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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연재

연재소설: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을 저주했을까 (1화)

by Domoleft 2026. 5. 4.

[연재] 연재소설: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을 저주했을까 (1화)

웹진 《도모》는 2026년 5월호부터 전환 회원이자 작가인 최정운의 소설을 독자투고란에서 월 1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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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의 무명 배우, 은영은 재정상의 이유로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지원했던 영화의 주연 오디션에서 최종명단까지 오르게 되고, 절박한 심정의 은영은 7년 전 자신의 첫 데뷔작을 감독하고 또 그 영화의 개봉을 취소시킨 장본인인 성진을 만나러 파리로 떠난다. 7년 만에 만난 은영과 성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의 끝에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현강'이 등장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두 갈래의 길에 서게 되는데...


보통 인생이 지루하다고 하는 인간 중, 대부분은 복에 겨운 사람들이다. 자기가 복 받은 줄도 모르는 멍청이라는 점만 빼면. 실존적 고민, 존재 의미, 부조리... 그런 거시적 고민은 본인에게 아직 빈 곳이 많아야만 할 수 있다. 이미 실패로 가득 차버린 인생은 더는 그런 고민을 넣을 공간이 없다. 미래에 관한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전부 암울하니까. 그러면 결국 진지한 고민은 회피하고 내일 점심 메뉴나 고민하게 된다. 바로 나처럼.

 


 

일이 꼬이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푸른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캐리어를 바깥에 두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경비원에게 인사했다.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아파트 로비에서 쫓겨난 신세인 나에겐 이 경비원의 연출된 친절도, 파리의 맑은 하늘도 지나치게 잔인했다.

"어휴..."

파리 5구의 비싼 아파트 단지 옆 골목에 서서 담배를 물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야, 김성진 여기 있는 거 확실해?'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 키보드를 연타했다. 이윽고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응. 씨네21 기자가 봤다던데. 인터뷰 요청도 했대. 결국 까였지만. 몇 시부터 기다렸는데?'

'8시, 로비에서 기다리다 경비원이 쫓아냄.'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거리 중간에 우뚝 선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3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택시를 타고 도착했을 땐 뜨기 시작했던 해가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다. 5시간, 당연히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따로 숙소도 예약하지 않았다. 양심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잡아줄 줄 알았으니까.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온 파리였다. 잘 다니던 대학 중퇴하고 연기하겠다고 여기저기 오디션 보러 다닌 게 벌써 10년 전이다. 돈을 많이 벌진 못했지만, 소극장 주연도 몇 번 하고 아침 드라마 조연으로도 여러 번 나오는, 그럭저럭 괜찮은 경력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진 유일한 장점이 돈이었던 오빠도 자식을 낳으면서 지원이 끊겼다. 이제 지원도 없이 120 남짓한 출연료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꿈은 여전히 비쌌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빌어보려고 온 건데 말이야."

나는 속삭이듯 되뇌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고개를 드니 거침없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멈춰 있는데 저들은 어딜 그렇게 바쁘게, 뚜렷하게 걸어가는 걸까. 직선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사선에 서 있는 나, 조금 웃겼다.

 

그렇게 담배가 끝을 보여갈 즈음, 이질적인 행색의 동양인 남자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170 남짓한 키와 검은색 코듀로이 블레이저, 회색 터틀넥 니트와 갈색 바지, 그리고 검은 태와 빨간색 렌즈의 선글라스, 부스스한 머리까지. 누가 봐도 김성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대로 본 건 7년 전, 장례식에서 스치듯 본 것까지 포함하면 3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쉬울 게 없어야 할 수 있지. 난 그럴 수 없었다.

"김 감독님!"

내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김 감독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급하게 말을 걸었던 지라 쇳소리가 났다.

"사인 안 합니다."

김 감독은 한 마디 쏘아붙이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이건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김 감독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김 감독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내 뺨에서 식은땀이 살짝 났다. 그렇게 내 앞에서 멈춰 선 그는 5초 정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은영이니?"

그의 시선은 당황이나 반가움보단 생경한 존재를 만난 놀라움의 시선에 가까웠다. 싫었는데 세상의 모든 걸 안다는 듯한 눈빛.

"감독님, 너무 오랜만이라 못 알아보셨죠? 하하."

김 감독은 나의 어색한 웃음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다가 이내 입술을 뗐다.

"아니 뭐... 바로 알아보긴 했는데, 너무 의외라서. 여기가 서울도 아니고."

김 감독은 잠시 망설이듯 혀를 작게 찼다.

"그리고 솔직히 네가 나한테 인사할 정도로 너한테 내가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7년 전에도 김 감독은 이런 버릇이 있었다. 숨겨야 할 말도 숨기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꺼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하는 버릇 말이다.

 

이내 순간이지만, 영원 같은 적막이 흘렀다. 적막을 깬 것은 역시나 김 감독이었다.

"여행?"

"네?"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는 나의 놀란 표정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본인의 흐름대로 말을 이었다.

"여행으로 왔냐고."

"아, 아...네! 파리로 여행하러 온 김에 인사라도 드릴 겸 들렸어요."

