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 ② 발전기
그 어떤 시대에도 체제와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사회적 수단으로서의 예술은 항상 존재해 왔다. 세계사와 한국사의 맥락 속 교차하는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의 발전사를 함께 되짚어 보자.
* 본 글은 1부 <저항의 미술, 인간의 미술: ① 태동기>에서 이어집니다.
예술의 자율을 얻게 된 19세기는 역설적으로 살롱(La Salon; 프랑스 정부의 공식 미술 전람회)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들의 선택을 받은 예술가만이 살아남는 세상으로 변모했다. 보수적이고 경직된 예술에서 탈출하려는 예술의 몸부림은 다시금 '신고전주의'에 갇히며 부르주아 위주-국가 주도의 살롱 체제를 만들게 된다. 1863년의 살롱 낙선전(落選展: 나폴레옹 3세의 허가로 살롱 낙선작들만을 모아 전시한 행사)은 이와 같은 기성 미술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낙선전에서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그림들이 기성 미술계와 평론가 등에게 조롱받자 그의 그림들은 기성 미술계에 저항하려는 운동의 첨병이 되었으며 이는 미술계의 저항의 시작이 되었다. 이 영향을 받아 1874년 기성 미술계에 비판적인 예술가들이 연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인상, 해돋이>가 출품된다. 이 당시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진보적인 화풍에 대한 공격과 함께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을 풍자하며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역설적으로 이것은 '인상주의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모네 이후 폴 세잔 등이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운동은 구스타브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으로 이어지는 분리파(비엔나파), 필리포 마리네티, 자코모 발라 등의 미래파로 이어지는 전통 예술계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연결된다.
전위의 첨병, 20세기 초반의 저항미술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예술계는 또 다시 변혁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은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난을 이어갔고, 시인 후고 발과 그의 부인 에밀 헤밍스가 이끌던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는 전쟁과 전통예술계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적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를 파괴하겠다는 강력한 열망 하에, 그들은 그 도구로 예술을 채택했다. '무의미의 예술'을 의미하는 다다이즘(DaDaism)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17년 다다이즘의 초기 멤버인 칼 휠젠벡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오며 '베를린 다다이즘'으로 발전한 다다이즘은 국제주의와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앞선 미래파, 표현주의, 입체주의 등의 다양한 예술가들을 공격하거나 포괄하며 포토 콜라주 등 전위적 기법의 도입으로 새로운 예술의 문을 열었다. 한나 회흐, 게오르게 그로츠, 라울 하우스만 등 다양한 미술가들과 함께한 휠젠벡은 회고록에서 "우리 모두는 전쟁 때문에 조국의 국경 너머로 내팽겨쳐졌다. ...(중략) 우리는 민족의 이념을 위해 타인을 사살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며 자신들의 진보적, 혁명적 전위성을 표명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나치당의 득세 이후 나치는 다다이즘 등의 현대미술 시도 모두를 '퇴폐 미술'로 규정했다. 이에 다다의 미술가들은 페미니즘, 반나치 성향을 더욱 강하게 표출했다. 한나 회흐(Hannah Höch)는 20세기 초반 페미니즘 미술의 상징적인 인물로 베를린 다다의 유일한 여성화가이기도 했다. 한나 회흐의 <미슐링>은 나치 독일에서 아리아인과 비아리아인 혼혈에 대한 분리 및 탄압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아프리카계 여성과 아리아인 상을 콜라주하여 이를 풍자했으며 한편으로 여성의 입을 얼굴에 비해 작게 그려넣으며 작아진 여성들의 발언권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Da Daddy>는 꾸며지고 치장한 여성들이 좁은 공간에 갇힌 모습을 그려넣은 콜라주 그림인데, 해당 그림을 전시에서 보게 된다면 그 윤곽선이 남성의 형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성 코르셋'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 진보적이고 저항적이라는 다다의 내부에서조차 남성 예술가들로부터의 한나 회흐를 향한 무시나 혐오가 존재했는데, 한나 회흐는 이런 비난에 대응해 보란 듯이 '제1회 국제 다다 전시회'에 개인 출품을 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사회의 기둥>은 다다, 아방가르드 계열 화가들 중 가장 적나라한 풍자를 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신경쇠약에 걸린 그로스는 1919년 독일 민족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며 공산당(KPD)에 가입하기도 했다. <사회의 기둥>에는 위쪽에서부터 전쟁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독일의 군인들, 술에 취하고 뚱뚱한 성직자와 말 그대로 머리에 똥이 찬 것으로 표현된 사회민주당 정치인, 신문을 가슴에 품고 있는 독일의 신문왕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그리고 나치당원이 그려져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독일 사회 내 사회문제들과 지도층에 대한 비판, 위선에 대한 풍자, 배타적 민족주의와 극우에 대한 우려를 담으며 당시 독일 사회의 위선을 비웃었다. 그로스의 그림들은 당대의 시위 현장에서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로스는 당시 언론 간행물이나 광고에서 정치 지도자들의 사진, 그림을 잘라 포토콜라주를 통한 풍자화를 그려 유포하기도 했다.
전간기의 유럽에서 저항적인 사조가 이어지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의 멕시코에도 저항미술, 여성미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여성 당사자이자 장애인 당사자로서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하고(이후 칼로는 멕시코에 망명한 트로츠키를 지지한 것으로 인해 잠시 제명당한다) 평화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주의, 사회주의 계열 반파시스트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 열정적 투쟁을 이어갔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 누구보다 적극적인 페미니스트,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혁명적 예술가의 삶'이라 칭할 수 있다.
