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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카프(KAPF) 100주년 - 해방 조선에 사회주의 예술을 허하라

by Domoleft 2025. 4. 15.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 특집>

[역사] 카프(KAPF) 100주년 - 해방 조선에 사회주의 예술을 허하라

 

한반도의 첫 사회주의 정당 조선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5년,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100주년이 있다. 1925년 조선공산당과 동시기 창설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100주년이다. 짧은 역사 속에서도 한반도의 예술운동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새긴 카프의 역사와 그들이 남긴 것을 함께 돌아본다.


한반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조선공산당이 창당 100주년을 맞은 2025년 올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100주년이 있다. 조선의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했던 문학가 및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창설 100주년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어를 표방하던 에스페란토의 표기를 가져온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일명 KAPF는 1925년 8월 팔봉 김기진, 정관 김복진, 송영, 한설야 등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다른 정치적 이유로 모두 묻혀 왔던 카프의 역사. 그러나 카프의 족적을 빼고는 일제강점기 예술의 역사도,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역사도 제대로 돌아볼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파스큘라, 염군사, 그리고 카프까지 자주 다루어지지 않던 한국의 사회주의 예술,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예술 사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국에서의 카프 연구는 주로 문학운동의 사조로서 다루어지나, 본 글에서는 문예운동적 정보를 바탕으로 미술에도 조금 더 초점을 두고자 한다. 다만 현존하는 무대장치, 미술품 등의 작품의 수가 적어 인용 가능한 도판이 적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1930년 9월 촬영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 맹원들의 사진.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인간을 위한 예술을

일제강점기 도래 이후 조선의 미술계는 일본 제국 및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졌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소위 '조선미전'이라 불리는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하며 권위를 바탕으로 많은 미술가들을 양성하고 조선의 예술을 식민통치의 기준에 맞추어 간다. '조선의 미술을 장려, 발전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전람회가 한국 근대미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조선 미술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일본화의 영향 하에 가두었으며 예술지상적으로 소위 '심미적'인 예술만을 선별하는 등 명백한 문제점이 있었다.

 

일제의 검열과 '탈정치적' 예술지상주의가 예술계 전반에 횡행하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 미술계에서는 '생활 미술' 혹은 더 나아가 '좌익 미술'을 주장한 이들이 등장한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염군사와 파스큘라이다.

 

1922년, 일본에서 귀국한 송영(宋影, 1903~1977)은 박세영, 이적효(李赤曉, 1902~미상), 이호와 동인문학단체 ‘새누리’를 조직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이후 김홍파, 김두수 등이 추가로 참여하여 1922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가 창설된다. 이들은 '본사는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강령을 세우며 좌익 문학을 지향했다. 이들의 잡지 『염군』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발매되지 못했다. 이 시기 <상록수>와 <그날이 오면>으로 잘 알려진 심훈도 중국에서 신채호, 이회영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이후 염군사에 가입하였다.

좌측부터: 조각가 정관 김복진(金復鎭, 1901~1940) / 소설가 겸 비평가 팔봉 김기진(金基鎭, 1903~1985) / 극작가 송영(宋影, 1903~1977)

 

한편 파스큘라는 1920년부터 1923년부터 일본에 유학했던 조각가 정관 김복진과 소설가 겸 비평가 팔봉 김기진(金基鎭, 1903~1985) 형제가 이끌게 된 문예단체였다. 김기진, 김복진이 일본에 유학을 갈 당시 일본 미술계에는 보수적 풍토에 대한 저항이 일고 있었다. 클라르테(Clarté) 운동과 MaVO 운동이 대표적인데, 김기진과 김복진 모두 이 두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먼저 클라르테(Clarté)는 프랑스어로 빛이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공산당원이었던 앙리 바르뷔스(Henri Barbusse, 1873~1935)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다. 클라르테 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거해 지식인들의 인터내셔널을 목표로 하는 반전문학을 추구했다. 둘째로 MaVO는 다다이즘에서 영향을 받은 미술사조로 디자이너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각주:1]를 중심으로 하였다. 스스로를 Mavoist(마보이스트)라고 칭했던 마보운동가들은 예술을 예술지상주의적인 낭만화의 너머에 두지 않고 일상생활로 통합하고자 했다.