김 감독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나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아는 사람 몇 없는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치가 답답해졌다. 친한 기자를 통해 알아냈는데, 김 감독이 알면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 그… 주호가 감독님 여기 산다고 알려줬는데."

김 감독은 순간 표정이 변하며 얼굴을 구겼다.

"주호? 김주호?"

"네."

"아, 김주호 이 새낀 또 어떻게 안 거야?"

그는 한참 동안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나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내 눈치를 살폈다.

"됐다. 뭐가 중요하니. 어떻게든 알아냈겠지."

잠시 적막이 흘렀다. 김 감독은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하고는 말을 걸었다.

"시간 괜찮아? 여기까지 왔는데 근처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실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 좋아요!"

"커피 한 잔 하자는 건데 왜 이렇게 좋아해?"

그는 나의 대답에 무표정으로 말을 툭 내뱉고는 나를 제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뭐라도 해보고 갈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그를 따라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카페에 햇빛이 길게 드리웠다. 바리스타가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소리와 생경한 불어가 겹쳐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냈다. 자리에 앉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의 창문에 해가 비춰 내 눈에 닿았다. 나는 눈이 부셔서 눈을 한두 번 깜빡이며 괜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에스프레소 잔에 티스푼을 넣고 빙빙 돌렸다.

"은영아, 담배 피울래?"

김 감독이 살짝 비음이 섞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오, 좋아요."

10분 동안 커피만 마시다가 꺼내는 첫 마디가 담배라니. 분위기가 변했다 싶으면서도 그대로였다. 그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오렌지색이 눈에 띄었다. 그가 담배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라이터 뚜껑을 열 때 특이한 소리가 났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나에게 담배를 건넸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그가 불을 붙였다.

"이거 단종된 거 아니에요?"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서 이베이에서 샀어."

그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담배나 술 같은 거 이베이에서도 팔아요?"

나의 물음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조금 야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원래도 말랐었지만.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김 감독과 나의 주변을 둘러쌌다.

"아직도 연기해? 연극?"

그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물었다. 그의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 연극도 하고, 아침 드라마도 하고 있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간신히 하고 있어요. 연기학원 강사도 하면서."

그는 나의 말에 커피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은 여기서 뭐 하면서 지내세요? 새 영화 시나리오 쓰고 계세요?"

나의 질문에 김 감독은 내 눈을 피하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영화는 잠깐 접었고, 너 카이에 뒤 시네마[각주:1]라고 알아? 거기서 가끔 평론 쓰고 있어."

그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네었다. 알아보지 못할 불어들과 함께 영어로 김 감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오. 그래도 감독님 팬들이 많은가 봐요. 이런 일간지에서 연재도 하시는 거 보면."

마음 한편이 불편한 것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들뜬 목소리를 냈다. 누군가에겐 돈 버는 일이 굉장히 쉬울 수도 있겠단 생각에 아랫배가 아려왔다.

"내 팬은 아냐. 자기가 본... 내 영화를 좋아하는 거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재수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라고 머릿속에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나는 다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그가 혼잣말하듯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것도 기억을 못 한다는 것에 당혹감이 잔뜩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감정의 동요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기억 안 나세요?"

애꿎은 커피만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커피 가운데에 거품이 모였다가 사라졌다.

"그... 3년 전에, 현강 언니 장례식 때 본 게 마지막이잖아요."

평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마지막에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랬었나."

그는 미동도 없이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면 언니가 좋아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상하지 않아?"

김 감독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계속 창가에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거. 무언가 엄청난 일을 겪어도, 인생에는 엔딩이 없잖아. 매일 누군가는 무언갈 잃고 상처받고, 그런데도 내일은 오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돈을 벌고..."

김 감독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침 자전거가 지나가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지옥에 살면서 지옥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어."

"네?"

"아냐. 아무것도."

김 감독은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내 얼굴로 다시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의 얼굴에 사뭇 그림자가 져서 조금 놀랐다.

"그래서. 왜 온 건데."

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김 감독은 한숨을 내쉬고 재차 질문했다.

"용건이 있으니까 온 거 아냐? 여기가 관광지에서 걸어서 올 수 있는 곳도 아니잖아. 에펠탑도 없고. 개선문도 없고. 소르본 대학 보러온 것도 아닐 테고."

선글라스에 가려 그의 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날 노려 보고 있다는걸. 나는 주눅 들지 않기 위해 허리를 곧게 폈다. 그의 시선은 7년 전만큼 나에게 위력을 갖지 못했다.

"사실 맞아요."

나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스크립트를 꺼냈다. 스크립트의 첫 장에는 일본어로 '비명의 우리.'라고 적혀 있었다. 김 감독은 그 스크립트를 보곤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를 유지하려 애썼다.

"나카무라 켄이치 감독님 신작이에요. 한국인 주연에 마스크 새로운 배우 쓴다고 하길래 저 진짜 죽어라 애써서 최종 오디션까지 갔거든요? 그런데 마지막에 아이돌이 오디션에 껴서 망했어요. 저 진짜 마지막 기회인데... 돈도 없단 말이예요..."