멕시코 혁명의 강력한 열망 속에서 자라난 프리다 칼로는 여성인권, 토착 아즈텍 문화,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멕시코와 미국 국경의 자화상>은 프리다 칼로의 관점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멕시코에는 자연, 역사, 문화유산, 아즈텍의 다채로운 이미지와 태양, 달, 구름, 번개가 떠 있는 반면 미국은 발전기와 회색 공장, 대기오염의 세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더군다나 미국의 발전기가 프리다가 밟고 선 돌과 멕시코의 꽃 뿌리에까지 닿은 모습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풍자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여성상에 부합하는 행동을 취하는 듯 하지만, 당시의 화장법에 맞지 않게 정리하지 않은 눈썹, 드러낸 가슴과 멕시코 국기와 담배를 든 손 등 여성상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프리다는 실제로 수염을 기르거나 눈썹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양성적인 면모 및 매력을 강조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화장을 하는 등 '자신이 좋아서 하는 스타일'을 통해 기존 사회적 규범에 대한 저항을 강조해 왔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 199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
이제는 다시 한국으로 눈을 돌릴 시간이다. 한국 민중미술의 태동기였던 1980년대의 어두운 시절이 지나고, 노동자 대투쟁과 6월 항쟁을 거쳐 찾아온 민주화와 X세대의 등장 이후 한국의 저항미술은 크게 변화했다. 90년대 이후 민중미술은 걸개그림 시대를 넘어 삶에서의 자유와 사회 진보에 대한 갈망을 본격적으로 담아내며 개인 창작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환경오염과 기후위기, 여성주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 노동과 평등 등을 작품에 담아내는 등 다양한 진보적 의제를 시각화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화가들은 도시화와 개인화 속에 희생되는 개인들을 그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서용선은 도시와 도시 속 사람들을 담아내며 '인간과 인간을 잇는 관계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서용선의 그림들은 붉은 계열의 색상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이전 세대인 80년대 민중미술에서의 붉은색과 이어지는 저항적 상징성을 가진다 볼 수도 있다. 시대의 억압과 금기에 대한 표현이자, 분노에 대한 표출인 것이다. 무겁고 칙칙한 도시는 사람들을 생경하게 그려낸다. <숙대 입구 07:00-09:00> 외에도 <거리> 등 서용선의 그림에서는 급속한 도시 개발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불안들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 시기 생태미술, 여성미술 등은 전위적인 형태로 진화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도 이미 퀴어 미술, 여성미술에 대한 강한 바람이불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그러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듯, 억압받던 여성들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예술에 담아내며 저항했다. 이불의 <아토일렛>은 1989년 이불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퍼포먼스와 <낙태>의 스틸 사진을 출력해 공중화장실 벽면에 붙인 설치작품이다. 그는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화장실을 캔버스로 삼아 강렬한 이미지를 담고 여성주의적 메타포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불은 이와 같은 퍼포먼스와 행위예술, 사진예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왜곡된 감정 및 시선을 풍자하고 표현한 아티스트로 호명된다.
한국 예술미술의 궤적에 있어서, 80년대 여성 예술가였던 '그림패 둥지' 출신의 김인순은 90년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화가였다. 김인순은 <엄마의 대지> 등을 통해 여성주의 미술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산업화된 도시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갔다.
이 시기에는 80년대부터 활동해 온 윤석남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윤석남은 사회적 여성상을 '핑크색 방'으로 표현하며 여성들의 불안정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알리려고 했다. <핑크 룸>에서 윤석남은 위험한 소파, 장애물인 구슬로 가득찬 방 등을 통해 혹독하지 않은 여성들의 삶, 심리적 불안감을 드러냄과 함께 남성들의 착각과 달리 여성의 삶은 화려함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해내며 성평등을 지향하고자 했다. 윤석남은 비록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으나 미술가로서 그의 행적은 여성의 권리, 정체성, 사상을 새롭게 정의하고 재구성하는 첨병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저항의 미술
저항의 미술은 무너뜨리고자 시도할수록 더욱 강해지고, 시대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모하는 미술사조였다. 이들 모두가 공통된 의견이나 하나의 뜻을 공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문화권에서도 억압에 저항하고, 저항을 통해 사조 자체가 강해지는 것이 저항미술의 주된 특징이었다. 20세기 다다이스트들은 나치의 위기에서도 살아남았으며, 90년대의 한국 예술가들은 민중예술 이후 포스트 시대의 혼란에도 살아남아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도 그 독창적 흐름을 유지시켰다.
저항미술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그려내다가 저항과 투쟁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다른 일부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하던 시대를 지나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역사적 교차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저항미술이 사라지지 않고 변혁적 가치를 유지해 온 것은 동일했다. 미술사의 이단아들은 항상 시대적 상황과 만나 저항과 싸움의 상징으로 우리의 옆에 서게 된 것이다.
남태령, 한강진 등에서 경찰들의 억압, 반대 시위자들의 폭행에도 저항하는 시민들이 더 강인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저항이 단지 정부에 대한 항거일 뿐 아니라 윤석열 다음의 세상을 함께 그려내는 캔버스였기 때문이었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이 항상 함께해 온 것처럼, 저항적 예술의 발전사는 그 어떤 억압과 비난에도 꿋꿋이 저항하며 더 나은 세상을 그려 온 역사였다. (계속)
이미래
고고·미술사학도. 미술, 문화, 역사 속에 흘러간 삶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낙관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길을 고민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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