 

이 시기 마보이스트들은 다다이즘은 물론 <붉은 쐐기로 백색을 쳐라>로 유명한 엘 리시츠키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화, 게오르크 그로츠의 사회풍자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당시 일본 좌익 미술을 이끌던 이들은 대부분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는 훗날 조형(造型) 등과 함께 전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통칭 NAPF의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

좌측부터: <『마보』 3권 표지화>, 마치다시립국제판화미술관 소장 / 엘 리시츠키, <붉은 쐐기로 백색을 쳐라>, 포스터, 48x69cm, 레닌도서관
좌측부터: 안석주, <『백조』 창간호 표지화>, 1922 / 김복진, <여인입상>, 1924

 

1923년, 김기진과 김복진은 귀국 이후 잡지 개벽을 통해 연재를 이어나가며 "혁명은 신질서를 의미하며 이는 바르뷔스를 말한다. 클라르테는 프랑스의 것이 아니라 만민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낭만주의 소설가들이 결성한 동인잡지 『백조』파의 박영희, 이상화 등과 함께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인간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며 파스큘라(PASKYULA)를 창설한다. 파스큘라라는 이름은 구성원들의 이름 두문자를 딴 것으로 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기진, 김복진, 이상화, 연학년의 이름에서 따 왔다. 이 시기 박영희는 김기진의 영향을 받아 계급문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파스큘라와 염군사가 활동을 이어가던 1924년, 조선의 좌익 및 노동-농민운동 진영 전반에는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조선노동연맹회, 조선노동공제회, 남선노동동맹, 전라노농연맹 등 여러 단체가 모여 조선노농총동맹을 설립한 이후, 뿔뿔이 흩어져 있거나 명확한 강령을 세우지 않고 있던 공산주의-사회주의 단체들이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위한 투쟁과 반식민지 투쟁을 강화시키며 사회주의와 노동쟁의, 소작쟁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게 된다. 비록 조선노농총동맹은 일제의 탄압과 조선공산당 창당 과정에서의 내부 주도권 문제로 1년만에 해산되었지만, 이는 향후 조선 노동운동의 계보에 있어 핵심적 단체 중 하나가 된다. 1925년 4월 17일, 조선노농총동맹에 참여하던 화요회의 김재봉, 김낙준, 윤덕병, 조봉암, 송봉우 등은 북풍회 등과 함께 한반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창당한다.

 

1925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공산당 등의 설립에 고무된 좌익 예술인들은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통합을 논의한다. 대표적으로 서울청년회에 소속되었던 송영, 박영희, 윤기정(尹基鼎, 1903~1955)은 염군사와 파스큘라를 오가며 합병을 제의하며 양 측을 설득했으며 김복진은 조선공산당(ML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달성한다"라는 합병단체 강령의 기초를 만든다. 이렇게 하여 1925년 8월 김기진, 김복진, 박영희, 이상화, 이적효, 이호, 심훈, 한설야, 김양 등이 결성한 것이 바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이른바 카프(KAPF)이다.


카프, 예술을 무기로 한 해방

좌측부터: <『예술운동』 창간호 표지화> / 김복진, <『문예운동』 표지화>, 1926년 1월호 / <『마보』 표지화>, 1923년 5월호

 

