도 혼자 와서… 여기가 혼자 올 만한 호텔은 아니잖아요. 하하"
이유를 마구 지어내기 시작했다. 급조된 것이니만큼 설득력은 없었다. 남자는 이마를 찌푸리며 내 위아래를 훑었다. 무슨 꿍꿍이지?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회가 휘몰아쳤다. 필연적으로 급작스러운 객기는 파국을 맞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아니죠. 확실히."
남자는 빨대 꽂힌 아메리카노를 빨아먹으며 말을 이었다.
"혼자 오기엔 외로움을 자극하는 요소가 너무 많잖아요. 너무 크고…가족도 많고…직원들도 너무 인위적이고…"
남자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몸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컬트인가요? 그것만 아니면 같이 이야기해도 돼요. 피차 혼자 온 것 같은데."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놀랐다.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때 휴대폰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잠시 멈칫하고는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 큼지막한 알림이 와있었다.
'김감독: 은영아, 안 내려오니?'
인상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핸드폰에는 분명히 10시 반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은 11시였다.
"하, 씨발."
하여간 자기 멋대로인 습성은 바뀌질 않는다. 얼굴을 찌푸리고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남자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제 친구가 잠시 나오라고 해서… 죄송해요."
누가 봐도 지어낸 것 같은 변명이었다. 역시 김성진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일부러 남자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조식당을 나왔다.
도착했음을 알리는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로비 중앙의 커다란 샹들리에가 눈에 띄었다.
"저거 만드는 데에 얼마 들었으려나."
나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읊조렸다. 손에 든 핸드폰을 통해 김 감독에게 새로 온 연락이 없는지 확인했다. 방금 온 연락이 마지막이었다.
"아, 어디 있는 거야…"
호텔 로비를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김 감독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 문을 열고 근처를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았다. 문을 닫고 창문 옆에 있는 아이보리색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렇게 찾아도 없으면 방으로 들어가야지. 하고 생각하던 찰나, 어디선가에서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서 선글라스를 쓴 누군가가 앉아서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 진짜."
좁은 어깨 하얀 피부,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분위까지. 누가 봐도 김 감독이었다.
"감독님 술 먹었어요?"
그의 몸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김 감독은 순간 몸을 들썩이더니 깊게 잠긴 목소리로 콜록거렸다.
"뭐. 조금"
김 감독이 선글라스를 벗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누가 봐도 조금 마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갈 수 있겠어요?"
내가 묻자 김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 감독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정문으로 향했다. 나는 그가 넘어질까 싶어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아니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나는 호텔 정문을 열어젖히며 말을 이었다.
"그게 기억이 나면 술을 마신 게 아니지."
김 감독은 몸을 가누기 힘든지 호텔 외벽에 등을 기대고 말했다. 원래 김 감독은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이었다. 담배는 정신을 또렷하게 해주지만 술은 정신을 흐리게 한다면서 항상 닥터 페퍼만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언제부터 술을 즐기게 된 걸까. 애초에 즐기긴 하는 걸까. 문득 김 감독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남으라고 했어요?"
나는 그를 마주 보고 서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바닥으로 떨구며 내 눈을 피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감독님 말마따나 우리가 좋은 인연은 아니었잖아요."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뭐, 예전엔 좋은 인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어가듯 한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김 감독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인연은 아니지. 확실히."
김 감독이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세우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걷자."
그가 몸을 반대로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발에 자의식이 있는 듯한 걸음걸이가 퍽 우스웠다. 늘 자기 멋대로 이긴 했어도 흐트러지진 않는 사람이었는데.
"감독이 멀쩡해야 스태프들이 면이 서지."
어느 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존경까진 아니어도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존경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잠시 잡념에 빠져있는 사이, 김 감독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급하게 뜀박질해서 그를 따라잡았다.
"갑자기 술은 왜 먹는 거예요? 예전엔 입에도 안 대더니."
목을 가다듬고 일부러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굳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드러내기 싫었다. 그는 내 말을 듣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무시당했구나. 방금 들었던 약간의 동정심이 파도에 모래성 무너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춘기인가 보지."
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대답이 너무 늦어서 말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한참 걸렸다.
"나이 40에 사춘기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단어를 골라내지 못하고 재채기하듯 대답이 나왔다. 김 감독도 취하니 생전 하지 않던 말도 하는구나. 싶었다.
"너 나이 따지는 타입이었나? 실망인데."
그가 잠시 자리에 멈춰서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딘가 비웃음 같기도 했다.
"알잖아. 순서 없는 거. 성공하는 데에도, 도전하는 데에도, 죽는 데에도."
그는 잠시 입술 때기를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죽는 데에 제일 순서가 없지."
그는 말을 끝마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그를 동정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언제인지 모를 어느 날부터, 그에게 동정심을 가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했다. 나에게나 그에게나 타인을, 자기 자신을 용서할 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진 몰랐다. 알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면 배우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 그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분, 5분, 10분이 흘렀다.