참았던 울음이 올라왔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잠시 숨을 골랐다. 다행히도 김 감독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진짜 감독님이 이런 부탁 싫어하는 거, 너무 잘 알거든요. 그래도 켄이치 감독한테 전화 한 번만 해서 저 좀 살려주세요. 저한테 진 빚 있으시잖아요. 불쌍한 사람 도와준다손 치고 진짜 한 번만..."

"켄이치, 독립 영화 감독 아니었나?"

김 감독이 나의 말을 끊고 대본 맨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엔 'NETFLIX ORIGINAL'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거절의 표시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눈을 살짝 올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무엇인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래. 해줄게."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나는 얼굴이 화색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 감독이 팔을 탁자에 올려놓고 머리를 괴었다.

"난 너한테 빚진 거 없고, 너한테 보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 도와주는 거니까,"

그가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부탁 하나만 들어줘. 비용은 내가 댈 테니까 한 2주만 파리에 있어."

"2주요?"

언제까지 머물다가 갈지 정하지 않은 여행이긴 했다. 솔직히, 조금 더 머물고 싶기도 했다. 파리 관광도 못 해보고 떠나는 건 조금 억울하니까 그래도 저 인간이 먼저 2주 동안 있어 달라고 부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감독은 태연한 표정으로 새로운 담배를 꺼내 다시 불을 붙였다.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거절할 입장 아닌 건 알지? 일정 없으면 딱히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이빨로 입술을 깨물고 김 감독을 노려봤다. 어디 안 간다니까. 좋은 일도 싹수없게 하는 버릇.

"네. 알죠."

나는 말을 마치고 커피잔을 들어서 들이키려 애썼다. 그러나 잔에서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요? 감독님 저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까 말도 그렇게 하더니."

나는 탁자 밑에 손을 숨기고 손톱과 손톱을 튕겼다.

"뭐. 싫어함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니까."

김 감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질문에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눈 깜빡한 사이에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해? 안 가?"

그가 뒤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가방을 챙겨서 그를 뒤따라 카페를 나섰다. 그는 카페에서 나와 돌로 된 인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어느새 해가 지고 가로 등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김 감독 옆에서 걸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7년 전만 해도 늙지 않을 것 같던 그도 어느새 눈가 주름이 눈에 띄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감독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내가 물었다.

"응."

그가 짧게 답했다.

"왜 하필 파리예요? 유학도 la에서 하셨잖아요. 한국이 싫으면 다른 선택지도 많지 않아요? 뭐 가까운 도쿄도 있고."

나는 말을 마치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빠르게 걸었다.

"글쎄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밑으로 숙였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김 감독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 잊어버렸네."

차가 가로변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바로 앞에 지하철역 입구가 보였다. 빠르게 걸어가던 김 감독은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자리에 멈춰 섰다. 가로변 왼쪽 구석에서 버스킹을 하는 재즈 악단의 연주가 은은하게 깔렸다.

"요새 너무 많은 걸 잊어버리는 것 같아."

그는 씁쓸한 듯 혀를 찼다.

"우리 영화 같이 찍을 때, 내가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개봉을 엎었을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놓쳐야 했던 동아줄의 이름이, 내 인생을 망친,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기적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먼저 나올 줄은 몰랐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제 자리에 멈춰 섰다.

"네 연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괜찮았었는데."

그가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행인의 의미 모를 불어도, 차도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경적도 모두 그 한마디에 묻힌 것처럼 느껴졌다. 매일 생각했는데. 내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하고.

"걔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김 감독이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잘 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아니. 노래 좋다고."

그가 재즈 악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얼버무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들은 것도 충분히 충격적이라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

내가 일전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지갑 안에서 카드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돈 아낀다고 호스텔이나 기숙사 가지 말고, 루스벨트 역 앞에 메리어트 있으니까 거기서 자. 여기서 타서 샤틀레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면 돼."

나는 얼떨결에 카드를 건네받았다. 김 감독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악단에 1유로를 건네고 빠르게 뒤를 돌아 역에서 멀어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그가 중간 정도를 되돌아갔을 때 그가 자리에 멈춰 섰다.

"내일 11시쯤 호텔 앞에서 보자. 괜찮지?"

김 감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네. 라고 대답했다. 그가 몸을 돌리더니 손을 한번 흔들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를 계속 바라봤다.

 


 

군데군데 자리가 빈 지하철 안, 취한 사람, 관광객, 피곤함에 찌든 직장인들이 뒤섞여 오묘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열차 안에 그려진 그래피티가 눈에 띄었다.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열차 바깥 야경을 바라보며 왼쪽 팔걸이에 등을 기대었다. 눈이 점점 감겨왔다. 하루 동안 꾸어선 안 될 꿈을 꾼 느낌이었다.


저자 소개

최정운

숭실대에서 꾸준히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며 줄곧 바다를 헤엄치는 나를 상상합니다. 이 세계에서 이뤄질 수 없는 것이 활자들 안에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제가 만든 종이 한 장짜리 작은 세계가 어디로든 흘러서 누군가에게 꼭 닿길 바라요.


각주

  1.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잡지. 19514, 앙드레 바쟁을 위시한 영화 평론가들이 창간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