1925년 창설 이후 카프는 기존 염군사-파스큘라의 뒤를 이어 문학, 예술적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시기 카프의 대표적 미술가로는 김복진, 권구현, 안석주, 정하보가 있었다. 그 중 강령 작성을 주도할 정도로 사실상 주축이며 조선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던 김복진은 1926년 파스큘라를 회고하며 "다다(다다이즘)나 맙쁘(마보이즘)과 크게 틀림이 없었다고도 말할려면 할 수 있겠고"라며 파스큘라의 계보를 이어 카프에서도 다다이즘, 마보이즘, 구성주의적 미술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전개하고자 했다. 실제 김복진의 <『문예운동』 표지화>를 보면 타이틀인 문예운동(文藝運動)을 구성주의적으로 해체해 배치함으로서 마보와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성주의는 당시 소련 미술계의 유행이 일본을 통해 건너가 김복진에게까지 닿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카프 내부에서는 노선 갈등이 곧 시작된다. 카프 참여 예술가 중 권구현(權九玄, 1898~1938)은 시인이자 화가로 아나키즘을 수용한 서화가였다. 권구현은 이 당시 인간의 본성에 맞는 정치질서는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하며 아나키즘 문학과 서화를 그렸는데 이 때문에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주류와 갈등을 빚었다.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김화산(金華山, 1905~1970) 등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 문예인들도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는 소설을 내며 박영희 등의 소설을 예술이 아닌 포스터나 정견발표라며 공격하기도 했다. 일견 탈정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입장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지 않겠다'는 카스큘라 및 염군사파의 주류 사상과 맞지 않았기에 박영희, 한설야, 임화, 윤기정 등 문예인들의 반발을 강하게 빚게 된다.

 

1927년 김복진은 <나형선언초안(裸型宣言草案)>이라는 책을 내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순수미술을 '순정미술'이라 비판하고 이에 대항할 비판미술을 제기하기도 했다.[각주:2] 결국 그 해 9월 1일, 김복진, 윤기정 등의 주도 하에 카프는 제1차 방향전환을 결정했다. 제1차 방향전환 이후 카프는 '예술의 무기로부터 무기의 예술에!'라는 기치를 걸고 운동 예술을 주장하며 더욱 짙은 투쟁성을 띠게 된다. 이 방향전환으로 카프의 운동적 명확성은 심화되었지만, 결국 예술에 있어 근본적 입장 갈등을 보였던 아나키스트 권구현, 김화산, 김용준 등은 제명되거나 스스로 떠나게 된다.

좌측부터: 안석주, <「난영」 삽화>, 조선일보, 1927년 / 안석주, <「밤낮 땅만파네」>, 조선일보, 1928년

 

1차 방향전환 이후 문예계에서는 리얼리즘이 대두되나, 미술계는 리얼리즘에 근간한 구성주의, 큐비즘, 해체주의, 미래파, 다다이즘에 대한 접근을 멈추지 않았다.[각주:3] 카프 회원이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예술가인[각주:4] 안석주의 그림 <밤낮 땅만파네>는 이와 같은 역동적 묘사와 아방가르드, 미래파적 사조가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동 시기 정하보는 제2회 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전람회에 <조선공산당공판일>을 출품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 1928년, 카프의 실질적 방향전환 계기를 가져온 조선공산당 당원 김복진이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체포된다. 방향성을 재설정해야 했던 카프는 1928년 12월 코민테른이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대한 12월 테제를 바탕으로 2차 방향전환을 결정한다. 이 2차 방향전환으로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목표로 한 마르크스주의적 예술, 그리고 노동자·농민을 향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는 작품만이 카프 예술의 주류로 설정된다. 여전히 디자인적이고 구성주의적인 연출이 일부 사용되긴 했으나 이 역시 외부적, 전투적인 관점에서만 허용되었다. 결국 이 결정으로 카프의 초기 미술인들이었던 권구현, 안석주, 김복진 모두가 제명되거나 탈회한다.

 

이후 박영희, 김기진, 임화 등의 미술가들과 함께 강호, 이상춘, 박진명, 김유영 등 문인, 영화인, 평론가들에 의해 운동의 볼셰비즘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이상춘의 <질소비료공장 2>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상춘의 판화 <질소비료공장>과 안석주의 <난영 삽화>를 비교한다면 이 시기 방향전환의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춘의 그림은 미술적으로는 조선인을 묘사한 것이 맞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카프의 2차 방향전환 이후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사회주의 탄압을 더 강화하며 여러 사회주의, 공산주의 단체와 그 구성원들을 강제해산 및 체포하기 시작했다. 카프 역시 1931년 임화, 안막, 김남천,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등이 모두 구속되는 등의 난고를 겪었다.