"어제 현강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김 감독의 입에서 현강 언니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잠시 걸음을 멈추자 그도 걸음을 멈췄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때 있잖아. 장례식 때… 그때 현강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펑펑 울더라고. 아, 저 사람들에게 현강이는 뭐였을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나. 그런데 정작 나는 말이지. 나는 눈물이 안 났어. 그냥…"
김 감독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나는 김현강 아직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사람들이 왜 우는지 이해가 안 갔어. 끝까지 자기 멋대로였던 사람을 뭐가 좋아서, 뭘 안다고 우는 거지?"
김 감독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도 안 울었잖아."
그의 검은 눈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저건 무슨 눈빛일까. 장례식장에서 김 감독을 마주쳤을 때 그 눈빛을 본 적 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너는 왜 안 운 거야? 나랑 같은 이유로?"
김 감독이 내게 물었다. 그랬다. 난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현강 언니를 원망했었나? 아니었다. 내가 원망했던, 지금도 원망하는 사람은 바로 내 눈앞에 있다. 경황이 없었나? 경황은 모두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훨씬 더 별거 아닌 일에도 열렸던 나의 눈물샘은 왜 비가 전설이 되어버린 사막처럼 메말랐던 걸까?
"집에 가서 울었어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거짓이었다. 부분적으로는.
"경황이 없었어요. 장례식장에선. 실감이 안 났으니까."
이 말은 전체적으로 거짓이었다.
김 감독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제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요."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내려고 노력했다. 그와 시선을 맞추지는 않았다. 행간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눈을 내리깔았다. 나의 다리와 때가 잔뜩 낀 파란색 스니커즈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부터 신었던 신발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 있는 거 알아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한 번 속에 담이 두었던 말을 꺼내니 봇물이 터지듯 밀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적어도, 적어도 말이에요. 현강 언니 원망했던 적은 없어요. 차라리 뭐가 힘들었으면 나한테 말도 못 하고 그렇게 갔을까 생각은 했어도, 원망? 원망이요?"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앞머리를 잡고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화가 났다. 그러나 김 감독의 말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김 감독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읽힌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감독님은 뭐 맨날 천재 소리 듣는 분이고, 한 번도 고생해본 적 없는 분이니 주변에서 이렇게 뭐라 하는 사람 없었겠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항상 좆같아 했던 거 알아요? 스태프들이?"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난 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뭐든 자기에 대입해서 생각하고 뭐든 비꼬고 뭐든 비관적이고. 영화 찍을 때도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제발… 인격자까진 안 바라니까 적당히 좋은 사람인 척이라도 하면 안 돼요?"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강 언니 아꼈잖아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잖아요."
나는 작게 읊조리며 김 감독을 쳐다봤다. 김 감독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김 감독은 내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뭐든 적당히 하는 사람과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있는 사람. 사회에선 당연히 전자가 후자보다 유능하고 괜찮은 사람이지."
그는 말을 마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말이야. 적어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 뭐든 적당히 하는 건 최악이야. 그래서 나는 모난 사람이 되기로 한 거야. 현강이도 마찬가지고.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 걔도."
그는 나를 응시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온몸이 굳는 듯했다.
"난 네 연기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그런데도 뜨지 못한 건… 이유가 있겠지."
그는 나를 그 자리에 세워두고 거리 바로 옆에 있는 영화관 쪽으로 움직였다.
"현강이가 그랬는데, 적당히 착한 사람의 가장 나쁜 점은 스스로한테도 너무 착하단 점이래."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나에게 말했다.
"난 영화 볼 건데, 같이 볼 거면 따라오고, 아니면 말고."
그가 다시 몸을 돌려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그를 따라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표를 발권하고 영화관에 들어가기까지 김 감독도 나도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영화는 2000년대 일본에서 개봉한 고어 영화였다. 상영관에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나는 가끔 김 감독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김 감독은 줄곧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선 한 여고생이 중년 남성을 납치하고,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흘러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여고생의 얼굴이 현강 언니처럼 아니면 내가 모르는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저기, 은영아."
영화 속 한 가정집, 현강 언니가 식탁 의자에 묶인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왜 거짓말 해?"
스크린 속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 애를 썼지만 입에 재갈이 물려 그저 신음만 낼 뿐이었다.
"나 같은 건 아무런 상관없잖아. 그냥 어느 순간부터 망해버린 네 인생… 내 오빠 탓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잖아."
현강 언니는 왼손에 가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난 너를 사랑했는데. 너를 사랑했는데."
그녀의 가위가 내 가슴팍에 박혔다. 가슴에서 선홍빛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는 무서웠던 거지? 내가?"
현강 언니는 얼굴을 내 귀 근처로 가져다 댔다.
"아프지? 그러니까 난 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영화 속 나는 눈물을 흘렸다. 끊임없이 눈물을.
눈물을.
이윽고 화면이 검어지고 상영관에 불이 들어왔다. 텅 빈 스크린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 소개
최정운
숭실대에서 꾸준히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며 줄곧 바다를 헤엄치는 나를 상상합니다. 이 세계에서 이뤄질 수 없는 것이 활자들 안에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제가 만든 종이 한 장짜리 작은 세계가 어디로든 흘러서 누군가에게 꼭 닿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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