이상춘, <질소비료공장 2>, 조선일보, 1932년

 

이 시기 조선공산당재건공작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이적효는 카프 개성지부를 중심으로 카프쇄신동맹을 시도했으나 코민테른 노선을 따른 지도부에 의해 카프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1934년 친일 경찰 양성순 등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상영하던 극단 신건설 지방 공연을 빌미로 박영희, 윤기정, 한설야, 송영, 김유영, 이기영 등을 전원 기소하는 '신건설사 사건'이 벌어진 이후, 카프는 일제로부터 해체를 종용받게 된다. 이미 자신의 신간회 지지 노선 등이 비판받는 등으로 깊은 회의감을 느꼈던 박영희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말을 남기며 카프를 탈퇴한 것도 이 시기이다.[각주:5] 결국 1935년 서기장이었던 임화가 송영 등 비해소파의 반대에도 직접 해산계를 제출하며 카프의 역사는 10년 만에 마무리된다.


카프 이후, 그리고 카프가 남긴 것들

좌측부터: 김복진, <김제 금산사 석고미륵여래입상>, 1937 / 김제 금산사 미륵전
좌측부터: 김유영(金幽影, 1908~1940) / 김유영 기념비, 구미시 고아읍, 출처: 오마이뉴스 / 이상춘의 일제 주요감시대상 카드

 

카프 해체 이후 카프를 주도한 예술가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우선 김복진은 1934년 긴 옥살이를 끝내고 출소했다. 김복진은 출소 이후 화재로 손실된 김제 금산사 미륵삼존불의 복원을 맡기로 했는데, 당시 조각승이었던 보응 문성, 금용 일섭(日燮, 1900~1975) 등 당대의 거장 조각승과의 경쟁 입찰에서 김복진이 선택된다. 이는 비록 김은호 등 서양화, 일본화에도 영향을 받은 화가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간 영향을 무시할 수 없으나,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옥살이를 한 이에게 절 측에서 문화유산의 복원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김복진이 복원한 김제 금산사 미륵여래입상은 미술사적 관점에서 근대적 기법으로 전통 불상을 조형한 최초의 대형 불입상이 되어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김복진은 이 이후에도 불상 조각 등을 하다 1940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사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신건설사 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유영은 카프 해산 이후 <애련송>, <수선화> 등을 제작했으나 신장염으로 인해 1940년 <수선화>가 상영되기 전 요절했다. 김유영 역시 사후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그의 고향 구미에 설치되어 있다. 이상춘은 제2차 검거 당시 투옥당한 뒤 극심한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다 자살했다. 2025년 현재 이상춘현대미술학교의 주관으로 그를 기리는 아방가르드 아카이브 공간 리상춘 전시가 진행 중에 있다.

좌측부터: <「대중공론」 표지화>, 1930년 / 이상, <「중성」 표지>, 1929년 / 추민, <「시대공론」 표지>, 1931년

 

카프의 해산 이후 김기진, 박영희 등의 일부 예술가들은 친일로 전향했다. 일부는 카프의 결말을 '용두사미'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꽃을 꺾어도 봄은 오기에, 카프가 해산되더라도 사회운동적이고 진보적인 예술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프의 해산을 열렬히 반대했던 송영은 해산 이후에도 일제의 탄압에 맞서 사회주의 경향의 작품들을 내곤 했다. 좌익 계열의 배우, 극작가, 문예인들은 여전히 활동을 이어갔으며 사회주의 혹은 좌익 사상을 담은 잡지의 발간 역시 계속되었다. 특히 카프가 태동시킨 구성주의 양식은 카프 전후로도 조선 예술계에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1930년의 <대중공론> 표지화는 이 중 대표적이다. 대중공론은 여러 번의 검열에서 겨우 벗어나 출간을 이어나갔는데, 해당 표지는 낫의 형태를 현상시키는 붉은 상징과 가로 그리드 등 공산주의 이미지를 디자인으로 승화한 구성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 <날개>로 대표되는 시인 이상, 화가 김규택 등이 카프의 활동가가 아니었음에도 구성주의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카프의 방향 전환 이후 카프 활동가들의 양식은 구성주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변했지만 오히려 이상 등 외부인들이 이를 채택한 것이다. 카프의 활동가였던 추민이 디자인한 <시대공론 표지> 역시 표지 디자인이 포스터화된 중요한 사례다. 추민은 엘 리시츠키의 디자인적 요소를 채택해 깃발을 든 남성을 묘사하며 마치 만화적인 구도로 표지를 디자인했다. 붉은 사각형 안에 옷의 별을 숨겨 사회주의의 상징을 디자인에 넣기도 했다.

카프의 깃발.

 

비록 카프는 미완의 단체로 남아 버렸고 구성원 중 일부는 전향을, 그들의 작품 중 일부는 소실되는 결말을 맞았으나 카프가 남긴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 구성주의 양식, 그리고 다양한 문예 작품들은 1935년의 해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카프가 제안한 문학은 훗날의 민중문학으로, 카프가 제안한 미술은 훗날 저항의 미술로, 카프가 제안한 연극은 훗날의 민중주의, 저항 연극으로 퍼지며 한반도의 예술운동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조선공산당이 비록 해산되었으나 한반도의 첫 노동자·민중 정당으로 현장 속에서 구체화되었던 그들의 운동이 현재까지도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에 끝나지 않는 질문을 던지듯이, 카프가 지향한 사회주의적·저항적이고 해방적인 예술, 사람들의 삶에 가장 가까운 생활 예술의 가치는 우리에게 카프를 단순히 일제강점기의 실패한 예술단체로만 규정지을 수 없게 만든다.


참고 문헌

김기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 『개벽』, 1923. 7.

김용철. "검열을 통과한 식민지 조선의 그래픽디자인과 러시아의 영향."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2.- (2021): 261-291.

기혜경. "1920년대의 미술과 문학의 교류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8.- (2000): 7-37.

정선아(Jeong SunA),and 김민수(Kim MinSoo). "1920~30년대 조선 사회주의 인쇄물에서 나타난 구축주의 디자인의 특성과 해석."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7.- (2024): 33-57.

키다에미코. "아방가르드와 한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 미학예술학연구 38.- (2013): 199-212.

홍지석. "카프 초기 프롤레타리아 미술 담론." 사이 17.- (2014): 9-40.


이미래

고고·미술사학도. 미술, 문화, 역사 속에 흘러간 삶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낙관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고 믿는다.


각주

  1. 일본의 연극가, 소설가, 디자이너. 일본프롤레타리아문예연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30년 치안유지법에 체포된 이후 석방되자 일본공산당에 입당, 1940년 세번째 체포 이후 1945년 한국, 만주로 이주했으며 그해 12월 일본제국이 패망하자 일본으로 귀국해 공산주의/반전주의 연극을 선전한다. [본문으로]
  2. 김용철(Kim Yongcheol). "검열을 통과한 식민지 조선의 그래픽디자인과 러시아의 영향." 한국근현대미술사학 42.- (2021): 261-291.  [본문으로]
  3. 기혜경. "1920년대의 미술과 문학의 교류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8.- (2000): 7-37. [본문으로]
  4. 당시 안석주는 신여성 및 여성해방에 부정적이었던 인물로, 카프 제명 이후 그의 만평 일부는 신여성을 비판하는 것에 할애되었다. [본문으로]
  5. 훗날 박영희는 '요시무라 고도'로 창씨개명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한 이후 싱가포르 함락을 칭송하며 조선문인보국회의 부회장으로까지 선출된다. 해방 이후 국민보도연맹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